미래에서 온 편지 27호 (2016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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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특집 | 진보정당의 총선대응 평가

과거에서 배우다 기획 |

모두의 목소리

27 호 2016·1


목차 1 미래에서 온 편지

특집 진보정당의 총선대응 평가 - 과거에서 배우다

2

편지를 띄우며

12 성공만큼의 한계를 지녔던 17대 총선

낯모르는 타인과의 연대 | 이장규

3

포토에세이

20 반정립의 한계를 확인한 18대 총선

당신은 이미 찍혔다 | 김민

| 이장규

| 윤현식

28 ‘통합’의 열풍이 몰아간 2012년 총선

27 호 2016·1

| 홍원표

미래에서

인터뷰 진보정치 열전

86 무지개 칼럼

64 건물주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삼통치킨’의 사장님,

92 먼 좌파 이웃 좌파

이순애 당원을 만나다 | 나동혁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무기로서의 문화예술 | 현린

포데모스가 해낸 것 | 안효상

특별기획 2016 총선 특별기획

98 노동자 권리찾기 상담소

74 ① 노동당의 총선 준비

쥐꼬리만큼 낮은 최저임금 | 박종만

총선을 거치며 더 단단한 노동당이 되자 | 최승현 삶과 문화

78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106 수학으로 세상에 말걸기

대중교통과 젠트리피케이션, “대중교통은

중립적인가?” | 김상철

애니메이션 영화 <월-E>를 통해 본 공리체계 | 나동혁


기획 모두의 목소리 36 ‘눈꽃송이’의 삶은 아닐지라도 | OOO 40 엄마노릇 딸노릇 사람노릇 | 최현숙 44 이제는 또박또박 말할게요 | 강올림 48 “망할 보호주의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라!” | 양지혜 52 봄을 기다리며 | 정현석 56 언제 다시 내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 어일우 60 사회의 실패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연희

편지 114 화요일의 약속 -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염신규

한국 문화예술정책의 두 가지 위기 | 현린

124 불온한 서재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 양솔규

130 소리편지

2016년 한국의 비더마이어에게 슈베르트의 위로를 | 홍철민

132 만화

텅 빈 이력서 | 공기

136 편지를 접으며

길 잃은 날의 지혜 | 구교현


미래에서 온 편지 제27호

발행인 구교현 편집인 이장규 교열 김혜연 정정은 디자인 DO Design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마포-라00403) 발행일 2015년 12월 26일 주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전화 02) 6004-2006, 2007 팩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News from Nowhere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from Nowhere』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nowhere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1


편지를 띄우며

낯모르는 타인과의 연대

해를 맞이하는 시간은 남다른 감흥을 줍니다. 새로운 다짐을 해보기도 하고, 지나간 아픔을 정리 하기도 합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흔히 생각하듯 일정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속 력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방향을 바꾸지는 못하는 셈입니다. 속력보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속력도 더 나아지면 좋겠지요. 그러기 위해 새로운 다짐도 하는 거니까요. 속력을 변화시키 는 것, 즉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또는 느리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간입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도 새해를 맞이하여 몇 가지 개편을 했습니다. 표지와 판형 등 디자인을 개선 하고, 새로운 연재기사로 내용도 보강했습니다. 좀 더 산뜻하고 눈에 들어오는 책이 되도록 노력했습 니다. 물론 재정적인 한계 등으로 크게 바꾸지는 못했지만, 조금씩이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해나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해는 20대 총선이 있는 해입니다.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에서, 진보정당의 관점에서 지나 간 총선들을 평가해보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진출을 이루었던 17대 총선, 민 주노동당과의 ‘분당’ 이후 진보신당 이름으로 치러진 18대 총선, 이른바 ‘노심조’가 탈당하고 사회당 과 합당한 이후 치러진 19대 총선 등 최근 세 번의 총선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좋은 일보다는 한계와 반성할 부분들이 더 많았습니다. 아직은 우리의 경험이나 역사가 일천한 탓일 겁니다. 하지만 그럴수 록 우리는 더욱더 과거에서 배워야 합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는 ‘과거에서 온 편지’이기도 합니다. 신년 기획으로는 그동안 진보진영에서도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양 하게 다루어보았습니다. 가사노동자인 주부, 청소년 활동가, 한국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인 독거노 인 등등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들 모두가 사실은 크게 보면 노동자들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임노 동자만이 노동자겠지만, 크게 보면 사용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모두가 노동자입니다. 그 사용가치 란 꼭 어떤 제품만은 아닙니다. 서비스노동이란 말이 있듯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게 하는 행동은 모두 넓은 의미의 노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병석에 누워있는 환자들조차 나름대로 는 노동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 등 다른 사람과 살아서 교감을 나누고 있으 니까요.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일은 모두 일종의 노동입니다. 노동은 직접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서로 이어주는 끈입니다. 그래서 좌파는 본질적으로 ‘낯모르는 타인과의 연대’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장규 |기관지위원장 2


포토에세이

당신은 이미 찍혔다 김민 | 사진가

미래에서 온 편지 3


취재현장

4

포토에세이


미래에서 미래에서온온편지 편지 55


2016년 역사는 이어진다. 시위에 참가한 당신은 경찰에 의해 채증당한다. 시위가 끝나고 경찰은 채증 사진을 판독한다 판독한 사진을 바탕으로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을 조사한다. 조사를 받은 시민들은 재판을 받고 범죄자가 된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사진은 더 큰 무기가 되었다. 6


1871년 파리꼬뮌에서의 이야기 혁명군과 그 지도자들이 바리케이트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다. 이후 코뮌은 진압당하고 경찰은 기념 사진을 수거한다. 수거한 사진을 바탕으로 꼬뮌에 가담한 시민들이 판독된다. 판독된 시민들은 검거되어 대부분 총살당한다. 사진이 증거로 활용되어 권력자의 무기가 된 역사의 첫 사례다.

미래에서 온 편지 7


8


모든 것은 수집된다. 당신의 얼굴. 당신의 옷차림. 당신의 거주지. 당신의 소속. 당신의 통화 기록. 당신의 SNS. 모든 것이 데이터 베이스가 된다.

미래에서 온 편지 9


빅브라더는 현실이다. 피해망상을 유지하라. 당신의 자유를 위해.

10


특집

진보정당의 총선대응 평가

과거에서 배우다 20대 총선이 다가왔습니다. 네, 또다시 선거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노동당 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반성할 부분이 더 많은 과거이지만,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지난 총선들을 평가 해보았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배움으로써, 오늘의 어려움을 풀어나갈 실마 리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11


특집

진보정당의 총선대응 평가 ‘과거에서 배우다’

성공만큼의 한계를 지녔던 17대 총선 이장규 |기관지위원장

2004년 4월 15일에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원내진출을 한 선거이 다.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거의 50년 만에 진보정당이 원내진출을 이루었거니와 의석수 또한 10 석으로, 단숨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 이은 제3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나름대로 상당한 지역 기반은 물론, 16대 국회 의석수를 꽤 많이 가지고 있었던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을 제친 것이다. 그래서 17대 총선은 흔히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나 지역주의의 일정한 약화 등 이전 선거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결과가 최초로 나왔기 때문이다. 진보 정당 입장에서는 ‘가장 아름다웠던 리즈시절’로 기억되기도 한다.1) 하지만 이 영광의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원내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진보정당으로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이후의 선거결과도 좋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될 가 능성은 선거결과 자체에도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었다. 이 글에서는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성 공했던 외적·내적 요인과 함께 그 성공의 이면에 존재했던 한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의석수만 따지면 2012년 통합진보당이 획득한 의석수가 13석으로 더 많다. 하지만 이 때 통합진보당이 획득한 의석, 특히 지역구 의석의 경우는 민주당과의 전면적인 야권연대를 통해서 획득한 것으로, 다시 말해 민주당의 하위파트너의 역할을 함으로써 얻은 것이다. 보수정당과 독립적으로 대응한 선거만 따진다면 17대 총선의 10석 이 진보정당이 획득한 최대의 의석수이다. 12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사진 : 민주노총)

17대 총선

1996년 말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개악을 저지하기 위한 총파업을 주도했던 민주

이전의 과정

노총 권영길 초대위원장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97년 국민승 리21의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도전한다. 1.19%라는 그리 높지 않은 지지율을 얻 었지만, 권영길을 비롯한 국민승리21의 핵심인사들은 이전처럼 좌절하지 않고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창당을 계속 추진한다. 98년 지방선거 때 울산의 노동자밀집지역 2군데 (울산북구와 울산동구)에서의 기초단체장 당선 등과 맞물리면서, 민주노총 또한 이전과는 달리 진보정당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년이 약간 넘는 창당준비기간을 거쳐, 2000년 1월 30일 민 주노동당이 창당했다. 2000년 4월 13일에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을 하지 못했다. 울산북구와 창 원을에서 그리 많지 않은 표차로 낙선했기 때문이었다. 원내진출의 희망에 부풀었던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많이 아쉬웠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음에는 반드시 원내진출을 할 수 있으리 란 희망을 갖고 꾸준히 당 활동을 해나갔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민주노동당은 2명의 기초단체장과 11명의 광역의원 을 배출했다(당시에는 기초의원은 정당공천을 하지 않았다). 특히 광역의원의 경우는 울산의 2명 을 제외하고 모두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2002년 지방선거는 1인 2표제를 적용한 최초의 선거였 다. 2000년 선거까지는 비례대표 선출을 위해 정당에 투표하는 제도가 없었다. 지역구후보자에게 만 투표하는 1인 1표제였으며, 지역구당선자의 소속정당 비율에 따라 비례대표를 배분했다. 하지 만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가 이런 방식의 비례대표 배분은 위헌이라고 결정했고, 이에 따라 2002년 지방선거부터 1인 2표제가 실시되었다. 1인 2표제가 아니었다면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 주노동당의 당선자는 울산지역의 기초단체장 2명과 광역의원 2명에 그쳤을 것이다. 1인 2표제가 미래에서 온 편지 13


실시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9개 광역시도에서 골고루 광역의원을 배출할 수 있었다. 1인 2표제 의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아직은 1인 2표제의 파급력이 명확히 인 식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2002년 지방선거 결과에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고 무되었다. 당원들 또한 꾸준히 늘어났다. 민주노총 조합원이나 이전의 진보정당 활동가만이 아니 라, 이전에는 진보정당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 출신자들이 민주노동당 의 당원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2002년 말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도 가능성이 보였다. 권영길 후보는 3.98%를 득표하며 97년 대선 때보다 3배가 넘는 지지율을 얻었다. 여론조사에서 한때는 6%가 넘는 지지율을 얻기도 했 다. 막판에 이른바 ‘비판적 지지’ 표가 노무현 후보에게 가는 바람에 지지율은 다소 떨어졌지만, 대선에서 100만 표 가량의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가능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당 전체에 활력이 넘쳤다. 권영길 대선캠프는 100명이 넘는 무급의 자원봉사자들로 넘쳐났으며, 막 확산되기 시작한 인터넷 공간에서도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17대 총선의 과정과 결과

17대 총선은 탄핵의 후폭풍이 규정한 선거였다. 2004년 초 한나라당은 새천년 민주당 2) 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하지만 당선 된 지 1년 남짓한 대통령을 뚜렷한 명분도 없이 탄핵함으로써 국민들의 거센 반 발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차떼기 등 막대한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당사자임에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규탄하는 집회에 모인 시민들. 이때의 거센 반발은 이후 총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진 : 환경운동연합 정보센터 박종학) 14


17대 총선은 탁핵의 후폭풍이 규정한 선거였다. 당선된 지 1년 남짓한 대통령을 뚜렷한 명분도 없이 탄핵한 사실은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도 이를 반성하지 않고 탄핵을 주도했다는 데에 여론이 매우 싸늘했다. 선거운동 초기의 여론조 사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이전 의석의 절반 정도밖에 얻지 못할 정도의 참패가 예상됐다. 구원투 수로서 박근혜가 새로운 대표에 선출되었다. 박근혜는 이른바 ‘천막당사’ 등을 통해 차떼기에 대 해 사과하는 제스처를 보이고, 거대여당에 대한 견제심리를 자극함으로써 선거운동 후반에는 한 나라당 지지율을 상당 정도 회복했다. 민주노동당도 탄핵의 후폭풍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권의 정책에 비 판적이긴 했지만 탄핵에는 찬성하지 않았음에도, 탄핵 초기에는 민주노동당의 지지율도 동반 하 락했다. 하지만 선거 중반에 들고 나온 ‘진보야당’이라는 슬로건이, 대여 견제심리는 회복했으나 차떼기당인 한나라당은 싫었던 유권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이라는 정책 또한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TV토론에서의 선전도 막판 지지율 상승에 보탬이 되었 다. 무엇보다도 1인 2표제가 주효했다. 국회의원은 열린우리당의 후보를 찍더라도 정당투표는 대 여 견제와 정책에 대한 지지 차원에서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이른바 ‘전략적 투표’ 행위가 광범 위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의 정당투표 지지율은 무려 13.1%에 달했다. 이 득표율은 지금까지 진보정당이 획득한 지지율 중 가장 높은 숫자다. 이로써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로 8석 의 의석을 획득하고, 2000년 총선에서 아깝게 낙선한 울산북구와 창원을 두 곳의 지역구에서도 당선되면서, 단숨에 전체 의석수 10석으로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이제 민주노동당이 17대 총선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들을 생각해보자. 우

성공 요인

선 내적요인부터 짚어보자.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 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중당 등 이전의 정당들은 한 번의 선거에서 성과를 내 지 못하자 그 주도세력들이 선거 후에 대부분 흩어졌다. 하지만 민주노동당과

그 전신인 국민승리21은 97년 대통령선거에서 그리 좋지 않은 득표율을 얻었음에도 핵심세력들 이 흩어지지 않고 계속 본격적인 창당을 추진했다. 그 이후로도 2004년까지 무려 7년의 세월 동 안 국회의석 하나 없는 원외정당이었음에도 당의 지도부나 당원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내부적 인 활력을 계속 유지·강화했다. 물론 이는 민주노동당이 갓 창당하고 계속 성장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또, 총

2) 원래는 노무현의 소속정당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지역주의 극복을 기치로 열린우리 당을 창당하자,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남은 사람들로 당이 구성되었다.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에는 야당의 하나로 활동했으며 노무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 15


선에서는 의석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지방선거에서는 나름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전과는 달리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기울였거니와 이런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가장 앞 선 지역이 울산이었기에, 울산에서 기초단체장을 획득하는 성과를 얻어냈고, 그 외 창원과 거제 등의 노동자밀집지역에서도 상당한 득표율을 올림으로써 이후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다 시 말해, 전국적인 차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몇몇 지역에서는 실제로 노동자들의 계급투표가 이루 어졌다는 점이 또 하나의 내적요인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적요인들을 단지 그 당시의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하며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고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다. 그때든 지금이든 기본적인 조건은 동일하다. 내적 요인의 핵심은 결국 몇 번의 실패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당의 활력을 계속 유지·강화해나 가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 새롭게 시작한 정당이라는 자세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당선은 아니더라도 이후의 희망을 가질 만한 지지율은 획득해야 하 는 바, 이는 결국 노동자들의 계급투표가 관건이다. 따라서 노동대중 속에서 당의 지지기반을 확 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제 외적요인을 생각해보자. 사실 17대 총선에서의 민주노동당의 성공에는 내적요인보다 외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요인은 1인 2표제로 치러진 최초의 총선이었다는 제도적 효과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1인 2표제가 시행되면서 국회의원은 열린우리당 등 다른 정당의 후보를 찍으면서도 정당은 민주노동당을 찍는 전략적 투표가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국회의원의 경우에는 이미 알려진 전·현직 국회의원 등 명망가를 찍지만, 정당은 정책이나 미래 를 생각해서 진보정당을 찍었다는 얘기다. 특히나 17대 총선은 탄핵 후폭풍 때문에 선거 초반 열 린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었기에 후반에 대여 견제심리가 부활했지만, 그래도 차떼기당인 한나 라당은 더 싫었던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진보야당’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온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었다. 주목할 것은, 이렇게 정당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을 찍은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꼭 노동자계급이거 나 원래부터 진보성향인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국정치에는 늘 10% 가량의 제3당 지지 자들이 존재한다. 기존의 거대 여야당 모두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17대 총 선에서는 정당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했다. 탄핵에 동참한 새천년민주당이나 쇠락해가는 자 유민주연합보다는 새로 성장하는 민주노동당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노동자계급투표는 그때나 지금이나 울산과 창원 등 일부 지역에서만 중요한 요인이 될 뿐, 전국적 차원에서는 계급투표의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 원래부터 진보성향인 유권자와 제3당 지지성향의 유권자들이 결집한 결과가 17대 총선이었으며, 이에 따라 득표율 또한 울산과 경남 등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거의 고르게 나타났다([표1] 참조). 16


[표 1] 17대 총선 지역별 득표율(%, 비례대표) 한나라당

새천년 민주당 열린우리당

자유민주연합 민주노동당

참고(2002년 지방선거 민주 노동당 비례대표 득표율)

전국

35.8

7.1

38.3

2.8

13.0

8.1

서울

36.7

8.4

37.7

2.1

12.6

6.1

부산

49.4

1.9

33.7

0.7

12.0

10.7

대구

62.1

1.1

22.3

0.8

11.6

5.2

인천

34.6

5.4

39.5

2.1

15.3

6.3

광주

1.8

31.1

51.6

0.3

13.1

14.9

대전

24.3

3.1

43.8

14.5

11.8

7.5

울산

36.4

1.5

31.2

0.8

21.9

28.7

경기

35.4

6.1

40.2

2.0

13.5

5.8

강원

40.6

3.5

38.1

1.3

12.8

8.6

충북

30.3

2.2

44.7

6.3

13.1

7.3

충남

21.2

2.8

38.0

23.8

10.5

4.5

전북

3.4

13.6

67.3

1.0

11.1

12.8

전남

2.9

33.8

46.7

1.0

11.2

15.0

경북

58.3

1.4

23.0

1.2

12.0

4.5

경남

47.3

1.4

31.7

0.8

15.8

9.0

제주

30.2

5.0

45.0

1.1

13.8

10.6

[표1]을 살펴보면, 최초로 1인 2표제가 실시되었던 2002년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노동당 득표율과 2004년 총선에서의 득표율을 비교할 수 있다. 이미 뚜렷한 계급투표 성향을 보였던 울산과 선거 의 기본구도가 2004년과 달랐던 호남지역3)을 제외하고는, 2002년에 비해 2004년의 지지율이 거 의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이는 원래 2002년부터 민주노동당을 지지한 진보성향의 유권자뿐만 아니라 제3당 지지성향의 유권자 상당수도 2004년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했음을 보여주 는 결과다.

3) 2002년에는 열린우리당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2002년 지방선거 때는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모두 싫은 호남지역 유권자의 경우에는 제3당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 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반면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 중에도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라는 두 개 의 선택지가 호남지역 유권자들에 있었다. 기본구도가 달랐기에, 호남지역의 2004년 득표율은 다른 지역과 달리 2002년에 비해 대폭 상승하지 않고 오히려 약간 줄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 17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 만찬에 함께한 민주노동당 의원과 지도부 (사진 : e영상역사관)

성공 이면에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외적요인들은 동시에 일종의 한계이기도 했다. 국회의원

존재했던

과 정당투표 모두에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은 다른 정

한계

당의 후보를 찍고 정당은 민주노동당을 찍은 유권자가 많았다는 얘기는, 아직 은 민주노동당이 최우선의 선택지라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 내지 보

충적인 성격의 두 번째 선택지였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울산과 창원, 거제 등 노동자밀집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민주노동당 지역구후보의 득표율이 정당득표율에 비해 훨씬 더 낮게 나 타났다. 흔히 간과하지만, 17대 총선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지역구후보도 대단히 많았다. 모두 123 명의 후보가 출마했는데, 출마한 지역구후보들의 득표율 평균이 7.8%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울산과 창원, 거제 등 노동자밀집지역을 제외하면 3~4% 가량에 불과했다. 이는 결국 17대 총선에서의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안정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하 자면, 당시 민주노동당의 성공은 그 노선과 정책에 대한 대중적 지지에서 비롯된 결과라고만 보 기는 어렵다. 민생은 내팽개치고 탄핵 등 정치적 이전투구만을 계속하는 기존 정당에 대한 불만 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서 비롯된 반사이익이 상당히 작용했다. 정당투표에서 민주 노동당이 얻은 득표율의 상당수는 적극적인 지지라기보다는 소극적인 지지로, 기존 정당을 향한 일종의 저항을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추후의 선거에서는 정당구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정당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시대적 한계였을 뿐 근본적인 한계는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50년 넘게 보 수양당체제가 강력하게 유지된 상황에서 신생 진보정당이 처음부터 안정적인 지지율을 얻어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엔 불안정한 지지라 하더라도 이후에 이를 안정적으로 만들 고, 나아가 지지를 확대한다면 성공을 지속할 수도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성공의 내적요인들을 18


민주노동당에게 2004년은, 외부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사실은 ‘쇠락의 시작’이었다.

지속하고 강화하는 일이 중요했다. 당과 당원들의 내부적 활력을 계속 유지·강화하고, 노동자대 중 속에서 지지기반을 확대함으로써 계급투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후 당의 원내외 활동이 진 행되었더라면, 민주노동당은 본격적인 성공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민주노동당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정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국회에서는 지나치게 의원단의 원내 활동 위주로만 대응했으며, 당 지도부와 의원단 간의 긴밀한 협력체제도 구축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 내부의 활력이 저하되었고, 결국 노동자 대중 속에서의 지지기반 확대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결국 민주노동당에게 2004년은, 외부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사실은 ‘쇠락의 시작’이었던 것이 다. 슬픈 일이다.

미래에서 온 편지 19


특집

진보정당의 총선대응 평가 ‘과거에서 배우다’

반정립의 한계를 확인한 18대 총선 윤현식 | 전 정책위 의장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 명의 국회의원을 원내 입성시킨 민주노동당의 성과는 ‘괄목상대(刮目相 對)’라고 할 만했다. 국회본청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국회의원 하나만 있었으면 했다”고 소회 를 밝히던 한 의원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탄핵정국 등 당시 상황 도 한몫했겠지만, 진보정당의 의원배출은 지난 시간 동안 진보정치에 헌신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이 거둔 쾌거였다. 총선 직후 민주노동당은 21.9%라는 놀라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여론의 75.2%가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을 계기로 정치발전을 기대한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유효 한 정치세력으로 대중의 승인을 받으면서, 향후 더 큰 도약을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듯 보였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17대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원내정 당화되었다. 당 내의 각종 제도에도 불구하고 의원이 주도하는 원내정치 중심의 당 운영이 가속 화되었다. 당 내부에서 발생한 다양한 의견의 분할과 대립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고, 북한 핵의 인정이나 독도 군대 배치 등 진보정당의 가치를 훼손하는 사안들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소위 ‘평양본사’라고 일컬어지는 북한 지배세력에게 당의 주요 활동가들의 인적사항을 보고한 일 이 발각되는가 하면, 이러한 반당적인 행위에 대한 당적 규율체계는 작동하지 않았다. 2007년 대 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파 간 알력은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였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참혹한 대선 결과를 받아 안게 되었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리됨으로써 진보진영은 단일대오를 형 성하지 못한 채 2008년 총선을 맞이했다. 20


민주노동당의

2008년 2월 3일, 민주노동당의 임시 당대회는 어떠한 혁신안도 통과시키지 못

분열

한 채 막을 내렸다. 그리고 총선을 불과 한 달 앞둔 2008년 3월 16일, 민주노동 당 탈당파를 중심으로 ‘진보신당 연대회의(약칭 진보신당)’가 창당된다. 진보진 영은 18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라는 두 개의 진보정당과 맞닥뜨

려야 했다. 분당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 내의 좌우대립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NL’과 ‘PD’의 대립 이 그것이다(보다 자세히 들어가면 단순하게 이러한 양립구조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겠지 만, 이 글에서는 이 정도로만 구분하기로 한다). 우선 강령과 정책의 실천과정에서 분란이 지속되 었다. 예컨대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의 방법에 대한 입장, 북한이 진행한 연속적인 핵실험에 대한 비판 여부, 독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데 대한 견해 등에서 좌우가 전혀 다른 입장에 섰다. 간단 히 말하자면, 우파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북한의 입장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반면 좌파는 강 령의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우파의 태도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일심회 사건> 손정목(42)

■일심회 지령 및 국내 정세 보고

국내 동향 수집

·야당 유력 대선후보 관련

조직 확대

·6자회담에서 민노당 위상 정립 ·5.31 지방선거에서 민노당이

이진강(43)

·여당 후보 지지할 것

시민단체 동향 수집

장민호(44)

지령

보고 ·2005년 6월 윤광웅 국방장관 해임안 무산 경위 ·민노당 내 인물분석 자료

북측 지령받고 남측정보보고

이정훈(43) 민노당 서울시당 동향보고 당내부 친북세력 조직

·민노당 서울시당 움직임

최기영(40)

·남북 통일운동 경향

민노당 활동계획 보고

·북핵 관련, 국내 동향

당내부 친북세력 조직

이러한 대립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 소위 ‘일심회’ 사건이었다. 고위 당직자가 당의 주요 활동가들 의 인적사항과 활동내역 및 그에 대한 평가를 일목요연하게 작성하여 북에 유출시킨 사실이 확인 되었다. 우파는 이 사건이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문제될 게 없으며, 원천적으로 국정원과 검 찰에 의한 조작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좌파는 당원의 정보를 당 밖의 세력에게 넘겨준 일은 당적질서를 파괴하는 동시에 당원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강력하게 성토하였다. 그러다보니 해법 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우파는 정보를 유출한 당직자를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고 하면서 공안 기관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좌파는 철저한 진상조사와 함께 당의 질서 체계 안에서 책임 있는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착에 빠진 좌우의 대립은 2007년 대선에서 그 밑바닥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권영길, 노회찬, 심 상정 세 후보의 경선을 통해 권영길 의원이 국민승리 21 이후 세 번째 대선후보로 결정되었다. 경 선과정의 문제점은 차치하더라도 대선후보로 권영길 의원이 선정된 이후의 대선준비과정은 난맥 미래에서 온 편지 21


그 자체였다. 특히 돌발적으로 제출된 ‘코리아연방’ 공약은 당을 일대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권영길 후보가 직전 선거였던 16대 대선의 3.5%에도 미치지 못하는 3.0%의 득표율에 머물면서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비등했다. 2008년 1월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심상정)는 집행단위를 주로 당내 좌파로 구성하고 혁 신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2월 3일 진행된 임시 당대회에서 이 혁신안이 모두 부결된다. 혁신안의 좌절은 좌파로 하여금 당 혁신에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선도탈당파 가 대선을 전후로 당을 흔든 과정이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판단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오히려 선 도탈당파와 당 혁신파가 함께할 수 있는 알리바이가 성립하는 순간이었다. 이리하여 당내 좌파는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결성한다.

