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25호 (201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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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제25호

2015. 11

지금+여기 노동당 ■ 노동개악저지 집중투쟁을 시작하며

특집 ■ ‘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기획 ■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값 10,000원

헬조선에 갇힐 것인가? 헬조선을 바꿀 것인가?

www.laborparty.kr

헬조선에 갇힐 것인가? 헬조선을 바꿀 것인가?


표지 이야기

“헬조선을 바꿀 ‘헬조선 탈옥선’ 이 출발합니다” 노동개악저지 집중투쟁을 시작하며 노동당은 전국위원회를 통해 2015년 4분기 핵심사업 의 하나로“노동개악저지”투쟁을 채택하였다. 그 주요 사업 중 하나인 전국 순회 투쟁을 위한‘헬조선 탈옥선’ 이11월3일항해를 시작한다. 탈옥선이 전국 곳곳에서 정박할 곳은 단순히 상징적

미래에서 온 편지 제25호 발행인 구교현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강남규 김건담 김일란 김철 김혜연 박권일 안효상

양솔규 이승원 정정은 현린 교 열 김혜연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5년 11월 2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인 공간이 아니다. 헬조선의 노예들이 생존을 위해 분투

전 화 02) 6004-2006, 2007

하는 현장이다. 노동개악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 민중이

팩 스 02) 6004-2001

있는 현장 곳곳에 탈옥선이 닿을 수 있도록, 당원 여러

이메일 laborzine@gmail.com

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바란다.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 노동개악저지 집중 투쟁 일정이 담긴 글 전문은 6~14쪽 사진 : 정정은 편집실장

<지금+여기 노동당>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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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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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누가 과연 기타정당인가|<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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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모집

지금+여기 노동당 ■ 노동개악저지 집중투쟁을 시작하며 6

헬조선에 갇힐 것인가? 헬조선을 바꿀 것인가!|정진우

특집 ■‘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16 다시, 계급형성전략이 필요하다|이장규 25 박근혜 정부 노동시장 구조개악에 맞선 민주노총의

대응|류주형 32 불안정 노동자들을 더 불안정하게 만드는

노동개악|안혜린

52

진보정치 열전|현대중공업 20대 노조위원장 정병모 당원을 만나다 “좀 더 큰 밑그림을 그리는 정당이 되었으면” |강남규

60

노동르포 임현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울산본부 북구지부장 인터뷰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서분숙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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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제 개선방안|김상철


2015년 11월 제25호

・목차

기획 ■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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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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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바람이 일고 있다, 점점 더 크게|박선미

논평을 논평하다 역사 전쟁 혹은 역사를 위한 전투|안효상

지역에서 현장에서 80

우리가 원하는 마을을 위하여|나동혁

85

오늘도 우리는 학교에 간다|김영도

90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 라는 문제의식을 권함|김상철

97

먼 좌파 이웃 좌파⑲ 시리자의 재집권(?)|안효상

삶과 문화 102

화요일의 약속 변방의 예술가, 임인자 무대에 정치적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현린

113

성정치칼럼 성정치, 내가‘나’ 로 살게 하는 우리 모두의 정치|백시진

118

오덕칼럼 수학이 취미가 될 수 있을까?|나동혁

123

불온한 서재 소설이 불가능한 시대의 소설|백상진

126

만화 파견의 품격?|공기

128

편지를 접으며 비정상의 정상화, 정상의 비정상화|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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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누가과연기타정당인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014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에 따르면, 2014년에 기관지를 발행 한 정당은 우리 노동당이 유일합니다. 새누리당도, 새정치민주연합도, 정의당도 오프라인 기관지를 발행 하지 않았습니다.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 정당들은 기관지를 발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발행할 필요 를 느끼지 못해 발행하지 않는 것이니, 이게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닌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관지를 발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정당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당은 모든 국민을 대변하는 정치결사가 아닙니다. 그럴 거라면 굳이 여러 개의 정당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정당은 자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며,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 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결사체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대변하고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무 엇인지를 당 안팎에 끊임없이 알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기관지 등 당의 입장을 알리는 매체가 제대로 된 정당에서는 필수적입니다. 당장의 확산력은 적을지라도, 기관지를 통해 당이 지향하는 가치나 관점이 어 떠한지를 당 안팎에 알리는 일은 복수정당정치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선관위 자료에서 우리 노동당의 이름 그 자체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원내의 세 정 당을 제외하고는 모두‘기타정당’ 으로 분류되어 있어서입니다. 누가 과연‘기타정당’ 인가요? 자기 당이 지 향하는 가치나 관점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겉으로는 전국민을 대변한다면서 실제로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를 억압하거나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이들이 오히려 기타정당 아닐까요?

교과서 문제로 한창 시끄럽습니다. 일당독재보다는 복수정당체제가 올바르듯이, 교과서 또한 국정보 다는 복수의 검인정 체제가 올바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검인정교과서는 과연 얼마나 ‘다양’ 한지요? 그 많은 검인정교과서 내용 중에 노동법이나 소수자 인권에 대한 내용이 제대로 들어있는 교과서가 단 하나도 없지 않은가요? 검인정이라도 어차피 학교라는 제도교육을 위한 것이기에, 내용에 대 한 가이드라인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합니다. 그리고 유럽 같은 곳은 그 가이드라인 속에 노동법이나 인권 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들어갑니다. 교과서 국정화가 철회되고 현재의 검인정 체제가 유지되면 그것만으 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검인정 체제 하에서도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자유주의’ 라는 환상을 뛰어넘어 전진할 수 있 습니다. 시대가 거꾸로 가는 듯하다고 현재를 지키려고만 해서는 어떤 진보도 불가능합니다. 현재도 이미 ‘헬조선’ 인데 이걸 지키는 정도로, 과연 안녕들 하십니까? 2015년 11월 2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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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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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노동개악저지 집중투쟁을 시작하며

헬조선에 갇힐 것인가? 헬조선을 바꿀 것인가! 정진우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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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헬조선은 어디인가?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지 명단에 참여한 남정욱 씨(교수)가 조선일보에 올린 <헬조선은 불평분자들 마음속에>라는 칼럼이 논란을 잇고 있다. 그는 칼럼에서‘헬조선’ 은 분수(分數)를 상실한 불평분자들의 마 음속에 있을 뿐이라며‘헬조선’ 을 비판하는 젊은이들을 훈계한다. 또, 지금 여기는 노력에 의해 결과가 좌 우되는 곳이라 강변하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노골적으로 옹호한다. ‘헬조선’ 은 어디에 있는가? 맘대로 해고하겠다는 공갈이 개혁안으로 포장되고, 부모 임금 안 줄이면 자식 일자리 없다는 협박이 정책으로 통하는 곳. 늘어나는 노동시간과 저임금에 허덕이는 이들의 삶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곳. 여기는 헬(hell)인가, 헤븐(heaven)인가? 날 때부터 온갖 특권을 탑재하고, 부와 권력을 전 생애에 걸쳐 향유하고 상속하는 이들에게 이 땅은 헬 인가, 헤븐인가? 그렇다.‘조선’ 은 헬이면서 헤븐이다. 누군가에겐 지옥인 이곳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천 국이다. 지옥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부리며 영구히 누리는(!) 자들에게 이 지옥은 천국이다.‘아닌 밤중의 홍두깨’ 조차 분수가 없는 곳, 더 많이 누리려는 자들이 더 강력한 잠금장치를 만들고 있는 곳, 지금 우리가 갇혀 있는 곳. 여기는‘헬조선’ 이다.

2.‘탈옥’ 의 의미

사용자가 제조사에서 제한한 여러 가지 기능을 사용하기 위하여 잠금장치를 해제한 폰. 대표적으로 아 이폰 탈옥이 있다. 탈옥한 폰은 바탕화면을 화려하게 꾸밀 수도 있고, 유료 애플리케이션을 무료로 볼 수 도 있으며 멀티태스킹도 가능하다. (탈옥폰 Jail Breaking Phone,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탈옥한다’ 는 말을 들으면, 세대나 취향에 따라 영화《쇼생크탈출》 에서 드라마《프리즌 브레이크》 까지 다양한 작품을 연상할 것이다. 그런데 포털사이트에서‘탈옥’ 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완성되는 검색어가 죄다 (탈옥)폰에 대한 것이다. 신조어야말로 세상의 변화를 반영하겠지만, 하필 그런 식의 도발이‘탈옥’ 으 로 통용되는 것일까? 스티브 잡스도 생전에 자기 폰을 탈옥해서 사용했다는‘설’ 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 람들이 애프터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협박을 듣고도 번거롭게‘탈옥’ 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징역 맞 고 감옥에 갇혀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터인데, 그곳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위안거리는 언젠가 벗어날 (脫) 날이 온다는 희망이다.《쇼생크 탈출》 의‘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 역)’ 처럼 스스로 잠금장치를 풀고 나가는(出) 것은‘탈출’ 이고,‘기한’ 이 도달해 나가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는‘출소’ 라 한다. 자신의 의지와 계획으로 잠금장치를 해제한다는 의미에서 이 탈옥은 (쇼생크)탈출일 수 있다. 가두고 잠근 자들이 원하지 않는 일이며, 정도의 차이가 심하지만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다. ‘탈옥’ 이 탈출, 출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인가? 실제로는 (당사자들이) 나가지(出) 않는다는 것 지금+여기 노동당 7


이다. 갇혀있는 곳에서 잠금장치를 해제하여 원하는 것(무상, 자유, 동시작업 등)을 얻지만, 원래의 그 공간 (또는 물체)을 버리거나 떠나지는 않는다. 탈옥은‘출(나가다)’ 하지 않고‘탈(벗어나다)’ 하는 방법을 찾는 도

전이다. 헬조선에 갇힐 것인가, 헬조선을 바꿀 것인가?

3. 헬조선 잠금장치

헬조선이 마음속에 있다고 강변하는 자들은 어떻게 이 체제를 통제하고 유지하는가? 박근혜 정부가 새 로 개량해 설치하겠다고 공지한 잠금장치의 이름은‘노동개혁’ 이다. 노사정 합의라는 포장지가 필요한 이 유는 갇힌 자들도 동의한다는 선전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이“헬조선은 마음속에 있다고”믿 게 할 필요가 있으니. ‘노동개혁’ 은 어떤 장치인가? 법률적으로는 근로기준법,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 률,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고용보험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을 개정한다.‘박근혜 노동개 혁’ 의 핵심적 개악 내용으로,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임금피크제’ 와‘저성과자 일반해고’ 는 법률개정이 아 닌 고용노동부의 행정방침 형식으로 시작한다. 현장의 노동조건 후퇴를 지휘하는‘가이드라인’ 은 저들에 게 오래된 보검이다(전가의 보도). 갇힌 이들끼리 경쟁하며 비루하게 버텨내야 하는 노동지옥, 저들이 안내 하는 곳에는 이미 이름이 붙여졌다.‘헬직장’ 은 포기하는 곳이란다. 퇴근포기, 저녁포기, 동료포기, 가족 포기, 인생포기…. 저들이 굳이 장치를 개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동시장이 형성되고 제대로 운영된다는 것은 노동력 이 원활하게 사용되어 구매자들이 안정적으로 이익을 얻는다는 뜻이다. 불안정노동을 확산해온 신자유주 의 시스템은 줄곧 고장신호를 울려왔다. 수출의존, 부채의존형 경제가 봉착한 위기를 노동에 전가하는 전 략은 노동시장을 구조적으로 새롭게 고치는 일로 구체화된다. 박근혜발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핵심은 노 동시장 전반에 걸친 노동조건의 개량이고, 이들이 개량과 재구축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는 노동시장의 구매자(자본)가 부담하는 규제장치를 완화(해제)하는 것이다. ‘가이드라인’ 과 노동법 개악은 저들에게 무엇을 풀어주는 것인가? 일차적으로는 실질적인 사용자책임 의 면제(회피)다. 판례를 무력화하고 위장도급을 합법으로 바꿔 주는 장치(파견법의 파견・도급기준)는 노동 법의 존재 이유를 뒤집는다.‘맘대로 해고’ 가 가능한 장치는‘해고’ 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일반이 된다 는 안내이고, 고용보장은 사용자들에게 책임이 아니라 선택이 된다. 사용자 책임이 줄어든다는 것은 당연 하게도 노동자 권리가 위축되는 상황을 동반한다. 더 심각해지는 문제는 노동조건의 후퇴에 직면한 노동 자들의 상태와 조건이다. 성과를 기준으로 한 임금차별과 해고의 합법화는 노사관계의 저울추를 급격하 게 사측으로 기울게 하는 장치가 된다.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집단적 상대방에 대한 관리비용을 절감하며, 노무관리의 위험까지 현격하게 줄일 수 있다. 그래서‘헬직장’ 은 저들에게 면제의 공간이다. 책임면제, 불 법면제, 수당면제, 노조면제…. 8


지금+여기 노동당 9


노동당‘헬조선 탈옥선’운행시간표 10월 28일 기준 →표시는 이동 / 표시는 집중탈옥문화제입니다.