진보신당의

2008년 3월 창당한 진보신당은 총선을 불과 한 달 앞둔 상황에서 총선준비에 들

창당과

어가게 된다. 급조된 정당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총선을 치르기란

선거패배

말 그대로 ‘맨 땅에 박치기’였다. 비록 “얼어 죽을 각오”로 진보신당을 결성하고, 진보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는 했으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어쨌든, 하나였던 진보정당이 갈라선 상황적 한계를 극복하고, 노회찬 심상정 등 당의 주요 인사들을 지역구에서 당선시키는 한편, 3% 이상의 비례득표를 달성함으로 써 원내에 교두보를 마련하자는 목표를 설정했다. 더불어 중장기적 진보정치 발전에 대한 진보신 당의 지표를 설정하였다. 당시 진보신당은 18대 총선 방침으로 (1) 이명박 정부에 맞선 진보진영의 지역과 부문, 진보정치 세력을 포괄하는 정치연대전선의 구축, (2) 사이비 개혁세력과 낡은 진보세력을 대체하는 강력한 진보야당의 위상 확보, (3) 진보신당 제2창당 및 진보진영 위기 극복의 초석 마련을 제시했다. 주 목할 점은 이 당시 진보신당이 스스로의 위상을 총선을 위한 가설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다. 다시 말해, 진보신당은 18대 총선을 경유하면서 확보한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향후 제2 창당을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정당으로 재탄생할 것을 이후 과제로 확정했다. 이러한 방침을 완수하기 위해, 총선에서는 선명한 정책 대결로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대중들에게 홍보하는 한편, 지역구와 비례에서 최대한의 당선자를 확보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세웠다. 전략지 역의 육성을 통한 거점 지지기반 확보, 재창당을 위한 전국정당화 기반 구축, 당 외연 확장이라는 조직적 목표도 함께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총선준비에 여념이 없는 당직자들을 고민에 빠트린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민주노동당과의 분리정립이었다. 즉, 왜 민주노동당에서 나와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으로 총선에 임하느냐를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을 찾아야 했다. 다른 하나는 민주노동당에 잔류한 우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조직력과 동원력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였다. 정권에 대응하는 진보 정치의 축으로 위상을 정립하겠다는 당찬 꿈은 당위의 영역이었고, 당장에 진보진영을 갈라치기 하게 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부닥치게 된 발등 의 불이었다. 진보정당의 분립을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한 논리의 기저에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반정립이 깔려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진보신당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민주노동당의 문제를 부각시켜야 했 22


<2008 총선 정당별 득표율>

다. 이를 위해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이 (1) 북한추종적 가치관에 장악됐고(이른바 ‘종북당’), (2) 민주노총의 영향력에 좌우되며(‘민주노총당’), (3) 민주주의적 질서가 작동하지 않고(‘패권주의’), (4) 당적 차원의 자정이 불가능하다(‘평양본사의 남한 파견소’)는 한계를 가졌다는 주장을 제기했 다. (1)과 (4)는 같은 이야기인 듯 보이나, (1)은 민주노동당 내 주류의 보편적 가치관에 대한 문제 였고, (4)는 당의 규율질서가 붕괴되었음을 의미했다. 한편, 현저하게 부족한 조직력과 동원력은 당의 대표주자인 노회찬 심상정 등 전·현직 의원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만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의 이름을 알리는 데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 족했던 한계를 극복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당은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는 당 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중들의 관심을 높이고 친밀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곤란함이 겹겹이 쌓인 상황 속에서 나름의 돌파구를 고민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고군분투한 과정이 진보 신당의 2008년 총선대응이었다. 총선의 결과는 참담했다. 진보신당은 지역구에서 전패했다. 또한 정당명부 비례선거에서도 2.94%의 득표율에 머물면서 3%의 진입장벽을 넘지 못하고 비례대표를 원내에 진출시키지 못했 다. 분당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면서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임했던 총선이었으나 결국 미래에서 온 편지 23


단 한 명의 의석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역시 결과는 좋지 않았다. 비록 지역구 2석과 비례 3석으로 생존의 기반을 아예 잃어버리진 않았으나, 17대 총선과 비교해 당세가 정확하게 반 분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분열의 결과는 참담했고, 분열에 대한 심판은 엄정했다. 그러나 문 제는 분열 자체가 아니었다. 분열의 당위가 모호했고, 현상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관성에 머물렀 다. 진보정당은 왜 참패했는가? 이에 대해선 진보정당의 내외적 측면을 고루 검토해야만 한다.

분당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면서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임했던 총선이었으나 결국 단 한 명의 의석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총선패배의

18대 총선은 이전의 그 어떤 선거와도 다른 특별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먼저 직

외적요인

전에 있었던 17대 대선의 성격을 볼 필요가 있다. 17대 대선에서 당선된 이명박 후보의 득표율은 48.7%였다. 당선자의 득표율만 보면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 보가 거둔 48.9%의 득표율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2위를 한 낙선자들

의 득표율을 보면 눈에 띄는 결과가 보인다. 16대 대선에서 2위를 한 이회창 후보는 46.6%의 득표 율을 보였던 반면, 17대 대선에서 2위를 한 정동영 후보는 불과 26.1%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결과 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나,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 가지 경향을 지적할 만하다. 10년에 걸친 민주화세력의 집권에 대한 피로도가 대중들에게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다 시 말해, 2007년 대선에서 대중은 이명박 후보의 적격성을 평가하기보다는 이전 정권을 심판하는 입장을 더 강하게 가졌다는 뜻이다. 18대 총선의 투표율은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실어준다. 18대 총선의 투표율은 46.1%로, 역대 총선 거는 물론이려니와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모두 포함하여 헌정사상 가장 낮았다. 이처럼 낮은 투표율이 형성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선거를 관통하는 핵심 쟁점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기존 선거에서 쟁점이 되었던 보수와 진보 간의 진영론도 그다지 크지 않았고, 대북정책이 관건이었던 16대 총선이나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시끌벅적했던 17대 총 선처럼 정치적·정책적 사안을 둘러싼 굵직한 대립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대선 직후 치러진 총선이라는 특수성에도 기인한다. 즉, 다툴 일은 불과 3개월 여 전에 있었던 대선에서 다 다루어 졌고, 대선 직후의 총선에 정권의 중간평가라는 의미가 부여되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18대 총선에서 보여준 양 보수정당의 선거준비과정을 통해 대중들의 정치 환멸도가 높아 졌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극한 연모만을 당의 중심가치로 내세운 ‘친박연대’라는 정당이 생길 정도로 한나라당은 ‘공천학살’을 자행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입지가 현저히 줄어든 상황에서 17대 국회의 중심이었던 열린우리당은 ‘도로민주당’으로 회귀했다. 통용될 수 있는 수준의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황은 대중들로 하여금 정당에 대한 정치적 기대심리를 저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 24


"이명박 당선 '신보수 시대'로" 2007년 12월 28일자 경향신문 갈무리

의정치의 위기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대두된 이유다. 시민사회의 정치참여가 저조한 것도 특이한 상황이었다. 이전의 각 선거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 던 시민사회는 18대 총선을 기점으로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낙천·낙선운동과 같은 후보에 대한 직접적 개입은 물론이려니와 기존의 총선연대와 같은 조직적인 선거정국 개입 역시 보이지 않았 다. 이러한 요인들은 진보정치에도 매우 부정적인 여파를 미쳤다.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 당이 갈라진 상황이 보수양당에 집중된 여론의 틈새에서 일정한 파급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히 려 진보정당의 분열에 대한 실망이 보수양당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겹치면서 진보정당도 별 수 없다는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시민사회의 역동성이 줄어들면서 진보정당이 대중적으로 의제를 확산하고 지지를 모을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는 데에도 곤란을 겪었다.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부분은, 민주화세력과 진보세력이 지지부진한 활동을 하는 동안 오히려 보수세력은 ‘혁신’이라는 의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다. 진보신당도 기존의 진보 정치는 낡았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진보를 천명했지만 실질적인 결과물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반면 2004년 이후 보수세력은 산업화세력으로서의 자부심을 일정하게 내려놓으면서 민주화의 가 치를 수용하겠다는 전향적 태도를 취하였다. 비록 그러한 태도가 겉모습에 불과한 것이었을지라 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를 지향하겠다는 보수세력 만큼의 진척조차 진보진영이 제대 로 보여주지 못한 한계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미래에서 온 편지 25


총선패배의

분명, 18대 총선은 전체적인 사회적 상황이 진보정당에게 유리하지 않은 상태

내적요인

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상황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이들 부정적 외부환경은 내적역량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했 고, 극복했어야 한다. 하지만 손에 쥔 결과물은, 당시 진보정치의 역량이 한 번

의 분열만으로도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질 만큼 취약했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 글에서 당시 민주노동당의 문제까지 거론하기는 어려우므로, 진보신당만을 두고 평가해보자. 우선 진보신당은 정체성의 확립과 그 홍보에 주력했다. 왜 민주노동당과 분리정립할 수밖에 없었 는가를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를 민주노동당의 반정립으 로 자리매김했다. 따라서 자체적 정체성의 확보라기보다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부정적 의제를 형 성하는 데 치중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주노동당은 ‘종북당’ ‘민주노총당’ ‘패권주의당’ ‘평 양본사의 남한 파견소’였기 때문에 진보신당의 구성원들은 이에 동의할 수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만들고 전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정립의 논리가 당시 선거에서 대중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 하다. 민주노동당과의 대립구조는 사실상 유권자 대중 일반에게는 그다지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진보신당의 주체들은 이러한 구호에 함몰되었는가? 이는 진보정당에 대한 고정적 지지를 얼마나 나누어 먹을 수 있을지에 선거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주노 동당을 ‘민주노총당’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민주노총사업장을 중심으로 세액공제 등 선거자금 과 조직적 결합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진보신당의 현주소였다. 이러한 상황은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일반적인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선거운동에서는 난맥이 이어졌다. 당의 얼굴 역을 맡은 대표주자가 당론과 중앙공약에 위배되는 지역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지역구에서 타당과 결부 된 후보단일화가 충분한 내부적 논의와 당원의 이해를 구하기 전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지역에서 민주노동당 및 그 지지자의 조직적 배제와 방해가 충분히 예상되었음에도, 정치력을 발휘해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실상 이러한 문제는 민주집중제의 당적 기풍확립에 실패했음을 보 여주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 우파를 패권주의라고 비난하는 진보신당이었지만 선거라는 중대한 정치일정에서조차 일사불란한 체계의 유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일부 명망가들의 이름으로 치러진 선거가 그 바닥을 드러냈다. 물론 급조된 정당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선거기간 동안 진보신당의 가치와 전망을 대중들에게 설파 하기보다는 우리 당은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는 당임을 알리는 데 치중한 선거였음을 반성하지 않 을 수 없다. 게다가 애초 진보신당은 선거를 위해 만든 선거대응용 가설정당일 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당의 대표주자들이나 각 집행단위의 활동가들이나 선거운동원들은 당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사업방식에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당보다는 사람을 알리는 데 급급했던 선거 가 잘 되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였을 테다. 다른 한편, 진보신당이 창당하면서 선언했던 ‘낡은 진보와의 결별’과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은 그 실체를 대중에게 입증하지 못했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했고, 향후의 기 획을 준비하겠다는 공약에 머물렀다. 결별의 내용은 민주노동당을 비판하는 데에 그쳤고, 재구성 26


민주노동당을 낡은 진보로 규정한다고 새로운 진보가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거과정에서도 진보신당은 ‘낡은 진보와의 결별’과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의 실체가 무엇인지 대중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은 언제 도래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일로 남겨버렸다. 단지 민주노동당 우파들이 견지했던 ‘종북’ 이나 ‘패권주의’를 낡은 진보로 규정한다고 새로운 진보가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보신당 이 강령을 통해 ‘평등·생태·평화·연대’를 가치로 내세웠다고는 하나, 그 안에서 어떤 실천이 민주노동당과 달랐으며, 왜 민주노동당은 낡았고 진보신당은 새로운지를 선거과정에서 보여주지 도 못했다.

2008년이

2008년 제18대 총선은 진보정치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붕괴되었음을 확인하는

남긴 후과

과정이었다. 스스로 초래한 것이기도 하고, 진보정치에 대한 대외적 공세를 효 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진보신당은 비례득표 2.94%와 지역구 전국득표율 1.2%를 넘기면서 약간이나마 국고보조를 받게 되

었다. 또한 이후 있었던 보궐선거에서 조승수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서 잠깐 동안 원내정당으로 활 동하기도 했다. 이것이 성과라면 성과라고 하겠다. 하지만 18대 총선에 대한 반성 및 평가와는 별개로, 이후 진보신당은 앞서 언급했던 총선실패의 내적원인을 해소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18대 총선은 당의 유력인사들로 하여금 진보정당의 분립 이 결코 자신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총선 직후 가설정당을 넘어서는 재창당이 이루어졌어야 했으나 이 과정은 생략되었고, 결국 완성된 정당으로서 깃발을 들지 못한 채 진보신당은 2010년 지방선거를 맞이하게 된다. 내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진보 신당은 2010년 지방선거를 경유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독자 vs 통합’ 논쟁에 휘말리면서 혼란을 겪는다.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넘지 못한 벽들은 이후에도 고스란히 진보신당의 발목을 잡 았다. 반정립으로서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하면 거울이 깨짐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경험적 교훈을 각성하지 못한 채. 미래에서 온 편지 27


특집

진보정당의 총선대응 평가 ‘과거에서 배우다’

‘통합’의 열풍이 몰아간 2012년 총선 홍원표 | 전 정책실장

2012년 총선은 최초로 3개의 진보정당이 참여한 선거였다.1) 이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은 지역구 7 석, 비례대표 6석(정당득표율 10.3%)을 얻어 모두 13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반면, 진보신당과 녹 색당은 의석 확보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정당득표율 역시 각각 1.13%, 0.48%에 그쳐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보수정당의 경우에는 새누리당이 지역구 127석, 비례 25석(정당득 표율 42.8%)으로 국회 내 단독의결이 가능한 152석을 확보하였고, 민주통합당은 지역구 106석, 비례 21석(정당득표율 36.5%)으로 모두 127석을 얻었다. 선거에서 득표율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진보정치가 선거에서 의미 있는 득표를 보여준 기간은 불과 10여 년에 불과하다. 따라서 진보정치의 선거를 평가할 때 득표율만을 따진다면 온 전하지 못한 처사일 테다. 그럼에도 2012년 총선은 진보정치 진영에게 커다란 실패였다. 민주노 동당 이후 새로운 진보정치 질서를 만드는 두 가지 흐름, 즉 통합을 통한 단일진보정당건설운동 과 다수 진보정당 공존의 상반된 실험이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1) 전통적 의미의 ‘진보’가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 평등사회 구현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녹색당은 녹색당이 진 보로 분류되는 데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이 글에서는 현대의 진보가 생태주의 의제를 적극 안으려 노력해 왔다는 점과 논의의 편의 때문에 녹색당 역시 ‘진보정당’의 한 주체로 포함시켰다. 28


진보신당은 당대회에서 54.14%로 진보통합정당 건설 합의안을 부결시켰다. (사진 : 참세상)

실패한

2012년 총선을 앞둔 시기는 그야말로 정치권 통합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시대정신,

아니다. 통합진보당은 2011년 초부터 시작된 진보대통합 운동의 결과로 탄생했

통합

다. 애초의 진보대통합 논의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이 주 참여대상이 었다. 그러나 논의 중간에 사회당이 이탈하였고, 진보신당은 당대회에서 통합

안을 부결시켰다. 이후 진보대통합은 사회당 이탈 이후 합류한 국민참여당과 당대회 이후 탈당한 진보신당 일부 세력이 결성한 ‘새진보통합연대’가 주축이 되어 진행했고,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 을 탄생시켰다. 당내 유력 정치인과 주력 활동가들의 집단 탈당으로 세력이 축소된 진보신당은 홍세화 대표 취임 직후인 2011년 12월에 사회당, 녹색당 창당준비위, 새로운 노동자정당 추진위원회, 사회주의노동 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진보교연, 사회진보연대, 현장노동자회, 공공현장 등에게 ‘진보좌 파정당 건설을 위한 연석회의’를 제안하고, 그 결과 2012년 3월 사회당과 진보신당만이 참여하는 ‘진보좌파정당 1차 통합’을 이룬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일어난 통합 열풍은 보수야당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민주당은 이른바 친 노세력(참여정부 출신 정치인)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 ‘혁신과 통합’, 한국노총 등과 함께 민주 진보통합정당 논의를 시작하고, 이후 ‘혁신과 통합’이 전환한 통합용 가설정당인 ‘시민통합당’과 합당하여 민주통합당을 창당한다. 미래에서 온 편지 29


2012년 총선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김순자 씨 (사진 : 노동당)

하지만 2012년 선거를 앞두고 1년 넘게 모든 정치 이슈의 블랙홀과 같았던 진보정치통합 논의는 결국 모두 실패로 귀결되었다. 사회당과 통합한 진보신당은 독자·통합 논란으로 유력한 정치인 과 주요 활동가들이 집단탈당을 함으로써 당력이 축소된 상태로 총선을 맞이했다. 당연히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1.13%라는 낮은 지지율을 획득했다. 그럼에도 진보신당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인 김순자 씨를 비례대표 1번으로 내세워 이른바 ‘순자어록’을 유행시킬 정도로 나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같은 해 치러진 대선과정에서 진보신당 계와 사회당계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났고, 당 내 합의에 다다르지 못한 채 결국 김순자 씨가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파국을 겪었다. 통합진보당은 2004년의 민주노동당보다 많은 13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의 통 합 역시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비례대표 선출 과정에서 생겨난 부정투표 논란으로 인 해 결국 통합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통합 진보당을 만들었던 세력들의 산술적 분화에만 머물지 않고, 진보정치 세력 전반의 도덕성에 치명 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30


야권연대

2012년 총선의 또 다른 키워드는 야권연대였다. 진보정치 내에서 야권연대 문

국면이 만든

제는 늘 첨예했다. 그 이유는 야권연대가 단순히 선거 시기에 유리한 구도를 형

‘올인’의 정치

성하기 위한 전술적 선택에 그치지 않고, 보수정당에 의존한 성장전략이냐 아 니면 독자적 성장기반 마련이냐는 진보정치 성장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차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2008년 이전까지는 야권연대에 대한 입장이 정치행위로 이어지기 전에 당내 논쟁을 거쳐야만 했 다. 하지만 2008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 이후에는 비로소 각 당의 당내 입장 차이가 줄 어들어 보다 직접적인 정치행위로 이어졌고, 그만큼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또 다른 한 축으로 는,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보수야당인 민주당에 대한 새누리당의 우위가 확고해지면서 민주당의 입장에서도 진보진영과의 야권연대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이유로 2012년 총선에서 야권연 대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등장하였고, 그만큼 야권연대에 대한 진보정치의 선택은 ‘올인(all-in) 의 정치’가 되었다. 2012년 총선에서의 야권연대는 두 가지 점에서 진보진영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첫 번째는 ‘보수정당에 의존한 진보정치 노선의 전면화’이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총선에서 적극적 선거연 대를 주요방침으로 채택했다. 이는 단순히 2012년 총선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통합진보당 창 당의 주요세력인 민주노동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과의 선거연대를 통해 상당한 성과 를 거뒀다. 또한 2012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이정희 후보가 중도사퇴하기 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선거-총선-대선으로 이어지는 주요 정치 국면에서 이뤄지는 야권연대는 주체의 의도와 무관하게 보수정당에 대한 진보정치의 의존성을 확대시키고, 결국 진보정당의 독 자적 성장 가능성을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부정적이다. 두 번째는 이미 다수의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진보정치 간 연대 가능성을 축소’시켰다는 점이다. 2012년 총선 당시 통합진보당은 진보신당 및 녹색당 등을 배제하고 민주당과 우선적으로 선거연대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민주통합당과 선거연대 합의문을 채택하기 불과 하루 전에 진 보신당에 선거연대 참여를 제안했다. 선거연대에 대한 진보신당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실상 참여 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러한 정치행위는 의도적으로 진보신당을 배제하고 그 책임조차 진보신 당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진보정치의 독자적 성장을 바라는 입장 역시 진보정치 간 연대 가능성 축소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진보신당의 입장에서는 강한 야권연대의 압력 속에서 독자적 성장을 위한 정체성 확립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는 보수정당과의 선거연대뿐만 아니라 다른 진보정당과의 선거연대에 대해서도 정치행보를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다른 진보정당과의 선거연대에 대한 태도까 미래에서 온 편지 31


우리는 아마도 이제 민주노동당 시절과는 다른 정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가졌던 정책의 깊이에 다다르려는 능력과 노력이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지 소극적으로 만드는 주장은 다수 진보정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의 진보정치 공존기반 형성을 더디게 하고, 이는 다시 당의 지지기반 확대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진보정치 이슈의 중도화

2012년 총선의 세 번째 특징은 기존 진보정치가 주도했던 이슈가 중도화 또는 우경화 되었다는 점이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새누리당조차 복지를 주요공 약으로 제시했다. 민주통합당 역시 자신들의 집권 시기에는 현실성 없다고 외 면하던 진보정당의 주요정책을 세부적 내용까지 수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정책공약의 채택에만 머물지 않고 (비록 전시성 공천이라 할지라도) 후보공 천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2012년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를 비례대표로 내세 우면서 한국사회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당 은 비정규직문제 외에도 정리해고문제로 투쟁 중인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삼성반도체 산업 재해문제로 투쟁 중인 반올림, 철거문제로 투쟁 중인 용산참사 대책위 등 다양한 투쟁주체들에게 적극적으로 비례대표 후보 출마를 권유했었다. 이 과정에서 확인한 놀라운 사실 중 하나가 민주 통합당(의 일부 인사) 역시 이들에게 자당 비례후보 출마를 권유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진보정치의 고유영역(이른바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조차 보수정당과의 경쟁 이 심화되었지만, 진보정당의 대응은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다. 진보정당은 쟁점이 되는 진보적 정치이슈의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주객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연히 선거 시기의 언론은 소수 진보정당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매우 대표적인 진보적 시민사회 단체가 주최하는 정책토론회에서도 진보신당이 배제되는 상황이었고, 이에 대한 항의 에 대해 돌아온 답변은 현실적 문제로 인해 ‘원내정당’으로 한정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진보정치의 이슈가 중심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단지 외부환경 탓만이 아니다. 진보신당을 포함해 진보정당은 언제나 정책정당임을 내 세웠지만, 실상 정책개발에 크게 투자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민주노동당 시절의 정책수준을 뛰 어넘거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못했다. 32


진보신당과 사회당 통합당대회 (사진 : 노동당)

지속되는

2012년 이후 진보정치 진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통합을 주장하며 통합진

과거

보당에 합류했던 일부 세력이 분당하여 정의당을 창당했고, 통합민주당은 시대 착오적 사법부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진보신당은 ‘진보좌파 2차 통합’을 완 성하지 못 한 채 노동당으로 재창당했다. 이후 두 번째 집단탈당의 아픔을 겪었

지만, 지금은 새 대표단을 선출하고 총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한때 거대한 태풍 같았던 통합의 압력은, 노동당 내 일부 세력의 2차 집단탈당과 ‘통합정의당’ 창당을 거치며 이제 단순한 저기압 으로 수그러들었다. 선거연대 역시 통합진보당 사태로 곤혹스러워하던 보수야당이 흥미를 잃어 4년 전의 기세를 잃었다. 상황은 이전과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에 대한 반성적 평가가 중요한 이유는 여전히 그 반성지점들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다수의 진보정당이 존재한다. ‘통합’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정치의 본성 중 하나라면, 다양한 진보적 가치에 따른 진화 역시 진보의 숙명이다. 진보정치는 이 본성과 숙명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우리는 아직 진보정당이 공 존하고 상생할 수 있는 질서를 만들지 못했고, 보수정당에 의존하는 선거연대를 뛰어넘는 진보정 미래에서 온 편지 33


치 간 연대를 숙성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아마도 이제 민주노동당 시절과는 다른 정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이 가졌던 정책의 깊이에 다다르려는 능력과 노력이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2016년 총선 에서 - 그럴 가능성은 아직 매우 낮지만 - 좀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선거라는 정치 이벤트에 단순히 이벤트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 대변하고자 하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과 연결시키고자 했던 진짜 정 치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2013년 재창당 당대회를 통해, 진보신당은 당명을 '노동당'으로 개정하고 재창당했다.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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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모두의 목소리 2016년 새해를 맞이하여, 그동안 진보진영 내에서도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던 분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눈꽃송이 같은 삶을 바라는 주부, 이제는 솔직하게 말하고픈 성소수자, 망할 보호주에서 벗어나고픈 청소년, 오늘도 사람의 온기로 겨울을 버텨내는 청년 작가까지, 2016년의 한국사회를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내는 우리 모두의 목 소리에 귀기울여주십시오.

미래에서 온 편지 35


기획

모두의 목소리

전업주부 OOO 씨의 이야기

‘눈꽃송이’의 삶은 아닐지라도 OOO | 전업주부

눈꽃송이는 그 결정체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모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눈 이 내리겠는가. 그런 결정체가 모두 다른 모양이란다. 사람은? 이전에 나는 사람도 눈꽃 송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누구와도 같을 수 없다고. 여기서 유치하게 “쌍둥이는?” 이러면 곤란하다. 쌍둥이라 할지 라도 목소리, 억양, 아니 다른 면이 수없이 많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만의 ‘눈꽃송이론’을 철회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무 슨 일이 있었길래? 요즘, 나는, 내 친구들은, 전.업.주.부.가 되었다.

갑자기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얼마 전 우연히 마주쳤다. 몇 년 사이에 그녀 역시 나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로 아이 둘을 건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 으로 기억하는 그녀는 영문과를 졸업하고 외국계 기업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커리어 우먼이었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여러모로 독특한 취향이 눈에 띄는, 명품브랜드 F사의 구두가 아니면 신지 않고 힙합을 좋아하는 호기 넘치는 여성이었다. 더구나 결혼을 왜 하 냐면서 평생 자유연애를 지향한다던 그녀가 전업주부라니…. 이 사실만으로도 놀라웠지 만, 요즘 근황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면서 평소 희미하게 가지고 있던 생 각이 확실해졌다. ‘결혼하고 애 낳고 집에 있으면 그냥 다 똑같구나….’ 비슷한 집안일을 해야 하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한 명의 엄마이자 아내만 남았을 뿐이다. 나 역시 결혼 전에는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리듬 향기 맛… 모든 것들에 나의 ‘선호’가 있었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으니 ‘내가 하고 싶은 것’ 따위 생각하지 않게 되 36


집이라는 공간은 끊임없이 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다. 깔끔한 성격이 이렇게 거추장 스러울 수가 없다.

었고, 내 생활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니다보니 모든 기호가 가족에게 맞춰져있다. 가장과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빨리 알아채고 그것을 구 현해내어야 가정이 편하고 내 속이 편하다.

그래, 전업주부에게 ‘취향’이라는 것은 오히려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오직 나만의 돈’은 단 한 푼도 없는 전업주부가 무슨 취향 타령인가. 이런 자본주의 시대에 푼돈조차 ‘오직 내 것’으로 가지지 못했다니! 돈에 따라 힘과 권력도 생겨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그런 작은 권력 하나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용하다. 그럼 전업주부는 정녕 아무 권력이 없는가? 무슨 권력으로 사는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수시로 이런저런 경우를 보 면서 생각해봤는데, 그 권력의 일부분은 자녀들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전업주부의 영향 력이 가장 여과 없이 미치는 대상이 자녀다. 그래서 그 많은 엄마들이 자식의 성적을 위해 끊임없이 소문을 듣고 학원을 옮기고 학부모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런 활동을 통해 존 재감을 얻기도 하고 자신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것도 물 론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잘 살아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진정한 힘의 원천이 아니다. 그래서 전업주부도 ‘돈 되는’ 일을 하고 싶다. 간절하다.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나의 수 입이 필요하다. 아니, 전업주부의 일련의 활동을 노동이라 인정하면 안 될까? 누군가는 “집 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주부로서의 당연한 일을 무슨 노동이라고 하는 거야?”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밥하고 빨래하는 서비스를 사고파는 사람이 있는데도 그것이 ‘노동’이 아니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냥 주부의 가사노동을 ‘노동’이라고 인정해주기 싫어서겠지. 미래에서 온 편지 37


일은 하지만 돈 한 푼 못 받는 전업주부의 노동에는 시간적인 보상도 없다. 나는 주부의 휴식시간을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출퇴근하는 사람은 좋겠다. 나도 퇴근을 할 수 있다면 그 시간 동안 이동수단 안에서 뉴스를 볼 수도 있고, 음 악을 들을 수도 있고, SNS를 할 수도 있겠지.’ 집이라는 공간은 끊임없이 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다. 깔끔한 성격이 이렇게 거추장스러울 수가 없다. 그냥 먼지가 좀 쌓여도 눈에 안 들어오면 좋을 텐데… 남편과 아이가 나를 좀 찾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한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남편, 남의 편이 아닌 아 내의 편인 남편. 그 남편은 전업주부인 아내의 6일간의 노고에 감사하며, 일요일에는 아 내의 주방출입을 막고 모든 가사에서 해방시켜준다고 한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처럼 일요 일은 쉬는 날. 다음날로 미뤄지는 빨래와 청소는 차치하고, 삼시세끼 밥과 그에 동반되는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휴식이 될 수 있겠지. 이렇게 따지 는 것조차 그 남편에게 좀 실례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내의 휴일을 생각한 자체만으로 도 장하고 장한 남편이다. 주5일 근무시대에 주6일을 일하는데도, 그의 아내가 부럽다.