3(화)

4(수)

5(목)

6(금)

7(토)

8(일)

9(월)

10(화)

11(수)

12(목)

1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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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선전전

오전(이동)

점심선전전

오후(이동)

오후

저녁문화제

18:30~20:10 07:20~08:40 09:30~11:30 11:30~13:00 14:00~16:00 16:30~18:00 (100분) 서울 기자회견

고양 인천 인천 탈옥선전/행진 탈옥선전/행진 탈옥선전/행진 12:30~13:30 15:30~16:00 16:30~17:30 10:00 광화문 화정역 GM부평공장 부평역 인천 → 당진 당진 → 천안 천안 출근선전전 <이동> 탈옥선전/행진 <이동> 탈옥선전/행진 07:00~08:00 구터미널 동암역북광장 09:00~11:30 로터리 도당사무실 터미널 천안 → 세종 세종 → 광주 광주 출근선전전 <이동> 기획투쟁 <이동> 탈옥선전/행진 07:30~09:00 12:00~15:00 16:30~17:30 구터미널 09:00~10:00 10:00 노동부 15:00 기아차 광천터미널 광주 → 목포 목포 → 전주 전주 출근선전전 <이동> 탈옥선전/행진 <이동> 탈옥선전/행진 07:00~08:00 광주송정역 09:30~11:30 전남도청 14:00~16:30 미정 <교양> 청주 대전 → 진주 진주 출근선전전 탈옥선전/행진 탈옥선전/행진 <이동> 탈옥문화제 13:00~14:00 17:00 등산로입구 10:00~11:00 서대전사거리 14:00~17:00 진주시청 검토중 <휴식> → 마산 마산 마산 → 창원 탈옥선전/행진 <이동> 탈옥선전/행진 <이동> 15:00~16:00 12:00~13:00 마산역앞 11:00~12:00 월영광장 16:00~17:00 사거리 창원 → 거제 거제 → 부산 부산 탈옥선전/행진 탈옥선전/행진 출근선전전 <이동> <이동> 12:00~13:00 17:00~18:00 07:00~08:30 매립지 생탁・택시 위아사거리 10:30~12:00 14:00~16:30 오션프라자앞 약식 집회 부산 → 울산 울산 울산 울산 탈옥선전/행진 출근선전전 <이동> 탈옥선전/행진 14:20~15:40 16:00~17:20 07:30~09:00 현대자동차 성남동 연산교차로 10:00~11:00 바보사거리 젊음의거리 울산 → 대구 대구 대구 대구 출근선전전 <이동> 탈옥선전/행진 선전전 탈옥선전/행진 06:20~07:50 12:00~13:30 15:00~16:00 16:00~17:00 현대중공업 09:00~12:00 반월당역 경북대병원 행진 구미 → 원주 원주 → 강릉 강릉 출근선전전 <이동> 탈옥선전/행진 07:00~08:00 탈옥선전/행진 <이동> 구미3공단 중앙동농협 09:00~11:30 신영극장 홈플러스 강릉 → 수원 수원 → 서울 서울 <이동> 탈옥선전/행진 <이동> 탈옥선전/행진 <없음> 12:00~13:00 14:00~16:00 16:00 09:00~12:00 수원역 당사경유 서울도심

인천 탈옥문화제 구월동 뉴코아아울렛 천안 탈옥문화제 터미널 광주 탈옥문화제

숙박 인천 바래미 인뇌협 (침낭필요) 천안 충남도당 사무실 광주 적십자수련원

조선대 정문 전주 탈옥문화제 오거리광장 진주 세월호 문화제참가 19:00 차없는거리 창원

→ 청주

진주 강상곤위원장 펜션 창원

탈옥문화제 17:00 한서병원앞

민주노총강당 (침낭, 깔개 필요)

부산

부산

탈옥문화제 19:30 서면사거리

부산지하철 (침낭 필요)

울산 탈옥문화제 18:00 현대중공업 정문 대구 탈옥문화제 18:00 대구백화점 강릉 탈옥문화제 옥천오거리 홈플러스앞 서울 탈옥문화제 서울도심

울산 울산시당 (침낭 필요) 대구 칠곡송정 자연휴양림 강릉 게스트하우스 경포대


4. 헬조선, 노동당이 바꾼다

헬조선에 갇힌 자들은 어떻게 잠금장치를 풀어낼 수 있는가?“신자유주의 노동체제(불안정, 저임금, 장 시간 노동체제)를 종식시키고 모두가 더 적은 시간 노동하면서 충분한 소득을 얻으며 살 만한 일자리를 공 1)

유하는 연대적 노동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연동되어 있는 임금구조, 고용구조, 노동시간구조의 세 측면 전체에 걸친 변화가 필요하다. 박근혜발 노동개악 국면에서 노동당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의 매뉴얼을 제시하고 있다. 1) 노동시간 단축, 2) 안정된 일자리, 3) 상시업무 정규 직 전환, 4) 원청사용자책임 강화와 파견제 폐지, 5) 생활 가능한 소득과 최저임금 1만원. 잠금장치를 풀기 위한 안내서는 준비되었지만, 저들이 설치하려는 새로운 잠금장치를 막아내지 못한 다면 탈옥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노동개악을 저지하는 위력적인 투쟁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 고 말하지만, 절박하고 결연한 구호만큼 노동개악을 둘러싼 사회적 투쟁전선에 이상은 없는가? 한국노총이 노사정 야합에 참여하자 곧바로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으로 맞서겠다고 선 언하였다. 11월 14일까지 모든 가맹・산하조직은 즉각적인 총파업 태세 구축을 완료하며, 노동자-민중총 궐기에 참여하는 조합원수 목표를 10만 명으로 늘렸다는 소식을 전한다. 전농 등 민중단체들, 박근혜 정 권의 온갖 실정에 분노하는 시민 참여를 포함한다면 20만이 넘는 대오가 서울도심에 집결하리라는 전망 도 나온다. 한국판‘분노한 사람들’ 은 노동개악을 막아내고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1) <연대적 노동사회로 나아가는 길> 금민《월간좌파》 ( 2015년 6월호)

지금+여기 노동당 11


노동당 전국순회투쟁을 위한 헬조선 탈옥선에 기름을 넣어주세요

‘낮은 임금’ ‘장시간 , 노동’ ,맘대로 해고’등 박근혜 노동개악에 맞서 11월 3일부터 출발하게 될 헬조선 탈옥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름을 넣는 일입니다. 고통받는 노동자와 민중들이 있는 현장을 누빌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바랍니다. ●모금계좌 : 신한은행 100-029-087093 노동당 ●입금방법 : 임금시 본인 이름 뒤에 (탈옥선) 표기해야 합니다. (예 : 홍길동 탈옥선) ●문의 : 중앙당 살림실 (02-600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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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전국순회투쟁

박근혜 정부 노동개악에 맞선 헬조선 탈옥선의 선원을 모집합니다 헬조선탈옥선 선원은 전국을 유랑하며 ‘낮은 임금’ ‘장시간 , 노동’ , ‘맘대로 해고’등으로 고통받는

●선원 모집 기간 2015년 10월 27일~11월 2일 18:00까지 ●순회 투쟁 기간

노동자 민중과 함께 합니다.

2015년 11월 3일~11월 14일

체력・노래・율동・유인물 배포에

(노동개악 철회될 때까지~~)

재능이 있는 당원들을 기다립니다.

●참가신청 방법 이메일 신청 : laborkr@gmail.com 전화신청 : 중앙당 비정규노동실(02-6004-2020) 청년학생위원회 박기홍 위원장(010-4666- 5423)

지금+여기 노동당 13


노동당은 전국위원회를 통해 2015년 4분기 핵심사업의 하나로“노동개악저 지 투쟁” 을 채택하였다.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을 저지하는 사회적 투쟁전선 을 주도하며, 새로운 노동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정당으로 국민적 지지를 확장하는 것이 사업의 기조다. 전국 순회 투쟁(11월3일~13일)과 거점투쟁,‘을들의 국민투표운동’ 을 주요사업으로 포함하 는 한편, 노동시간단축 등 새로운 노동대 안 입법안을 준비하여 2016년 1월부터 본격적인 사회운동(입법운동 등)을 전개 해 나갈 예정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시동을 걸고 있는 ‘헬조선 탈옥선’ (전국 순회투쟁)은 기발한 연출에 머물지 않고, 실제 상황의 연속이 되고자 한다. 전국 곳곳에 탈옥선이 정박 하는 곳은 상징적인 공간이 아닌 헬조선의 노예들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현장이다. 갇힌 이들끼리 통하 는 절박함이 잠긴 마음을 열 수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더 큰 파동이 되어 울릴 것이다. 2015년 11월 14일은 헬조선의 심장부 서울을 점령하며 청와대로 향하는 날이다. 서울광장에 운집한 거 대한 인파가 세종로를 점거하고, 광화문 네거리 입구에 설치된 경찰장벽 앞에서 더 크게 만날 내일을 기 약할 것이다. 막으려는 자들에게나 모이는 것을 기획한 이들에게나 거기까지가‘최선’ 이 되는 날일지도 모른다. 11월 14일의 광화문 장벽 앞은 한국판‘분노한 사람들’ 의 역사적 출발을 선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최선’ 이 아니라,‘분노한 사람들’ 이 무엇을 이루어낼지를 자유롭게 말하고 단호하 게 응답하는 시간. 수천, 수만의 탈옥선이 출항을 준비하는 기적. 전국을 순회한‘헬조선 탈옥선’ 은 기적 을 준비하는 1호선이다.‘분노한 사람들’ 이 세상을 바꾸는 상상. 11월14일,‘그날 이후’ 의 역사는 현실이 될 것이다. 노동당이 전국에 내걸고 있는 현수막의 문구처럼.“헬조선, 노동당이 바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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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미래에서 온 편지》지난 호 <특집>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노동개혁’ 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따져보고, 우리에게 필요한‘진짜’개혁은 어떠해야 하는 지 이야기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이번 호에서는,‘진짜’개혁을 이루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대응 방안 과 정책 제안은 무엇인지, 노동당과 노동운동 현장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15


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사진출처 :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특집 /‘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다시, 계급형성전략이 필요하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이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에 대응하려면, 당장의 노동개악 저지투쟁을 넘어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묶어세우 기 위한 계급형성전략이 필요하다.

이장규 기관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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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은, 실제로는 국정교과서 문제보다도 훨씬 심각한 문제이다. 사람들의 구체적 인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개악과 관련한 문제 는 생각보다 큰 이슈가 되지 않고 있다. 이른바‘9.13합의’이후 잠깐 이슈가 되었으나, 추석 이후로는 별 이슈가 되지 못한 채 국정교과서 국면으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노동개악이 왜 문제인지 구체적인 사안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도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정당으로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 이전의 근본적인 문제다. 왜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노동개악 에 대한 여론이 국정교과서 문제에 대한 여론보다도 오히려 더 우호적인가? 국정교과서 문제는‘먹고사 는’문제와 일차적인 관련이 없는 반면 노동개악이야말로‘먹고사는’문제와 직결됨에도, 노동개악을 찬 성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의 상황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되물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노동체제1)의 변천과 연관 지워 역사 적으로 살펴보는 한편, 이런 역사적 고찰을 통해 한국에서는 여전히 노동자가 하나의 계급으로 제대로 형 성되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가 현재의 노동개악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여론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따라서 노동개악에 대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대응 역시 당장의 노동개악 저 지투쟁을 넘어서서,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묶어세우기 위한 계급형성전략이 다시 필요함을 강조하고 자 한다.

노동자계급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선 노동자가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된다는 뜻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자. 개별 노동자는 생산과정 에서 임금을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며, 이는 생산과정에서의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구 조적 내지 결정론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개별 노동자가 아니라 계급운동이라는 집합적 행위 차원에서 생 각한다면 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은 저절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집합적 행위자로서의 노동계급은 공통 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의식, 즉 계급의식을 분명히 지녀야 한다. 이런 계급의식은 역사 속에 서 다양한 문화나 제도의 영향 아래 행위자의 역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에, 결국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주체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개별 노동자들이 하나의 집합적 행위자로 형성되는 과정이 이른바‘계급형성’ 이다. 계급형성은 ‘조직적 형성’ 과‘이념적 형성’ 으로 나뉜다. 조직적 형성은 노동자가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 결속력을 갖는 것이고, 이념적 형성은 그렇게 모인 노동자들이 어떠한 계급적 목표를 지향하느냐의 문제이다. 하지만 조 직적 형성이건 이념적 형성이건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기본적인 계급의식이 전

1)‘노동체제(labor regime)’ 라는 개념은 아직 엄밀히 정의된 학문적 개념은 아니지만, 많은 학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이 글에 서는 정치적, 사회적, 작업장 노사관계 등 다양한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제도적 양식 및 이에 대한 국가-자본-노동의 대응 양식 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17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의 집회 모습

다른 사업장이나 다른 산업의 노동자들이 나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졌음을 인식하고, 그들과

제되어야 한다. 이 때의 기본적인 계급의 식이란 노자(勞資)관계의 본질이나 자본 주의의 모순에 대한 정확한 인식 등 높은

내가 함께 싸우는 것이 필수적임을 알고 있어야

수준의 계급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노동자계급형성이가능하다.

다른 사업장이나 다른 산업의 노동자들 이 나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적어도 저 사람과 내가 같은 이해관계를 가졌으며 함께 싸우는 것이 필수적임을 알고 있어야만 집합적 행위자로의 형성, 즉 계급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87년 노동체제 … 불안정했으나 가능성이 있었던

이제 그간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한국에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된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부분적으로는 민주노조운동 등이 존재했다. 87년 노동자대 투쟁 또한 80년대 초반부터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학생운동의 현장이전이나 가톨릭노동청년회나 노동상 담소 같은 노동운동 관련 외곽조직들의 활발한 활동 등의 전사(前史)가 축적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 나, 광범위한 사업장에서 대중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된 때는 87년부터이고 이 때 형성된 노동체제를 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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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노동체제’ 라고 부른다. 그런데 87년 노동체제는 애초부터 제도적으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기업 별 노조 체제였다는 것이다. 임금이나 근로조건이 개별 기업 단위에서 결정되는 기업별 노조 체제에서는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해관계 또한 개별 기업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에 단위사업장을 뛰 어넘는 정치・사회적 행위자로서의 노동계급 이 형성되기 어렵다. 하지만 87년 노동체제는 완전히 확립되었

87년 노동체제는 애초부터 제도적으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중 가장 근 본적인문제는기업별노조체제였다.