결혼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정규과정을 이수하고 사회에서도 책상 앞에 앉아 머리 쓰는 일 만 했던, 사회에서 요구하는 표준체형의 여자도 결혼해서 주부가 되면 하루아침에 힘세고 날쌘 일꾼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들 수 있어야 하고, 하루 종일 손목을 써야 하며, 오래 서있어도 까딱없어야 한다. 거기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전혀 다른 업무이지만 빠른 시 일 안에 숙련되어야 한다. 잠잘 때 빼고 대부분이 업무시간이고 휴일은 따로 없다. 물론 연차나 월차도 따로 없다. 월급도 없다. 월급이 없으니 상여금도 없다. 38


‘나 자신’을 ‘내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눈꽃송이’에서 ‘빗물’로, 나는 나를 완전히 녹여내는 중이다.

이쯤 되면 “아니 하는 일도 없이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커피숍에서 탱자탱자 노는 그 여자 들은 다 누구요?” 하고 꼭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네, 네. 저도 본 적 있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전업주부도 빈부격차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잘은 모르지만, 부잣 집 전업주부는 해외여행도 자주 가고 외출할 때에는 자가용에, 애 봐주고 밥 해주는 사람 도 있다. 그럼 자기는 쇼핑도 하겠지. 하지만 보통의 전업주부들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 을 맘대로 쓸 수 없다. 어쩌다 한 번 쇼핑하고 차 마시는 일이 그렇게 사치스러울 수가 없 다. 안 그래도 힘들고 알아주는 이 없는 전업주부를 더 비참하게 하지 마시라. 그래도 남 과 비교하지 않고, 나의 노동이 고스란히 가족의 평안에 기여한다는 그 신념 하나로 해내 고 있으니까.

전국의 전업주부가 연대해서 파업을 하면 어떨까? 그럼 전업주부가 하는 일이 명명백백 하게 세상에 알려지고 인정받게 되려나? 파업은 고사하고 소심하게 태업만 해도 남편의 잔소리에, 때론 나 스스로에, 밀린 집안일에 떠밀려 다시 정상근무를 한다. 우는 아이에겐 달래줄 엄마가 필요하고 직장 일에 쪼들리고 여기저기 치이는 남편에게는 따뜻한 된장찌 개를 끓여줄 아내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필요한 자리에서 내 일을 해나가는 중이다. 내 모습은 이제 눈꽃송이가 아닌 그저 흔하디흔한 빗물 같아졌지만, 누구도 탓할 생각은 없다. 어떤 이의 눈에는 할 일 없는 아줌마로 보이겠지만, 그것도 중요하진 않다. ‘나 자 신’을 ‘내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그렇게 ‘눈꽃송이’에서 ‘빗물’로, 나는 나를 완전히 녹여내는 중이다.

미래에서 온 편지 39


기획

모두의 목소리

독거노인 김 할머니의 이야기

엄마노릇 딸노릇 사람노릇 최현숙 | 독거노인센터 생활관리사

한 시에 이쪽저쪽으로 도착할 거라고 미리 전화를 드렸고, 한 시가 되기 오 분 전에 도착 했다. 올 추석 며칠 전이었다. 현관문이 빼꼼히 열린 채 아래쪽에 신발 한 짝이 괴어져있 었다. 나를 위한 배려다. 현관에서 이어진 부엌 건너에 있는 한 칸 방문도 열려있다. “아유, 문을 아예 열어 두셨네. 그러다 나쁜 놈이라도 들어오면 어쩌시려고.” 홀로 사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강도 겸 성폭력 사건들이 늘고 있다. 올여름 주민자치센 터에서는 여성독거노인들을 따로 불러 문단속과 성폭력에 관한 교육을 했다. 김 할머니는 혼자 외출을 할 수 없어서 교육내용과 자료를 내가 전해드렸다. “누웠다가 일어나서 문 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그래서 아까부터 열어놓았지.” 꾸물꾸물 일어나시려는 걸 ‘머 하러 일어나시냐?’며 도로 누우시라 했다. 김 할머니는 늘 이부자리를 펴놓고 누워 계신다. 약봉지, 핸드폰과 전화, TV 리모컨, 효자손, 메모지와 펜 등이 근처 손 닿을 만한 곳에 가지런하다. 성격도 살림도 깔끔한 분이다. 점심으로 누룽지 를 끓여 드셨는지 사기 공기에 누른 밥 몇 알이 남아있다. 끓여 잡수시는 건 아직 혼자 하 실 수 있다. 노인장기요양을 신청하셔서 방문요양보호사를 오게 하시라고 권해도, 남 들 락거리는 거 싫어서 신청을 안 하시겠단다. 꼼지락거리며 간단한 청소며 빨래도 하시고, 열흘마다 딸도 온다. 34년 생으로, 올해 여든 둘인 여성노인 김숙희(가명). 딸 하나만 낳았고, 그 딸은 대구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 작년 추석 며칠 전, 갑작스런 위경련으로 겨우 내게 연락을 하셨 다. 119부터 불러드리고 나도 달려갔다. 딸이 대구에서 급하게 왔다. 위암이 확인됐지만 40


몸이 쇠약해, 의사도 수술을 하지 말자고 했단다. 딸은 엄마한테 ‘나쁜 거’라고만 했고, 어 르신은 나한테 ‘위암’이라고 했다. 딸과 엄마는 병명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난 한 해 동안 빠르게 말라가는 중이다. 요즘은 38킬로. 작은 키가 최근 더 작아지셨다. 팔 관절 위아래의 두께가 똑같다. 낮은 찻상에 모포를 덥고 두 발을 올려놓고 누워 계신 다. 그래도 허벅지 아래로는 항상 심하게 부어있다. 오늘은 발이 유난히 퉁퉁 부었다. “내가 원래 살이 없었어. 그래서 이렇게 말라도 살이 늘어지지는 않으니 다행이지 머야.” 그녀에게 몸은 평생의 자부심이자 노동이다. 일제와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십대 중후반의 한 여학생은 작은 두 발에 몸과 욕망을 싣고 춤을 추며 행복했다. 발을 살살 만져드렸다. 붓지 말라고 올려놓다보니 피돌기가 안 좋아서 발이 늘 차다. “어 르신 발 볼 때마다 무용하시던 모습을 상상해요. 얼마나 아름답고 힘차셨을지.” “내가 무용을 계속 했으면, 그걸루 대학교수라도 됐을 거야. 소학교랑 여중 다닐 때 늘 구 령대에 올라가서 무용이랑 체조 시범을 보여줬어. 나를 예뻐한 여자 체육선생님이 꼭 무 용과를 가라고 당부하셨는데, 아버지가 ‘양반집 여식이 무슨 놈에 무용이냐’며 호통을 치 셨지.” 그래도 꿈을 접지는 않았는데, 여고를 입학한 해에 6.25가 났다. 사변이 끝날 무렵 아버지 가 혼처를 정했고 바로 혼인했다. 영감이 돈을 안 벌어 와서 평생 당신 몸으로 사셨단다. 몸이 작아 크게 힘쓰는 일은 못했지만, 여자들 일은 안 해본 거 없이 다 하셨단다. 손끝이 깔끔해서 일이 안 끊어졌다. 그래도 덜 고생하려고 그랬는지, 딸 하나만 생긴 게 다행이란 다. 늦게 얻은 외동딸 고생시킬까봐, 딸 결혼시키고도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여 든 하나인 작년 추석 밑까지도, 남의 집 가서 아기 보는 일을 하셨다. 그러다가 쓰러지신 거다. “내가 친구들 가자는 여행 한 번을 같이 못 따라갔어. 노인정 가서 화투라두 한 번 치고 놀아봤으면 지금 좀 덜 억울하겠어. 남들은 서방 죽으면 연애도 잘 하던데, 20년 전에 서 방 보내고는 더 기를 쓰고 일했어. 남의 돈 한 푼 받으려면 오장육부를 다 빼놔야 돼. 어느 때는 돈에서 냄새가 다 나더라구. 징글징글한 비린내가. 멋두 모르는 딸년은 지 년 시집가 고 나서는 만날 나한테 하는 소리가 쉬엄쉬엄 다니라는 거야. 그것도 일인데 쉬엄쉬엄이 돼? 아파도 끌고 나가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다니고. 여자들 일이 더 그렇잖아. 저 고생 안 시키려고 그러는데 쉬엄쉬엄 어쩌구 하면,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구 밉더라구. 내가 빤쓰 하나 사는 게 겁나서 다 떨어진 거를 기워가면서 입었어. 딸이 내 서랍 정리하다가 미래에서 온 편지 41


노인기초연금 20만원에, 딸이 주는 용돈 10만원이 월수입의 전부다. 월세 16만원이 가장 큰 지출이다.

그걸 보구는 궁상떤다고 난리를 치더라구. 그러면서 지가 동대문시장 가서 짝으로 사오겠 다나 머래나. 근데 그게 글쎄 그걸 자꾸 까먹구 안 사와. 서울 오면 지 딸 데리구는 여기저 기 다니면서도, 내 빤쓰 사오는 거는 까먹는 거야. 지 새끼 옷만 사 입히고 들어와서는 나 더러 이쁘냐구 물어보는 거야. 내가 얄미워서 아무 대답을 안 해도, 그 년은 에미 빤쓰 생 각을 못 하더라구, 글쎄. 자식은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어.” “아유, 그래도 그 딸이 효녀지 머예요. 시부모 모시고 대구 살면서 서울 사는 친정엄마 병 원을 달에 두 번 이상 꼬박꼬박 챙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 딸이 어딨어요? 그리 구 아닌 말로 아들이었으면 엄마 팬티 걱정을 했겠어요? 딸이니까 속옷 서랍도 챙겨드리 구 팬티 걱정도 해주는 거지. 저는 딸이 없어서 어르신이 젤로 부럽더라.” “맞아, 그건 맞아. 철없는 줄로만 알았더니 쉰 넘으니까 달라지더라구. 내 딸이 올해 쉰이야.” “그리고 어르신, 딸이구 사위구 손주구 아예 기대를 하지 마셔요. 그래야 어르신이 상처 를 안 받아. 해주는 거는 그저 ‘그래 고맙다’ 하며 받으시고, 그러면서두 기대는 하지 마셔 요. 남이면 기대도 안 하니까 상처 받을 것도 없지만, 자식한테는 자꾸 기대하게 되고 그 러면 그게 꼭 상처를 받게 되더라구.” “그건 그래, 근데 아직 젊은 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셔. 올해 몇이라 그랬지?” “아,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죠 머. 저도 내일 모레면 예순이에요. 우리 엄마를 보든 저를 보 든 다른 어르신들을 보든, 다 거기서 거기에요. 핏줄이 최고라지만, 핏줄이 또 제일 아픔 인 거지. 아, 오죽하면 ‘전생에 웬수가 핏줄로 만난다’는 말이 있겠어요. 이승에서 잘 풀어 야 저승에서 좋게 만난대요, 하하하” 42


“호호호, 그 거 말 되네. 그래도 내가 고생한 끝이 있지. 그 딸이 공부도 잘해서 숙명 나오 고 중앙대까지 나와서 결혼을 한 거야. 그러구는 아들 딸 둘 낳은 것도 모두 서울서 대학 다니고. 이젠 나 하나만 걱정 안 끼치고 살다 가면 되는데, 작년 딱 요때쯤 이렇게 된 거 야. 내가 이럴 줄 누가 알았겠어? 여든 넘어서도 몸이 가벼우니까 훨훨 날아다녔는데. 억 울해 억울해… 너무 억울해.” 이무럽다* 며 털어놓는 딸 얘기가 푸념과 자랑 사이를 들락날락한다. 어쩌다 내게 보이시 던 짜증도 여든 둘 선배 여성의 ‘생기’여서 반갑다. 김 할머니는 사위 직장 때문에 국민기초수급 대상이 아니다. 노인기초연금 20만원에, 딸 이 주는 용돈 10만원이 월수입의 전부다. 월세 16만원이 가장 큰 지출이다. 약값과 병원비 로 딸도 힘겹다. 지난여름 폭염에는, 딸도 나도 할머니가 잘못되시는 줄 알았다.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셨 고, 일주일 내내 서울에 와있던 딸에게 나는 매일 전화를 했다. 사실 이럴 때는 참 난감하 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들끼리 하는 말로, 자식 입장에서는 ‘죽었나 살았나‘를 확인하는 전화로만 들릴 수도 있다. 다행히 딸은 고마워했다. 그 김에 여든다섯 내 어머니 이야기도 나눴다. 퇴원시켜드리고 대구 내려가기 전, 일부러 내게 먼저 연락을 했다. 마침 근처 어 르신 댁을 방문 중이어서 전철역에서 잠깐 얼굴을 봤다. 언니라면 좋겠다며 내 손을 먼저 잡는데, 서로의 눈이 붉어진 걸 보고는 둘 다 그 채로 그냥 웃었다. “딸 노릇 정말 잘 하고 계신 거예요. 하는 데까지 하시자구요.” 쉰 살 여성 후배의 아프고 바쁜 몸과 마음이 안쓰럽다. 일어나려는데 추석 밑이라며 굳이 미역 한 봉지를 주시겠단다. 미리 현관 앞에 챙겨두시 기까지 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련 떨지 말고 꼭 먹어요. 이러구 혼자 누워있으면 먹고 싶은데 참 고 못 먹었던 게 하나하나 다 떠올라. 그게 젤로 억울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르 흐르는 거야. 아이구 바보 천치에 미련한 인생아…. 내가 이런 얘길 최 선생 말구 누굴 붙 잡구 하겠수. 딸년한테 하면 쌈이나 되구, 이웃이 들으면 악착 떨더니 저렇게 됐다구 숭이 나 보겠지.” 목소리에 늘 기운이 없으셨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또록또록 하셨다. 못 일어나고 도로 앉았다. * 편집자 주 - 서로 친하여 거북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구애됨이 없다는 뜻. 표준어는 임의롭다.

미래에서 온 편지 43


기획

모두의 목소리

성소수자 강올림 씨의 이야기

이제는 또박또박 말할게요 강올림 | 대학생 (Twitter ID : alllim_3)

사실 2016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2015년 한 해를 힘들게 보냈다. 군대도 가 지 않고, 건강하지 못한 채 아팠고, 부모님께 커밍아웃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싸늘했고, 그래서 부모님과 전과 같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걱정됐고, “넌 왜 군대를 안 가? 넌 왜 건강하지 않아? 넌 그냥 여자를 좋아하면 되지, 왜 남자를 좋아해?”와 같은 질문들에 나 자체가 무너질 것 같았다. 이런 과정에 대한 비관을 잊기 위해 술에 많이 의존했고, “심란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리고 2016년이 오면 이런 질문을 아무도 하지 않아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2016년이 되어도 누군가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물어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게이’구나!”하고 성적지향성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배우 권상우의 복근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여자라는 사람보다 남자라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구 나!”하고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사춘기 때 알았다는데, 나는 자각을 빨리 한 편이다. 조숙했던 걸까? 외국에서는 남자랑 남자가 결혼도 한다는 정보를 그 어린 나이에도 알았 다. 그리고 ‘내가 이상하고 나쁜 사람이 아닌, 조금 다른 사람’임을 받아들이며 “나는 게 이”라는 사실에 대한 혼란을 가라앉혔다. 어린 나이에 저지른 짓이지만, 중학생 때는 ‘이 쪽’ 사람들만 가입하던 커뮤니티에 아빠 주민등록번호를 빌려 가입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인터넷의 힘을 빌려 커뮤니티 안의 정보와 이야기만 흘깃흘 깃 읽었다. 그러다 스마트폰을 처음 사 쓰기 시작하면서, 데이팅앱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고 연애도 시작하게 되었다. 44


하지만 ‘나’라는 사람과 같은 성적지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리란 설렘은 그리 오래가 지 못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이상한 앱에 게이들이 어디 있는지 거리단위로 뜬다”는 소문이 퍼졌었나 보다. 얼굴 사진이 달리지 않은 계정들이 교내에서 늘어나기 시 작했다. 처음엔 그런 계정들이 왜 많아졌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몇 주 뒤, 친하지는 않았 지만 같은 반이었던 아이에게서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너 게이지? 내가 거기서 봤 어. 애들끼리 누가 깔았는지 알아내려고, 깔아서 봤어.”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그때 이후론, 들키면 안 된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별 의미 없는 농담들에도 움찔움찔 놀라곤 했다. ‘게이’라는 남성동성애자는 ‘웃긴 존재’ 또는 ‘이상한 존재’로 여겨지는 공간 에서, 나는 게이가 아닌 척, 같이 혐오하는 척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통스러웠다. 생물선생님이 수업 와중에 뜬금없이 “동성애는 이해한다 치자. 정이 들면 사랑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들이 하는 관계는 혐오스럽다.”는 말을 뱉었을 때, 나는 죄인 마냥 고개를 숙였다. 홍석천 씨가 “게이는 당신의 가족, 형제, 친구일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사진이 오용될 때마다, 나는 꿈속에서 “너 게이야?”라며 혐오를 느끼는 표정으로 내게 묻는 부모님, 친구,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항상 마주해야 했다. 그렇게 소심하고 비루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스무 살에 대학을 들어갔다. 새로운 환경에 서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 나는 최대한 ‘게이 같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몇 년간 몰래 몰래 쓰던 스마트폰 속 앱들도 다 지워버리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와 전공 공부, 동아리 일에 매진했다. 그러다 2년 전 쯤 학교 공용게시판에서 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성소수자 동아리를 만들 려고 합니다. 가입의사가 있으신 분은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주세요. (익명성 보장), (재학 생, 휴학생, 졸업생 무관)” 게시판 앞을 스치듯 지나가며 본 것인데도, 머릿속에 그 문구 가 계속 맴돌았다.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등등 각각의 성적 지향을 가리키는 용어는 알았지만, ‘성소수자’라는 의미는 생소했다. 수업시간에 몰래 그 뜻을 찾아 ‘성소수자’가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를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 라는 걸 알았다. 나와 같이 성적지향, 성적정체성 때문에 다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단체 채팅방 하나에 오순도순 모인다는 점에 끌렸다. 막연히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함께하면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가입하고 싶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처음 열린 술자리.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했다. 자신의 성적지향성과 이 모임에 들어온 이 유를 소개하고, 즐겁게 술도 마셨다. 그동안 학교에 모일 동아리가 없어 아쉬웠다는 소회 도 털어놓고, 앞으로 어떻게 동아리활동을 이어나갈지에 대한 개개인들의 생각도 나누었 미래에서 온 편지 45


서울예술대 캠퍼스에 부착된 성소수자 혐오 포스터. 서울예술대 성소수자 인권동아리 녹큐 페이스북 갈무리

다. 막차시간에 다다라 자리를 파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집에 돌아오는데, 살짝 미소가 지 어질 정도로 홀가분했다. ‘세상에서 나만 다른 게 아니구나.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모이 니, (각자가) 유별나게 보이지 않는 새로운 ‘집단’이 생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나는 “너 게이야?”라고 묻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조심한 다. 하지만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감출 이유가 없었다. 편하게 “나는 게 이”라고 밝힐 수 있어 행복했다. 음성적이고 폐쇄적인 만남, 인터넷상에만 머물러야 했던 관계 속에서 느꼈던 ‘고립감’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해방될 수 있었다. 고민되는 부분이 있으면 자유롭게 동아리 안에서 함께 고민하고, 혐오에 대응하는 목소리 도 낼 수 있었다. 나의 ‘게이 라이프’는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수요일 오후, 학교 게시판에서 황당한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100만 청소년, AIDS에 무방비 노출” “에이즈(AIDS/HIV)로 인해 매년 1,000여명의 청소 년과 청년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뭐지?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용을 좀 더 훑어봤다. 동성애자는 에이즈도 많이 걸리고, 우 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을 앓으며, 심지어 이성애자보다 수명까지 짧다는, 근거도 부족한 악의적인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누가 붙였을까, 이걸 어디에 알려야 하는 걸까, 못 본 척 지나가야 하나, 짧은 순간에 많은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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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동아리 대표에게 연락을 했다. 포스터의 내용에 반박하기 위해 신빙성 있는 자료를 함께 찾고, 반박대자보를 써서 학교 곳곳에 붙였다.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어 기쁘기도 했 지만,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로 성소수자를 비방하는 포스터가 학교 곳곳에 붙었다는 사실 이 씁쓸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의 존재를 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안개 속에 가려져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전체’에서의 ‘소수’로 지내던 예전에는, 동성애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 왔을 때 다른 이들의 말에 상처 입으면서도 직접적으로 그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고 소심 하게 고개만 숙였다. 성격 탓인지, 다른 사람들의 의도치 않았던 말이 생각보다 매서웠던 탓인지 스스로를 탓하며 울기까지 했다. 다른 친구들의 ‘여자친구’ 자랑에 이질감을 느끼 며, 혼자 그 자리를 나와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고 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동아리활동을 하고, 다른 대학의 성소수자 모임들과 연대하고, 퀴어문화축제에 함 께하고, 혐오 포스터에 대응하는 자보를 붙이면서 나는 달라졌다. 내가 ‘퀴어, 성소수자’ 라는 이유로 소심해질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내 성적지향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돌 려 말하는 공허한 거짓말이 아닌 솔직한 진심을 말하는 것이 상처를 덜 받는 길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이 더욱 깊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쓴 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르 다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무의식적인 혐오에, 자존감이 긁히는 상처에, ‘내 삶이라서, 나는 게이여서 행복해.’라는 스스로의 주문, 주위의 응원이 이제는 좋은 약이 되리라 믿는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청소년 문학상인 마이클프린츠상을 수상한 엘렌 위트링거는 『하 드 러브』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커밍아웃은 거짓말을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고통 스럽지만 오히려 고통스러울 때 진실을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2016년에도 더 고통스럽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을 만날 것이다. 100% 예상한다! 그런 순간 들이 전혀 없기를 바라지만, “넌 왜 군대를 안 가? 넌 왜 건강하지 않아? 넌 그냥 여자를 좋아하면 되지 왜 남자를 좋아해?, 성소수자들은 왜 고생스럽게 연애를 하고 힘들게 살 까?”라는 질문을 어디서든 받게 될 것이다. 어눌하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또박또박 솔직한 내 의견을 말하려 한다. “왜냐고? 이유 없어! 좋으니까. 그리고 그게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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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모두의 목소리

다른 삶을 상상했던 청소년 OOO 씨의 이야기

“망할 보호주의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라!” 양지혜 | 청소년세미나모임 세모 활동가

“선배, 저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요.” 함께 활동하던 후배가 어느 날 내게 조언을 구했다. 후배는 담임교사에게 체벌과 인격모 독을 당했고, ‘사회활동을 하는 아이’라는 낙인이 찍혀 친구들 사이에서도 고립되어 있었 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후배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 딱히 없었다. 내게도 학교는 곧 ‘고립’이었다. 1학기에는 수능특강을 풀고, 2학기에는 수능완성을 푸는 입시 위주의 교 육 속에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나는 후배에게 “네가 원하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나는 너를 항상 지지할 것”이라고 말 했다. 그러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삶을 거부한 청소년이 원하는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학교를 자퇴한 후배는 가정에서의 마찰을 견디지 못하고 빈번히 집에서 벗어났다. 후배의 친권자는 ‘내 마음대로 네가 살아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일컬었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후배에게 친권자의 사랑은 위협이었고, 강요였고, 폭력이었다. 후배와 함께 청소년 보호시설에 대해 알아보았다. 쉼터나 주거협동조합 등을 백방으로 구해보았으나 쉽지 않 았다. 아무런 자본도, 경제권도 없는 청소년에게는 당장의 잠자리조차 아득했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고작해야 단기쉼터였고, 그마저도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장기쉼터에 가 기 위해서는 가정폭력을 당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했다. 돈이 없었지만 청소년이 아 르바이트를 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간신히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그녀는 하루 만에 쫓겨났다. ‘삶을 지지하고 함께하겠다’고 말했지만, 후배의 방황과 결정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은 없었다. 그저 간혹 함께 밥을 먹고 버스비를 보태줄 뿐이었다. ‘보호’시설은 사실상 제 48


사회는 폭력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지 않고 청소년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역할을 하지 못했다.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각종 규제들은 오히려 그들의 독립적 인 삶을 가로막았다. 집을 계약할 권리도, 홀로 일자리를 구할 권리도 청소년에게는 없었 다. 학교와 가정에서 뛰쳐나온 청소년을 위한 자리는 사회 어디에도 없었다. 사회는 그들 을 다시 폭력적인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묵묵히 학교에 다녔다. 고3의 교실은 황폐했다. 내가 다니 는 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학교가 아니었다. 수시 철 내내 합격소식을 듣는 일이 드물었다. 한 친구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데에 왜 자격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물리치료사가 되 고 싶었지만 성적이 되지 않아 대학에 불합격한 친구였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물리치료 를 배울 공간도, 물리치료사가 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는 “등급으로 사람을 평가하 는 세상이 싫다”며 “왜 굳이 대학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대학에 가는 것 말고는 대안을 떠올릴 수 없었다. 막연한 공포가 교실을 잠식했다. 대학에 가지 못하고, 취업을 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궤도에 들지 못한 채 평생을 패배자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는 불안이 공기 중에 짙게 깔렸다. 삶의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졌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면 먼지들이 점멸하곤 했다. 먼 지들은 둥둥 떠다니다가 사그라졌다. 교실 안의 우리가 다 먼지 같았다. 우리는 사회에서 방치되어 있었다. 12년간의 교육은 무기력만을 남겼다. 입시과정에서 겪는 두려움, 막막 함, 스트레스, 실패, 죽음 등은 개인적인 불행으로 치부되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말인가. 다른 삶을 상상 하는 청소년은 손발이 묶인 채 주어진 삶 속에서 패배자로 규정되고 마는데, 사회는 폭력 미래에서 온 편지 49


청소년 보호는 규제가 아닌 보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과 독립적인 삶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다.

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지 않고 청소년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 었다. 청소년 보호법을 찾아보았다. 제1조(목적)에 의하면 청소년 보호법은 “청소년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구제함으로써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게 함”을 목 적으로 한다. 아동법 제 3조에는 “모든 국민은 아동을 보호양육하고 사회생활에 적응되도 록 육성할 책임을 진다”고 명시되어있다. 그러나 이 ‘보호’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셧다 운제, 음주 및 흡연 금지, 모텔출입 금지 등 ‘건전함’을 유지하는 데에 집중되어있다. 이 사회는 모든 청소년을 보호하지 않는다. ‘건전한 청소년’만을 보호한다. ‘건전한 청소 년’이 될 생각이 없는 청소년에게는 방치와 폭력만이 이어질 뿐이다. 입시에 해악한 것들 을 전면적으로 차단하고, 가정과 사회에 순응하는 삶만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강요한다. 곧 ‘보호’란, 청소년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체제에 대한 보호를 의미할 뿐이다. 물론 체제 안에서 우리는 안전할지도 모른다. 금지와 검열이 남발하는 청소년 ‘보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최소한의 의식주를 보호받으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말만 잘 들으 면 말이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은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삶이다. 나 자신의 개성이 존재하는 삶이다. 실업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단 하나의 인격으로 자라나라고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 청소년에게 정말 필요한 보호는 ‘보호주의’로부터의 보호다. 청소년 보호는 규제가 아닌 보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과 독립적인 삶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 다. 누군가가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고 스스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충분히 가능성이 주 50


어지는 삶이어야 한다.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 억압하는 거라고 말하는 이 사회를 향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망할 보호주의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라!”

미래에서 온 편지 51


기획

모두의 목소리

소설가 정현석 씨의 이야기

봄을 기다리며 정현석 | 소설가

작년 이맘때는 한참 집필로 밤을 지새운 기억뿐이다. 밤샘은 쉬이, 외딴섬이 되어버린 사 람으로 하여금 굳이 날것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도록 유도한다. 동시에 치솟는 알량한 자 존심은, 괜한 걱정을 사지 않으려 입을 다물고 기어이 고립을 택한다. 드러내지 못한 그 날것의 속내. 책을 출간하기에 앞서 집필부터가 버거운 이유 중 하나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과 생 계를 놓고 경중을 저울질하는 일이 언젠가부터 일상이 되었다. 한정된 시간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한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나 싶어도 실천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집필 중에는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이나 체력의 여유가 없다. 기껏 모아놓은 돈을 모두 월세로 깎아먹은 탓에 본가로 들어온 지도 반년이다. 그동안 책 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교통비만 감당하기도 벅찬 수준이다. 근근이 연명을 돕던 축제 기 획일도 겨울과 동시에 비성수기를 맞았다. 기획자의 삶조차 바야흐로 보릿고개다. 영도를 밑도는 날씨에 옷을 여미듯 지갑을 여미는 수밖에 없다. 먹고살기 힘든 까닭은 단지 내가 무명의 신인이기 때문만은 아닐 터이다. 2012년 문화예 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문인 200명을 대상으로 창작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을 물은 결과 32.5%는 수입이 없고, 28.5%가 10만원을 밑돈다고 답했다 한다. 문인이라면 통장에 숫자 가 찍힌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입장이다. 간혹 어떻게 먹고사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작가를 지망할 때는 사회적 편견이라 여기곤 했던 질문이 이제는 나의 현실이란 걸 느낀다. 대답이 궁색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 52


작품과 생계를 놓고 경중을 저울질하는 일이 언젠가부터 일상이 되었다. 한정된 시간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한다.

면 있는 대로 산다. 이조차 부모와 집이라는, 조금이나마 기댈 구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 다. ‘부모님이 허락한 예술’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공감을 이끌 만큼 예술을 하겠다고 부모 와 담을 쌓고 지내는 예술인이 대다수인데, 소설을 쓰는 일로 가족의 지지를 받는다는 건 그야말로 축복이나 마찬가지다. 지원은커녕 부모의 동의를 얻는 일조차 예술인에겐 거대 한 벽이다. 금수저나 은수저가 아닌 이상, 작품을 내는 일은 생계를 담보로 한 일종의 도박이다. 누구 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이력 한 줄이 되느냐, 끝내 버티고 버텨 당시에는 미처 주목하지 못한 전적이 되느냐. 현실은, 후자가 되기 전까지는 오직 전자의 삶을 살 뿐이다. 작품 활 동만으로 먹고사는 건 욕심이라는 지적도 고깝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지금에 이르니 소설가가 되는 건 차라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라는 직업을 지속할 수 있을지가 더 의문이다. 언제까지나 부모에게 기대고 있을 수는 없다. 모든 문인 의 불가능한 꿈인 ‘글로 먹고사는’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늘 고민을 품고 살 것이다. 희망은 이루어지기 전에나 존재하고, 기대는 일찍이 버리고 싶대도 두 가지를 모두 놓기 란 어려운 일이다. 다시 새로운 소설을 쓰는 중이다. 돈을 더 벌고자 하는 임대인에 의해 퇴거당할 처지에 놓 인 임차상인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이미 어느 소설보다 극적인 삶이 거리에 만연하다. 예 술인과 더불어 예술인을 위한 공간마저 하나둘 설 자리를 잃어간다. 수년간 음악인과 관 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공연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드물지 않게 들려온다. 홍대에 서 밀려난 예술인은 합정으로, 합정에서 상암으로 밀려난다. 변방으로 밀려나다 못해 강 미래에서 온 편지 53


이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챙긴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지금은 재주를 부린 곰이 선 무대마저 빼앗는 시대다.

을 건너 신림 고시원에 터를 잡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같이 돈 때문에 내쫓긴다. 음식과 음료를 팔아 예술인의 작업공간을 내어주던 대안공간은 유명 연예인이 건물을 사들인 이후로 수차례 철거용역을 막아가며 싸우는 중 이다. 평생 예술만 보고 살아온 임차인은 일상을 파괴당한 채, 가게를 지키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수시로 법원을 드나든다. 언제 철거당할지 모르는 공간에서 공연과 전시를 이어간다. 그놈의 돈이 허락하지 않은 무대를 무대삼아 노래를 부르고 전시를 하고 시를 읊는다. 버티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이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 은 사람이 챙긴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지금은 재주를 부린 곰이 선 무대마저 빼앗는 시대 다. 매년 겨울이 예년보다 춥다고 느껴지는 건 진정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모든 삶이 고통을 감내하는 시대다. 사람의 온기를 끌어안고 버티는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 봄을 기다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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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씨는 "글쓰기도 노동"이라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든 '일'을 한다. (사진 : 정현석 페이스북 페이지)

미래에서 온 편지 55


기획

모두의 목소리

여전히 농부를 꿈꾸는 어일우 씨의 이야기

언제 다시 내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어일우 | 산림일용직 노동자

직업으로 농사를 선택하고 강화도에서 작년과 재작년에 고구마랑 벼를 키웠다. 내가 살았 던 곳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볼음2리다. 날씨가 좋으면 북한 땅이 보이는 곳에 위 치한 작은 동네다. 운이 좋아서 농사 첫 해부터 유기농으로 벼농사를 지었다. 농사 첫 해에 논을 4200평 얻었 다. 논이 세 자리였는데 1800평짜리 한 자리의 농사를 망쳤다. 물달개비가 논을 뒤덮었다. 콤바인을 운전한 이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래도 나머지 두 자리에서는 평년만큼 소출이 나왔다. 수확한 벼의 3분의 1 정도를 직접 팔았다. 택배비를 포함해 10킬로그램당 4만원에 가까운 비싼 가격이었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사줬다. 전체 논 면적의 40%에서 소출이 적게 나왔 는데도 평당 1000원 정도가 남았다. 이 정도가 소작농의 평균소득이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농산물 소득 자료에 따르면, 벼농사는 평당 2500원이 남는다. 근데 이 것도 자기 땅에서 본인 기계로 농사를 지었을 때의 얘기다. 남의 땅을 빌려 남의 기계로 농사를 지으면 평당 1000원이 남는다. 고구마 농사도 소출로 봐서는 망쳤지만, 섬에 들어와서 농사짓는 젊은 부부라고 많은 분 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직거래로 다 팔 수 있었다. 그리하여 농사 첫해에 얻은 순이익은 600만원 남짓. 생활비랑 농사경비로 쓴 비용이 1100만원 정도였으니, 농부로 살기 시작한 첫해에 500만원을 까먹었다. 작년에는 재작년에 잘 안됐던 논 한 자리를 줄여 2400평에 벼농사를 지었다. 가물어서 논 에 물이 적었지만 다행히 수확은 재작년만큼 됐다. 이번에는 이사 문제 때문에 직거래를 하지 못했다. 별 수 없이, 수매대금이 없는 줄 알면서도 동네 형들이 쌀을 파는 곳에 내가 농사지은 쌀을 팔았다. 56


농사 첫해에 얻은 순이익은 600만원 남짓. 농부로 살기 시작한 첫해에 500만원을 까먹었다.

인천지역의 학교급식에 타지에서 생산한 쌀을 쓸 수 있도록 하면서, 강화지역 농협에서는 팔기 어려운 유기농 벼를 아주 소량만 수매한다. 그나마 그것도 창고에 1년 내내 묵혀두 었다가, 가을에 수확시기가 다가오면 몇 억씩 손해를 보고 헐값에 판다. 그 손해는 금융업 으로 이자놀이를 한 돈으로 메꾼다. 어째서 농협은 쌀을 팔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까? 상황이 이렇다보니 볼음2리 친환경 작목반에서 나오는 쌀은 농협이 아니라 강화의 다른 곳에 판다. 그런데 이곳은 친환경농사에 대한 운동성은 가졌지만 수매대금이 없다. 수매 대금이 없으니 대금지급도 늦어진다. 여기에 수매한 동네 형들은 해가 지나서 쌀값을 받 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쌀값을 받지 못한 이들은 창고에 쌓인 벼를 담보로 농협에 빚을 내 생활하기도 한다. 정말 거지같은 악순환이다. 볼음도 50만평 논이 전부 바닥을 드러낸 어느 날, 동네에서 벼농사 짓는 분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친환경 벼는 농협에서 수매량을 정해서 받아주기 때문에 나머지는 농부가 알아서 팔아 야 한다. 이래서 친환경 농사 짓겠나? 친환경으로 안 지으면 쌀시장 개방 때문에 나중에 는 쌀 팔기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정부에 얘기해서 민통선지역을 쌀 전량 수매지역으 로 지정해야 한다. 올해 풍년인데, 농협에서 다 사주지를 않으니 풍년이라고 좋은 것도 아 니다.” “강화군 친환경농민회 쪽을 통해서 한살림에 나가는 쌀도, 쌀을 팔아보고 내년 3월에 쌀 값을 준다더라. 이래서야 농협에다가 파는 것만 못하다. 유기농 쌀도 한살림에 나가는 가 격과 다른 생협에 나가는 가격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유기농사 짓는 사람들끼리도 가격 조정이 필요하다.” “지금 무농약으로 농사짓는 논들을 내년에는 다 유기농으로 바꾸면 어떨까? 내년부터는 미래에서 온 편지 57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그 작은 움직임이 모이고 쌓여서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는다.

인증 받을 때, 잔류농약 검사비용을 농민들이 내야한다더라. 이래서 친환경 농사 하겠나. 기술센터에서 하는 잔류농약 검사로는 친환경 인증을 못 받는다더라.” 결국은 시스템의 문제다. 동네 형들이 농협에다 쌀을 수매하지 않는 것이 그들 나름대로 는 최선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에서 농업을 버리니 농민들의 삶과 마음도 점점 팍 팍해져간다. 농사를 직업으로 정했을 때 생각한 1년 수입 목표액이 1000만원이었는데, 2년 동안 농사 를 지으며 1000만원을 까먹었다. 의욕적으로 귀농한 사람들처럼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적게 까먹었다고 생각한다. 농사를 직업(생업)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사업 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겠거니 생각한다. 나 혼자만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봐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몇 년 후에 농민들이 너도나 도 벼농사를 포기해서 여기저기의 논이 싼 임대료로 나올 때, 그 논을 임대해 유기벼농사 를 짓고 직거래로 판다면 나랑 아내가 먹고살기는 충분할 것 같다. 달랑 2400평 농사지은 쌀값을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강화도를 떠나 강릉으로 왔다. 집도 없고 땅도 없고 돈도 없으니 터전을 옮기는 일이 어렵지 않다. 이러다 한평생 떠돌이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 강릉으로 와서는 아는 형의 소개로 산림일용직 일을 했다. 강릉과 정선의 경계인 삽당령 근처 국유림에서 동료 아홉 명과 나무농사를 지었다. 나무를 심고 잘 키워서 좋은 종자를 받는 것이 우리 일이다. 3월 중순부터 12월 하순까지 일을 했고, 내년 3월에 다시 시작한 다. 58


올해 1500만원 정도를 벌었다. 실업급여도 두 달간 받게 되었고, 잊고 지냈던 쌀값도 7월 에 받았다. 아내도 직장을 잡았다. 출근 때문에 나이 서른여덟에 처음으로 자동차를 샀다. 섬에 살 때보다 돈을 조금 더 쓰지만, 둘이 같이 버니까 벼농사를 짓는 동안 생긴 적자를 다 채우고도 돈이 모였다. 남의 돈을 받으면서 농사를 지으니까 참 편했다. 나무는 크게 잘못될 일이 없기도 하지만, 내 것이 아니니까 잘못된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했다. 인건비가 적기 때문에 바쁜 시기를 제외하면 육체적으로도 아주 무리하지는 않았다. 다만, 국가기관에서 계약서도 쓰지 않고 일용직을 쓰고, 하루에 한 번씩 근로계약서를 쓰는 형태라고 거짓말을 한 점에는 화가 난 다. 더구나 고용된 동안에는 직장의료보험이 필수인데, 그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4 대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고용보험만 내면 된다고 하다가 의료보험공단에 추징금을 냈다. 노동법이 바뀌면 이번 겨울에 받는 실업급여를 내년 겨울부터는 못 받게 된다. 동료들에 게 그 얘기를 하니, 몇몇은 격분하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하는 분위기 다. 나라꼴이 닭장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언제 다시 내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다시 농사를 지으면, 그 동안에 벌어둔 돈을 다시 다 까먹게 되지는 않을까? 그때의 악순환을 되풀이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작은 밭을 얻 어서, 우리 먹고 아는 사람들 나눠줄 정도로 짓는 농사라면 올해 했던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겠단 생각이다. 강화도에서 그랬지만 강릉에 와서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도 그들에게 어떤 도 움이 됐겠지만, 항상 세상에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다. 미안한 마음을 가슴 가장 깊은 곳 에 품고 산다. 농부와 일용직처럼 약한 사람들을 더 못살게 하는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 결국은 정치라는 생각도 한다. 이웃들과 잘 놀고 잘 지내고, 남에게 해코지하지 않고 살려는 마음을 가지고, 희생자를 기 억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는 - 작은 후원, 인터넷서명, 일인시위, 농성장 연대 - 아주 작 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그 작은 움직임이 모이고 쌓여서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 는다. 안 바뀌어도 할 수 없고.

미래에서 온 편지 59


기획

모두의 목소리

성노동자 연희 씨의 이야기

사회의 실패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연희 | 성노동자

“옛날에는 일하기도 편하고 돈 벌기도 수월했어. 그런데 지금은 너무 힘들어. 아마 앞으 로는 좋은 시절이 다시 안 올 거야. 그러니 너는 이 일 오래 하지 말고, 빨리 필요한 돈 벌 어서 대학 다니고 남들이 하는 ‘일반일’ 해라.” 2009년 룸살롱에 다니던 시절, 막내였던 나에게 가게 언니들이 매일 같이 하던 말이다. 성 인이 되어 성노동을 갓 시작한 그때의 나는 이 말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슴속 깊이 너무나 절절하게 이해한다. 2015년, 성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며 생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경찰단속이 심해지면서, 자본주의의 영향을 가장 강하고 빠르게 받아들이는 서울 과 그 부근 지역의 성산업 노동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졌다. 경찰단속을 피하려고 주거지역으로 침투한 ‘오피(가게가 아니라 오피스텔 방에서 성매매 를 하는 곳)’는 인터넷사이트를 통해 광고를 한다. 중개업자들은 더 자극적인 광고를 위해 성노동자들의 알몸 사진을 찍고, 손님과 성행위 중인 사진을 찍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추 후에는 그 사진으로 성노동자를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 가게처럼 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는 ‘오피’에서는 중개업자와 성노동자 가 일대일로 마주해야 한다. 때문에 노동자들이 불리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성폭력을 당 하기도 하고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 중개업자는 단속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직접 손님을 만나 위험성을 확인하지 않고 바로 오피스텔 방으로 손님을 들인다. 오피스 텔 방이 고립된 공간임을 잘 아는 성구매자들은 성노동자에게 갖은 폭행을 가하고 금품을 갈취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일했던 집창촌은 재개발로 인해 쇠락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공개되어 있어 그나 60


성노동을 긍정하든 긍정하지 않든 성노동자는 이미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중인 동지다.

마 안전한 공간이었던 데다, 언니들과 함께 업주와 싸워가며 공정한 대우를 쟁취해나가기 도 했던 곳이다. 휴게텔과 안마소 등은 잦은 단속으로 대부분 없어져버렸다. ‘불법’이기에 전근대적인 노동환경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있는 점들이 오히려 성산업의 장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성산업도 다른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자본주의화 되어가는 중이다. 20~30대의 젊은 성노동자들이 모이는 인터넷카페에는 ‘오피’시스템에 대한 한탄과 토로, 중개업자와 성구매자의 폭력에 대한 성토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하지만 우리 성노동자들 은 아직 한국에서 아무런 힘이 없기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구조의 폭력적인 변화를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 간간히 “우리도 힘을 조직해보자”는 글이 올라오지만, “창녀”라는 손가 락질이 너무나 무섭고 “평생을 창녀로 조질 수는 없다”며 다들 꼬리를 내린다. 나는 일하면서 ‘안전한 환경’과 ‘건강’을 가장 신경 쓰는 편이라, 현재 수도권의 환경에서 는 일을 마음 놓고 할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러던 중,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언니의 소개 로 서울에서 지하철로 얼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가장 어린 막내언니가 마흔여덟 살이었다. 가장 큰언니는 육십 대 중후반, 나 머지 세 명의 언니는 오십 대였다. 솔직히 적지 않게 놀랐다. 사람들은 보통 성노동자 하 면 이삼십 대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 역시 수도권에서는 나이가 많은 성노동 자들과 함께 일한 적이 없었기에, 가끔 매체로 접하는 탑골공원의 ‘박카스 아줌마’를 통해 서만 존재를 알 뿐이었다. 막연하게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만 생각해왔던 중년-노년 여성 성노동자의 존재를 이제야 직접 겪게 된 것이다. 너무 큰 나이차에 서로 어색했던 첫 만남을 시작으로, 언니들과 내가 동고동락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곧 일흔을 바라보는 큰 언니는 “내 손자가 고등학생이니 너와 또래다. 완 미래에서 온 편지 61


전 애기네 애기.”라며, 달걀물을 입혀 부친 분홍색소시지나 비엔나소시지 야채 볶음 같은 “애기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해주시기도 한다. 미성년자 때부터 일을 한 언니들도 있고 성인이 되고부터 일을 한 언니들도 있지만, 언니 들은 하나같이 청년일 때도, 중년일 때도, 노년에 들어와서도 빈곤을 경험했다. 한국에서 는 성노동이 쭉 불법이었기에 사회복지나 국민연금의 수급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었다. 젊은 날부터 힘들게 살아왔지만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 숨이 붙어있는 한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언니, 남편이 퇴직을 하고 나서 일을 못 하고 있으니 애들 키우며 살자면 나라도 나서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언니, 손자 대학이라도 보내주고 나면 쉬엄쉬엄 일하고 싶다는 큰 언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의 일원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는 언니 들의 무덤덤한 넋두리는 나의 마음속 한편에 묵직하고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자리 잡았 다. 사회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정작 사회는 성노동자 개인에게만 채찍질을 한다. 열일곱 살에 미혼모가 되 어 아버지와 딸아이를 혼자 부양하느라 타지의 다방에서 일하던 성노동자가 경찰의 위장 단속에 쫓겨 추락사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사회구조가 아닌 성노동자 개인을 탓했다. “어 떤 상황이었어도 몸은 팔지 말아야지” “공장이라도 다녔어야지. 공장에 다녀도 충분히 애 키우면서 살 수 있는데” “씀씀이가 헤프니까 그렇지” “성매매는 불법인데 단속하다 죽는 게 왜 피해냐. 애초에 불법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죽은 성노동자들에게는 잔인한 말들 만이 내리꽂힌다. 여성운동을 하는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북유럽 서유럽 호주 뉴질랜드처럼 사회안전 망과 복지가 잘 갖춰진 국가일수록 자국민 여성 성노동자의 수가 적게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은 고민하지 않는다. 경제적 기반이 사회적으로 마련되면 성노동에 종사하 는 여성의 수가 자연히 줄어들 텐데도, 성매매가 여성을 성 상품화하고 더더욱 남성에 종 속시키는 결과를 낳으니 없애야 한다고만 말한다. 성구매를 못 하는 환경을 만들면 자연 히 없어질 거라는(결국 성노동자들은 굶어죽으라는 얘기로 들리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들 을 신념이랍시고 당당하게 말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왜, 성매매 문제만은 원인을 생각하 지 않고 결과(성매매 근절)에만 집착하는 걸까? 하루 열두 시간 동안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고,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에서 1500원짜리 김 62


밥 한 줄을 두 끼에 나눠 먹다가, 도저히 이렇게 더는 못 살겠다 싶어 성매매를 시작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나의 삶은 나아졌을까? 지금만큼이라도 살아갈 수나 있었을까? 나와 내 주변의 언니들은 이야기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이 일을 한다고. 다시 예전으 로 돌아간다 해도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래야 지금만큼이라도 살 수 있다고. 성노동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이라고. 더 이상은 성노동자에게 이 사회가 실패한 일들의 책임을 지워서는 안 된다. 젠더가 평등 하지 못한 것은 성노동자의 책임이 아니다. 여성혐오는 성노동자 때문이 아니다. 빈곤도, 노동의 급속한 자본주의화도 성노동자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성노동을 긍정하든 긍정하지 않든 성노동자는 이미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중인 동지 다.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집에 와 따뜻한 물에 씻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만끽하고, 다음 날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드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점점 더 열악해지는 노동환경을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성노동자들이 뭉쳐서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들을 쟁취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건강한 환경에서 일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부탁드린다. 이제 선입견과 편견을 조금만 덜어내고, 오롯한 우리만의 목소리를 천천히 들어주시지 않 겠습니까?

미래에서 온 편지 63


인터뷰

진보정치 열전

삶은 끊임없는 추방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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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삼통치킨’의 사장님, 이순애 당원을 만나다 인터뷰·정리 : 나동혁 | 서울 마포 당원 녹취 : 김혜연 | 편집실 부장 사진 : 정정은 | 편집실장

얼마 전 홍대 일대에 꽤나 이름난 통닭집 삼통치킨에 강제 집행이 들어왔다. 7년 전 들어올 때 권리금이 미비했던 삼 통치킨 자리는 이제 권리금 4~5억원에 이르는 명당으로 바 뀌었다. 건물주는 이 권리금이 탐났다. 올해 5월에 바뀐 상 가법에 따르면 건물주가 마음대로 임차상인의 권리금을 빼 앗을 수 없다. 하지만 빈틈이 많다. 소급적용도 안 된다. 삼 통치킨처럼 법 개정 전에 계약이 만료된 곳은 이 법의 보호 를 받을 수도 없다. 이를 잘 아는 건물주는 이미 삼통치킨 을 제외한 나머지 세 군데 임차상인을 내쫓은 터였다. 맘편 히장사하고픈상인들의모임(이하 맘상모)과 노동당을 비롯 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싸운 덕분에 건물주와의 협상을 끌 어낼 수 있었다. 싸우는 와중에 삼통치킨 이순애 사장님은 노동당에 가입했다. 마지막으로 가게를 정리하던 날 술잔 을 기울이며 인터뷰를 약속했다.

미래에서 온 편지 65


어딘가에 자리 잡으려다 쫓겨나고, 이번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 결심했으나 배신당하고. 그나마 성공에 대한 로망이라도 남아 있던 때도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환상마저 모두 박살난 형국 같다.

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그냥 편하게 살아온

이십대에게는 애초에 정착에 대한 기대

이야기를 하시면 된다고 했더니 “그러잖아도

자체가 거의 없다.

자서전이라도 한 권 써야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장사의 길로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다.

이순애 당원은 올해 나이 예순세 살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엄청난 부자는

팔십 가까운 아빠도 경제활동을 중단하고

아니었으나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이순애

제일 하고픈 일이 뭐냐고 내가 물었을 때

당원은 체육교육과에 다녔다. 학교를

“자서전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사람이 자기

졸업하면 교편생활을 할 거라 생각했기에

삶을 기록으로 남겨 정리하고픈 마음이 드는

장사를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 현대사를

그런데 대학교 4학년 때 만난 사람과 결혼을

관통해온 노년층은 특히 누구나 자기 인생이

하면서 평범한 현모양처로 꿈이 바뀌었다.

소설 같았다고 말한다. 대조적으로 이십대와

남편은 스물일곱 살에 부모님 사업을

인터뷰를 하면 자기 인생은 아무 것도

물려받았고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이대로라면 평생 밥은 안 굶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사회는 파란만장했던 삶과 아무 것도

그러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상황이

아닌 삶들이 공존한다. 그 중간은 없다. 왜

급변했다.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도 평범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저는 대화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말도 안 하고 엄청난 빚을 졌죠. 그때 딱

생각해보면 일제로부터 해방, 한국전쟁과

느꼈어요. 남편을 경제적으로 믿으면 안

분단, 군사독재와 민주주의 혁명, 급격한

되겠구나.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경제성장과 IMF 등을 70년 만에 압축적으로

여기 저기 다녀봤습니다. 방 열 칸에

경험한 한국사회에서 누구의 삶인들 소설

수도꼭지 하나 있고 화장실 두 개 있는 그런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 소설 속

데서 살게 됐는데, 어디서든 저는 굉장히

주요장면에는 숱한 내쫓김이 포함되어있다.

적응을 잘했어요. 그런데 가끔 집에 돌아올

어딘가에 자리 잡으려다 쫓겨나고, 이번만

때면 눈물이 주룩주룩 나는 거예요. 하지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 결심했으나 배신당하고.

삶의 의욕이 강했고 자식에 대한 책임감도

그나마 성공에 대한 로망이라도 남아 있던

있었고, 그래서 채소장사를 시작했어요.”

때도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다(그때도 누군가는 계속 쫓겨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66

신림동으로 이사 가서 난곡에서 일 년 정도


채소장사를 했다. 시작은 괜찮았다. 서른 살에

취직했다. 여전히 자존심이 남아서 보험 일을

시작한 장사에 제법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프로처럼 완전히 잘 하지는 못하고, 생활비만

돈을 벌었다 손해를 보기를 반복했다.

버는 정도였다. 삼성전자의 모니터요원까지 투잡을 뛰었다. 남편도 운 좋게 취직을

“옛날 용산 청과물시장에서 과일을 떼다

하면서 형편은 조금 나아졌지만, 남편이

팔았는데, 명절 때 되면 도매상인들이

(이순애 당원의) 직장생활을 원치 않아 다시

외상으로 과일을 대주거든요. 그걸 팔아서

장사를 시작했다.

갚는 거죠. 추석 전전날까지 한 차를 다 팔았는데, 남편은 수요예측을 못 해서 또 왕창

이번에는 식당이었다. 역시 장사가 잘됐다.

사오는 거예요. 근데 막상 추석 당일이 되면

빚도 다 갚고 아파트도 사고 땅도 조금 샀다.

판매량이 줄거든요. 그래서 손해를 보고.

때는 바야흐로 한국경제가 가장 잘나갔다는

김장때는 배추를 왕창 팔죠. 나는 밭떼기를

88년 올림픽 전후. 장사가 너무 잘돼 남편도

하지 말고 배추만 받아서 오자고 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합류했다. 스타일이 달라

남편이 또 밭을 통째로 산 거죠. 그런데

부부싸움도 많았고, 강남에 가게를 열었다

날씨가 추워서 다 얼어버리잖아요. 이런

실패하기도 했지만 큰 흐름에는 문제가

식으로 계속 손해를 봤죠.”

없었다. 장사가 너무 즐거웠다. 그러다 IMF가 왔다.

결국 채소장사를 그만두고 보험회사에 미래에서 온 편지 67


정주할 수 없는 삶

이사. 평균 2년을 못 채우고 이사를 다녔다.