다기보다 그 자체가 형성 과정에 있었거니와, 기업별 노조 체제의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당 시에는 대공장의 투쟁이 전체 사업장의 투쟁을 선도하는 성격이 강했다. 쉽게 말해 대공장의 임금이 오르 면 중소사업장 또한 어느 정도는 임금이 함께 올랐기에 대공장과 중소사업장 노동자가 공통의 이해관계 를 가지는 측면이 강했다. 둘째, 학생운동 출신이나 외곽조직 활동가들의 영향력이 강했거니와 80년대 초 반에 급격하게 확산된 사회주의 이념의 영향력 등으로 인해 적어도 지향점이란 측면에선 단위사업장을 뛰어넘는 전체 사회의 변혁이라는 이념적 목표가 있었다. 그렇기에 단위사업장의 이해관계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 지역별로 연대투쟁의 기풍이 강력했기에 한 사업장의 투쟁에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이 자연 스레 연대하는 등 기업별 노조 체제를 뛰어넘는 실천들이 지역 단위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노동운동 내에서의 기본적인 계급의식은 상당히 강력했다. 결국 기업별 노조 체제라는 87년 노동체제의 한계는 처음부터 아예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87년 노동체제 자체가 형성기에 있는 불안정한 체제였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한계를 뛰어넘 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기에 이후의 전개과정에 따라선 노동계급이 제대로 형성되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의 전개과정은 그렇지 못했다.

97년 노동체제 … 계급 내 분할의 본격화

87년 노동체제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개별 사업장, 특히 대공장에서는 노동의 권리가 상대 적으로 강력했기 때문에 자본과 국가는 노동을 약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96년의 노동법 개악 시 도 등이 대표적인데, 이 노력은 97년 IMF사태로 인해 본격화되었으다. 이후 정리해고의 도입 등으로 새 로운 노동체제가 구축된 바, 이를‘97년 노동체제’ 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97년 노동체제는 계급 내 분할을 본격화하는 체제였다. 정리해고 도입은 단순히 대공장 노동자들을 겨 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공장보다는 노동시장 전체에 미치는 효과가 더 중요했다. 경제위기를 기화 로 비정규직 등 불안정 노동이 전면적으로 확산되었거니와, 정리해고의 위협은 대공장 노동자들로 하여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19


금 비정규직 등을 자신의 고용불안의 방패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실제로는 더 중요하다. 생각보다 대공장에서 실제로 정리해고가 이루어진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기업별 노조 체제라는 한계가 주어 진 상황에서, 대공장 등 조직노동자들의 위기의식은 자신들의 시야를 단위사업장 차원으로 한정하게 만 들었고, 이는 결국 대공장과 중소사업장, 정

불안정노동의 확산과 정리해고의 위협은 대공장 노동자들의 시야를 단위사업장 차 원으로 한정하게 만들었고, 이는 노동계급

규직과 비정규직 등 노동계급 내의 분할이 본격화되도록 만들었다. 이른바‘노동귀족’ 론의 씨앗이 이 때 뿌려진 셈이다. 물론 노동운동이 그냥 당하기만 했던 것

내의 분할을 본격화시켰다. 이른바‘노동귀

은 아니다. 기업별 노조 체제의 한계를 극복

족’ 론의씨앗이뿌려진셈이다.

하기 위한 산별노조운동이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진보정당운동이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둘 다 타이밍이 약간 늦었다. 기본적인 계급 내 연대의식이 살아있었고 경제도 호황이었던 90년대 초반에 산별노조로의 전환이나 진보정당 건설이 이루어졌다면 이후의 전개가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닥쳤고, 이 위기의 극복 방향이 90년대 초반에 급격히 성장 한 대기업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이었으며,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등으로 전체 사회의 변혁이라는 이 념적 목표가 흔들리는 등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친 상황이었다. 그 결과 산별노조나 진보정당을 제대로 만 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겉으로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실제로는 당장의 내 공장 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어긋남이 쌓인 결과,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 한국의 노동시장과 노동계급은 완전히 분할되었 다. 대기업은 온갖 방법으로 중소기업을 쥐어짜기만 할 뿐이었고, 노동운동조차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함 께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도 격화되었다. 정규직 고용은 거의 이 루어지지 않고 신규고용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으로 충당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서로를 하나의 계급으로 생각하기는커녕 서로 적대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87년 노동체제에서 의 계급형성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노동자는 사실상 두 개 이상의 계급으로 내부 분할되었다.

노동개악 … 정규직에 대한 공격, 그리고

97년 노동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결과가 바로 지금의‘헬조선’ 이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에게는 헬조 선일지언정, 최근까지만 해도 대기업에게는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의 일부 대기 업은 글로벌기업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성장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상황에서도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편승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위기를 덜 겪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중국의 경 제성장이 둔화되고, 그간 잠재되어 있던 한국 대기업의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품소재나 20


제조업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노동시장의 분할에 따른 숙련노동의 약화이다. 하지만 자본은 그동안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을 쥐 어짜며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스스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설계 등 핵심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외부 여건이 어려워지자 제조업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그런데 이런 제조업의 위기는 단순히 외부 여건 때문이 아니다. 제조업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노동 시장의 분할에 따른 숙련노동의 약화 때문이다. 핵심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선 숙련된 노동력이 필수 적이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을 쥐어짜는 현재의 노동체제 하에서 숙련을 통한 기술의 확보는 불가능하 다. 하지만 자본은 그동안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그 결과 외부 여건의 악화와 맞물려 스스로를 위기로 몰 아넣었다. 이 위기에 대응하는 자본의 전략은 정규직을 공격하는 것뿐이다. 이미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은 쥐어 짤 대로 짰기 때문에 더 이상 공격할‘꺼리’ 조차 별로 없다. 결국 쥐어짤 여력이 남은 곳은 대기업 정규직 뿐이다.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은 정확히 이 지점을 겨냥한다. 임금피크제든 일반해고든 취업규칙 불이 익 변경이든 일차적인 공격 대상은 대기업 정규직이다.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은 이미 지금도 임금피크 제와 무관하며 일반해고 및 계약해지를 늘 당하고 있고 취업규칙도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상을 국민들은 이미 너무나 잘 안다. 바로 그렇기에, 현재의 노동개악에 대해 사람들이 상대 적으로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노동개악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은 것이다. 임금피크제 도입한다고 청년 일 자리가 크게 늘지 않으리란 걸 청년들도 알고 있다. 일반해고나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 원론적으로는 좋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21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안이 좋지 않다는 건 국민 도 안다. 하지만 이미 국민 대부분이 어려운 상황 이니, 대기업 정규직의‘특권’ 을 해체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나아질거라생각한다.

지 않은 것이라는 것도 이미 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국민들이 어 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판이니, 대기 업 정규직을 공격해서 그들의‘특 권’ 을 해체하면 적어도 지금보다 약 간이라도 나아질 것 같다고 생각한

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너희들도 이제 좀 당해봐라’하는 생각조차 하는 듯하다. 결국 현재의 모습은, 97년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오랜 분할로 인해 이제는 스스로를 하나의 계급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 된 노동계급의 형 성에 철저하게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노동계급 형성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기업 정규직을 공격하는 현재의 노동개악으로 제조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도 명확하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제조업 위기의 근본 원인은 대기업 정규직의 과도한 특권 때문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을 쥐어짤 뿐 숙련노동을 통한 원천기술의 확보를 무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 판에 대기업

“힘내요! 모여봐요! 비정규직 없는 대우조선”9월 12일 거제-부산 희망버스 당시 대우조선소 앞에서 진행한 선전전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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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들까지 쥐어짜는 식으로 단기적인 자본의 이익에만 급급할 경우, 숙련노동의 약화에 따른 제조업 의 위기는 지금보다 더 심화될 뿐이다. 잘못된 위기 대응은 더 큰 위기를 불러온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현재의 노동개악에 대한 대응은 일차적인 공격대상인 대기업 정규직의 문제만이 아니다. 누군가는 (어쩌면 우리 당원 등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일부는) 대기업 정규직이 주 공격대상인데 우리 가 왜 이를 저지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하는가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숙련노동의 약화로 인한 제조업 위 기의 피해는 대기업 정규직만이 아니라 중소 기업이나 비정규직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가 받는다. 더구나 그 피해는 중소기업이나 비정 규직이 더 크게 입을 수밖에 없다. 또한 숙련노 동 등 노동의 가치를 자본이나 국가가 제대로 인식할 때에만 경제도 살아나고 중소기업이나

대기업과중소기업, 정규직과비정규직이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졌음 을 정확히 인식하는 일은, 그간 실패해온 노동계급형성을위한출발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더 나은 기회와 노 동조건이 주어질 수 있다. 그간의 현상만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내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정확 한 인식이 그간 끊임없이 실패해온 노동계급 형성을 위한 출발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기업 정규직을 위해서만 싸우자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대기업 정규직들 또한 그동안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할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을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자신들의 고용안정과 임 금상승을 우선시하고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을 오랫동안 외면한 결과, 드디어 자신들까지도 위태롭게 되 었음을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 조금만 길게 보면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과 본인들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노동계급을 하나로 형성하는 데 대기업 정규직들이 먼저 나서야 한 다.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

그 출발점으로 우리 노동당이 제안하는 것이 바로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에 앞장서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여러 가지 다른 의 의도 많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는 고용, 즉 일자리와 연결된다. 임금피크제 실시해본들 실제로는 일자리가 거의 늘어나지 않는다. 반면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를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안 중 하나이다. 대기업 정 규직 노동자가 앞장서서 노동시간 단축에 나서야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및 실업자 등 불안정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결합할 수 있다. 대기업 정규직은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고 불안정 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일자리가 늘어남으로써 공통의 이해관계가 만들어지기에, 노동시 간 단축은 계급형성전략의 일부이기도 하다.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23


또한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에도 대기업 정규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함께 싸워야 한 다. 최저임금 인상은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등 불안정노동자들에게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거니와, 대기업 정규직들 또한 이것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계속 강조하듯이 하나의 노동 계급을 형성하기 위해 같이 싸우지 않으면 결국에는 대기업 정규직이 주공격대상이 된다는 것을 현재의 노동개악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노동시간 단축이 특히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에게는 실질 임금의 심각한 저하를 가져올 수도 있으므로 이를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최저임금 인상은 반드시 필요하 다. 한편 대기업의 경우에도 노동시간 단축이 일정 정도의 실질임금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 이는 최저임 금 인상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분은 기본소득이나 사회복지의 강화 등 이른바 사회임금 의 확충을 통해 보충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임금의 확충은 불안정노동자들에게 직접적인 임금 이외의 간 접소득을 늘린다는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노동시간 단축・최저임금 인상・사회임금 확충은 현재의 노동개악을 저지하는 수준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제안하는, 노동당의정책대안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 및 사회 임금 확충은 우리 노동당이 현재의 노동개 악을 저지하는 수준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 으로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 제시하는 정 책대안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정책이나 선 거공약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대안들은 계급형성전략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현재의 노동개악 국면이 역 사적으로는 계급형성의 실패와 연관되어 있으며, 앞으로 우리 운동이 일차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또한 다 시 노동계급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적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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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의 ‘노동개악 반대!’ 조합원 선전물 중 (출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홈페이지) 민주노총의‘노동개악 ‘노동개악 반대!’ 반대!’조합원 조합원 선전물 선전물 중 중 (출처 (출처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홈페이지) 홈페이지) 민주노총의 민주노총의 ‘노동개악 반대!’ 조합원 선전물 중 (출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홈페이지)

특집 ‘ / 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박근혜 정부 노동시장 구조개악에 맞선 민주노총의 대응 “노동개혁에 명운을 걸겠다” 는 대통령의 다짐 그대로,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의 명운을 걸고 6대 요구 쟁취와 노동개악 저지를 위한 싸 움에 임할 것이다.