“눈치가 빠르면 그 전에 권리금 받고 나갔어야

특별한 경험도 아니다. 쫓겨나는 상인들에게

했는데, 자식교육도 있으니 자꾸 이사를

공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사회는

다니면 애가 생활리듬이 깨질까봐 옮기지

정주가 불가능한 사회다. 끊임없이 삶을 걸고

못하고 타이밍을 놓친 거죠. 고대 쪽으로

도박을 해야 하고, 불안과 싸우는 일이

옮겨서 이화주막을 열었어요. 어느덧 나이가

일상화된 사회다. 누구든 원치 않아도

오십이 되었을 때입니다. 거기서도 한 3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다.

잘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한참 고대 주변 상권도 커지고. 그때도 권리금

“모든 걸 빼앗기면 내 인생은 뭐가 되나?”

많이 준다고 할 때 나갔어야 했는데, 아들

신림동, 충무로, 강남, 충무로, 안암동을 거쳐

대학 가르친다고 또 시기를 놓쳤어요. 남편은

홍대입구역으로 왔다. 얼마 전까지

무릎을 다쳐서 장사를 도와주기도 어렵게

삼통치킨이 있던 그 자리다. 부침은 있었지만

되고. 결국 권리금 안 받고 그냥 나왔어요.

그럭저럭 잘 버텨낸 세월이 7년. 이제

상권이 커지고 임차상인들이 많이 늘어나니까

삼통치킨은 건물주의 탐욕과 맞서게 된다.

건물주는 장사가 잘되는 줄 알고 임대료를 계속 올려달라는 거예요. 그것도

“삶에 우여곡절이 참 많았어요. 시련도

부담이었습니다. 실제로는 후반으로 갈수록

많았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려울 때마다

장사는 그저 그랬어요. 거품만 커진 거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도움을 얻었어요. 삼통치킨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나이

인터뷰를 하면서 내내 부모님이 생각났다.

들어 다시 가게를 시작한다는 게 불안해서

서울로 이사 오던 때가 7살. 고향은 그저

정말 열심히 했죠. 그러다 남편에게 위암이

추상화처럼 막연한 기하학적 이미지로만

와서 정말 절박했어요. 가게를 그만둘까

남아있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서울에 와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우울증도 심해지고,

철물점을 열었다. 건물주인은 큰돈은 못 벌고

건물주는 정 못하겠으면 다른 사람 구하겠다

그냥 저냥 먹고살 정도는 된다고 말했단다.

그러고. 그런데 남편 투병생활이 길어지고

서울로 이사 오며 진 빚이 있었고, 세 아이를

노후대책도 없는데 가게마저 잃으면 대책이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벅찼다. 처음 몇 년은

있냐는 주위 이야기를 듣고 다시 마음잡았죠.

지옥 같았다고 했다. 가끔 빚쟁이들이 찾아와

간판도 새로 바꾸고 밤잠도 설쳐가면서

어깃장을 놓고 가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독하게 장사했어요. 한 일 년, 장사가 진짜 잘 됐어요. 그러고 나니까 하두호(건물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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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을 때면 이사 다닌 집을

슬슬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얼마나

시간순대로 떠올려 본다. 총 열여섯 번의

기가 막혀요. 그 전에는 존경한다, 장사


강제집행을 당한 후 삼통치킨은비닐을 치고 다시 장사와 투쟁을 이어갔다. (사진 : 노동당 서울시당)

못하게 될 때까지 해라, 편한 생활하시라,

때문에 동네에서 쫓겨난다. ‘조물주 위에

좋은 말만 하더니. 우리는 순진해가지고 그

건물주’라는 조어가 빈말이 아니다.

말을 그대로 믿었죠.” 건물주는 명도소송을 걸었다. 대개 그렇듯이 임차상인은 장사가 안 되면 자신을 탓하며

법원은 건물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1심이

장사를 접는다. 장사가 잘돼도 올라가는

끝나자 강제집행이 시작되었다. 약자를

임대료와 건물주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지켜주지 않는 국가와 법, 그리고 너무도

걱정이다. 권리금을 비롯한 제반권리마저

익숙한 용역깡패와 공권력 투입.

위태위태하다. 정작 동네를 살린 임차상인들이 높은 임대료와 권리금 약탈

“시련이 있어도 그때그때 정말 지혜롭게 미래에서 온 편지 69


극복을 해왔거든요. 근데 하두호는 시련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러다 집행이 들어올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시련이었어요. 처음

거 같다고 김상철 위원장에게 문자를

집행이라는 말이 나오는 시점에는 되게

보냈는데 너무 친절하게 답장이 온 거죠.

두려웠어요.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 저런

여태까지 저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 주위에

나쁜 놈한테 모든 걸 뺏기면 내 인생이 뭐가

모든 상인들 중 누구도 동조해주는 사람이

되나? 지금까지 살아온 게 후회되고 비참할 거

없었어요.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건물주가

같았어요(울먹). 그래서 힘들었고 악착같이

사람들에게 ‘자기는 권리금을 일억 오천을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생겼어요. 항상

주려고 했는데 삼통치킨이 욕심을 부려서

같이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많았잖아요.

그렇다, 돈 욕심으로 계속 떼를 부린다’고

굉장히 힘을 얻었어요. 특히 맘상모와

소문을 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졌다면,

노동당에 너무나 고맙게 생각합니다.

돈을 떠나서 도저히 당당하게 주위 사람들

조심스럽게 김상철 위원장(노동당

보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결국은 안

서울시당)한테 도와달라고 문자를 보냈어요.

해야 될 싸움을 해가지고 스스로 나락으로

그런데 너무 흔쾌히 답장을 주신 거예요.”

떨어졌다고 비웃을 것이고. 그래서 어는 순간에는 막 숨이 막혀 오더라구요.”

싸움이 시작되자 맘상모에 가입했다. 그리고 노동당의 문도 두드렸다.

믿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11월 6일 아침 1차 강제집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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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서울시당에 찾아갔어요. 내가 굉장히

여성, 노인, 장애인 용역까지 등장했다.

이기적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 어려울 때만

비참할 겨를도 없이 70명이 넘는 용역들이

찾아오니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삼통치킨으로 들이닥쳤다. 서교동에서

굉장히 어렵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김상철

건물주에게 시달리던 참숯만난닭갈비에도

위원장은 오히려 노동당을 이용하라는

같은 시간에 강제집행이 들어왔다.

거예요. 그렇게 가입을 했는데, 같이 한 게

건물주끼리 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노동당 서울시당의 임차상인상담소 시즌2 종료를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발언 중인 이순애 당원 (사진 : 노동당 서울 시당)

건물주는 준비를 많이 했다. 사람을 무너뜨릴

장사는 계속되었다. 분노에 찬 맘상모

준비를.

회원들은 한 시간 만에 가게를 복구했다. 편의점에서 쓰는 간이테이블을 들여놓고

아침 7시, 아직은 어두운 시각. 가게 안에는

장사를 이어갔다.

평소 자주 보던 맘상모 회원들이 많이 보였다. 아침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다며 가게에서

“맘상모 국장님하고 만나서 제가 ‘하두호

잠을 청한 노동당 당원들도 제법 보였다. 가게

보통 놈이 아니다, 무서운 놈이다’ 그랬더니

안이 사람들로 꽉 찰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우리 국장님은 우리가 더 무서운 사람이래요.

기적과도 같이, 연대 온 사람들의 수와 기세가

저 분들은 대체 뭐를 믿고 저렇게 자신감이

용역을 압도했다. 참숯도 지켰고 삼통도

넘칠까? 우리 아들 나이밖에 안되는데. 그게

지켰다. 오랜만에 느끼는 시원함.

너무 대견스럽고 의지가 되는 거예요.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니까 당당한 건데, 저희는

11월 17일 2차 강제집행은 예고 없이 불현듯

처음에 그런 생각을 못 해서 불안했던

이루어졌다.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사장님

거예요. 나중에는 강제집행으로 털렸는데도

내외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용역들은

그 상황이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국장님들이

집기를 들어냈다. 튀김옷을 입지 못한 생닭이

털려도 두려워하지 마시라고, 천막을

거리에 흩뿌려졌다. 미안함과 분노와

치고서라도 계속 장사한다고 해서 오히려 더

서글픔이 뒤섞인 새벽이 지나갔다. 그래도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미래에서 온 편지 71


삼통치킨은 승리했지만, 임차상인과 건물주의 싸움 이 여전히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현재 투쟁 중인 개 봉역 카페베네의 집회에 참석한 이순애 당원 (사진 : 나동혁)

가게가 곧 농성장, 농성장이 곧 가게. 장사와 농성이 구분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건물주의 요청으로 협상이 이루어졌다. 1년 7개월간 계속된 싸움이 끝이 났다. “주위에서 누가 어려운 일 있으면 노동당 가입하라고 권유해요. 다른 곳에 집행 들어온다고 하면 내 일 같고 불안해요. 그 초조감과 불안감을 다 이해하니까. 사실 형제들도 이런 거 잘 몰라요. 왜 험한 이런 일을 겪으려고 그러냐 손해보고 말지, 이런 얘기만 하고. 가족이니까 걱정돼서 그러는 건

건물의 소유가 누구인가와 무관하게

알겠는데, 언니도 그렇고 가족들 오면 울기만

삼통치킨과 함께한 7년간 그 공간이 누구의

하고 가요. 그런데 울고 나면 마음이

것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약해져요.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어요. 이순애 당원은 싸우는 동안 행복하다 했다. 남편도 처음에는 (싸움을) 안 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을 믿을 수 있어서. 그리고 가게 앞에

결과적으론 뭐랄까 통쾌한 느낌을 받는 것

떨어진 은행잎을 보고는 “이제야 가을이

같아요. 요즘에 들떠가지고 막걸리를 많이

보인다”며 술이 거나해진 채로 노래를

먹어요.(웃음). 우리가 만족스러운 것은 돈

흥얼거렸다. 양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때문이 아니에요. 어려운 상황을 딛고

감사했다, 고마웠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다.

일어섰다는 거. 지금 집행위기에 있는 우리

정말 수고했고 감사했다고.

회원들에게도 말하고 싶어요. 강제집행 앞두고 두렵겠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이도 있고 남편 건강도 그렇고 새로운

도움을 주러 온 사람들 고맙게 생각하고

시도를 하기는 어렵죠. 아직 쉴 생각은

그래야 오히려 더 잘 된다고. 서로 자신감도

없어요. 노후대책이 완벽한 것도 아니고

생기고 믿음이 생겨요. 저는 믿을 수 있어서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일을 하고 싶어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신경을 쓴다면 어려운 사람들, 소수자들 위해서 활동하는 단체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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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정리하고 떠나기 전 날, 모든 짐을

조금이라고 보탬이 되고 싶어요. 다른 건

정리하고 텅 빈 가게를 지키는 사장님과 한 잔

없어요. 노동당에도 큰 힘은 못되겠지만

했다. 빈 가게에 누군가 들어와 나쁜 짓이라도

저라도 가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곳이

할까봐 걱정이라며 밤을 새는 중이었다. 그

있다면 불러주세요.”


특별기획

20대 총선이 4개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서 온 편지」는 총5회에 걸쳐 ‘총선 특별기획’을 준비해 독 자 여러분께 노동당의 총선 소식을 전할 예정입니다. 노동당의 총선준비 현황을 알리는 글을 시작으로, 노동당 의 후보와 총선정책 등을 차례차례 소개하겠습니다. 노동 당의 당원 여러분, 또는 지지자들께서 총선 기간 동안 노 동당을 알리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6 총선 특별기획 미래에서 온 편지 73


특별기획

① 노동당의 총선 준비

총선을 거치며 더 단단한 노동당이 되자 최승현 | 총선준비위원장, 부대표

20대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미 예비후보등록이 시작되었고, 뉴스에는 총선에 대비하는 보수정치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노동당은 총선을 앞두고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전국순회 총선간담회를 부대표들이 나눠서 진행했습니다. 대면하지 못한 분들도 많기에, 그 동안의 준비과 정과 간담회에서 나눈 이야기를 지면으로나마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총선준비위원회의 구성 노동당의 20대 총선에 대한 논의는 2015년 초의 당대표선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진보결집으 로 총선을 돌파하자는 주장과 노동당의 이름으로 총선을 맞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진 보결집을 주장한 나경채 후보가 대표로 당선됐고, 6월 당대회 때 진보결집에 대한 당원총투표안 을 대의원 발의로 상정했습니다. 당원총투표안은 당대회에서 부결되었고, 이후 진보결집을 주장 한 분들은 탈당 후 진보결집 더하기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2011년의 경험에 비 추어 볼 때 충분히 예상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와 같이 총선에 대한 아무 준비도 하 지 못한 상황을 반복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보결집 논의와는 별개로, 일찍부터 총선준비를 차근차근해나가자는 생각으로 2015년 3월 전국 74


2015 정기당대회에서 총선준비위원회 설치에 관한 안건을 설명 중인 최승현 위원장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위원회에서 ‘총선준비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당내 의견그룹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상황이기에, 총선준비위원은 각각의 의견그룹을 안배하여 선임했습니다. 탈당사태 이후에도 위원 구성을 한 동안 유지해오다가, 새로운 당대표가 선출된 이후 총선출마지역의 시도당위원장을 추가로 선임 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6월 당대회에서 총선준비위원회가 제출한 ‘총선기본방침’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후 총 선준비위원회는 채택된 총선기본방침을 토대로 구체적인 총선계획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는 한편, 총선을 치르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습니다. 전략지역구와 일반지역구의 출마신 청을 받기 시작하고, 총선기금을 모으고, 총선정책토론회를 진행했습니다. 우리는 진보결집을 통 해서가 아닌, ‘노동당’으로서 총선을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노동당’이 제대로 서는 과정 이 곧 총선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구교현 당대표가 선출된 이후에는 ‘총선종합계획’안을 제출하기 위한 준비들을 본격적으로 해나 갔습니다. 총선준비위원회가 준비한 총선종합계획안은 2016년 1월 9일에 있을 4기 6차 전국위원 회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두 차례의 전국순회총선간담회와 네 차례의 정책토론회 6월과 11~12월에는 전국을 돌며 총선에 대한 당원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중 11월과 12월에 진 행한 간담회는 11월 24일 부산시당에서의 간담회를 시작으로, 새로 선출된 부대표들이 나눠서 진 행을 했습니다. 두 차례 순회가 한 번은 진보결집 총투표 전에, 한 번은 진보결집의 소용돌이 이후 미래에서 온 편지 75


에 진행되었기에 ‘총선’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졌던 한계는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당 역 량과 총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금 당조직이 힘을 내는 자리였습니다. 특히 당원간담회에서는 선거 시기에 당원들이 어떤 내용으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필요로 질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주변을 설득할 수 있는 쉽고 강력한 슬로건·공약·메시 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많은 분들이 강조해주셨습니다. 세 차례의 정책토론회도 열었습니다. 6월 당대회를 앞두고 한 번, 8월 핵심정책을 구체화하기 전에 한 번, 12월 12일에 정책위원회 주최로 한 번 진행했습니다(당시의 정책토론회 자료집과 토론내용 은 노동당 홈페이지 http://www.laborparty.kr/bd_member/1632521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후 12월 28일에도 쟁점을 중심으로 한 정책토론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노동당의 총선목표와 대응계획 우리는 이번 총선의 목표를 전략지역구 당선과 비례득표 2%로 잡았습니다. 전략지역구는 한두 곳으로 정하고 당력을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현재는 울산동구가 전략지역구 로서 출마신청을 한 상태이고, 이갑용 울산시당위원장이 후보로 선출되어 예비후보등록도 마쳤 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역의 필요성 재고와 새로운 정치주체 발굴을 위해 일반지역구를 설정하고, 광역 시도별로 한 곳 이상에서 출마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총선기본계획에서 채택했습니다. 현재는 경기도 고양덕양갑의 신지혜 예비후보와 대전유성구 이경자 예비후보가 등록을 마쳤고, 서울· 강 원· 충남· 광주· 대구· 부산· 울산(동구외 3곳)· 경남 등에서 출마를 준비 주입니다. 아마도 지난 19대 총선 때보다는 적은 수의 후보가 출마할 것입니다. 하지만, 출마하는 지역의 시도당과 후보는 총선을 치르는 동안 각각의 의미를 지니는 활동을 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의 총선계획은 2016년 1월 9일 예정된 전국위원회에서 총선종합계획안이 채 택된 이후 공식적으로 추진됩니다. 비례대표선출과 관련한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현재까지 대표 단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4~6명 정도를 선출하되, 2008년이나 2012년과 같은 전략명부제 방식이 아니라 후보를 등록하고 당원들이 선출하는 방식으로 비례순번을 정하자는 것입니다. 후보등록은 1월 말~2월 초에, 후보선출은 2월 말~3월 초에 하게 되리라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비례득표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노동당은 의제전략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총선 전, 총선 기간, 총선 후까지 이어지는 사회운동전략화와 함께 이뤄질 것이기도 한데, 노동의 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노동당의 강점을 특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내용입니다. 근래에 노 동당이 노동개악에 맞선 전국순회를 하고, 노동개악 3대주범에 대한 이슈파이팅을 하고, 민중총궐 기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노동대중투쟁의 현장에서 노동개악에 맞서 가장 열 심히 투쟁하고 처절하게 저항하는 정당으로 노동당이 기억되는 동시에, 노동문제의 대안을 제시 하여 노동자들에게 지지 받는 정당의 모습을 갖춰가야 합니다. 그 외에도 노동당을 제대로 알리고 많은 국민들이 노동당을 지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획들을 계속 해서 고민 중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민주노총의 공동선거대응제안도 고려해야 하고, 후쿠시마 5 76


12월 12일에 열린 정책토론회 (사진 : 노동당)

주년과 세월호 참사 2주년 등의 사건에 대한 대응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총선을 경과하면서 더 단단해질 준비를 하자 총선을 앞둔 감정이 사람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4년 전의 일이 다시 되풀이 된 데에 대한 응어리도 있을 테고, 우리의 역량과 힘에 부침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선거는 당의 역량과 현실을 국민들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심판을 받는 과정입니다. 모두가 알다시 피 우리의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리한 제도, 불리한 지형, 주체역량의 한계에 도 불구하고 우리는 2016년 총선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맞이하려 합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의 곁에서 함께 싸우는 정당은 노동당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총선을 계기로, 노동당은 더 단단하게 성장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총선에서 최대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들을 해야 합니다. 또 그 준비과정과 실행 속에서 노동당이 더 단단해지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 어야 합니다. 총선을 계기로 당원조직을 더 단단히 하고, 당의 정책역량을 더 높이고, 당의 대외적 인 활동을 더 넓혀나가야 합니다. 더 구체적이고 쉽고 강력한 내용이 노동당 2016년 총선종합계획에 반영되고 당원들이 중심이 되는 선거가 될 수 있도록, 총선준비위원회와 중앙당도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2016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함께 총선을 잘 치러내고 더 단단한 노동당을 만듭시다. 미래에서 온 편지 77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대중교통과 젠트리피케이션, “대중교통은 중립적인가?” 김상철 | 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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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되지 못한 사회현상을 일컫는 말 중에는 외래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내·외생적 사회문제가 압축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 한국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 해보면, 단순히 압축적 사회문제의 등장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사회현상에 대해 ‘문제시’하는 사회적 태도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좀 더 거칠게 이야기하면 ‘이데올로기’의 문제 때문이다. 90년대까지는 다양한 사회문제가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대응하는 반폭력’의 문제로 설정되었다. 이에 따라 단순하게 ‘민중으로부터 수탈하는 국가권력’이라는 강탈 적 국가의 상이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많은 경우의 사회문제가 민중의 생존권과 이를 박탈 하려는 국가의 악의가 대립하는 국면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다보니 사회문제가 가진 복합적인 단 면들이 굵은 대립선 하나로 단순화되었다. 물론 이런 접근법은 대항세력을 동원하는 데 탁월한 역 할을 했으나, 정작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최근 많이 회자되는 ‘젠트리피케이션’도 그렇다. 70년대 강남재개발에서 80년대 서울시내 노후주 택 철거, 그리고 90년대 재건축 바람과 2000년대 뉴타운 재개발까지, 전통적으로 ‘주민 물갈이’라 일컬어지는 도시개발의 흐름을 관통하는 특징은 해당 지역에서 거주하던 원주민의 대량이주라는 사회현상이었다. 따라서 주거문제는 곧바로 ‘생존권’문제로 이어졌고, 이와 같은 도시개발의 본질 은 ‘주민물갈이’라는 점이 직관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일반적으로 적절한 보 상과 임대주택의 지원을 통한 보상으로 귀결되어왔고, 이는 역설적으로 ‘대규모 재개발 → 보상’이 라는 공식만 갖춰지면 대규모 도시개발은 ‘괜찮은 것’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자에게 물질적 보상을 전제하는 도시개발의 정상화가 90년대 영구임대아파트 법제화에 이어 현재까지 적용되어온 임대주택 정책의 골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하지 만 이런 대책은 언제나 일반적 문제를 특수한 해결책으로 무마하고자 했다(예컨대 신규 아파트 중 17%를 임대아파트로 공급한다는 모호한 기준은 사실, 기준 설정 당시의 임대아파트 입주자격을 가진 세입자 비율만을 참조해 만든 자의적인 기준이다). 그러다보니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가 모두 개별문제로 분해되었고, 왜 대규모철거 방식의 도시개발이 선호되는지, 이를 유인하는 내재 적인 이해관계는 어떠한지, 그렇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이해관계의 단절이 필요하고 대안개발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려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래에서 온 편지 79


대중교통은 중립적인가? 대중교통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대중교통의 확대는 일반적으로 자가교통과 대응 하여 옹호의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추진하는 대중교통정책은 모두 자가 교통을 억제하는 효과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일반 고속도로 건설사업과는 달리 옹호할 필요가 있 다는 입장이다.

2013년 발표한 ‘서울시 도시철도기본계획 수정계획’에 포함된 노선들(왼쪽)과 2015년 발표한 ‘서울시 젠트리피케 이션 종합대책’에 포함된 1차 핵심 사업지구(오른쪽)들이다. 젠트리피케이션 대책 대상지역들이 그동안 서울시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각종 도시계획을 시행했던 강북권역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하지만 수도권 광역교통의 발달을 위해 국토교통부가 도입한 간선급행버스체계(BRT)가 기존의 도로를 점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규로 BRT도로를 신설함으로써 사업비의 5분의 4를 토지보상비 로 나눠주는 전형적인 토건사업으로 진행된 점이나, 최근 논란이 되는 원주-강릉간 복선철도 건 설 문제를 보면, 대중교통 확장 문제가 단순히 ‘대중교통’이라는 이유로 옹호할 수 있는 성질의 것 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 실질적인 부도위기에 몰린 의정부의 경전철 건설 문제 역시 비슷한 예 다. 서울시가 내놓은 ‘2030교통비전’ 장기계획만 봐도, 10개 노선으로 늘어난 경전철의 건설 목표 가 대중교통의 수송분담률을 높이기보다는 버스를 이용하는 기존 대중교통이용자를 철도이용자 로 옮기는 데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경전철과 겹치는 버스노선을 축소하는 건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애초부터 왜 중복되는 경전철노선 건선을 추진했는지, 과연 버스이용자가 경전철 이용자로 옮겨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는 다뤄지지 못했다. 반면 사업자들은 대중교통 계획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각종 부동산 소식지에 따르면, 지하철9호선 2차 구간 개통 수혜를 받은 삼성역 주변 아파트(전용면적 59제곱미터의 경우)의 값은 2015년 11월 80


현재 6억7500만원으로, 지난 3월 지하철9호선 2단계 개통 이후 8개월 동안 13.45% 뛰었다. 지난 2009년 6월에 착공을 시작한 이후에도 1년 동안(2009년 6월 ~ 2010년 6월) 집값이 5.38% 상승했으 니, 지하철 착공과 개통 이후 20% 가량 집값이 뛴 셈이다. 비슷한 예로,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의 아 파트(전용면적 59제곱미터의 경우)도 지난 2013년 3월 평택~시흥 고속도로 개통 이후 2년 동안 1억 5250만원에서 1억6500만원으로 가격이 8.2% 상승하며, 시흥시 아파트 가격 평균상승률(5.12%)을 웃돌았다. 통상 ‘3승 효과’로 알려진 지대차익효과는, 계획의 수립단계 -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행 되는 착공단계 - 이후 공사가 마무리되는 준공단계, 이렇게 3단계에 거쳐 나타난다. 특히 이런 지 대차액은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무조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어메니티를 유지 하는 곳을 중심으로 동심원 구조로 나타난다. 「부동산114」라는 정보지가 지하철역 주변의 집값 변 동을 실거래가 중심으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지하철역 100미터에서 300미터 사이의 집값이 가장 많이 올랐다. 외려 외지인의 통행량이 많은 지하철역 인근은 집값이 떨어졌다. 대중교통의 확충에 많은 사회적 자원이 집중되지만 그것이 파생하는 경제적 부는 배타적으로 향유 된다. 이는 단순히 주거세입자들의 임대주택 확충이나 주거이전비 지원 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 는 문제다. 이런 해결방법이 가능한 때는, 대규모 도시개발에서 나타나는 주거세입자의 문제가 ‘부 수적’일 때뿐이다. 대중교통시설이 늘어나 지역주민들의 편의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일부 토지주나 사업자가 이익을 편취해가는 상황을 ‘부수적’이라고 한다면, 지하철역이나 버스승강장 주변에 공 유시설을 확충해 공적개발에 따른 이익의 사유화를 제한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자본주의적 과정으로서의 젠트리피케이션 하지만 이런 시각은 금방 한계에 직면한다. 가장 단순한 반론은 “그런 문제가 있음에도 왜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주류적 시각은 단순하다. 그것이 도시의 속성이 기 때문이다. 많은 고전적 경제학자들이 시장을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보듯이, 도시개발에서 나타 나는 일들 또한 수요-공급과정에서 파생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젠트리피케이션 역시 이런 시 장의 법칙에 따른다. 이를테면 기존 노동계급 거주자들을 중간계급으로 교체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보자. 전통적인 고전적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신흥계급이 노후화된 도심을 벗어난 교외 에 주거지를 형성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노후화된 도심지가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통해서 개량되면, 교외에 살던 중간계급이 다시 도심지로 회귀한다. 다시 말해, 더 나은 주거지에 서 살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망의 흐름이 계층 물갈이, 즉 젠트리피케이션을 불러오는 셈이다. 도시가 만들어지면, 도심을 중심에 두고 동심원 구조로 확장된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 순서대로 노후화되면서 계층적인 공간분할이 발생한다. 이런 계층화는 이후 노후화된 도심 내 주거지가 개 량되는 순서대로 다시 변화한다. 고전적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도심에서 교외로, 교외에서 도심 으로 순환하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도시현상’이다. 따라서 이는 설명해야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묘 미래에서 온 편지 81


사해야 하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매릴랜드대학 스마트성장연구소의 캐시 도킨스가 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워싱턴시내 지하철역 조성과 역 주변 거주자의 중위소득을 비교한 자 료를 보면, 지속적으로 인과관계가 확인된다. 도킨스는 지하철역으로부터 0.5마일을 기준으로 지 하철역 주변 주거지와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해서 살펴보았는데, 70년대에 지어진 지하철역부터 2000년대 만들어진 지하철역까지 지속적으로, 지하철역 주변 주거지의 중위소득이 그렇지 않은 지 역보다 높게 나타났다. 중요한 점은, 이런 현상이 지하철역이 만들어짐에 따라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지하철역이 만들어짐에 따라 주변 거주자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졌다는 말인데, 도킨스는 이를 “대중교통이 유발한 젠트리피케이션transit-oriented gentrification”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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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asey Dawkins et. 「Transit-Induced Gentrification : Who Will Stay, and Who Will Go?」 2014. 10.

최근의 젠트리피케이션 연구자료는 기존의 대규모 도시개발의 목적, 즉 지대추구와 이의 차익을 통한 도시의 축적구조를 해명하는 데에도 초점을 맞추지만, 동시에 가치중립적이거나 기술적인 측면으로 이해되었던 대중교통계획이 가진 계급적 효과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젠트리 피케이션의 이론적 동향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고전적 경제학의 입장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소비의 측면’에서 공급에 따른 자연스러운 적응과정으로 이해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비판적 입 장은 오히려 ‘생산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과정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후자의 이론적 경향들이 대중 교통이 젠트리피케이션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면서, 도시정부의 계급적 의도에 대한 해명이 주 된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또 도시철도와 같은 궤도교통수단이 가진 계층적인 속성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의견이 제기되는 데, 이를테면 ‘왜 어떤 도시는 도시근교에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가 형성되는 반면, 다른 도시는 도심부에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가 형성되는가?’ 같은 질문이다. 『도시의 승리』라는 책을 쓴 하버 드대학의 에드워드 글래이져는 2006년에 「왜 도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가」라는 논문을 통해서 이를 해명하고자 했다. 런던은 도심부에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적 주거지가 있는 반면 파리는 근교 에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역사적인 변수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답은 집단적 주거지의 존재지만, 그것을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본다면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다. 글래이져가 찾은 답은 지하철의 존재 여부였다. 미래에서 온 편지 83


A. Cities with Subway Systems 10.0 10.4

30% Public Transit Usage

10.8 20% 11.2

Log(Median Income)

10%

11.6

0

1

2

3

4

5

6

7

8

9

10

Log(Median Income)

Public Transit Usage

40%

12.0

Distance from CBD (miles)

B. Cities with Subway Systems 40%

10.0 10.4 10.8

20% 11.2

Public Transit Usage

10%

11.6

0

1

2

3

4

5

6

7

8

9

10

Log(Median Income)

Public Transit Usage

Log(Median Income)

30%

12.0

Distance from CBD (miles)

출처 : Edward L. Glaeser 「WHY DO THE POOR LIVE IN CITIES?」 2006. 11.

위의 그림에서 보듯, 지하철이 있는 도시의 경우에는 핵심적인 상업지구 CBD와 가까운 곳에 소 득이 낮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지하철이 없는 도시의 경우에는 도심지와의 거리와 소득수준이 일관되게 비례했다. 대중교통이 도시의 계층적 구성에 중요한 차이를 제공한 것이다. 이처럼 대 중교통의 문제는 단순히 이동의 권리에 대한 보장뿐만 아니라, 도시 내 계급적 구성에 대한 적극 적인 방향논의와도 이어진다. 도시의 부를 축적하고 분배하는 방식인 젠트리피케이션과도 당연 히 연관될 수밖에 없다. 84


젠트리피케이션과 대중교통 주거지에 대한 도시개발이 뉴타운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최근에는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진 행되고 있다. 또 한국사회에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이름을 알린 직접적인 배경이 된 상업지역의 지대약탈 역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중이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필 요하다는 주장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정책적으로 접근해나갈 때, 일면적 인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대중교통을 매개로 하는 도시교통의 변화가 파생 하는 효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대 중반 미국에서 자가용 이용자들의 총 이동량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2007년에 3 천만마일을 넘어서고 2008년에 정점에 도달한 연간 누적 이동거리가 이후에는 2013년까지 지속적 으로 줄어들었다. ‘자동차가 주도한 미국의 도시화’가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는 진단이 줄을 이었 다. 이른바 밀레니엄 세대가 가진 특징이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 이후 총 이동량은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아직도 직장의 4분의 3이 다운타운이라고 부르 는 지역에서 최소 3마일 이상 벗어난 곳에 있으며, 주거지의 4분의 1만이 소위 도시지역이라 불리 는 곳에 위치한 현실” 때문이었다. 즉, 세대가 가진 가치지향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공간의 물리적 편성에 의해 자가용 이용이 강제되었다는 뜻이다. 대중교통은 이런 불가피한 물리적 환경을 결정짓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서울시를 비롯한 다양 한 도시에서 경전철의 건설이 교통복지라는 이름으로 시도된다. 하지만 그것의 결과를 살펴보면, 주로 자가용을 이용하는 토지·건물 소유자들에게 편파적으로 경제적 부를 안긴다. 기존 교통요 금에 비해 비싼 경전철 요금은 자가용이용자에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소유자들에게 높은 임대 료를 내는 세입자들이 추가적으로 부담하는 비용이 된다. 실제로, 많은 도시의 도시교통기본계획 에서 자가용이용자들을 대중교통이용자로 전환시키는 수요관리정책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럴 경우, 도로를 점유하는 버스 대신 지하를 이용하는 궤도교통망의 확충은 필연적으로 자가용이용 자들의 편익을 증대시킨다. 도로환경이 더욱 나아지기 때문이다. 민자경전철을 이용하는 더 가난 한 사람들은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는 반면, 토지나 건물을 소유한 사람들은 높아진 지대차익을 독 점하는 동시에 쾌적해진 도로환경의 편익도 가져간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도시교통의 문제는 계층적 문제, 더 나아가 도시공간을 생산하는 목적과 이로 인해 편향적으로 재편되는 도시의 부라는 문제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금 단편적으로 다뤄지는 젠트리피케이션 논의가 확장되어야 할 방향이다. 올 한해는, 이제까지 단편적인 교통문제를 다뤄 왔던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인 정책수단으로서 교통문제가 가지는 특징들을 살펴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논의되는 젠트 리피케이션 문제가 “대중교통은 중립적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대중교통은 어떠해야 하는 가”라는 질문으로 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미래에서 온 편지 85


무지개 칼럼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무기로서의 문화예술 현린 | 문화예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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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업주의의 시대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것도 먹고살 만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문화와 예술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다며, ‘창의한국’(노무현)이니 ‘창조경제’(박근혜)니 하며 문화 예술 육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바야흐로 산업주의 시대가 가고 문화산업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문화산업주의’라는 말은, 특정한 문화상품이나 문화예술노동에 대한 수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실 문화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모든 생활양식과 상징양식을 포함하는 만큼, 문화산업주 의는 인간의 일상과 상징 모두를 상품화의 대상으로서 고려한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일상에서 사 용하는 소품이나 일상적 소통 일체를 상품으로서 기획하고 디자인함으로써 인간의 삶 자체를 시 장화하는 것이다. 그 결과,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역시 ‘문화예술적’이기를 요구받는다. 창의성, 예술성, 유희성 등을 강조하는 자기계발담론에서 보듯, 이제 문화예술적 역량 강화는 국가만이 아닌 개인 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가 자본가건 노동자건 간에 문화예술적 역량을 키우는 것은 취향의 문제 이전에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일상에서 예술을 실천하라는, 한때 대단히 급진적이었던 슬로건은 이제 일상까지 상품화 하라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슬로건으로 변질되었다. 물론 이는 자본과 권력이 문화예술이 갖는 해방적 계기를 거세 또는 억제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강국 대한민국? 국가가 육성하는 문화예술이란, 창조적이고 파격적이되 정치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체제를 위협하 지 않을 만큼 착한 것이어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직간접적으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지 금까지 한국정부는 문화예술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한편으로는 ‘한류’를 중심으로 한 문화상품 개 발에, 또 한편으로는 이들 문화상품을 소비할 문화소비자 육성에 몰입해왔다. 되돌아보면 한국에서 문화산업에 ‘국민적 관심’을 쏟기 시작한 첫 번째 계기는 1993년 영화 <쥐라 기 공원>의 흥행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쥐라기 공원> 한 편의 수익이 자동차 150만대를 생산해 벌어들이는 수익과 맞먹는다며 문화산업 육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두 번째 계기는 2002 년 1월부터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으킨 한류열풍이다. 당시에는 드라마 한 편을 수출해 서 직접 벌어들인 돈과 그로 인해 발생한 부수적 경제적 효과가 얼마인지를 귀에 굳은살이 앉을 정도로 들어야 했다. 미래에서 온 편지 87


영화 <괴물>의 포스터

때마침 <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4), <괴물>(2005) 등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연이어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10년 전 <쥐라기 공원>을 보면서 느꼈던 부러움은 <괴물> 을 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자긍심으로 바뀌었다. 그 자긍심이 얼마나 컸던지,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산업 독점과 노동착취 문제를 덮어두기에 충분했다.

문화예술교육에서 배제당하는 청장년층 <쥬라기공원>이나 <괴물>과 같은 수익성 높은 문화상품이 어디에 또 없을까 찾는 금융자본가에게 도, 미래의 자본가나 예술가를 꿈꾸는 현실의 노동자에게도, 또 개인 차원에서도 문화예술은 이 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경영가 또는 자본가들을 위한 문화예술 교양강좌가, 또 한편으로는 공교육제 도권 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부쩍 늘어났다. 특히 공교육제도 내의 문화예술교육은 미래의 문화산업노동자가 갖춰야 할 역량을 배양하는 동시에 미래 문화상품 시장의 소비자로서의 취향도 배양한다는 점에서, 자본가의 요구와 미래 노동자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다. 88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교육 국내 사례를 소개한 인포그래픽 (출처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인포그래 픽 홈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정작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경제활동 참여 인구의 문화예술적 역량을 강화하 는 프로그램은 어느 정부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들의 문화예술적 역량 강화 는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져있고,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가 그 역량의 전시장이자 교실의 기 능을 한다. 박근혜 정부도 10대 이하를 대상으로는 교육제도권 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확대와 문화소외 계층 대상 문화바우처 지급 등의 지원을 하고, 60대 이상을 대상으로는 ‘1인 2기 문화캠페인(문화 예술 1, 스포츠 1 취미 갖기)’을 벌이지만, 정작 나머지 청장년층을 대상으로는 실질적인 문화예술 정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문화가 있는 날’이나 지역문화센터 확충, 동호회 활동 지원 등을 하 지만, 이는 청장년층에게 특화된 지원책이 아닌 다른 세대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적 지원책이다.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포함된 청장년층은 경제활동 참여 인 구인지라 문화예술을 향유할 만한 시간이 없다. 더구나 10대와 60대 이상 인구에 대한 정부의 문 화예술 지원책은 문화예술을 소비하는 차원의 소극적인 향유가 아니라 문화예술 창작에 직접 참 여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인 향유를 지원한다. 이런 면에서 노동시간을 단축하지 않고서는 청장 년층이 실제로 문화예술을 향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정부는 노동시간을 단 축할 의사가 없다. 미래에서 온 편지 89


문화창조융합벨트 주요 거점

둘째는 청장년층이 수동적인 문화예술 소비자에서 능동적인 문화예술 창작자로 성장할 경우, 자본 과 권력의 의도와는 달리 문화예술이 갖는 해방적 계기가 발전할 수 있다. 청장년층이 여가시간을 확보하고 그 시간에 예술가로 성장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문화예술 창작을 통해 억압되고 소외 된 노동이 아닌 해방된 노동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해방된 사회를 상상하고 요구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국가는 청장년층이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해주기를 원치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이들이 문화예술의 해방적 계기를 체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문화권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 2006년 공포된 ‘문화헌장’과 2014년 시행된 ‘문화기본법’에 따르면, 문화예술에 창작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문화권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이다. 게다가 문화산업주의 시대는 모든 인 간에게 문화예술적 역량을 요구한다. 90


고양 ‘K-컬처밸리’ 조성에 관해 보도한 KBS뉴스9 영상 갈무리

하지만 과거 문화예술정책은 시민들의 문화권을 실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술적 역량을 키우는 것도 방치해왔다. 보수정부와 보수정당만이 아니라 심지어 진보정당에서도 문화예술을 정치적· 경제적 의제에 비해 부수적으로 다루면서, 문화예술이 갖는 정치적·경제적 해방적 계기를 간과 해왔다. 노동시간단축과 임금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노동시간단축과 임금인상이 왜 필요한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지각하기 위 해서는 먼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삶을 경험해야 한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다운 삶, 그 자체는 모든 시민이 문화예술 창작의 주체로서 직접 참여할 때에 가능하다. 여태까지는 정치적·경제적 민주화 이후에나 문화권 실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왔 다면, 문화권 실현을 통해서 정치적·경제적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문화예 술의 해방적 계기를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무기로 전환할 문화예술정책 설계를 시작해야 한다.

미래에서 온 편지 91


먼 좌파 이웃 좌파

이번 총선에서의 지지에 감사하는 내용을 담은 포데모스의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포데모스가 해낸 것 안효상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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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의 스페인 정치 지형을 감안할 때, 창당한 지 2년도 안 된 신생정당 포데모스가 이번 총선 에서 이룬 성과는 대단하다. 20.7%의 지지로 69석을 얻은 포데모스는 123석의 국민당(PP, 득표율 28.7%) 90석의 사회주의노동자당(PSOE, 득표율22%)에 이은 제3당이 되었다. 한때 여론조사에서 포데모스보다 더 높은 지지를 얻기도 했던 중도우파의 신생정당 시민당(Ciudadanos)은 13.9% 지 지로 40석을 얻어 제4당이 되었다. 반면에 좌파연합(IU)은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포데모스는 스페인 정치뿐만 아니라 유럽좌파 정치운동에서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고 할 만하 다. 당장 스페인의 경우만 해도, 1978년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에 지속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의) 양당체제가 깨졌다. 스페인은 그리스와 달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이 PASOK화(새로운 좌파정당 의 등장으로 인한 급속한 몰락)를 겪지 않았고, 우파 쪽에서도 시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이 등장함 으로써 4당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이제 스페인 정치 자체는 당분간 유동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후 포데모스가 어떤 궤적을 그릴지, 스페인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바뀔지를 예측 하는 건 사실 성급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은 ‘포데모스’와 ‘포데모스 현상’이 문턱을 넘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운동에서 새로운 정당으로 이제는 누구나 알고있듯이. 포데모스는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 혹은 5월 15일 운동(15M) 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2008년 세계경제위기, 2010년 유럽의 재정위기와 부채위기, 이어 지는 긴축정책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한 반응이었다. 재정위기와 부채위기는 특히 남유럽 나라들을 강타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구제금융을 받는 과정에서 긴축과 사영화 등이 강제되었 다. 그 결과는 20%가 넘는 실업률(스페인의 청년실업률은 50퍼센트에 육박했다), 사회복지의 축소 등이었다. 여기에 더해 기성 정치인의 부패가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문제는 기성 정치질서의 일부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긴축정책을 도입한 장본인이며, 부패문제에 서도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모습은 스페인의 사회주의노동자당에만 해당하 는 것은 아니다. 길게 보면 산업노동자 계급의 쇠퇴,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응한 신자유주의의 발 흥, 환경 등 다양한 쟁점의 등장 속에서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의 시대가 저물었고, 이른바 ‘신수정 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런 변화 속에서 1990년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사회민주당 혹은 노동당이 집 권을 했지만, 이들이 보인 모습은 정책이나 태도 모두에서 중도우파 정당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 서 사회민주당 왼쪽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될 가능성이 생겨났고, 독일의 좌파당(Die Linke) 이 대표적인 예다.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요청, 단기적으로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 분노한 대중 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포데모스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략적인 좌파 포퓰리즘 담론의 구성에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좌우구도가 아니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까지를 포함한 미래에서 온 편지 93


연설 중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기성 정치인과 금융자본 등을 ‘카스타’라 부르고, 여기에 나머지 인민(people), 즉 우리를 대립시 키는 것이었다. 월스트리트점거운동 때 등장한 ‘1퍼센트 대 99퍼센트’의 스페인 버전이라 하겠다. 이때 ‘우리’를 대표하는 것은 지도자의 이름이며, 포데모스의 경우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이다. 1978년 생의 젊은 정치학자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포데모스 창당 이전부터 독자적인 TV 시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이후 제도권 TV 프로그램에까지 나오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누렸다. 이를 바탕으로 포데모스 창당 이후 대표를 맡았고, 작년 유럽의회 선거를 통해 유럽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이제는 포데모스 대표로서 총리후보가 되었다. 포데모스의 등장과 궤적은 현대의 사회운동이 정당으로 전화되는 포퓰리즘적 방식을 잘 보여준 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모인 ‘분노한 사람들’은 긴축과 기성 정치에 반대한다는 공통점 이외에 는 다른 공통점이나 정체성이 없는 무정형의 대중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카 스타와 인민, 즉 저들과 우리라는 담론이며, 그 고정점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파블로 이글레시아 스라는 인물이다. 이렇게 사회운동을 정치세력으로 전화한 포데모스는 2015년에 들어설 무렵 인기의 절정을 누렸다. 94


지지율이 25~27&에 달해, “만약 지금 선거가 벌어지면 포데모스가 집권할 것이다”라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릴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그리스에서 시리자가 집권하면서 바야흐로 남유럽에서부터 새 로운 흐름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환상이 퍼지기까지 했다. 새로운 정당에서 기성 정당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이른바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포데모스가 집권은커녕 사회주의노동자당에도 밀릴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해졌다. 한 가지 이유는,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은 그리스 사회당 (PASOK)과 달랐기 때문이다. 1879년에 창당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현재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조직노동자의 지지를 여전히 받고 있으며 지역적 뿌리도 강한 편이다. 또 다른 이유로 들 만한 것 은 중도우파의 신생정당인 시민당의 선전이었다. 원래 시민당은 2006년 카탈루냐의 지역당으로 출발했지만, 포데모스와 마찬가지로 기성 정치에 반대하는 깨끗한 정치를 내세우면서 지지를 얻 었다. 이 당은 진보적인 사회정책과 친시장적인 경제정책을 교묘하게 혼합해서 국민당과 사회주 의노동자당 양쪽에서 지지자를 빼갔다. 시민당의 부상은 ‘포데모스의 딜레마’를 반영하는 사태이기도 하다. 포데모스는 분노한 사람들의 사회운동을 정당정치로 전화하는 포퓰리즘적 계기 속에 등장했다. 따라서 포데모스의 광범위한 지 지층은 이념이나 사회계층 면에서 매우 이질적인 세력의 집합이며, 시간이 흐르면 이를 계속 유지 하기가 어렵다. 포데모스가 그리는 구체적인 변화의 모습이 나오면서, 중도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아마도 지지를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변화는 국민당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이 포데모스를 끊임없이 (극)좌파라고 몰아붙인 선동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한 덕이기도 하다. 2015년의 정치 일정 및 그 결과와도 관련이 있다. 12월 총선 이전인 지난 5월에 지방선거가 먼저 있었는데, 여기서 포데모스는 생각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우선 광역단위 선거에서 그 어느 곳에서도 2위를 하지 못했고, 그 결과 ‘사회주의 정부’ 구성을 위해 사회당을 지지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당이 권력을 유지하거나 하는 곤란한 선택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포데 모스는 사회당 지지가 가능한 곳에서는 사회당을 지지함으로써 어느 정도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이 또한 우파-좌파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것이기에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 를 낳았다. 다시 말해 포데모스가 주장한 카스타는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기성의 정당과 정치인 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한 쪽 편을 듦으로써 그 주장의 신뢰성 자체가 사라지게 된 셈이다. 이런 포데모스의 딜레마는 포퓰리즘의 작동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집권 미래에서 온 편지 95


포데모스 로고

을 위한 ‘포괄 정당(catch-all-party)’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가이다. 포데모스가 지금까지 택한 방식은 가운데로 가는 것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가 2015년 총선을 위한 경제강령인데, 유럽의회 선거강령에서 포함되었던 기본소득이 빠지고 대신 최소소득보장이 들어간 점이 눈에 띈다. 하지 만 앞서 말한 것처럼 중도와 우파 쪽에 시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런 중도화 가 제대로 작동했다고 볼 수 없다. 스페인 유권자들의 정치성향이 중도에 몰려있기보다는 좌우로 나누어져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도리어 좌파적 포괄 정당화가 더 나은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힘을 감안하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포데모스의 지지율은 17%를 넘지 못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민당에게도 뒤 졌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 5월 지방선거에서 성과를 얻은 ‘민중연합’의 구성이라는 문 제제기가 좌파 쪽에서 나오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해체된 포퓰리즘적 계기를 포착하기 위해 아래로 부터의 운동을 반복하자는 문제제기였다. 하지만 포데모스는 이럴 경우 담론과 인물의 집중성, 즉 포퓰리즘적 헤게모니를 작동시키는 고정점이 약화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유동적인 정세 이러한 우려와 함께, 그래도 어떤 기대 속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그 결과는 앞서 말한 것처럼, 포데 모스가 총 350석 가운데 69석을 얻어 제3당의 지위를 얻었다. 총선 전체를 보자면, 투표율은 지난 96


2011년 선거보다 2% 올라간 73.2%였다. 일부 언론이 예측한 80%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높은 참여율인 것은 분명하다. 의석분포를 보면, 집권 국민당이 과반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뿐 만 아니라 비슷한 경향의 시민당과 합쳐도 과반에 못 미친다. 억지로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절묘한 분포의 4당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국왕 펠리페 6세가 성탄절 전야 메시지에서 “대화와 단결”을 촉구하긴 했지만, 이런 말 자체가 불 안정한 현 상황을 반영할 뿐이다. 적극적인 연합이든 소극적인 인정의 방식이든 다수파 정부를 구 성하지 못하면 수개월 내에 선거를 또 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 가지 가능성은 국민당과 사회주의노 동자당의 연합이다. 선거 직후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페드로 산체스가 이런 가능성을 일축하고 포 데모스 및 시민당과의 정부 구성을 시도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여전히 큰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포데모스가 손잡고 카탈루냐 공화주의좌파 등 소수정당을 모아 ‘사회주의’ 연 립정부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걸려있다. 먼저, 카탈루냐 독립문제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카탈루냐 독립에 반대하면서 대신 더욱 자율적인 연방주의를 주장하는 반면, 포데모스는 카탈루냐 독립문제를 카탈루냐 주민투표에 맡기자는 태도를 취한다. 또 다른 하나는, 기성 정당을 대체하고자 한 포데모스가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손을 잡는다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 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총선은 또 다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점거운동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시리자 와 포데모스의 등장, 시리자의 집권 등을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시리자의 ‘굴복’에서 볼 수 있듯이, 지구적 차원에서 힘의 역관계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이는 지 난 20여 년 동안 급진적인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이 약화될 대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리 자의 승리나 포데모스의 약진은 최후의 일격을 위한 기동전이 결코 아니라 하겠다. 도리어 그것은 새로운 지구전을 준비하기 위한 기동이었다고 해야 한다. 포데모스가 보여준 것, 아니 해낸 것은 새로운 싸움의 가능성이다.

미래에서 온 편지 97


노동자 권리찾기 상담소 1

쥐꼬리만큼 낮은 최저임금 박종만 | 노동자 권리찾기 상담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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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불안정 노동의 시대입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알기 힘듭니다. 노무사나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면 그나마 낫지만, 한국의 전체 노동자 중 90%는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서 일합니다. 이에 노동당 이 ‘노동자 권리찾기 상담소(이하 노동상담소)’를 열고, 비용문제와 정보부족 등을 이유로 권리를 빼앗긴 채 일 하는 노동자들의 권리찾기에 나섰습니다. 앞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 지면을 통해 우리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정보를 공유하고, 노동상담소에 들어온 구체적인 상담사례를 통해 권리를 되찾는 방법을 함께 알아 보려 합니다. 우리들의 ‘권리찾기’에 이 연재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담신청 방법 홈페이지 : www.laborparty.kr 상담전화 : 02-6004-2030 이 메 일 : nodongtalk@gmail.com

최저임금제도의 탄생 배경 2016년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6,030원입니다. 최저임금을 설명할 때에는 ‘최저임금이 얼마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뒤에 이어지는 설명들은 대부 분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그래도 상식수준에서 알아두면 좋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은 원래 노동자와 사용자1) 간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임금 결정을 포함한 모든 노동조건이 당사자 간의 ‘자유’에만 맡겨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의 임금이 점점 낮아지고 여성과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가 심각해졌습니다. 낮은 임금은 노동자의 생활은 곤란하게 만들고, 이는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평균수 명 단축, 성장둔화, 불임 등의 문제를 낳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고, 자 본가들은 체제유지를 위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들어줘야 했습니다. 그 결과가 노동법 의 탄생입니다. 그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뼈골까지 빼먹으려는 자본에 계속해서 맞서 싸워왔습니 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최저임금제도가 등장합니다. 최저임금제도는 1894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1928년 국제노동기구 (ILO)가 ‘최저임금 결정기구의 창설에 관한 조약’을 비준하면서 세계경제공황 이후 널리 보급되었 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부터 국회와 관련기관에서 최저임금법제화 논의가 있어왔습니 다. 그러나 국가경쟁력이 약화된다거나 고용증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등의 이유로 미뤄지다가 1986년이 되어서야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었습니다. 1) ‘사용자’는 법률용어로서, 근로기준법 및 각종 노동관계법에서 정하고 있는 노동조건에 관한 사항을 준수해야 할 의무를 진다. 근로기준법상 사용자는 ‘사업주 또는 사업 경영 담당자, 그 밖에 근로자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사 업주를 위하여 행위하는 자’를 말한다. 미래에서 온 편지 99


지난해 6월 노동당은 ‘최저임금 1만원’을 주장하며, 국민들이 바라는 최저임금을 직접 묻는 ‘최저임금 국민투표’ 를 진행했다.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꿔다놓은 보릿자루, 최저임금위원회 최저임금 결정방식은 각 나라마다 다릅니다. 국회에서 정하는 국가도 있고, 정부의 개입 없이 정 하는 국가도 있습니다. 한국은 정부의 공익위원, 사용자위원, 노동자위원 각각 9명씩 총 27명이 최 저임금위원회를 구성하여 다음 연도 최저임금을 결정해왔습니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매년 8월 5일까지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때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심 의·의결한 최저임금안에 따라 결정해야 합니다. 고용노동부 장관으로부터 심의요청을 받은 최저 임금위원회는 요청을 받은 날부터 90일 이내에 최저임금안을 제출해야 합니다. 고용노동부 장관 은 최저임금위원회로부터 최저임금안을 제출받으면 지체 없이 사업·사업장의 종류별 최저임금안 및 적용사업의 범위를 고시하여야 합니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자나 사용자를 대표하는 자가 고시 된 최저임금안에 대하여 이의가 있으면, 고시된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이의 를 제기하여 이를 재심의할 수 있습니다. 100


매년 4월이면, 위원들끼리 인사도 나누고 일정 등을 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 1차 전원회의를 진행 합니다. 본격적인 논의는 6월부터 시작하는데, 보통 주 1회씩 회의를 진행하다가 결정시한이 임박 해오는 6월 마지막 주에는 매일 같이 회의를 하기도 합니다. 6월 초 회의 때는, 노동자측은 ‘밥 한 끼 값’을 얘기하며 1천원 정도의 인상안을, 사용자측은 ‘지금도 많다’며 동결을 주장하면서 각각 최 저임금안을 제출합니다. 6월 중순 쯤에는, 사용자측이 10원 인상안을 내놓으면 노동자측이 900원 정도의 인상안으로 맞섭니다. 이런 과정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가 6월 말 또는 7월 초에 정부측 위원들이 200원~400원 정도의 인상안을 중재안이랍시고 냅니다. 그러면 노동자측이 됐든 사용자 측이 됐든 일부 위원들이 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퇴장하고, 남은 사람들끼리 표결을 통해 최저 임금을 결정합니다. 다시 말해, 노동자측이나 사용자측의 안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탁상 공론만 벌이다가 막바지에 정부측의 중재안으로 최저임금은 결정돼온 것입니다. 물론 2015년 최 저임금위원회에서는 양대노총 등 노동계가 최저임금 1만원을 주장하면서 약간은 다른 양상을 보 였지만, 결국에는 노동자측 위원들이 퇴장하고 정부측의 중재안으로 결정되는 기존의 과정이 똑 같이 반복되었습니다.