류주형 민주노총 정책부장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25


노사정 합의안과‘노동시장 선진화법’ 의 문제점

9월 15일 조인된 노사정 합의안과 9월 16일 발의된 새누리당의‘노동시장 선진화법안’ 은 정부・여당 이 추진 중인 노동개혁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우선 노사정은‘근로계약해지 등의 기준과 절차 명확화’ 와‘단체협약 및 취업규칙 개정을 위한 요건과 절차 명확화’ 에 합의함으로써‘쉬운 해고’ 와‘낮은 임금’ 을 현장에 강요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했다. 나아 가 중장기적으로 채용, 인사평가, 성과형 임금, 승진, 배치전환, 해고 등 근로계약 전반에 대한 법제화 논 의를 시작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더 많은 비정규직’ 을 허용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과 파견 확대 관 련한 비정규직법 개정 논의에도 물꼬를 터주었다. 노동시간과 통상임금 등 근로기준법 개정 사항도 현행 보다 후퇴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처럼 노사정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법・제도‘개악’ 을 명문화한 반면, 당초 노동개혁의 명분으로 내 세웠던 청년고용 창출이나 대중소기업 상생협력・동반성장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실효성 없는 공문구만 나열하고 있다. 노동시장 양극화의 진정한 원인을 제공한 재벌 대기업과 정부의 노동유연화 정책에 대해 서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는 것이다. 종합하면, 이번 노사정 합의안은‘더 쉬운 해고, 더 낮은 임금, 더 많은 비정규직’ 을 제도화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는 반면 청년 일자리나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등 노동개혁의 취지와 상반된 내용들로 가 득 찬 역대 최악의‘야합’ 으로 기록되기에 부족하지 않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마치 노사정 야합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당이 당론 발의한‘노동시장 선진화법’ 의 내용이다. 이 법안은 노사정 야합안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휴일근로・연장근로 중복할증 금지(근로기준 법) ▲ ‘뿌리산업’등 파견업종 확대 및 불법파견 합법화(파견법) ▲기간제 정규직 전환 기회 박탈(기간제법)

▲ ‘실업급여 확대’거짓 선전(산재보험법) 등 합의안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들을 대거 추가함으로써 대대적 인 노동법 개악을 예고한다. 새누리당 법안에서 새롭게 추가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당은 현행법・판례와 충돌해온 정부 의 휴일근로・연장근로 중복할증 금지 행정해석을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명시하고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 는 초과수당 및 임금총액을 낮추고 간접적으로는 사용자의 초과노동 사용에 대한 유인을 증가시켜 장시 간 노동을 조장하는 효과를 지닌다. 둘

새누리당이발의한‘노동시장선진화법 ‘은, 그렇

째,‘뿌리산업’즉 주조・금형・용접・

지 않아도’ 재벌특혜추석종합선물세트’ 로비난

표면처리・소성가공・열처리 등 제조

받은 노사정 야합안에 제조업의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비정규직 사용을 장려하는 내용을 추가 했다. 그야말로‘노동시장후진화법’ 이다 26

업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 공정에 파견 을 허용하고 그동안 판례로 축적되어 온 원청 사용자성 및 파견・도급 구별 의 징표를 축소함으로써, 그동안 불법


파견 판정을 받은 재벌 대기업들에게 파견노동자를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확대했다. 셋째, 선 진화법에서 이른바‘당근’ 책으로 제시된‘실업급여 확대’ 의 경우, 실업급여 대상자의 67퍼센트가 적용되 는 하한액을 삭감하고, 가입기간도 180일에서 270일로 강화하는 등 저소득 단기 고용으로 인한 취약계층 노동자의 기존 실업급여 보장을 후퇴시키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재벌 특혜 추석 종합선물세트’ 로 비난받은 노사정 야합안에 제조업의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비정규직 사용을 장려하는 내용을 슬그머니 추가한 새누리당의‘노동시장 선진화법’ 은 그야말로 유신시대에나 어울릴법한 재벌의 재벌에 의한 재벌을 위한 개발독재로 회귀한다는 점에서‘노동시장 후 진화법’ 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민주노총의 정책대안

민주노총은 이러한 정부・여당의 노동개혁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대신‘재벌개혁’ 과 정부의 신자유 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은‘재벌책임, 청년・좋은 일자리, 노동자・서 민 살리기 6대 요구’ 안으로 불리는 정책대안을 통해 진정 실효성 있는‘좋은 일자리’창출 방안을 제기한 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 노동시장의 핵심적인 문제를 ▲비정규 노동의 양산과 일자리 질의 악화 ▲저임금 노동과 계급간 소득불평등 확대 ▲장시간 노동과 노동시간의 유연성 확대 ▲노동기본권 탄압과 노사관계 실종 ▲사회안전망의 부재 등으로 파악한 다. 그 원인은 정부・여당이 주장하듯이

오늘날 한국 노동시장 문제의 원인은 정부・

‘정규직 과보호’ 나‘강성 노동조합’ 에있

여당이 주장하듯‘정규직 과보호’ 나‘강성 노

는 것이 아니라, 1997~98년 경제위기・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적 노동유연화 정책과 재벌 체제에 있다. 즉,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변형근로

동조합’때문이 아니다. 경제위기 이후의 신 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과 무소불위의 힘과부를쥔재벌체제에 그원인이있다.

제의 도입에 따라‘고용 없는 성장’ ‘임금 없는 성장’ 이 일반화되었고, 재벌 중심 수출주도 성장 정책에 따라 무소불위의 힘과 부를 거머쥐게 된 재 벌 대기업들이 오히려 나쁜 일자리를 양산해 오늘날 노동시장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야기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노총은 나쁜 일자리 확산에 따른 노동시장 양극화의 1차적인 책임을 재벌 대기업에 게 묻는다. 재벌 대기업은 그동안 법인세 인하, 각종 규제완화 등 정부의 재벌 특혜 정책으로 급성장했으 면서도, 일자리 창출이나 동반성장 등 사회적 책임은 다하지 않았다. 특히 이들은 지불 능력이 충분함에 도 불구하고 약 40퍼센트의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사용하는 등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는 주범으로 전락 하고 말았다. 이에 민주노총은 ▲재벌감세 철회 및 법인세 정상화, 초과이윤/사내유보금 과세, 재벌총수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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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29


일가 불법・편법이익 환수 및 부자증세 등‘재벌세 3대 입법’ 을 통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남용 근절과 상시・지속업무 정규직 전환, 재벌의 산별교섭 참여, 하청노동자와의 직접교섭 참여 및 동일 기업집단 내 동일 단체협약 적용 등 좋은 일자리 전환을 위한‘재벌 사용자 책임 3대 과제’이행 ▲납품업 체 등 집단교섭 보장, 재벌의 골목상권 침해 규제, 대・중소기업 관계 개선 등 중소영세기업・자영업자 상생을 위한 재벌의 사회적 책임 3대 입법을 제안한다. 다음으로 민주노총은‘실노동시간 연 1800시간 상한제’실시를 통한 일자리 창출을 주장한다. 주5일 제가 시행되었음에도, 우리 노동자들은 2013년 OECD 기준 연간 2,163시간에 달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을 개선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고용창출 정책이며, 이는 정부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동시에 통상임금을 정상화하여 왜곡된 임금구성을 바로잡고 소 정근로 시간당 임금보다 헐값으로 취급된 초과근로에 대한 할증임금을 제대로 받음으로써 장시간 노동 관행을 철폐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신규고용 대신 장시간 노동을 선택해온 자본의 위법하고 탈법적인 관행 을 바꿔나갈 수 있다. 실노동시간을 법정 상한인 1주 52시간으로 준수하기만 해도 62만개의 일자리가 창 출되고, 1주 48시간으로 단축할 경우 105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보고를 참고할 수 있다. 또한 민주노총은 대통령 공약사항이기도 했던 상시・지속 업무 일자리의 정규직 전환 및 직접고용 원 칙 법제화를 주장한다. 현재 정부는 정규직 전환 대상을 공공부문 직접고용으로 한정하고, 민간부문의 정 규직 전환을 유도할 실효성 있는 방안을 제출하지 않고 있다. 공공부문의 경우 직접고용뿐만 아니라 파 견・용역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도 정규직 전환대상에 포함해야 하고, 민간부문에서도 비정규직 남용을 억제하고 상시・지속업무 정규직 전환을 의무화하는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국민의 생명과 안 전과 직결되는 일자리도 정규직 직접고용을 의무화해야 한다.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 할 경우 2013년 기준 최소 약 35만 개의 좋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추정되고, 재벌 계열사 사내하청은 대부분 불법파견이라는 점에서 이들 일자리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약 64만개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 범위를 300인 이상 대기업으로 넓히면, 약 92만 개의 일자리를 정규직 일자리로 전환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민주노총은 ▲ ‘최저임금 1만원’인상을 통한 생활임금 확보 ▲5인 미만 사업장・초단시간 노동자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및 모든 노동자에게 헌법상 노동기본권 보장 ▲실업급여제도 개선, 실업부 조제도 도입, 산재보험적용 확대, 국민연금 보장성 강화 등 사회안전망 보장・사회공공성 강화를‘좋은 일자리’창출 및 전환 대안으로 제기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투쟁방향

민주노총은 이상‘재벌책임-청년일자리-노동자서민 살리기 6대 요구’ 의 쟁취와 노동시장 구조개악 관련 정부의 행정지침 및 여당의 국회 입법 저지를 위해 총력 투쟁 태세에 돌입한 상태다. 30


10월 한 달간 공공운수・건설・보건의료 노동자들의 파상파업과 함께, 전국 동시다발 촛불행동, 총파 업・총궐기 조직 전국 현장순회, 비정규직 철폐 전국노동자대회를 통해 11-12월 투쟁의 예열을 마친 상 태다. 이 여세를 몰아 11월 14일에는 전국노동자대회와 민중총궐기를 통해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선포할 예정이다. 노동시장 구조개악 관련 정부・국회 차원의 공세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는 11월 중순 이후에는 전면 총파업에 돌입하여 정부・여당의 노동개악을 무력화하고, 이어서 노동개악 저지 투쟁과 6 대 요구 쟁취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2016년 총선 및 2017년 대선 요구로 확대・발전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정부・여당은 민생경제 파탄, 세월호-메르스 대처 무능, 공안기구의 민주주의 파괴 행위, 각종 권력형 부패와 비리, 역사 퇴행적 국정 교과서 강행 등으로 얼룩진 정권의 과오를‘노동개혁’한 방으로 역전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노조가 쇠파이프를 휘둘러 3만 불 소득 달 성이 안 됐다” 는 둥,“6백만 표를 잃을 각오

우리는 노동개혁이 정부・여당에게 오히 려 부메랑이 될 것이라 단언한다.“노동개 혁에 명운을 걸겠다” 는 대통령의 다짐 그

가 돼있다” 는 등 망발과 오만을 서슴지 않는

대로,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의 명운을

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개혁이 정부・여당에

걸고싸움에임할것이다.

게 오히려 부메랑이 될 것이라 단언한다.“노 동개혁에 명운을 걸겠다” 는 대통령의 다짐 그대로,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의 명운을 걸고 6대 요구 쟁취 와 노동개악 저지를 위한 싸움에 임할 것이다.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31


6.27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차별철폐대회 (사진 : 안혜린 제공)

특집 ‘ / 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불안정 노동자들을 더 불안정하게 만드는 노동개악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지금도 힘없고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박근혜의 노동 개악은 더 큰 불안을 안겨줄 것이다. 정규직이나 최소한 무 기계약직이라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는커녕 지금보다 더 큰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안혜린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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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개혁은 우리 딸과 아들의 일자리입니다” 서울과 창원을 오가기 위해 탄 KTX의 모든 객실의자 등받이에 걸려있던 문구다.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해고를 지금보다 쉽게 하고, 노동자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바꾸 고, 임금피크제와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기간제 기간을 4년으로 늘리면, 우리 딸과 아들의 일자리가 늘어 난다고? 정말 그럴까? 나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경남지부에서 3년 간 조직국장으로 일을 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중심으로, 힘없고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박근혜의 노동개악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불안정 노동자에게 더 큰 불안을

먼저 근로계약 체결 및 해지 기준과 절차에 대해 알아보자. 법과 판례에 따라 명확히 하고,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며, 노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해고기준을 지금보다 완화해서 해 고를 더욱 쉽게 하겠다는 뜻이다. 학교에 근무한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그래도 안정된 일자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실 은 매년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훨씬 많다. 무기계약으로 전환된 노동자들도 있지만, 예산부족 과 학생 수 감소를 이유로 교육청이 무기계약정원을 줄이고 간접고용과 시간제・기간제 노동을 늘리고 있다.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학교급식실 노동자(조리실무사, 조리사, 영양사)가 약 45퍼센트 정도로 가장 많 고 그 외에 행정실무사, 교무실무사, 사서, 교무행정보조원, 기숙사사감, 영어회화전문강사를 포함한 각 종 시간제강사 등 우리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다양한 직종들을 포함한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 나, 경남에서는 학교비정규직노동자 직종이 무려 60여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무기계약으로 전환된 직종 은 약 15개뿐이고, 무기계약에서 제외된 직종은 40여 개에 달한다. 무기계약 직종은 겉으로는 무기한 고용이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금도 학생 수 감소 등을 이유로 퇴직 압박에 시달린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해고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교육청은 학 교현장을 스스로 그만두는 분위기로 만든다. 노동자들을 모아서, 또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모여서 제비뽑 기로 퇴직할 사람을 정하게 하거나“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이 일을 더 잘 한다” 는 논리를 퍼뜨려서 나이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그만두도록 압박한다. 지금도 이런데 해고기준이 완화되면 어떻게 될까? 무기계약직 정원을 줄이려는 교육청은 이를 기회로 삼아 손쉬운 해고를 통해 정원을 줄이려 할 것이다. 또 학교현장의 관리자들이 기준이나 절차를 지키지 않은 부당해고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됨으로써,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징계사유 등이 없는데도 관리자가 입 맛에 따라 편의적으로 해고권한을 남용하게 될 위험이 크다.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33


무기계약 제외 직종으로 분류된 약 30~40여개 직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어떻게 될까? 이들은 거 의 대부분 1년 단위로 계약을 한다. 이 중에서도 간혹 대체직종의 경우는 이보다 더 짧은 기간으로 계약을 하기도 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재계약을 해야 한다. 이 재계약을 하는 시점은 대체로 1~2월이다. 학교 가 신입생을 맞이하고 새로운 준비를 하는 이 활기찬 시기에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루하루 불안한 날 들을 보낸다. 이렇듯 지금도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해고기준이 완화되고 나면 지금보다 더 큰 불안 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정규직이나 최소한 무기계약직이라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는커녕 지금보다 더 큰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학교회계직원 인원 및 무기계약직 전환 비율 교육부 자료 (단위: 명 / 2015.4.1 기준)

합계 시도별 (A=B+C+F) 서울

22,671

계약직 (B)

전환제외

전환율

전체 인원 중 무기계약 비율

(F)

(G=B/AE-F)