연도별 최저임금 연도

시급(1시간)

인상액

2012년

4,580원

260원

2013년

4,860원

280원

2014년

5,210원

350원

2015년

5,580원

370원

2016년

6,030원

450원

최근에는 이런 결정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 년간 논의방식이나 결정방식, 인상금액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최저임금위 원회를 통해서 결정되는 최저임금이 너무 낮아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부터 노동계를 중심으로 최저임금 결정방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으나 아 직 뚜렷한 대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국회에서 결정해서 정치적인 이슈로 다뤄야 한 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최저’임금이 아닌 ‘적정’임금을 결정하는 적정임금위원회로 바꿔야 한 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 현재의 최저임금위원회는 문제가 있다는 데에는 대부분 공 감합니다. 최저임금이 법의 취지에 맞게 국민의 생활안정을 꾀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결정될 수 있도록 결정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101


tvn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수습 감액하려면 근로계약기간이 1년 이상이어야 법적으로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줘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의 최저임금 미만 임금노동자 는 25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전체 노동자의 10%를 훌쩍 넘는 숫자입니다. 안 그래도 최저 임금이 낮아서 문제인데 이보다도 적게 지급하는 것이 합법이 되다니, 대표적인 악법 중에 하나 입니다. 먼저, 아파트 경비원 등 감시·단속적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입니다. 이전에는 이들에게 최저임금의 90%만 줘도 되었습니다. 감시업무를 주 업무로 하며 상태적으로 정신적·육체적 피로 가 적은 업무에 종사하는 자2) 나 일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휴게시간 또는 대기시간이 많은 업무 에 종사하는 자3) 를 ‘감단노동자’라고 합니다. 감단노동자라고 해서 무조건 90%를 주어서는 안 되 고 반드시 고용노동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또 경비원이 주차관리를 병행하는 등 감시업 무 이외의 업무가 상당할 경우에는 감단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물론 2015년부터 이들은 최 저임금 감액적용 대상자에서 제외되어 최저임금의 100% 이상을 지급해야 합니다. 수습노동자도 최저임금의 90%만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일을 시작하고 나서 첫 3개월만 감액할 수 있고, 근로계약기간이 1년 미만인 노동자는 감액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근로계약기간이 1년 이상인 노동자 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노동자에게만 수

2) 계수기감수원, 보일러공, 수위, 경비원, 청원경찰 등. 3) 생산업체의 고압보일러실에 근무하는 자, 건물시설관리를 위해 휴일 및 야간에 대기하는 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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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이라는 이유로 3개월간 최저임금의 90%를 지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원래 ‘수습’은 미숙련노 동자가 숙련노동자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숙련에 필요한 기간 중 최대 3개월까지만 임 시적으로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허용한 것인데, 현실에서는 숙련여부와 상관없이 채용하면 무 조건 3개월을 수습기간으로 두고 임금을 적게 주는 폐해가 반복되다보니, 근로계약기간에 따른 제 한규정을 둔 것입니다. 최근에는 1년 미만으로 일하기로 구두계약을 했음에도 근로계약서에는 계 약기간을 1년으로 적어 수습 감액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법을 악용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대표적인 규정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할 악법입니다. 이 외에도 가사사용인, 동거의 친족만을 사용하는 사업장, 선원법의 적용을 받는 선원 및 선원을 사용하는 선박의 소유자4),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노동능력이 현저히 낮아 업무의 수행에 직접적 으로 현저한 지장을 주는 것이 명백하다고 인정되는 자로서 노동부장관의 인가를 받은 경우5)에는 최저임금법 적용이 안 됩니다.

시간당 최저임금 × ‘209시간’ = 월급 최저임금 앞서 말씀드린 대로 최저임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저임금이 얼마다 하는 것입니다. 2016년 최 저임금은 시간당 6,030원입니다. 이것을 월급으로 계산하려면 주40시간을 기준으로 209시간을 곱 하면 됩니다. 2016년 월급 최저임금은 1,260,270원입니다. 이보다 적게 받기로 했다면 사용자는 3 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며, 최저임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으로 간주합 니다. 왜 209시간을 곱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유급휴일’을 다루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4) 선원법에서는 해양수산부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선원의 임금최저액을 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5) 동종 또는 유사 직종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다른 노동자 중 가장 낮은 능력자의 평균작업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며, 인가기간은 1년을 초과할 수 없다. 미래에서 온 편지 103


Q&A Q. 최저임금이 얼마인가요? A. 2016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6,030원입니다. 하루8시간 기준 일급은 48,240원, 주급은 289,440원, 월급은 1,260,270원입니다. 사업주는 매년마다 최저임금을 노동자들에게 널리 알릴 의무가 있으며,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Q. 최저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A. 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며, 노동자는 최저임금 을 기준으로 한 임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수습노동자 등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지 급해도 되는 사례가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Q. 6개월 일하기로 구두계약 했는데 수습이라며 3개월은 시급 5천원만 준대요. A. 수습이라는 이유로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지급하려면 1)근로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고 2)근로계약기간이 1년 이상이거나 기간의 정함이 없어야 합니다. 또 최대 10%를 감액할 수 있기 때문에 6,030원의 90%인 5,427원 이상을 받아야 합니다.

Q. 시급이 7천원이었는데 최저임금 때문에 2016년부터는 6,030원으로 주겠다고 합니다. A. 최저임금법 제6조는 ‘사용자는 이 법에 따른 최저임금을 이유로 종전의 임금수준을 낮추 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6,030원으로 낮춘다면 이 규정을 위반 하는 것임으로 무효입니다. 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 질 수 있고, 전처럼 7천원의 임금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Q. 최저임금 관련하여 신고하려면 어디에 해야 하나요? A. 최저임금법 위반에 대해서는 사업장을 관할하는 노동청에 신고하면 되며, 진정 혹은 고 소를 통해서 권리를 구제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법원에 바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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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미래에서 온 편지 105


삶과문화

수학으로 세상에 말걸기 1

세상의 눈으로 수학을 읽고, 수학의 눈으로 세상과 대화하기를 시도합니다. 영화, 문학, 드라마 등 다양한 미 디어와 수학을 접목시켜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글입니다. 「수학으로 세상에 말걸기」 1~8편에 실리는 글은 『미디어스』에 같은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일부 수정한 글 입니다. 이 글은 2014년 9월 19일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309에 실 린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월-E>를 통해 본 공리체계

나동혁 | 서울 마포 당원

가슴 뜨거운 로봇 <월-E> <월-E>는 믿고 보는 픽사가 제작한 3D 애니메이션이다. 월-E의 영어명은 WALL-E로, Waste Allocation Load Lifter Earth의 약자다. 간단히 말하면 지구 쓰레기 처리 로봇으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월-E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쓰레기 처리를 반복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양산형 로봇으로, 지구와 인간이 공존했던 시대의 종말을 상징한다. 인류는 넘쳐나는 쓰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거대한 우주선 엑시엄호를 타고 지구를 떠난다. 지구 를 망쳤고, 그래서 버렸거나 혹은 버림받았다. 인간이 지구를 떠난 뒤 700년이 흘렀지만 사방엔 쓰 레기뿐 생명체(유기체)는 보이지 않고, 정비를 받지 못한 월-E들은 시나브로 기능이 정지되고 파 손되어 그 자신이 쓰레기 더미의 일부가 된다. 영화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작한다. 지구상에는 생명체 아닌 유일한 생명체 오직 한 대 남은 월-E만이 살아간다. 이제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가 된 월-E는 이미 죽어버린, 아니 고철이 되어버린 다른 보통명사 월-E들로부터 필요한 106


부품을 얻고 태양열 발전으로 에너지를 얻으면서 지속적으로 작동(work)한다. 심지어 음악을 듣 고, 영화를 보고, 바퀴벌레를 키운다. 쓰레기를 치우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수집한다. 뇌가 없 으나 두뇌활동을 하고, 심장이 없으나 감정을 느낀다. 요컨대 월-E는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생 명(life)체로 살(live)게 되었다.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그러던 어느 날 월-E는 쓰레기 더미 가운데서 자라난 새싹을 발견하고, 거의 동시에 어디선가 이 브라는 로봇이 날아온다. 월-E는 이브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브는 월-E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다. 이브는 엑시엄이 보낸 외계식물 탐사로봇으로, 지구에서 발견한 식물을 엑시엄호로 가져가는 임 무를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 그리고 이 식물을 우주선의 할로디텍터에 넣기만 하면 엑시 엄호는 즉시 지구로 돌아가도록 설정되어있다. 영화 후반부는 인류가 지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다룬다. 월-E의 메시지는 매우 선명하다. 과학기술 발전과 대량소비로 인한 환경파괴와 인간성 괴멸. 로 봇이 휴머니즘을 가장 진득하게 체화했다는 역설적인 설정도 자연스럽다. 끝내 재앙을 극복해내 는 헐리웃의 긍정도 여전하다. 가족영화로 분류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애들도 좋아할 것 같고, 평 론가와 관객 모두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픽사 애니메이션 특유의 창의력과 유머, 그리고 캐릭 터가 지닌 생명력 때문일 게다. 나는 픽사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월-E>가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깨 알 같은 지적 유희 때문이다. 대다수는 3D영화 종사자들을 영화인이라기보다는 최상급 엔지니어 로 보는 것 같지만, 픽사의 이 유쾌한 천재들은 단지 엔지니어가 아니다. 심지어 이 영화에는 수학 적 은유까지 들어있다. 월-E가 거대우주선 엑시엄을 처음 만나는 장면. 클로즈업되면서 드러나는 우주선의 위용이 스크린을 압도하는 순간, 나는 “아~”하고 가볍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극 장이라는 사실을 잊고 우주선의 이름을 작게 소리 내 불렀다. Axiom(엑시엄)! 시작 없이는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 Axiom은 수학용어로 ‘공리’를 뜻한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인 ‘axioma’로, ‘그 자체로 명백한 진리’ 라는 의미를 가진다. 수학에서 ‘공리’는 증명하지 않고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를 의미한다. 무엇이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학문에서 근본적인 논리지형을 만들어내는 출발 점이다. 물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우주는, 또 지구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 인류는 언제 출현하였나? 등등.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거대한 논리구조를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예를 들어, 생물학에서 진화론은 완전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했다. 지동설에 버금가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처음 발표했을 당시에는 다수가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독교 중심의 세계에서 창조론에 대한 부정이 가져올 파장은 충분히 예측가능하 다. 하나의 세계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충분했을 것이다. 진화론만 그런 게 아니다.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수학·과학 이론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 을 보였다. 수학이론도 시대정신의 산물인 이상, 그 기본을 흔드는 이론은 시대정신의 생사와 연 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종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생각은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최 초 생명체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 질문을 수학적으로 바꿔보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수학지식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수학적으로 참이라고 증명된 문장을 ‘정리’ 미래에서 온 편지 107


라고 한다. 하나의 정리는 또 다른 정리를 사용해서 증명한다. A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B가 필요하 다. B가 참이라는 것을 설명하려면 C가 필요하다. C를 위해서는 D가, D를 위해서는 E가…. 이렇 게 거슬러 올라가면 논리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유클리드가 정립한 공리체계 수학은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논리체계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논리의 출발점이 존재한다. 그게 공 리다. 논리의 피라미드 제일 꼭대기에 있는 문장. 어디서부턴가 시작점을 설정하기 위해 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명제. 보통 공리에는 ‘자명(自明)하다’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고대 그리스 수학을 집대성한 유클리드1)는 그의 저서 『원론(elements)』에서 처음으로 다섯 개의 공리와 다섯 개의 공준을 설정하고, 이로부터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수학적 사실을 일목요연하 게 재배치하였다. 공리는 수학 일반에서의 대전제를 의미하고, 공준은 기하학에서의 대전제를 의 미한다. 당시에는 이를 구분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선택했으나, 훗날 모두 공리라는 용어로 불리 게 된다. 유클리드는 우선 기본적인 용어를 정의하면서 서술을 시작한다. 『원론』의 첫 문장은 “점은 쪼갤 수 없는 것이다”이다. 이어서 선과 면을 비롯한 기본용어 스물세 가지에 대한 정의가 이어진다. 그 다 음으로 다섯 개의 공리와 다섯 개의 공준이 등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리

공준

1) 같은 것과 같은 것들은 서로 같다.

1)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점은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

2) 같은 것들에 같은 것을 더하면 그 합은 서로 같다.

2) 직선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3) 같은 것들에서 같은 것을 빼면 그 차는 서로 같다.

3)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임의의 길이를 반지름

4) 서로 포개어지는 것들은 서로 같다.

으로 하는 원을 그릴 수 있다.

5)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5) 한 평면 위의 한 직선이 그 평면 위의 두 직선과 만 날 때 동측내각의 합이 2직각보다 작으면 이 두 직 선은 그쪽에서 만난다(머리 아프니까 쉽게 설명하 면,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일단은 “이런 것까지 다 규정해야 하나?” 내지는 “시시하네. 그래 서 이게 뭐?”와 같은 생각이 들 테다. 같은 것끼리 같다는 게 무슨 말장난인가. 공준으로 넘어와 도 여전히 비슷한 느낌이다.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점은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다. 5)번 공준 정도는 나와야 “이제 본격적인 수학이 시작되는가 보네. 슬슬 외계어처럼 들리는데.”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감을 잡기 위해 문제를 하 나 풀어보자. 1) 그리스식 이름은 에우클레이데스. 『원론』 역시 영어식 번역으로, 원제목은 『스토이케이아』이며 그리스어로 ‘세 상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그리스 시대는 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두고 치열 하게 싸우던 때다. 그리하여 물·불·흙·공기라는 4원소체계가 자리를 잡는데, 이 와중에 책 제목을 ‘원소’라고 지 은 것은 엄청난 자신감의 발로이다. 108


어떤 길이의 선분으로 정삼각형을 만들어라. 『원론』의 첫 번째 문제다. 단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이용해야 한다. 왜 그런지는 언젠가 설명 할 기회가 있을 테니 일단 한 번 시도해보자. 물론 시도하지 않아도 좋다. 해결과정을 그림으로 요 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아무 곳에나 두 점 A, B를 찍고 연결해서 선분을 그린다.

A

2. A를 중심으로, 선분 AB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린다.

B

3. 이번에는 B를 중심으로, 선분 AB의 길이를 반지름 으로 하는 원을 그린다.

A

B

4. 두 원의 교점을 C라 하고, A와 C를 잇고 B와 C를 이어 삼각형을 만든다.

C

A

B

A

B

각 단계를 『원론』의 구성에 맞춰 분석해보자. 1단계에서는 두 점을 지나는 선분을 그렸다. 1)번 공준을 사용했다. 2단계에서는 원을 그렸다. 3) 번 공준을 사용했다. 3단계도 마찬가지. 4단계에서 원의 정의는 스물세 가지 정의 중 15번째에 나 온다. “원이란 그 도형의 내부에 있는 한 정점으로부터 곡선에 이르는 거리가 똑같은 하나의 곡선 에 의해 둘러싸인 평면도형이다.” 따라서 선분 AB와 AC는 길이가 같다. 마찬가지 이유로 선분 AB 와 선분 BC의 길이도 같다. 이제 공리 1)번에 의해, 같은 것끼리는 같으니까 선분 AC와 선분 BC 도 같다. 따라서 삼각형 ABC는 정삼각형이다. 아 깜빡! 삼각형의 정의는 19번째에, 정삼각형의 정의는 20번째에 나온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세 개 의 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이 삼각형이고, 그 중 세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이 정삼각형이다. 아차 미래에서 온 편지 109


차차, 직선의 정의는 4번에, 도형의 정의는 14번에, 원의 중심의 정의는 16번에… 짜증나지 그만 할까? 보편적 언어로 정립된 공리 체계 위 내용을 수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길이를 선분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그릴 수 있다.” 공리, 공준, 정의를 사용해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정리(theorem)라고 한다. 정리를 논리적으로 설 명하는 과정을 증명(proof)이라고 한다. 수학의 지식체계는 피라미드식으로 구성되었기에 새로운 정리를 증명할 때는 공리, 공준, 정의와 이미 알아낸 정리만을 사용해야 한다. 유클리드는 이런 식으로 그때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수학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기념비적 인 성실함이다. 책 내용 중 유클리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정리는 없다. 언제나 한 시대를 풍미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 시대 최고의 수학자는 아르키메데스이지만, 언어체 계를 세운 건 유클리드다. 근대 이전의 모든 기하학을 통틀어 흔히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머리가 좋지 않으면 손발이라도 부지런해야 한다. 그러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공리와 공준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수학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근본을 찾아 거슬 러 올라가다가 더 이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을 때 공리가 등장한다. 그러 니까 공리나 공준은 너무 뻔한 말처럼 들리는 게 당연하다. 수많은 정리들이 아주 간단한 원리 몇 개로 모두 설명이 된다는 데 공리체계의 매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수학에서는 뻔할수록 설명하기 가 쉽지 않다. 유클리드도 5번 공준에 대해서는 증명을 시도했다고 한다. 다른 공리나 공준에 비해 딱 봐도 문장이 복잡하니 맘에 안 들었을 것이다. 공리나 공준은 간명해야 한다. 하지만 끝내 증명 이 되지 않아 공준으로 설정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수학은 부분적으로 발전했다. 어떤 내용들은 그리스보다 앞선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식은 결코 학문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차라리 측량에 가까웠다. 수학은 측량을 위한 보조도구에 불과했다. 높이가 같은 원뿔과 원기둥의 부피비가 왜 1:3이냐고 물으면 이 집트인이나 메소포타미아인은 실제로 원뿔과 원기둥 모양의 그릇을 만들어 부피를 측정했을 것이 다. 원뿔에 물을 가득 담아 원기둥에 부었더니 세 번 만에 꽉 차더라 하는 식으로. 이집트라면 모 래를 채웠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들은 원주율(파이)을 3.1이라고 쓰기도 했고 3.2라고 쓰기도 했 다. 측량결과에 따라 적당한 근삿값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리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논리를 사용했다. 개념을 설정하고 논리적 인과관계 로 모든 명제를 이끌어냈다. 민주주의가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처럼 그들은 수학적 사실을 논 리로 증명했고, 수학을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에게 측량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부피비가 정 확히 2.999배인지 3.001배인지, 심지어 3.0000000000001배인지는 측량으로 알아낼 수 없다. 오직 수학적 방식의 증명만이 필요할 뿐이다. 110


따라서 그리스의 수학은 고도의 논리학이었다. 또한 이성중심의 사고를 끝까지 밀어붙인 철학체 계였다. 점의 정의가 정립되기까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아토모스)론부터 피타고라스, 제논, 플라 톤, 아르키메데스에 이르는 엄청난 철학적 논쟁이 계속되었다. 현실에서는 어떠한 점을 그려도 면 적이 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즉 길이도 면적도 없는 존재로서의 점의 정의는 오직 개념 속에 만 존재한다. 당연히 그리스의 수학은 고도의 형이상학이었다. 『원론』은 단순히 수학적 논리체계의 완성을 넘어 그리스 시대의 정신이 어떻게 종합되었는가를 보 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그리스 시대정신이 르네상스 때 부활해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듯이, 그리 스 수학은 2000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했다. 2000년간 유럽에서 수학교과서로 쓰였으며(물론 중세 시대 단절이 있긴 했지만) 성경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이 읽힌 책이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 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부터 중세후반의 스콜라학파를 거쳐 뉴턴,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거인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원론과 같은 형식으로 쓰인 미국의 독립선언문 적어도 19세기 전까지 공리체계는 매우 공 미국 독립선언문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7.4

고하게 유지되었다. 근대국민국가 자체가 공리체계와 동일한 구조로 구성되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신)가 가장 오래 공 리 역할을 했다가 왕이 그 자리를 잠깐 차지 했고, 뒤이어 이성과 법률이 그 자리를 차지 했다. 선험적 진리(공리)를 전제로 모든 사 회구조와 체계를 배치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리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어 온 과 정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 법전에 기초 한 현대적 법체계가 공리체계와 유사한 구 조를 갖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뉴턴의 『프 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데카르 트의 『방법서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물 론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이르기까지, 근대 를 이룩한 수많은 책과 문서들이 『원론』의 형식을 따라한 것은 자신의 말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는 자부심 혹은 권력의지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다. 한 예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다음 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 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 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 미래에서 온 편지 111


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 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독립선언문은 공리(자명한 진리)에 기초하여 영국정부의 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 마치 수학문제 증명하듯 설명하다가 미국의 독립은 정당하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이성의 궁극적 승리는 근 대국민국가로 완성되는 듯했다. 하나의 세계가 종말을 고한 곳에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지구를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쓰레기 더미로 만들고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우주선에 ‘엑시엄’이란 이 름을 붙인 것은 아주 훌륭한 반어법이다. 인간들은 이성의 힘으로 과학기술을 발달시켰고, 지구를 파괴했으며,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시스템을 선택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생의 모든 과정은 프로 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관리되고 인간의 주체적 의지는 작동할 틈새가 없다. 그 종착점에 진리의 출 발점, 의심할 바 없는 진리라는 의미로 ‘엑시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의 기 계적 합리성이 빚어낸 이 어처구니없는 황폐함에 보내는 야유에 이만큼 적당한 이름이 어디 있을 까? 픽사식 유머와 상상력에 반하는 이유다. 논리의 시작점을 의미하는 공리는 역설적으로 체계가 가장 완결적인 형태를 갖추었을 때 안정적 인 지위를 획득한다. 이천년 동안 쌓아온 수학지식체계는 매우 촘촘하고 강력했다. 하지만 공리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 불완전하다. 19세기 들어 공리체계 자체가 가진 모순들이 드러났고 공리체계 에 대한 회의·보완·재정의 등이 잇따랐다. 공리가 허구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공 리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 만큼 완벽할 수 없고, 논리적인 모순이 드러난 만큼 그 공리에 기초한 체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적당히 리모델링해서 쓰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면 적으로 집을 허물고 다시 짓자는 사람도 있었다. 공리체계가 흔들리는 과정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룰 생각이다. 다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정 도로만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전 공리체계가 또 다른 공리체계로 대체되거나 혹은 지속적인 혼란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그 혼란은 아주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좀 더 오래갈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상 황이 가능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거짓을 몰아내고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기보다 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에 가깝다는 점이다. 새로운 이론은 이전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 고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그렇게 무너진 곳이 또 다른 출발점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우주선 엑시엄호는 한 세계의 종착점인 동시에 또 다른 세계의 출발점이다. 700년 넘게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던 엑시엄호는 지구에 착륙하며 여행을 끝마쳤고, 거기서 다시 역사는 시작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공리로 믿었던 경제발전, 합리성, 효율성, 과학기술, 물 신숭배와 같은 가치를 환경, 평화, 공존, 재생, 지속가능성과 같은 가치로 대체할 수 있을까? 새싹 을 심으며 영화는 끝난다. 잘 돌이켜보면 당신의 삶 자체도 대부분은 몇 개의 공리로 구성되어있다. 건강이 최고다,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 사랑을 위해 산다, 신앙 또는 신념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 이 만들어낸 공리다. 의심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60억 인류에게는 112


60억 개의 사랑이 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답을 할 것이다. 물론 예측 가능한 몇몇 유형의 대답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정답이 있는가? 확신할 수 없음에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산다. 모든 추상명사는 답이 없다. 자신만의 개념어사전 속에는 무 수한 추상명사의 리스트가 있다. 공리는 그런 것이다. 사람을 생각하게 하고 판단하게 하고 그럼 으로써 살게 한다. 때로는 그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 하자보수하며 고쳐 쓰기도 하 고, 때로는 혁명적으로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며, 때로는 미로 같은 암흑 속을 헤 매더라도 말이다.

“ ”

난 생존이 아니라 살고 싶어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지구행을 결심한 선장이 고장 난 시스템에 반기를 들며 한 말은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어 떤 울림을 준다. 우리는 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미래에서 온 편지 113


삶과문화

네 번째, 화요일의 약속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염신규 114


한국 문화예술정책의 두 가지 위기

현린 | 편집위원,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

그는 93학번 국문학도였다. 하지만 문화를 매개로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 던 그는, 문학제가 아닌 영화제를 기획했다. 졸업 후에는 직접 픽션영화 를 찍으려고도 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결국 영화의 꿈은 접었다. 대신에 영화감독 이창동이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던 2003년, 선배 의 계략에 넘어가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 정책팀장으로 일하 기 시작했다. 민예총의 정책 기능이 소멸했다고 판단해서 2009년 민예총 을 그만둔 후에는, 옛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노문연) 활동가들이 중심 이 된 문화예술 사회적 협동조합 ‘자바르떼’에 결합한다. 그곳에서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후에는 시인 출신 국회의원 도종 환의 비서관으로 일하며 문화기본법 제정에 관여한다. 의도한 일은 아니 라고 말하지만, 요컨대 그는 90년대 학번이면서도 80년대 말 문화운동의 끝자락을 경험하였고, 90년대 문화운동의 산물이 어떻게 2000년대 참여 정부 문화예술정책에 반영되었는지를 목격했으며, 불과 얼마 전까지 여 의도에서 문화예술 관련 법안을 만들어왔다. 지나간 문화운동의 한 세대 를 증언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조언을 할 만한 사람으로 그를 빼놓을 수 는 없는 노릇. 그래서 네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 그러나 지금은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이라는 건조한 직책을 맡 은 염신규 문화정책연구가와 잡았다.

미래에서 온 편지 115


미래에서 온 편지(아래 미) :

2000년대 초반에는 문화운동을 했던

최근의 총선에서 각 정당이 내놓은 문화예술정책들을

집단들이 지금보다 왕성하게 활동했고,

비교해 보면 여당이나 야당이나 비슷비슷하다. 심지어

문화연대라든가 민예총의 정책기능이

두 거대 보수정당들의 문화예술정책과 진보정당들의

살아있었다. 초창기 참여정부는 과거 정부와

문화예술정책을 구별하기도 힘들어졌다.

달리 적어도 문화정책에서만큼은 진보적인 의제를 많이 수용하려고 했고 토론회도 자주

염신규(아래 염) :

열었다. 그래서 문화연대나 민예총 등에서

한국 문화정책이라는 게 7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문화정책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상당히

정책영역에 들어왔지만, 90년대 후반까지 크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변화가 없었다. 데칼코마니라고 해야 할까, 박정희

그 결과 2004년 참여정부에서 『예술의 힘 -

정권의 민족문화정책과 이에 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한국의 예술정책』과 『창의한국 - 21

민족문화운동은, 서로 지향점이 달랐지만 근대적

세기 새로운 문화의 비전』을 출간했다.

한국문화가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는

현재까지 나온 문화정책 의제들이 이 두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권 안에 다 들어있다. 그 후 10년 동안

알다시피 박정희 정부는 민족문화중흥이라는

문화운동계나 보수적 행정부나 가릴 것 없이

걸 앞세워 문화영역 전체를 국가관리체계 속에

참여정부 초창기에 세팅됐던 이 의제들 중에

집어넣으려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처럼, 한국적

필요한 것을 써왔다.

문화가 무엇인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었다. 예컨대 1973년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만들었는데, 80년대 중반까지 이 기관의 주요사업이 한국학 연구였다. 곳곳에 위인 동상을 세운 것도 그렇고, 관제화된 민족문화를 퍼트리려 했다. 소위 말하는 진보적 문화운동도 70년대 초반에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김지하 씨의 오적필화 사건과 문인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런 운동이 지금의 민예총을 낳은 민족문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조동일 교수의 판소리, 탈춤 부흥운동 등이 그렇다. 그런 흐름들이 9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다른 정책에 비해 한국의 문화정책 발전이 지체되었다.

116


문화운동주체들의 배제 또는 소멸의 위기

미 : 당시 진보적이었다는 그 정책들 다수가 실현되지 않은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염 : 문화정책 관련 실무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참여정부 당시의 정책수립과정을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정책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정책이라는 게 현장의 변화 속도와 비슷하게 가야 하는데, 문화이론이나 정책이론 공부한 입장에서는 준비를 많이 했다지만, 현장은 그렇지 못했다. 지역의 문화분권, 문화자치가 중요하다면서 2001년에 이미 지역문화의 해를 선포했지만, 막상 지역에서는 문화자치를 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책이 현장으로 전달되려면 행정을 거쳐야 하는데, 행정체계가 다양한 문화담론을 수용할 만한 단계가 아니었다. 정교한 문화담론에 기반을 둔 정책들도 행정을 거치면서 단순한 한두 줄의 사업으로 단순화되고 말았다. ‘문화다양성’ 개념이 대표적인 예이다. 문화다양성은 다양한 문화정책에서 일관적으로 관철되어야 하는 관점의 문제이다. 그런데 막상 정부정책으로 들어가면 이주노동자들이나 이주여성들 대상으로 하는 ‘문화다양성 사업’이라는 하나의 개별사업이 되고 말아서, 다른 문화사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미 : 문화운동계 활동가들이 정부정책안 마련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현장 문화운동은 약화되었다? 같은 시기,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을 했지만 정작 현장 노동운동은 약화되었던 상황과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하다. 염 : 2000년대 중반 민예총 활동하면서 처음 위기감을 느꼈다. 소비문화 외 민간문화운동 영역이 위축되었다. 참여정부 당시 나뿐만 아니라 활동하던 사람 대부분이 그런 걸 느꼈다. 영상문화운동을 예로 들자면, 2000년대 이후로 영상문화를 즐길 수 있는 인프라가 풍부해졌다. 미디어센터도 많아지고, 예술영화전용관도 생기고, 시민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인프라 자체는 좋아졌다. 하지만 상업영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개별적으로 소비한다. 영화를 가지고 타인들과 소통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문화는 약화되었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학에서 풍물패나 노래패 활동을 하면, 그런 곳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관심을 가져주었다. 꽃다지가 공연을 하면 꽤 많은

미래에서 온 편지 117


사람들이 모였다. 최소한 젊은 세대들은 당장 경제적

염 : 나도 국회에 있었기 때문에

이득이 없어도 그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문화기본법 제정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감을 느꼈고, 문화라는 틀 안에서 노동·통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출신인 새누리당

외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해 소통했다. 그런데

김장실 의원실에서 발의한 것으로

IMF 사태 이후 돈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회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정부안이다. 그런데

바뀌었고, 청년세대가 생존에 떠밀리면서 문화주체가

현재의 문화기본법은 문화부의 업무를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나열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문화기본법이 아니라 ‘문화부 업무를 위한

미 : 그나마 참여정부의 문화예술정책 기조도 초기의

기본법’이다. 애초 문화기본법 제정에는

시민의 문화향유권 신장이나 문화민주주의 확대에서

2가지 취지가 있었다. 첫째는, 1972

문화산업주의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년에 제정된 후 40년 이상 수정해 오면서 누더기처럼 이상해진 문화예술진흥법을

염 : 문화민주주의와 같이 문화에서 진보적

손봐서 법적인 체계를 정비하자는 것이었다.

가치를 실현하려고 한 사람들이 힘을 얻었던

둘째는, 문화민주주의 이념에 따라 국민의

시절은 이창동 장관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문화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재직하고 있을 때까지였다. 사실 정권 초기 1~2

상응하는 법적체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년 동안 외부에서 들어간 정책연구자들과 관료들

현재 문화기본법은 2가지 취지 중 문화 관련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관료들은 행정

법체계를 정비한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관련 정보를 거의 독점하고 있어서 이기기가 쉽지

그러나 문화예술에 관한 시민의 권리,

않다. 결국 정태인이나 이창동이 물러나면서 다시

문화예술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관료주의적으로 돌아섰고, 문화산업발전을 위해

구체화시키는 일은 배제했다.

각종 규제를 풀기 시작했다. 이런 면에서 참여정부 시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의· 주장을 행정 안에서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제도적인 측면에서 디테일한 검토를 해야 한다. 쉽지 않다. 그런 전문가그룹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미 : 흥미롭게도 참여정부 시절 준비하던 문화기본법이 박근혜 정부 들어서 마침내 제정되었다. 참여정부 당시 준비하던 문화기본법과 현재의 문화기본법에 차이가 있는가?

118


당에서 기존에 계속 의제로 삼아 왔던 것이 예술인 복지의 문제인데, 기본적으로 계속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지금의 예술인 복지사업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예술노동이라는 기본 관점부터 시작해서 틀 자체를 새롭게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화성시민 대토론회에서 강연하는 염신규 소장

미래에서 온 편지 119


무엇보다도 나는 문화기본법이 이렇게 형식적으로 만들어지는 데 동의하기 힘들었다. 이런 법이 우리 삶에서 왜 중요한지 국민들이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문화기본법이 만들어지기를 바랐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그 결과, 문화예술인이나 일반시민이 문화기본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이걸 만들어서 뭘 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참여정부 당시 문화헌장을 문화헌정제정위원회를 통해서 만들었듯이, 문화기본법도 일개 의원실에서 만들 것이

문화부 관료들의 전문화의 위기

아니라 제정위원회를 만들어서 1년간의 논의과정을 통해 만들어야 했다. 문화기본법이 왜 필요하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소통도 하고, 가치도

미 : 문화기본법 제정과정도 그렇고 각종

공유하고, 홍보도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박근혜

문화예술정책 실행과정도 그렇고, 시민들이

정부는 문화기본법을 그런 규모에서 생각하지 않았고,

참여하는 문화운동적 차원의 토대가 없으면

문화헌장에 제시된 문화를 통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인다.

의지도 없었다.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법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전문가를

여건에서 문화운동이 부활할 수 있다고

포함한 굉장히 폭넓은 분야의 사람들 사이의 토의가

보는가?

필요하다. 물론 많이 싸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적 권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염 : 인적자원의 풀 자체는 과거보다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을

넓어졌고 다양해졌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보수적으로 예술영역으로 축소시켜서 보는 입장도

이뤄지지 않지만 지자체나 지역공동체

있지만, 광역화시켜서 보는 관점도 있다. 엘리트적인

차원에서는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기

관점에서 보는 입장도 있지만, 전혀 반대에서 보는

때문에, 경험이 축적되어있다. 그리고

입장도 있다. 그런 모든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1년 정도

과거 문화운동계 선배들은 완전히 제도권

박 터지게 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밖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문화정책을

그게 거버넌스다.

현실화 시키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참여정부를 통한 행정경험도 있다. 서울 성북구의 예에서 보듯 중앙정부 차원에서 하기 힘들었던 문화정책을 지역사회에서 실험하고 활동하는 등 현장성 있는 정책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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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되고 있다. 지금은 개별적으로 산개해있긴 한데, 여하간 제도 안에서 실험된 것이기 때문에 제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고, 실제로 문화정책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어 경험도 늘었다. 반면 또 다른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다. 참여정부 시절에 문화운동진영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행정체계를 경험했다면, 반대로 문화부 관료들은 이쪽에서 이루어지는 정책 이슈들을 경험했다. 과거 십수 년 전에는 문화부 관료들이 지금처럼 실력이 좋지 않았다. 문화정책이 중요하지도 않았고, 문화부가 인기도 없는 부처였고 해서, 문화부 관료들 중에 정책 전문가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부처 관료들이 과거에 비해 전문화되고 있다. 더구나 국가는 예산과 정보와 인적 인프라를 키울 수 있는 안정적 틀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정부 예술의 힘-새로운 한국의 예 술정책 2004 표지

관료들의 정책적 전문성은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시민문화 인프라는 풍부하지도 않은데다 활동가나 역량을 재생산하는 구조도 갖추고 있지 않다. 문화활동은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문화정책 영역에서는 인력도, 물적 토대도 부족하다. 참여정부 5년 동안 많은 이슈들을 놓고 정부와 협력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활동가들이 많이 지쳤다. 80년대 후반 민예총, 90년대 후반 문화연대 설립 이후, 민간에서 키워왔던 역량을 다 소모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면 정책이라는 게 한두 사람의 전문가에 의해 이뤄지고 기본적인 민주성을 갖기 힘들게 된다. 정책이 뿌려지는 형태로 집행될 수밖에 없고, 현장의 문제들은 묵살될 수 있다. 미 : 그런 점에서 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노동당은 문화예술정책안을 생산할 만한 토대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문화예술정책 생산에 참여했던 이들도 지금은 흩어져 있는 상황이다. 염 : 진보정당의 역사 속에서 NL 계열은 통일 정책에 주력해 왔고, PD 계열은 노동과 복지 정책에 주력해 왔다. 그것 외에 다른 사회정책을 다루기에는 여러 모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제반 정책 생산에서 진보정당이 부르주아 정당에 비해 역량이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운동영역에서도 진보적 가치를 문화 속에 투영시키는 데에 있어서 역량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노동당 시절로 돌아가 봐도, 민주노동당이 개별적인 의제들을 많이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당시 워낙 많은 문화정책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당에서

미래에서 온 편지 121


삶에 일어날 변화를 상상하게 하는 공약이 필요

써먹을 아이템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지, 당 안에

미 :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임금을 인상하는

문화예술정책을 생산할 역량이 충분해서 그랬던 것은

것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그릇이라면,

아니다. 민주노동당 시절 문화예술위원회가 있었지만,

그 그릇을 채우는 것이 문화예술이라고

당시 문화예술위원회를 과거의 문선대 관점으로

생각한다. 중장기적으로 반드시 수행해야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당장 2016

연구가 충분히 이뤄질 수 없었다.

년 총선을 대비해서 문화예술정책을

한 예로, 18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문화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과연 기존의 문화예술정책을

만들려고 정책단위를 급조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넘어서는, 그러면서도 가장 노동당 정책다운

정의당으로 간 이지안 부장이 실무자였는데, 이지안

문화예술정책을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부장이 워낙 문화단체들과 교류를 많이 하던 사람이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맥이 넓었다. 그래서 자신이랑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뚝딱 문화정책을 만들었다. 평소에 논의를

염 : 진보정당으로서 내가 속해 있는 당의

하면서 만들어야 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문화정책이 수구정당이나 자유주의적인

그나마도 그때 민주노동당이 지금 노동당보다 인적

보수정당의 문화정책과 어떻게 달라야

풀이 컸으니까 가능했다.

하는가. 나 역시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가지고

남아있는 소수의 문화정책가들도 과거의 문제의식을

있던 고민이긴 한데, 늘 부족하다. 그런데 나

진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새로운 이야기를

혼자 풀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국가정책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필요한 문화정책이 무엇인가

전체를 포괄할 정도의 정책을 마련하기는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당

힘들 것이라 본다. 오히려 당이 추구하는

차원의 투자를 통해서 정책역량을 지금보다 훨씬

가치에 따라 유권자들 피부에 와 닿는 몇

끌어올리지 않으면, 정책의 주도성을 정부한테 내줄

가지 아이템을 만들어서 당 내외 사람들을

수밖에 없다. 지금 같은 식으로 가서는 정부정책

모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뒤따라 잡기 수준을 넘기 힘들다.

한다고 본다. 그냥 문화향유권을 높이겠다는 건 아무나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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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소리이고,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게 왜 필요하고,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완결성 있는 정책을 몇 가지라도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가지 수는 적어도 조리가 잘 된 정책안을 내 놓을 필요가 있다. 꼭 역량 있는 사람만 모일 필요도 없다. 관련된 사람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상당히 세부적인 실현방안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다. 공약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문화향유권을 실제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정책도 더 구체화된 단어를 통해서, 예를 들면 문화급여 같은 것을 통해서 제시할 수 있다. 장례급여처럼 국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10대 기본급여라는 것이 있다. 문화기본법에 의해 문화권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으니, 문화적 향유권은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국민의 기본권이 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급여를 만들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문화바우처라든가 문화카드 등 기존의 선별적 문화복지정책 대신에 이제는 문화급여라는 이름으로 보편적 문화복지정책을 만들고 필요한 예산을 정교하게 짜야 한다. 돈을 나눠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체험을 통해서 자기 문화적 취향이나 역량을 만들어 가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를 매개할 수 있는 인력들이 있어야 한다. 지역이나 커뮤니티 단위에서 문화복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 재원은 중앙정부에서 책임을 가지고 확보를 하더라도 지역문화 생활권에서 향유할 프로그램 자체는 그 생활권에 있는 문화 매개자들이 자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외에 표현의 자유 경우에도 적극적 관점의 표현의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정책안을 준비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북유럽의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들이 문화제를 하는데 종교단체에서 이에 대한 반대집회를 하면, 이 집회는 법적 처벌 대상이 된다. 국가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현 정권 아래에서 하기 민망한 얘기이긴 하지만, 한국도 국가가 나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에서 기존에 계속 의제로 삼아 왔던 것이 예술인 복지의 문제인데, 기본적으로 계속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지금의 예술인 복지사업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예술노동이라는 기본 관점부터 시작해서 틀 자체를 새롭게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최소한 다른 정당의 정책과는 차별화된 제안은 내 놓을 수 있다고 본다.

미래에서 온 편지 123


삶과문화

불온한 서재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양솔규 | 편집위원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 역사 알기 도서출판 한내 360쪽 | 값 65,000원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 몇 년 전 형네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두꺼운 사진책을 보았다. 기억이 맞다면, 이태리 노동총연 맹(CGIL)에서 이태리 노동운동 관련 사진을 모아 낸 사진집이었다. 자본주의 초창기 공장에서 일 하는 아동노동자로부터 시작해 그 유명한 1969년 ‘뜨거운 가을(autunno caldo)’과 FIAT 금속노동 자들의 파업, 이태리 공산당 당대회에 이르기까지, 글자로 익혔던 이태리 노동운동사의 중요한 국 면들이 불뚝불뚝 생생하게 다가왔다. 빛나는 노동운동사를 만들어 나간, 아니 그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해 대대로 함께 나눠보는 이태리 노동운동의 저력이 부러웠다. 지금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노동운동 역시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 못지 않게 빛나는 투쟁의 역사와 성과를 만들어냈다. 70년대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산업의 지리적 재편 과 분업 조정을 거치면서 가치사슬의 맨 아랫부분을 담당하던 한국, 브라질, 남아공 등 제3세계의 노동자들이 저항의 불꽃을 터뜨렸다. 이러한 노동운동 후발주자들의 빛나는 분발은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흔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124


변증법적 유물론은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도약’을 하나의 법칙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사전적인 법칙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겠으나, 역사 공부와 서술에 있어서는 정말 딱 들어맞는 서 술이 아닐 수 없다. 풍부한 사료와 다양한 관점은 지나간 역사 를 생생하게 되살리고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모르는 게 당연하듯이, 사료와 관점이 없으면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알 수가 없다. 빛 나던 투쟁의 역사는, 정신은, 감동은, 자부심은 드러나지 않으 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노동운동사는 태어나 자마자 죽어버리는 영아사망의 상태나 다름없다. 투쟁은 계속 생겨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5년만 지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관련 자료는 고사하고 날 짜라도 찾고 싶어도 찾을 방법이 없다.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에게 역사가와 역사를 기록하는 아키비스트(archivist)들은 잘 차려진 밥상에 한낱 숟가락 하나 얹는 사람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부심만으로 켜켜 이 쌓여나가는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 금 여기서 그때그때 해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흘 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물의 1996-97노개투 이정용 알기 도서출판 한내

누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록한 모든 이와 투쟁한 노동자가 함께 만들어낸 역사의 기록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자역사 한내’가 그 나마 한국 노동운동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우리 노동운동이 걸 어온 120년 역사를 담은 사진들을 모아 두꺼운 사진집을 낸 것 이다. ‘노동자역사 한내’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의 역사 를 담은 『전노협 백서』를 만들던 故 김종배 동지(모란공원 묘역 에 그의 묘소가 있다.)의 정신을 받아 안아 노동운동 역사자료 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80만 명의 조합원 을 가진 조직노동이 해야 할 역할을 ‘외부세력’이 하는 셈이다. 이 책의 제목은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로 되어있 미래에서 온 편지 125


1987노개투 사사연 알기 도서출판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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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노동자역사’보다는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사진이 주를 이룬다. 한 노동자의 삶은 투쟁만으 1929원산총파업 독립기념관 알기 도서출판 한내

로 점철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투쟁’은 삶 전체에서 보면 짧은 예외적 시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진집이 한국 노동자들의 역사를 오롯이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수많은 노 동자들의 응축된 분노를 표출하는 그릇이고, 그 응축된 분노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을 ‘찰나의 예술’이라 부르는 건 그래서 적절하다. 잘 포착한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감동의 깊이와 압축된 설명은 열 권의 책 못지않다.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0년 4월 ‘사북사태’로 불리던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투쟁 사진이나 1971년 KAL빌딩에서 체불임금 투쟁을 벌이던 파 월 한진 노동자들의 투쟁 사진은 아무리 꼼꼼하게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해 공부하더라도 알기 힘 든 현장감과 당사자들의 심정을 포착해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 중에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경향신문과 같은 오래된 신문사들의 사진도 있고, 원풍모방 박순희 부지부장이나 동일방직 이총각 지부장과 같이 당사자들이 제공한 사진들 도 있다. 또한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같은 기관지 기자들의 사진들도 있다. 사진을 남기고 기록 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눈물과 분노 속에서도 투쟁한 모든 우리 노동자들의 노력이 한 권의 사진 집을 만들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 127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내는 다른 주요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11월에 발간되었다. 아마도 우 리 노동운동의 뿌리, 전태일 열사가 그 달에 산화했기 때문일 테다.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 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 한다. 우리의 역사를 기록하는 책들이 한 권 한 권 쌓일 때마다 우리는 진정으로 영원히 ‘모두 다 사라지지 않게’ 되리라 믿는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의 무게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6만5천원이라는 책값이 비싸다고는 생각 하지 않지만, 그래도 개개인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제안을 한다면, 노동조합도 좋고 사 회단체도 좋으니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이 책 한 권씩 구매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자기 동네 공공 도서관에 회원가입을 하고 희망도서 신청을 해주면 좋겠다. 나 역시 창원의창도서관, 부산금정도 서관, 영등포평생학습관에 책 신청을 했다. 그 정도 노력이야 할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지난 9월27일 민주노총 편집국과 금속노조 편집실에서 일하던 이정원 동지가 병마와 싸 우다 운명하셨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 중 많은 사진이 그가 찍은 사진이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 다.

■ 더 볼만한 책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사회사진연구소 | 동광출판사 | 1989년 12월 : 80년대 말, 90년대 초 현대중공업 파업투쟁 등 노동운동을 기록한 사회사진연구소의 사진집. 한국 사진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작업이었다. 『사진으로 기록한 이 시대 우리 이웃 시리즈』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 | 눈빛 :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에서 나온 민중들의 삶을 기록한 사진집. 현재 5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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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금은 노동자역사전시관 건립기금으로 사용합니다.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노동자역사 한내 엮음 | 360쪽 | 양장 | 값 65,000원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 2012년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투쟁까지 역사의 알기(=주체)들을 사진으로 만나다 자본주의 문명은 노동자를 역사의 알기(=주체)로 치질 않는다. 아예 노동자를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으로 여기고 있다. 뻔뻔스럽게도 자본을 역사의 알기로 조작하고 있다. 이 책은 빛나는 희망으로 일어나 온몸의 말림으로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 노동자가 진짜 역사의 알기라고.

문의: 노동자역사 한내 / 02-2038-2101 / www.hannae.org


삶과문화

소리편지 vol.1

2016년 한국의 비더마이어에게 슈베르트의 위로를

홍철민 | 문화예술위원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 소속의 음악가들이 매달 다양한 주제와 장르의 음악을 골라 독자 여러분께 띄웁니다.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새로움을 선사할 ‘소리편지’에 많은 분들이 귀기울여주시기를 부탁드 립니다. - 2016년 1월, 노동당 문화예술 위원회 음악분과 Arpeggione Sonata in A minor D.821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연주 첼로 Daniel Shafran / 피아노 Lydia Pecherskaya 19세기 초반 개발되어 잠깐 사용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아르페지오네’라는 악 기를 위해 만든 곡이다. 아르페지오네는 첼로 정도의 크기에 모양은 기타와 비슷한 6현의 악기로, 활로 연주하였다. 현재는 주로 첼로로 연주한다. 구소련의 첼리스트 다니엘 샤프란은 이 앨범에서 너 무 무겁고 슬프지 않게 담담한 어조로 노래한다. www.youtube.com/watch?v=nilEuyT-tU0

String Quartet No.14 in D minor, D.810, 「Death and the Maiden (죽음과 소녀)」 연주 Alban Berg Quartet 「죽음과 소녀」는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으로, 죽음에 다다 른 소녀와 그녀의 생명을 거두어가려는 죽음의 사자와의 대화로 이루어졌다. 그 기 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녀의 간절한 소망, “나는 아직 어려요. 그냥 지나가주세요.” 사자의 달콤한 대답, “나는 친구란다.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야. 내 팔 안에서 꿈결 같이 편히 잠들 수 있단다.” 31년의 짧은 생애 동안 총 1200곡을 쓸 정도로 많은 곡을 빠른 시간 내에 쓰던 슈베 르트지만, 이 곡은 2년 동안 다듬고 다듬어 완성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곡이다. 자 기연민과 우울에 빠져있던 그의 내면을 잘 묘사한 곡으로, 곡의 전반적 분위기는 비 극적이지만 멜로디와 리듬이 다양하게 바뀌고 변주된다. www.youtube.com/watch?v=otdayisyIiM

Symphony No.8 in B minor, D.759 「Unfinished (미완성)」 연주 Concertgebouw Orchestra / 지휘 Leonard Bernstein 슈베르트의 8번째 교향곡이다. 「미완성」이란 제목이 붙는 이유는 4악장으로 구성된 다른 교향곡과 다르게 2악장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8번 교향곡을 쓴 이후 9번 교향곡을 썼기 때문에 8번이 2악장으로 끝난 데 각종 추 측과 루머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2개의 악장만으로도 충실하고 완결된 교향곡이라 는 사실이다. www.youtube.com/watch?v=uWnKMzAed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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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9월 1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전후 유럽

반경 안에서 소수의 친지들과 조우하며 일생을 보냈

의 질서재편을 논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프로이

다. 가족과 친구들의 집에 모여 가정음악회를 열어

센, 러시아, 영국 등 유럽의 열강들이 한자리에 모였

가곡과 실내악을 연주했고, 다른 음악가나 시인들과

다. 이듬해 6월까지 지속된 이 회의의 목표는 유럽을

어울리며 작곡을 하였다.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이에 이들은 프랑스혁명 이전의 절대왕정 복위, 프랑스의 정복지

슈베르트는 사회적 상황에 등을 돌리고 오로지 내면

분할 등을 실시했고, 유럽사회의 질서는 프랑스혁명

의 세계만을 이야기한 음악가라 생각하기 쉽다. 그와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후 1848년 혁명까지 유럽을 지

관련된 이미지들 역시 ‘고독’ ‘병약’ ‘낭만’ 등이 아니

배한 이 ‘빈체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던가?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가곡은 실러, 클로프슈토크, 그릴파르

‘군대와 경찰에 의한 자유주의 정치운동 탄압, 민족

처, 하이네 등 당대의 시대고발에 적극적인 문인들

주의 경향 저지, 언론과 출판 등에 대한 검열 및 탄

의 작품을 바탕으로 작곡한 곡들이 많다. 그리고 친

압, 간첩 조작’

구 프란츠 폰 쇼버에게 쓴 편지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슈베르트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 고통스러워

빈체제의 주도자 메테르니히가 재상으로 있던 오스

했다. 말하자면 그는 강요된 ‘비더마이어의 시대’ 속

트리아의 반동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특히 거셌

에서 살다간 음악가였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기에

다. 사회적 발언과 행동이 엄격히 통제되었고, 주요

활동할 수 있는 곳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물들에겐 비밀경찰의 감시가 뒤따랐다. 급진사상 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났고, 정치단체

“특히나 내게는 우리 시대가 나태하고도 하찮은 삶

들은 해산당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회동 자체도

으로 여겨지고,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져서, 나로 하

금지되었다.

여금 다음의 시를 … 민중을 항해 소리치게 한다네. 오 우리 시대의 젊은이여, 너는 죽었구나! 무수한 민

이 시기를 문화사에서는 ‘비더마이어 시대’라고 부른

중의 힘이여, 그것은 허무하게 소진되었구나 … 너

다. ‘검소하고 정직하다’는 뜻의 ‘Bieder’와 오스트리

무도 크나큰 고통, 그 강력한 고통에 나는 쇠약해지

아의 흔한 성씨인 ‘Meier’를 합한 말로, 오스트리아

고, 결국에는 그 힘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로 인해

의 활기 없는 중산층을 빈정거리는 투로 가리키는 말

행동을 포기함으로써 이 시대 또한 먼지가 되어 흩

이다. 검열과 탄압이 일상화된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어지고 …”

모두 침묵하였고, 회합조차 금지된 상황에서 그들에 게 남은 선택지는 가정이었다. 게다가 프랑스혁명과

암울한 시대다. 2016년의 한국사회는 19세기 초반 오

반혁명, 독재,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 속에서 사람들

스트리아의 사회와 너무도 닮아있다. 한국의 ‘비더마

은 이미 정치, 분규, 싸움 등에 진력이 났다. 혁명을

이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께 슈베르트의 음악을

노래하던 예술가들도 자신들이 사는 시대와 거리를

권한다.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두며 내면으로 침잠하였다. 31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 가 살던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였다. 그는 좁은 생활 미래에서 온 편지 131


삶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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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만화


미래에서 온 편지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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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135


편지를 접으며

길 잃은 날의 지혜

12월 21일. 국회 앞에 한국정치의 계급적 전선이 그어졌습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국회 안에서 는 재벌의 요구를 받아 어리바리한 야당의 멱살을 잡고 노동개악을 추진하는 새누리당의 발악이, 찬바람 부는 국회 앞 거리에서는 2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동당의 48시간 정당연설 회가 벌어졌습니다. 노동당과 새누리당 사이에는 경찰의 질서유지선이 놓였습니다. 노동당과 노동 자들로부터 새누리당 재벌권력을 보호하는 공권력의 실체입니다. 국회 바깥에서는 노동자의 삶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오래 일해서 죽고, 일하지 못해 죽고, 언 제 잘릴지 몰라 불안하고, 월급이 너무 낮아 억울한 노동자들의 현실은 안중에도 없이, 이제 새누 리당은 노동자들의 말과 행동, 심지어 정신까지 통제하려 합니다. 미래가 참으로 어둡기만 합니다. 노동개악과 함께 우리가 다시금 마주하게 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재벌’입니다. 천 조에 달 하는 사내유보금을 보유한 재벌들이야말로 노동개악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압 니다. 알지만 변화시킬 마땅한 수단을 찾지 못한 우리사회 근본문제이기도 합니다. 노동당이 ‘노동’을 대표해, 누구보다 재벌문제를 잘 아는 정당이 되어야겠습니다. 재벌과 국민 사이의 불평등한 조세와 권력 문제에 분노한 국민들을 모아가는 일도 필요합니다. 재벌들의 비리 와 탈세, 횡포에 가장 앞장서서 싸우는 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 세월호 희생자들의 추모공간으로 쓰이는 안산 단원고 교실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박노해 시인의 「길 잃은 날의 지혜」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새누리당이 어마어마한 돈과 막강한 힘 으로 세월호의 진실을 가리고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는 지금의 현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힘은 아직 미약합니다. 아직 미약하지만 이곳 국회 앞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고, 비록 의원들을 만날 수는 없지만 시민들을 향한 연설을 끝없이 이어가고 있으며, 언론은 무관심하지만 온라인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알리고 있습니다. 노동개악을 막아내기 위한 오늘의 작은 저항이 재벌을 바꾸는 거대한 운동으로 나아가는 그림 을 그려보며, 기억에 남는 구절을 전합니다.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봐주십시오 …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박노해 시 「길 잃은 날의 지혜」 중 구교현 | 노동당 대표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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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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