(B/A)

무기계약전환대상자

무기 소계

1년이상

1년미만

(C=D+E)

(D)

(E)

14,224

4,155

1,170

2,985

4,292

92.4%

62.7%

부산

7,937

6,157

555

85

470

1,225

98.6%

77.6%

대구

6,865

5,561

715

119

596

589

97.9%

81.0%

인천

8,355

5,863

500

84

416

1,992

98.6%

70.2%

광주

4,392

3,760

309

118

191

323

97.0%

85.6%

대전

4,022

3,755

32

13

19

235

99.7%

93.4%

울산

3,488

3,101

100

32

68

287

99.0%

88.9%

세종

685

624

7

0

7

54

100.0%

91.1%

경기

34,453

28,582

2,321

339

1,982

3,550

98.8%

83.0%

강원

6,480

5,809

101

14

87

570

99.8%

89.6%

충북

4,962

4,634

68

14

54

260

99.7%

93.4%

충남

5,443

4,727

244

46

198

472

99.0%

86.8%

전북

5,896

4,521

411

69

342

964

98.5%

76.7%

전남

6,836

5,068

913

513

400

855

90.8%

74.1%

경북

7,918

6,238

632

167

465

1,048

97.4%

78.8%

경남

9,312

7,777

887

235

652

648

97.1%

83.5%

제주

1,727

1,484

22

5

17

221

99.7%

85.9% 79.1%

시도

141,442

111,885

11,972

3,023

8,949

17,585

97.4%

국립

523

424

33

8

25

66

98.1%

합계

141,965

112,309

12,005

3,031

8,974

17,651

97.4%

79.1%

주) 실제 교육부 자료에는 무기계약 전환비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학교회계직원의 총 인원은 141,965명이며, 그 중 무기계약직은 112,309명으로 조사됨(97.4%) ※ 무기계약전환제외 17,651명, 1년 미만 8,974명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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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공립학교(98.4%)가 사립학교(90.0%)에 비하여 무기계약직 전환 비율이 높아, 비교적 고용안정이 이루어지고 있 음” 이라고 홍보한다. 실제 무기계약전환율과 관련해서는“무기계약전환제외 17,651명, 1년 미만 8,974명 제외” 라며, 마치 무기계약직이 무려 97.4 퍼센트나 되는 것처럼 언론 등에 홍보하고 있으나, 전체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 중 실제 무기계약 비율은 필자가 임의로 만들 어 붙인, 표 제일 오른쪽 항목‘전체인원 중 무기계약비율’ 을 참고하면 된다. 그리고 교육부에서는 학교비정규직노동자을“학 교회계직원” 으로 분류한다.

지금도 미흡한 취업규칙, 노동자에게 더욱 불리하게

정부는 취업규칙 개정을 위한 요건과 절차를 명확히 하고 이를 준수한다고 하면서, 노조 동의 없이 취 업규칙 불이익변경을 가능하게 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현재 취업규칙에 관한 근로기준법 94조 1항은“사용자는 취업규칙의 작성 또는 변경에 관하여 해당 사 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다만,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그 동의를 받아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되어있기는 하나, 현재의 근로기준법 역시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실제로 제대 로 된 안전장치라고 보기 어렵다. 불이익변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현재의 근로

경에 대한 동의 조건인‘근로자의 과반수’ 를

기준법도 제대로 된 안전장치가 아니다. 취

들쭉날쭉 제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취 업규칙의 적용대상이 광역시도교육청 소속 전체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일 경우에는 그

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하나, 그 동의

과반수의 대상이 전체 학교비정규직노동자

조건인‘근로자의 과반수’ 에 대한 해석은

들이지만, 그것이 일부 직종에게만 해당될

들쭉날쭉제멋대로다.

경우에는 그 일부 직종만을 대상으로 보기 도 한다. 또, 아직도 일선 현장에서는 해당 학교장을 사용자로 보아, 해당 학교 전체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과반수이상의 동의만 받으면 취업규칙의 변경에 따른 절차를 다 거쳤다고 보고 취업규칙을 변 경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약 50~60개 직종이 있으 며, 학교 규모에 따라 매우 적게는 한 학교에 1명, 많게는 30여명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급식실 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별공간에서 따로따로 근무를 한다. 행정실에서, 교무실에서, 급식실에서, 학교도서 관에서, 강사실에서, 사감실에서 등등. 또한 근무시간과 체계가 달라서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서로 일상적인 교류가 어렵다.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급식실을 제외하고는 분리되어 개별근무를 하고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35


있으며, 급식실 역시 학교에서‘외딴섬’ 이라는 불릴 정도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학교장이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하려 할 경우, 이들 각각을 개별 접촉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학교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근무하고 있기에 일상적으로 다소 위축되어 있고, 직종 에 따라서는 1년 단위 계약을 하므로 일상적으로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따라서 지금도 취업규칙을 노동자 들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려고 작정만 하면, 사용자 마음대로 한두 달 안에 변경할 수 있는 구조이다. 실제 로 현장에서는 행정실장을 통하여 개별로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관 리자의 사적인 업무에 대한 지시를 거부한 행정실무사에게 보복성으로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 우나, 평가점수가 낮으면 해고가능하다는‘일반해고’조항을 넣어 마음에 안 드는 조리실무사를 저평가 해 해고하는 사례도 있다. 현실이 이런데도, 지금의 미흡한 취업규칙조차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 없이 일 방적으로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지금의 노동개악이다. 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 과연 단순히 취업규칙에만 머무를지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현재의 근로기 준법 96조 1항과 2항을 보면“취업규칙은 법령이나 해당 사업 또는 사업장에 대하여 적용되는 단체협약 과 어긋나서는 아니 되고, 고용노동부장관은 법령이나 단체협약에 어긋나는 취업규칙의 변경을 명할 수 있다.” 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다. 그렇다면 단체협약만 잘 체결해놓으면 개별 학교의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은 문제되지 않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이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면 이후에는 단체협약 관련 법조항 역시 사용자 위주로 개악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는 현재의 노동법 전반이 개악되어 노조의 활동 자체가 크게 위축될 수 있고, 그럴 경우 노조에 소속된 조 합원들 역시 안전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성과급제, 더욱 어려워지는 무기계약전환

성과급제와 기간제 4년 연장을 보자. 현재로선,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피크제와 성과급제 도입 을 전국 단체협약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대로 지켜질지 장담할 수 없다. 올해 경남 의 경우, 전체 처우개선 직종(일반적으로 무

올해 경남은 전체 처우개선 직종에 연간 100만 원의 상여금을 일괄지급하기로 했지 만, 시행과정에서 평가점수를 여러 단계로

기계약 직종으로 이해하면 됨)에게 연간 100

만 원의 상여금을 일괄 지급하는 것을 단체 협약의 성과로 이루어냈다. 그런데 경남교 육청이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단체협약

나누어 가장 하위단계의 노동자들을 상여

과는 달리 평가점수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금지급대상에서제외하려했다.

가장 하위 단계의 노동자들은 상여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공문을 학교현장에

보내려고 하였다. 물론 노동조합이 나서서 이를 막기는 했으나, 이러한 시도가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으리 36


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기간제 4년 연장은 어떠한가? 해당 직종에서 2년 이상 계속근무를 하고 있는데도 여러 이유를 갖다 붙 여 무기계약 제외 직종으로 분류하는 직종이 현재 구조에서도 30~40여 개에 이른다. 노동조합이 이 무기 계약 제외 직종을 무기계약 전환직종으로 변경하기 위해 싸우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무기계약 제외 직종 은 그 종류는 많지만 각 직종에 속한 노동자들의 수가 적어서 투쟁이 빛을 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것을 법을 바꿔서 4년으로 연장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이 직종에 대한 무기계약전환이 더 어려워질 거라 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노동개악 저지에 전력을 다해야 할 때

이상으로 큰 틀에서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을 짚어보면서, 현재 근로기준법 내에서도 안전할 수 없는 학 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현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아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조항과 해고기 준 완화, 기간제 4년 연장, 성과급제와 임금피크제 도입 등을 하겠다면, 전국의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현재의 근로조건마저도 보장받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런 엄중한 사태를 앞에 두고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조차도 정작 이것이 본인의 일이고, 본인 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현재 구조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근로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더욱 불안하게 바꾸려는 노동개악의 시도가 본인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10월 24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 (사진 : 안혜린 제공)

특집‘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37


고 안일하게 생각한다.“단체협약이 있으니까, 나는 조합원이니까”하는 마음으로 안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바로 이 점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 광역시도 노동조합이 교육청과 체결한 단체협약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지금 구조에서도 가능하다. 게 다가 노동개악이 전면적으로 관철되면 그 가능성이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 분명하다. 단체협약의 대상을 교육감으로 인정받기까지 얼마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워왔다. 단체협약을 체결 하기까지 얼마나 먼 산을 넘어왔던

나 어려웠고, 단체협약을 체결하기까지 얼마나 먼 산을 넘어왔던가! 그런데 그 단체협약이 무력화될 수 있는 위기에 처했다. 그간의 과정보다 더 치열하 게 싸워야지만 단체협약을 지킬 수 있다. 현재의 노

가! 그런데 그 단체협약이 무력화될

동개악의 위험성을 전체 조합원이 같이 알고 공유

위기에처했다.

하면서 조합원들을 하나로 묶어 노동개악 저지 투 쟁에 함께 연대해야 한다.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정말 치열하게 싸워왔다. 전국의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 기도 했고, 투쟁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이 노동자들조차 이번 노동개악에서는 안전할 수 없다는 여러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처럼 잘 싸워온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조직 되지 못한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이번 노동개악이 미칠 영향은 어떠할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유감스럽게도 민주노총 역시 박근혜의 노동개악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지고 매우 적극적으로 대 응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노동개악은 앞서 언급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이 땅의 전체 노동자들에게 닥칠 위기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전열을 가다듬고 조합원뿐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 나아가서 전체 국민들에게 현재의 노동개악이 우리 사회에 미칠 심각한 악영향을 적 극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 단결하여 이 싸움에 전력을 다해 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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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기본소득이 시대의 난제를 해결하는 의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노동당도 지난 6월 당대회에서 기본소득 정책이 포함된‘2016년 총 선 기본방침’ 을 채택했다. 하지만 한국사회 전반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당 내에서도 기본소득은 여전히 친숙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따 라서 폭넓고 깊이 있는 토론을 위한 계기와 장이 마련될 필요가 있 다. 이번 기획에서 싣는 두 편의 글은 이를 위한 시발점이며, 다양한 비판과 제언을 요청하는 호소이기도 하다.

기획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39


기획 /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기본소득을 간단하게 정의하면“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자산심 사나 노동 요구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 이다. 이때 기본소 득을 지급하는 주체는 보통 정치공동체 혹은 국가이다.

쟁점

기본소득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자

이렇게 간단하기 때문에 사실은 다양한 쟁점이 만들어진다. 모든 사람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무상급식 논쟁에서도 나왔듯

산심사나 노동 요구 없이 무조

이“왜 부자들에게까지 돈을 주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무

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 이다.

조건적으로 지급한다는 것에는“왜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이렇게 간단하기 때문에 사실

베짱이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가?” 라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별

은 다양한 쟁점이 만들어진다.

적으로 지급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직접적인 문제제기가 나오진 않지 만, 일부 사람들은 개인의 독립성 강화가‘가족의 해체’ 를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드러낸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은 현금(화폐)으로 지급되는 것이므로, 장래 사 회와 관련해서 일부 좌파는“시장의 존속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보통 쓰이는 의미에서‘개량적’ 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현재 사회와 관련해 서는,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기업이 그만큼 임금을 덜 주어도 생활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안효상 편집위원

비판도 있다. 가장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이지만 기본소득의 재원과 관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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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크게 의미 있는 문제제기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그래도 논의해야 할 쟁점은 지속가능성의 문 제이다. 예컨대 일정한 액수 이상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소득이나 자산에 상당한 세금을 부과 해야 한다(한국과 같이 조세부담률이 낮은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그럴 경우 (보통 우파가 많이 주장하는 방식 이긴 하지만) 경제활동 자체가 위축되거나 세원 자체가 소멸할 수 있고, 따라서 기본소득을 계속해서 지급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 외에 다양한 입장에서 감각적인 비판이 있다. 생태사회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물질적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소비를 늘릴 수 있다거나, 국가가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때문에 국가가 강화 될 수 있고 이는 자율주의나 무정부주의, 혹은 국가 소멸의 전망에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쟁점들을 염두에 둘 때 기본소득 옹호자들, 특히 왼쪽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선적 으로 두 가지 문제를 해명해야 한다. 하나는 이른바 노동윤리의 문제인데, 이는 인간 생존에서 노동의 의 미와 사회구성원의 생존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도 어느 정도는 노동을 해야 할 것이 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사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노동’ 은

람들이 말하는 노동은 인간의 활동 가

임금노동으로 한정된다. 하지만 임금을 받지 못

운데 일부인 임금노동으로 한정된다. 하지만 가사노동 논쟁에서도 알 수 있 듯이,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간의 여 러 노동 혹은 활동은 생존을 위해서도

하는 노동 혹은 활동은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하 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오늘날 대다 수의사람들은‘놀고있다’ 고말할수없다.

필요하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뭔가 활동을 하고 있고, 따라서‘놀고 있다’ 고 말할 수 없다. 노동윤리에서 나오는 비판은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일하던 사람들도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예측 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의 연대성을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현존 사회의 기준으 로 판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지금처럼 생존을 위한 강제 속에서 임금노 동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이 개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두 번째로, 미국식의‘거친 개인주의’ 가 아니라면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회가 사회구 성원의 생존에 책임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를 보장하느냐이다. 지금까지 사회구성원의 생존을 가장 강하게 보장한 체제라 할 수 있는 사회민주 주의적 복지국가의 경우, 경제활동이 가능한 사회층의 생존은 완전고용의 추구를 통해 보장하고, 나머지 생애 주기 및 질병 등에 대해서는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사회정책을 통해 보장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앞서 말한 노동윤리 및 사회구성원의 기여를 전제로 한 구성물이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은 노동 여부와 상관없 이 사회구성원 모두가 생존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본다. 마치 정치적 권리가 아무런 기획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41


기여 없이 주어지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의무와 직접적으로 연동되지 않고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 지다. 이것이 좌파 공화주의 혹은 사회적 공화주의의 기본적인 태도이며, 이때 국가 혹은 정치공동체는 말 그대로 구성원의 삶을 직접적으로 책임지는 위치에 있게 된다.

상황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꽤나 오래된 것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1980년대 중반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이때 기본소득이 재발견된 이유 가운데 하 나가 기존 복지국가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었다. 우선‘한계’ 란 복지국가가 전제한 완전고용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다.‘문제점’ 은 복지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방대한 관료체계 및 수급자 선 별로 인한 낙인효과다. 기본소득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두에게 지급하는 소득이므로 선별을 위한 관리 체 계나 이로 인한 낙인효과가 당연히 없다. 기존 복지국가의 토대이자 목표인 완전고용과 관련해서 보자면,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 적 정책, 산업구조의 변화, 기술 변화 등으로 인해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거나 이미 넘어갔다는 인식이 나 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정규직 산업노동자 및 이들에 의한 강력한 노동조합이 존재하던 시절이 끝나 고, 다양한 비정규불안정 노동자가 노동력의 다수를 차지할 뿐 아니라 거시적으로 일자리 자체가 경향적 으로 줄어드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고용’ 이라는 형태로 사회구성원의 삶을 제대로 보장하 기는 불가능해졌고,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소득의 정세적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관습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이런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도를 찾기보다는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 기존 정치세력과 노동자운동의 기본전략이었고, 이 속에서 기존 복지국가는 계 속해서 침해당하고 후퇴했다. 그렇지만 2008년 경제위기는 글로벌 자본주의 전체를 빠져나오기 힘든 위

1986년 9월 벨기에의 신루뱅에서 열린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 창립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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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 몰아넣었고, 이에 따라 이를 추동해온 신자유주의적 방책 자체도 한계에 빠졌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 다.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사회를 먹 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부담이 되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사회를 먹여 살리는 것

고 있다. 다만 계급관계로 인해 상층이

이 아니라 사회적 부담이 되고 있다. 다만 계급

그 수혜자가 될 뿐이다. 여기에 더해 자 동화와 인공지능(AI)의 발전은, 한편으론

관계로인해상층이그수혜자가될뿐이다.

인간을 힘들고 지루한 노동에서 해방시 킬 가능성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빼앗는 위협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날로 더해질 것으 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이‘기본소득’ 이 아이디어를 넘어 정치적 의제로 제출되고, 구체적인 실험으로 구상되도록 했다. 한편에서는 일자리의 부족과 소득불평등의 해결 방안으로 (이름은 다양하지만) 사회구성원에게 일정 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발전을 긍정적인 효과가 나는 방향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퍼지고 있 다. 특히 후자는 기술의 발전이 사실상 모든 사회구성원의 직간접적인 기여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누 구나‘일정한 몫’ 이 있다는 공유의 관점까지 내포한다. 여기에 더해 생태적 위기를 넘어서는 고리로써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생태적 전환을 위해 서는 어떻게 말하든 물질적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 생산을 위한 노동 자체를 줄이고, 그 시간을 다른 인간 활동에 할당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 사람들의 소 득이 줄어든다는 것인데, 이때 필요한 것이 기본소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얻은 소득을 더 많은 물 질적 소비에 쓴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물질적 족쇄에서 해방될 때 사람들은 아 마도‘본연의’인간적 활동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쏟을 것이다.

위치

기존 좌파 쪽에서 기본소득을 비판할 때“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에”문제라는 주장을 한다. 그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의 변화를 직접적인 사정(射 程)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곧바로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

져오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염두에 둘 때 기본소득은 두 가지 위치를 지닌다. 하나는 당면한 여러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결합 정책으로서의 위치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 노동당에서 제출한‘노동 사 회 재구성 전략’ 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이른바 노동개혁은 어떻게 해서든 노동비용을 낮추면 서도 일자리 자체는 늘리기 위해 임금피크제라든가 비정규직 제한 완화 등을 구체적인 방책으로 제시한 기획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43


“진보정치와 기본소득” 을 주제로 6월 18일 노동당에서 진행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공동의장 칼 와이더키스트 초청 정책간담회 모습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다. 이는 결국 대부분 일자리의 저임금화와 불안정화를 가져올 것이기에 절대 다수가 반대하고 있다. 이 에 반해 노동당의 제안은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일자리 증대,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임금소득 향상, 그래 도 부족한 부분에 대한 기본소득 지 급 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패키지

노동당은노동시간단축에따른일자리증대, 최저

계획이다. 따라서 제안대로 이루어

임금 인상을 통한 임금소득 향상, 그래도 부족한

질 경우, 일자리 증대와 소득 향상

부분에 대한 기본소득 지급 등으로 이루어진 패키

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

지계획을제안한다. 제안대로라면, 일자리증대와

다. 물론 여기에는 최소한 영국 정

소득향상이라는두마리토끼를잡을수있다.

도의 조세 부담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재분배 효과가 있는 조세 개혁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의 위치와 기능은 사회구성원, 즉 시민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제공함으 로써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기존 사회민 주주의와 과거의 공산주의 체제 모두 사회구성원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이 부동(不 動)의 사회를 만들어낸 이유이다. 20세기의 대중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의 경험과 요구를 거친 오늘날

더 나은 사회는 사회구성원 다수의 자발적인 구상과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정치의 과제는 그 44


런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때 기본소득이 유력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공화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하겠다. 공화주의의 이상에서 국가 혹은 정치공 동체는 시민들의 편안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여기서 시민들은 타인을 착취하지 않고, 착취당하지도 않으며, 정신적으로도 독립적인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독립적인 시민이 필요한데, 과거에는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이나 자기 작업장이 있는 장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 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물질적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필요한데, 이것이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 오래된 유산이긴 하지만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20세기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와 현대사회의 특정한 기술적 경향, 생태적 위기 등 에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본소득이 많은 사람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연대적・공동체적 삶 속에서도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보장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연결하는 적절한 다리가 될 수 있다.

기획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45


기획 /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기본소득 바람이 일고 있다, 점점 더 크게 2015년 세계 기본소득운동에 대해

2013년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실시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한 ‘기본소득 국민발의’ 가 성공한 이후, 기본소득운동이 점점 더 힘을 얻 어가고 있다. 올 한해만을 돌아봐도 적지 않은 변화와 성과가 눈에 띈 다. 이 변화와 성과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약칭 BIEN)에 속한 23개 나라 네트워크들과 여러 개 나라로

이루어진 3개 지역 네트워크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각자의 2013년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자리에서 현실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실시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기

형성된 것도 있다. 세상의 변화가 늘 그렇듯이.

위한‘기본소득 국민발의’ 가성

2015년에는 특히, 전 세계에서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노

공한 이후, 기본소득운동이 점

력이 눈에 띄게 커졌다. 여러 정당들이 선거공약으로 기본소득을 채택

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 올

했고, OECD 가입국들에서 기본소득을 부분적으로 실시하려는 구체

한해만을 돌아봐도 적지 않은 변화와 성과가 눈에 띈다.

적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노력의 바탕에는 몇 가지 문제의식이 있는데,‘인간 의 존엄함을 지키는 빈곤퇴치’ ‘생태적 전환’ ‘자동화 시대의 안전망’ 등이 그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제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문제 에 대한 해법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흐름, 화석연료 고갈과 기후변 화문제를 보통사람들의 희생 없이 극복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기본소득

박선미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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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지하는 흐름, 현대 기술변화의 핵심인‘자동화’ 로 인한 삶의 변화 에 대응하는 제도로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흐름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새로운 인권운동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우리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사실 최근 현상이 아 니다. 기본소득론의 개념 자체가 개별인격을 존중하는 사회제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특히 유럽에서) 사민주의 정부들이 삶의 안전망으로 실시해온 생활보장제도가 유 효하지도, 적합하지도 않다는 비판이 깔려있다. 오늘날, 빈곤선 아래의 사람들이 정치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려는 취지로 실시해온 사 민주의적 생활보장제도는 모욕과 낙인효과라는 근원적 문제와 포괄성 부족이라는 효력 문제를 모두 갖고 있다. 생활보장제도의 구제대상임 을 확인하는 심사과정에서 개별인 격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낙인효과 는 끊임없이 구성원의 일부를 존엄 한 시민자격이 박탈된 사람들로 만 든다. 더욱이 20 대 80 사회에서, 구성

사회민주적 생활보장제도는 모욕과 낙인효과라 는 근원적 문제와 포괄성 부족이라는 효력 문제를 모두 갖고 있다. 심사과정에서 개별인격에게 가해 지는 모욕과 낙인효과는 구성원의 일부를 존엄한 시민자격이박탈된사람들로만든다.

원의 다수가 빈곤 위협에 처한 사회 에서, 임금노동으로 소득을 얻을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사회에서, 임금노동이 아닌 노동과 활동이 사회 적・경제적으로 공동체에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폄훼되는 사회에서, 이런 선별적 생활보장제도는 대다수 의 구성원을 수혜대상으로 정하지 않는 한 실효성이 의심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캐나다 앨버타 주의 두 대도시, 캘거리와 에드먼턴은 기본소득으로 모든 구성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하려 하고 있고, 핀란드 중앙정부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는 기본 소득 시범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생태사회로 전환하는 의미 있는 매개체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과 기후변화는 재앙이지만, 모두에게 재앙은 아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심하게,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약하게 직접적 피해가 가해지는 불평등한 재앙이다. 이 러한 생태문제와 생태적 불평등문제를 동시에 풀어나갈 매개로 기본소득이 부상하고 있다. 미국 오리건 주의 법안이 대표적 사례이다. 2015년 4월, 미국 오리건 주의회에서 생태문제 개선을 위한 기본소득 법안이 통과됐다.‘상한제와 배 당(Cap and Dividend)’ 을 위한 2개의 법안이 통과됐는데, 환경오염 발생 측에게 탄소배출권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모든 오리건 주 사람들에게 나눠주되, 매년 탄소배출 허가량을 줄이는 정책을 위한 것이었 기획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47


다. 그리고 직접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매년 발생하는 모든 거주민들의 수익금으로 오리건 주의 자연자 원에 투자하는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또한, 여러 나라의 녹색당들이 이런 문제의식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했고, 나아가 기본소득을 사회적 불 평등과 빈곤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받아들이며 총선공약으로 채택했다. 2015년에 총선을 치른 영국 잉글 랜드웨일스녹색당, 포르투갈 PAN(사람-동물-자연을 뜻하는 Pessoas-Animais-Natureza가 정식명칭)이 공 약으로 내세웠고(각각 1명이 당선됐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캐나다녹색당, 한국녹색당 등이 공약으로 채 택했음을 공표했다.

자동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전망

“농업생산에서 말(馬)의 역할이 트랙터의 도입으로 처음에는 줄어들다가 나중엔 완전히 없어진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생산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의 인간의 역할은 줄어들게 돼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 자 바실리 레온티에프

자동화 시대의 삶, 자동화가 노동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본소득이 점점 설 득력을 얻어가는 중이다. 이런 지지의 흐름은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직접적 영향 때문이라기보다는,‘접 속’ ‘공유’등의 개념에 주목하는 IT기술혁명 관계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동기가 더 크게 작용한 다. 대표적인 일화가 2015년 9월 29일 세계기술네트워크 주최로 열린‘기술적 실업에 관한 세계정상회의’ 에서 저명인사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한 일이었다. 클린턴 정부 시절에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현재 미국 민주당 샌더스 대통령후보의 선거캠프에 결합해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전기자동차로 유명한 테슬라모터스(Tesla Motors)의 수석 소프트웨어 엔지니 어인 제럴드 허프 등이 이날 지지를 표명했다.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회의의 주요 주제는 자동화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효과였는데, 자동화에 대한 정책대응을 논하는 동안, 거의 모든 참

다소 극단화하자면 자동화된 미래 사회는 소수의 고용인(자본가), 소수의 피고용인 (정규 노동자), 다수의 실업자로 삼분될 것 이라고그들은전망한다.

석자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계를 일자리 에 의존하는 세상에서 자동화는 영구적인 저 임금 또는 영구적인 실업을 가져올 수 있고, 다소 극단화하자면 미래 사회는 소수의 고용 인(자본가), 소수의 피고용인(정규 노동자), 다

수의 실업자로 삼분될 것이라는 전망이 참가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리고 기술혁명이 낳은 부작용 48


은 기술혁명이 낳은 혜택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기술혁명 덕분에 생겨난 부와 수익의 원천을 공유재산으로 만들어 그 수익금을 모든 사람의 기본적 생 활소득으로 보장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자동화의 혜택을 공유하게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버트 라이 시는 특허권과 상표권을 공유재산으로 삼는 방법을 제안했고(다소 미국에만 해당하는 방법일 수는 있다), 노 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기본소득 지지자인 허버트 사이몬은 지식과 경제활동을 통해 버는 소득의 90퍼센 트가 공유재인 지식을 활용한 대가임을 역설하면서 기본소득 재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전 세계가 똑같이 전면적 자동화를 겪진 않을 것이고, 노동자들의 힘이 약해 저임금 구조가 가능한 지 역과 나라 또는 분야에서는 기계보다는 노동력을 동력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자동화 현상은 불균 등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가 이미 급물살을 타는 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을 대응책으로서 주목하는 추세는 늘어날 듯하다.

기본소득 실험들의 다양한 모습

나미비아, 인도의 빈민지역에서 실시된 이전의 기본소득 시범사업과 달리, 앞에서도 말했듯이 최근 들 어서는 OECD 가입국 정부들이 기본소득 정책을 실시하려고 나섰다. 2015년 핀란드 중앙정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 등 30개 도시, 캐나다 앨버타 주 에드먼턴과 캘거리, 한국 성남시, 미국 오레곤 주 등이 그 런 정부들이고, 2013년에 국민발의된 스위스의 기본소득은 2016년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다. 이 기본소득 정책들은 모두 기본소득 논의의 진전을 가져다줄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성남시와 네덜란 드 위트레흐트 시, 핀란드 정부 등이 실시하려는 정책은 특히 더 주목할 만하다. 언론을 통해 이미 소개됐듯, 성남시의 청년배당 정책은 기본소득 개념(무조건성・보편성・개별성)을 구 현하는 청년정책이다. 성남시에서 3년 이상 거주한 19~24세 청년 모두에게 조건 없이 연 100만 원을 지 급하는 이 정책이 만약 실시된다면, 조건 없는 보편적 소득보장이 공동체와 개인에

성남시의 청년배당 정책은 기본소득 개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수 있는 첫 기회가

(무조건성・보편성・개별성)을 구현하는 청

될 것이다. 다만, 매우 적은 소득보장인 데 다 지자체 한 곳에 한정된 정책이어서 지 역의 상황과 조건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 칠 수 있으므로, 여러 평가와 해석의 충돌

년정책이다. 실시된다면, 조건 없는 보편적 소득보장이 공동체와 개인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첫기회가될것이다.

을 낳을 여지가 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에서 준비 중인 기본소득 정책은, 정확히는 기존 사회보장제도인 국민최저소 득제도의 대안을 찾기 위한 비교연구실험이다. 현재 국민최저소득제도는 자격심사가 있고 구직노력을 조 건으로 하고 있으며, 개인단위로 지급되지 않고 가구 단위로 사정평가한다. 이번 사업은 국민최저소득제 기획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49


도와 새로운 사회보장모델들을 일정 기간 동안 병행해서 실시한 후에 상대적 우위를 비교하는 실험이고, 기본소득이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 사업이 의미 있게 진행된다면,‘노동 의욕 저하’ 와‘경제 악영향’ 이라는 기본소득 비판론과 관련하여 좀 더 진전된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얻게 될 것이다. 핀란드에서 준비 중인 기본소득 시범사업은 여러 가지로 주목된다. 우선, 핀란드의 기본소득 지지층이 좌파에서 우파까지 기존 정치스펙트럼으로 설명할 수 없게 널리 분포해 있고, 이는 전 세계의 압축판 같 은 모양새이다. 오른쪽의 중앙당, 핀란드인당(Finns)에서부터 왼쪽의 녹색동맹(Green League), 좌파연합 (Left Alliance)까지 기본소득 지지 의원이 분포해 있다. 가운데의 사회민주당은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입장

이었다가 최근에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 중이다. 물론 핀란드에서 그동안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적극 지지하고 구체적인 연구와 실행방안을 내놓은 정 당은 정치스펙트럼의 왼쪽에 있는 녹색동맹과 좌파연합이었다. 그에 반해 중도우파인 중앙당은 1990년 대 이후로 기본소득 지지 입장이었지만 두루뭉술했고 오랫동안 기본소득 이슈에 침묵해왔다. 심지어 적 지 않은 중앙당 의원들은 기본소득을 선별적 소득보장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앙당은 2015년 4월에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걸고 총선을 치러 다수당이 됐다(참고로,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전체 의원 중 52.5퍼센트가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핀란드인당 등과 우파 연합정부를 구성한

중앙당은 지난 9월에 기본소득 시범사업 연구팀을 설치해서 기본소득 공약을 이행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핀란드 공공부문 예산을 20~30억 유로로 삭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자세한 삭감 계획을 알 수 없어서 속단하긴 이르지만, 기본소득으로 사회복지 전체를 대체하고 사실상 공공부문 을 축소하는 효과를 겨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그래서 현재 기본소득핀란드네트워크는 이 시범사업이 본래의 기본소득 개념을 구현하는 사업이 되도 록 가능한 한 협력하는 한편, 공공부문 예산 삭감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이번 핀란드 정부의 기 본소득 시범사업이 기본소득 지지층 내부의 균열을 가져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기본소득독일네트워크 창립자인 카티야 키핑 의원이 공동대표로 있는 독일 좌파당(독일 내 제3당)은 2016년 총선 공약으로 기본소득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창당 후 첫 선거인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채택한 스페인 포데모스는 이 선거 이후 대안정당으로 급부상했고, 다음 총선에서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채택할지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노동당 또한 지난 당대회에서 기본소 득을 2016년 총선 기본계획에 포함했고, 구체적 공약화 논의에 들어갔다. 2015년 세계 기본소득운동의 정치적 노력이 2016년에 더욱 진전을 보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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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열전

현대중공업 20대 노조위원장 정병모 당원을 만나다

좀더큰밑그림을 그리는정당이 되었으면

인터뷰・정리 : 강남규 편집위원 속기・사진 : 김혜연 편집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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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모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을 만난 날, 그는 단식 이틀째였다. 그는 노동조합 사무실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임기 만료인 11월 안에 노사교섭을 타결시키기 위한 단식이었다.‘조선 빅 3’중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은 이미 교섭을 타결했지만, 현대중공업은 협상이 지지부진한 모양이었 다. 그러고 보면 이 공장에 들어오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노동조합을 방문하러 왔다고 말하자 어딘가 분위기가 싸해지더니, 30여분을 기다리다가 노조 사무국장이 나타나서야 출입이 허가됐다. 정병모 위원 장은 노동당원이다. 진보신당 때부터 당적을 유지했다. 그에게 노동운동과 노동당에 대해 물었다.

할 사람이 없다고 포기하면 안 되지

강남규(이하 강) :《미래에서 온 편지》독자들에게 본인을 직접 소개한다면.

정병모(이하 정) : 현대중공업 노조 위원장이다. 당원인데 당원의 역할을 잘 못하고 있다. 중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공장노동자 생활하다가 81년도에 울산에 왔다. 82년부터 사원이 되어 만 33년이 지났다. 입 사 당시에는 노동조합이 없었다. 87년을 거치면서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조합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가 장 초기에 11명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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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노조 위원장에 출마한 이유가 있나.

정 : 운동이 사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지리멸렬하고 있지 않나. 2002년 어용노조에 집행부를 뺏긴 뒤 2004년 민주노총 금속연맹에서 제명되는 등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신이 커졌다. 그 런 상황에서 14대(2002년)부터 선거에는 계속 출마를 했지만 당선이 안 됐다. 선거를 아무리 해도 희망이 없어 보이고. 노동조합을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주도하지 못하고. 제가 출마하던 2013년에는 후보를 만들 수도 없었다. 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할 사람이 없다고 이걸 포기하면 안 되지 않나. 진보 정치도 마찬가지고. 내가 역량이 안 되지만, 부족하지만 맡아서 한 거다.

강 : 이번 달이 지나면 임기가 끝난다. 무엇을 가치로 활동했고, 얼마나 달성한 것 같나?

정 : 많이 부족했다. 많이 부족했는데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생각했다. (민주노조) 12년 공백을 메우는 데 2년이 너무 짧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하고 있다.

강 : 그래서 재선 도전하시는 거냐.

정 : 좀 안정화를 시켰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가 있다. 집회를 하면 삼천 명 사천 명, 열악해도 이천 명까지는 모인다. 내가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시기처럼 이 친구 들이 노동조합을 생각하고 있다. 이 친구들한테 노동조합이 어떤 건지 얘기하고 싶고, 노동자 조직을 안 정화 시키는데 제 역할이 있지 않겠나. (* 인터뷰 이후 그는 정파 내‘내부경선’ 에서 탈락했다.)

강 :‘강성’ 으로 평가된다.

정 :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아주 온당하지 못한 표현이다. 다만 노동조합 운동의 원 칙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조합 법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에도‘강성’ 이라고 압박하는 것은 주홍글씨를 새기는 거다. 회사가 하는 것에 반대하면 강성 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언론의 나쁜 표현이다.

죽음의 공장

강 : 소위‘조선 Big 3’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중 유일하게 임단협 체결이 아직 안 됐다. 무엇이 쟁점인가? 진보정치 열전 53


정 : 기본급 문제 및 여러 가지 문제다. 기본적인 구조와 상관없이 임금협상 타결하면 주는 일 시급으로 현혹시켜 왔기 때문에, 젊은 친구들 중에는 기본급이 최저임금을 밑도는 친구들도 있다. 그래서 내년도 최저시급 6030원과 기본급을 맞추려다보니 늦어지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있고, 제 임기가 끝나가고 있 어서 대충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제가 봤을 때는 다음 주, 다다음 주 초반까지가 협상을 할 수 있는 시 간이다. 그때까지 총력을 다 해서 하고, 안 되면 무겁고 힘든 짐을 차기 집행부에 넘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 결국 임기 내 타결되지 못하고 연말로 임단협이 연기됐다.)

“하청 직원들에게 안전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 다. 배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비상탈출구가 어 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맡긴다. 안전교

강 : 현대중공업의 별명이‘죽음 의 공장’ 이다. 지난 1년 동안 13명 의 하청노동자가 산재로 죽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육시키면돈이나가니까덜시키는거다” 정 : 하청노동자가 왜 그러냐면, 사내 하청 직원들에게 안전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다. 마구잡이로 (현장에) 투입한다. 배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기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비상탈출구가 어디 있는지, 이런 걸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맡긴다. 안전교육 시키면 돈이 나가니까 덜 시키는 거다. 물론 위험한 작업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전교육을 하면 54


덜 위험할 수 있다. 결국 하청노동자가 죽는 이유는 자본이 과도한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강 : 하청지회와 관계는 어떤가?

정 : 하청지회랑 관계는 썩 좋은 건 아니다, 솔직히. 우리도 전심을 다해서 하고 있지만 정규직하고 비 정규직 사이 인식 차이가 있지 않겠나. 사회를 보는 지점에서. 작년 한해는 서로 어려웠는데 올해는 그래 도 많이 개선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노조가입 운동도 하청지회랑 같이 하고 있다. 우리가 정규직이라 예산이 좀 있으니 하청지회 투쟁 지원하기 위해 사업 같이 하고, 그 정도는 된다. 하지만 아직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은 건 사실이다.

강 : 2004년 민주노총 제명 이후 아직까지 상급단체에 가입하고 있지 않다. 당선 당시 인터뷰를 보니 조합원 의견을 듣겠다고 했는데, 2년간 살핀 분위기는 어떤가?

정 : 상급노조 가입은 필연적으로 추진할 일이다. 하지만 절차와 방법에 있어 조합원들 의사에 따라야 한다. 민주노총 직가입 문제는 아주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런데 금속노조 전환 문제는 조합원 3분의 2가 찬성할 문제다. 한번 시도하고 나면 또 몇 년 기다려야 할 문제라서. 실제로 전환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 지는지, 우리가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런 데 고민이 있다. 조합원들 사이에 민주노총 가입이 왜 필요한지, 금속노조 전환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공감대 조성이 우선이다.

강 : 다수 청년들은 현대차/현대중공업 등 대기업 노동자를‘귀족’ 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한다. 알고 있 나?

정 : 33년 다닌 내가 기본급이 238만 원이 다. 이걸 귀족노동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33년 다닌 내가 기본급이 238만 원이다. 이걸 귀족노동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사회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 사회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아쉽다.

이다. 아쉽다.”

강 : 노조 조합원 중에 젊은 층에서 활동도 많이 하나?

정 : 작년부터는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87세대라고. 이제 세대교체를 이뤄가고 있으 니까. 강 : 젊은 층의 성향이랄 게 있나? 진보정치 열전 55


정 : 그냥 먹고 살기 힘드니까. 회사 말 잘 들으면 먹고 살 줄 알았는데, 들어도 힘드니까. 간단히 얘기 하면 현대중공업 들어오는 길 중 하나가 산하의 직업훈련소를 통해 6개월 훈련 후 산하 협력업체 2년 경 력이 있으면 기능직 공개채용 자격을 부여한다. 그런데 한 번에 되나. 만 명씩 밀려 있는데. 빠르면 한번 두 번 세 번… 보통 7수해서 들어온다. 그 사람들 나이가 30대 중반이다. 게다가 연봉시급은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내 삶을 내가 바꿔야겠다, 그런 걸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진보정치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운동

강 : 당 얘기를 해볼까. 언제부터 당원이었고, 왜 가입했나?

정 : 진보신당 때 가입했다.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있어서 진보정당이 필요하기 때문에.

강 : 다른 정당들도 있었는데 왜 진보신당이었나?

정 : 왜 진보신당이냐 묻지는 말라. 저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 추구하는 바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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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노동’ 당이다. 노동자로서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당과 노동운동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 는가?

정 : 노동조합 활동과 정당 활동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투쟁현장에서는 (정치역량을) 제대로 발 휘하기 어렵다. 노동조합이 정치적으로 색깔을 가질 필요도 있긴 한데, 너무 정치적으로 하면 정치조직처 럼 될 수도 있고. 조심스러운 게 있다. 올바른 진보정치를 위해선 현장의 통로가 필요하다. 그것이 노동조 합의 생각이 아닌가. 이 노동조합의 생각을 건전하게 잘 전달해서 정말 우리가 꿈꾸는 진보정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상호보완하는 정도의 관계였으면 좋겠다. 어디가 어디를 이끌어가고, 이런 것은 바람직하 지 않고.

강 : 최근의 진보결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 : 들어는 봤다. 머리가 짧아서 해석이 잘 안 된다. 현장에 실망이 많다. 글자 그대로 당-운동이라는 것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운동이라면, 이념끼리 논쟁 때문에 당이 갈라지고, 쪼개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분당사태, 탈당사태, 이게 정치 불신이나 정치냉소, 나중에 혐오까지 갈 수 있다. 많은 현장의 노동자들은 진보정치가 건전하게 발전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한다면 더 큰 실 진보정치 열전 57


망감을 주지 않겠나 생각한다. 현장에서 우리는 돈 보태주고, 몸 보태주는 호구들이냐, 그런 볼멘소리가 있다.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현장 밑바닥의 소리가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

강 : 노동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정 : 글쎄, 답이 있을까. 저도 조합 활동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한계도 많이 있고 제가 그런 큰 밑그림 을 그리질 못한다. 어찌됐든 조합원 대중들하고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합원들은 당장 눈앞의 경 제적 이득에 관심이 있지만, 노동운동은 경제적 이득을 벗어나는 행위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런 데서 고민 도 있고, 어떻게 잘 절충해야 하나 싶다. 현장의 지회장들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진보정치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운동이 라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강 : 알바노조 운동을 해온 구교현 씨가 대 표가 됐다. 조선노동을 해온 노동자로서 바라 는 바나 하고 싶은 말이 있나?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좀 더 큰 밑그림 을그렸으면좋겠다.”

정 : 알바노조 운동하고 조선소 노동자 운 동하고는 비슷한 맥락이 있을지 모르지만, 진

보정치 운동은 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바노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진보정치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좀 더 큰 밑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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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임현주전국공무원노동조합울산본부북구지부장인터뷰

진보정치 열전 59


노동르포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임현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울산본부 북구지부장 인터뷰 서분숙 기록 노동자

어깨까지 내려오던 그의 머리카락이 짧아졌다.‘정직 3개월’ 이라는 징계를 받은 지 2개월 째, 그의 업무가 정지된 지도 2개월째다. 갑자기 그에게서 잘려나간 업무처럼 늘 그의 목을 감싸고 바람처럼 흔들리던 검은 머리카락이 사라진 모습은 낯설었다. 인터뷰 장소로 들어서 는 그를 한동안 나는 바라보았다. “머리 한번 잘라보십시오. 엄청 시원하고 좋네요.” 그의 어깨 너머로 단풍든 가을나무가 흔들리고 있다. 머리카락을 잘라보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긴 머리카락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나의 한 시절이 떠오른다. 이십여 년도 훨씬 이전 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젊었지만 살아가는 일이 무겁고 힘이 들었다. 견디지 못한 삶의 무게 는 때로는 내 어깨를 짓누르고 허리를 쑤셨다. 환상 같던 통증이 점점 현실의 통증처럼 생생 하게 다가올 무렵부터 나는 내 몸을 누르는 작은 부피의 무게도 두려웠다. 겨울에도 외투를 입지 않았고, 심지어는 손톱이나 발톱의 무게조차도 손가락 발가락 끝을 짓누르듯 고통이 느 껴지기도 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가뜩이나 숱도 없고 가는 머리카락이 무게가 나갈 리 가 없었지만 무겁게 느껴졌다. 두피만 겨우 가릴 정도로 남겨두고 나머지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렸다. 여름날의 풀잎처럼 쉼 없이 수북하게 올라오던 머리카락이 견딜 수 없이 무겁게 느껴지던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정직 징계 당하고 바로 자르신 거예요?” 이번에 울산시가 북구청 공무원들에게 가한 징계가 그의 마음을 많이 힘들게 한 것인지, 혹 그 일 때문인지 물어본 것이다. 그 즈음에 자른 건 맞지만 꼭 그 일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60


지난 8월 17일, 울산시는 민주노 총 4.24 총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북구청 공무원 3명에게 해임, 강등,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전국 지자체에서 고발된 공무원 35명 중 북구청만 중징계를 요구했고, 이것이 실제 징계로 이어진 것이다. 태어나 자라났고, 어느 날 엄마가 되었고 엄마가 된 후에 공무원이 되 었고 그리고 지금의 순간까지 되돌아 보면 그의 삶은 우연으로 이어진 삶 이다. 그러나 밑둥지 없는 나무가 없 듯 지금의 삶은 과거의 시간과 연결 되어 있다. 나는 지금의 그를 만든 지 난 세월이 궁금했다.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냥, 무조건, 공무원들은 역량이 뛰어나야 해요

학교 다닐 때는 반항기가 많은 아 이였어요. 대학교 일학년 다니다가

울산시 북구청의 공무원 징계에 항의하는 일인시위를 하는 임현주 지부장. 그는 정직 징계를 당한 후 머리를 짧게 잘랐다. (사진 : 임현주 제공)

휴학계를 내고 결혼을 일찍 했죠. 그러다가 애 키우다 보니 답답하기도 하고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는데 여 건이 안 되어서, 그나마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게 뭔가 찾는 중에 공무원이 생각 난거죠. 작은 아이가 돌 되 었을 때, 막 걸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 어린이집 바로 보내 놓고 공부를 시작했죠. 그래가지고 학원 다니면서 공부를 해서 공무원이 된 거죠. 큰 뜻이 있어서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래서 공무원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너무 비합리적이고 좀 이상하더라고요. 그만두려고 생각도 많이 했었고…. 지금은 일반 회사 조직보다 공무 원 조직이 오히려 합리적이라 생각이 돼요. 친구 남편이 현대중공업 다니는데, 옛날에 정몽준 전 회장이 대 선후보 나왔을 때 서울 올라가서 선거운동도 해야 하고, 그런 게 있더라고요. 공무원은 정치적인 자유가 없 다뿐이지 막 그런데 동원되지는 않아요. 동원된다고 해봐야 국민들 행사, 그런 데는 당연히 하는 거고, 지금 은 오히려 공무원 사회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이천년 초 그때는(처음 공무원이 되었을 때는) 권위적이 고 인수인계를 하는 데도 며칠 걸리지 않았거든요. 일반 기업들은 몇 달씩 걸려 인수인계를 하기도 하는데, 노동르포 61


공무원 조직은 그 이전에 이년 가까이 전임자가 해오던 큰 업무를 그냥 바로 받아서 쳐내야 하니까 그 자체 가 비합리적이죠. 그냥, 무조건, 공무원들은 역량이 뛰어나야 해요. 내가 힘들다고 주저앉을 수 없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업무분장상 떨어지는 일은 다 해야 하는. 보통 이삼일 전에 발령이 나면 이삼일 뒤에 새로 발령받은 자리에 나는 가있어야 하고, 이삼일 동안 내 자리에 올 사람에게 일을 인계해줘야 하고, 이삼일 동 안 내가 일 할 부서에 가서 일을 다 받아야 하니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오고 가고 연동1)이라는 게, 같이 일 할 시간을 주면 해소가 좀 되겠죠.

천천히, 공무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준다면

첫 발령을 받은 부서는 사회복지 업무를 하는 부서였어요. 아동에 관한 업무를 봤는데 유기아동이나 방 임아동을 가정위탁이나 양육원으로 연결하는 일인데, 한번은 밤 열시에서 열한시쯤 당직 근무할 때 아이가 파출소에 있다고 연락이 와서 아이를 데려와 당직실에 재우고 다음날 부모님께 데려다 준 일이 있어요. 이 런 일을 하다 보면 좀 힘들긴 해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들죠. 양육원으로 보내져야 할 상황에 놓인 아이들도 어떻게 잘 해서 가정위탁으로 보내고, 나중에 내가 다른 부서로 옮기고 나서도“임 주사 있을 때는 아이들 가정위탁으로 보냈는데 왜 지금은 양육원으로 보내려고 하느냐”이런 이야기 들었 을 때 보람을 느끼죠. 그런 건 상대적으로 나중에 듣는 이야기이지만 일을 하는 동안에는 내가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대개 보람이 있죠. 저는 일을 하면서 그때가 가장 보람 있었던 것 같아요. 기존 업무보다 다른 걸 좀 더 찾아서 아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그런 거요. 공무원이 메리트가 좀 있는 게, 공무원에게 재량권이 좀 있어요. 지침이 내려온다고 하지만 세세하게 다 내려오지는 않거든요. 지자체마다 다르고 같은 지침이라 하더라도 표출되는 방법은 다 다르거든요. 다양해요. 담당 공무원에게 재량권이 있기 때문에 담당 자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진행을 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이 받는 혜택이 달라지거든요. 그런 걸 보면 굉장 히 무서운 직업이기도 하지만 또 충분히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이라고요. 그렇게 하려면 생각을 할 수 있 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러기에는 너무 바빠요. 업무량은 많고 사람은 적으니까. 공무원 한 사람이 책임지고 있는 국민 수가 너무 많거든요.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단위 업무를 몇 가지씩 가지고 있거든요. 저도 지금 시설 업무 가지고 있고 가정위탁 업무 가지고 있고 수당도 줘야하고. 한 가지 일을 딱 내려주면 거기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잖아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이것에 대해 어떻게 집행을 할 것인가 고 민할 시간이 필요한 건데 그조차도 시간이 안 되는 거죠. 상황이 그래요. 대부분의 직원이 이 일을 하다가 다른 업무가 떨어지면 이것도 급한데 또 다른 업무를 해야 하고 하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다른 일이 터 지면 또 일을 해야 하는 거라 돌아와서 맨 처음 하던 일 다시 하려고 하면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이런 상황 이 계속 반복되는 거죠. 머리를 써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건 근무시간엔 못해요. 다른 부서에서 자료를 좀

1) 어떤 한 부분이 움직이면 다른 부분도 함께 잇따라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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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달라고 하면 자료 찾다보면 하루가 다 가요. 어떤 날은 본연의 업무를 못할 때가 더 많아요.

해마다 많은 수의 공무원들이 과로사로 숨진다. 5년간 공무원 과로사가 514명에 달한다는 통계는(2008 년 10월 13일자 공무원 뉴스) 공무원들의 과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구제역이나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이 자주 돌고 있는 시기에는 공무원들의 과로사도 늘어난다. 계절풍 기후의 영향을 받는 우리나 라는 사계절마다 기후로 인한 재난이 많이 발생한다. 홍수와 태풍, 봄・가을로 발생하는 산불과 폭설이 내 리는 겨울철에는 전 공무원이 비상 동원될 때가 많다. 임현주 지부장도 이런 시기에는 늘 핸드폰 소리에 민 감하다. 새벽에도 동원령이 내리면 빠른 시간 안에 재난 장소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밤샘근무를 하고 도 정상적으로 출근해서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과로가 누적되는 일이 잦다. 구제역이 발생할 때 공무원 과로사가 증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후변동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태풍이나 홍수가 자주 발생하고 육 식의 증가로 인해 구제역 발생 횟수와 지역도 예측을 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고 있다. 나라 간의 이동도 많 아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의 발생도 언제 어디서 또다시 번식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 어서 일어난 일이라 해도 현장으로 달려가서 수습을 하고 책임을 지는 일은 늘 민원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몫이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지자체는 공무원들에 대한 친절도 전화조사 등을 통해 서 만족도가 낮은 공무원들에 대해서는 친절도를 높이는 재교육을 한다. 친절하라는 강요보다는 친절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게 우선이 아닐까.

공무원이 친절할 수 없는 이유

공무원이란 직업 자체를 놓고 보면 정년이 보장된다는 것, 요즘은 (공무원퇴출제 도입으로 인해) 그조차도 흔들리고 있지만 그래도 월급 꼬박꼬박 나온다는 것, 그것도 큰일이지만 그것 빼고는 다른 메리트가 없어 요. 기본적으로는 사람이 누려야 할 자유가 없어요. 정치적 자유도 없고 신분제약도 많고 제약이 과도하게 많아요. 공무원이 봉사하는 직업은 맞지만 누구나 해야 하는 일, 공무만 보면 되지만 관계에서 우리는 늘 ‘을’ 이에요. 공무원은 민원인을 직접 대하다보니 다른 직업에 비해 애환이 굉장히 많아요. 전화 친절도를 조 사한다고 해서 공무원이 친절해지겠습니까. 차라리 인원을 더 충원해서 공무원들의 업무를 경감시키면 친 절해지죠. 그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전화 친절도 조사해 가지고 불친절 공 무원이라 해서 인센티브 주고 그런다고 해서 친절해집니까.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많이 바쁩니다. 공무원 들이 남아서 일하는 게, 일이 많아서 열한시까지 남아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젊은 직원들도 육아 때문에 평일에는 여섯시, 여섯시 반에 퇴근하지만 토요일에 출근해서 밀린 일을 하는 경우가 많고 자료도 많고 행 자부나 중앙부서에서 급하다 하면 그 보고자료를 해야 하니까, 고유 업무를 해야 할 시간이 모자라면 저녁 에 남아서 일을 해야죠. 과로사하는 공무원들이 있는데 그게 특정한 누구에게 제한되어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 혹은 베푸는 삶을 살고 싶어서 공 노동르포 63


무원이 된 사람도 많은데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한 달이 안 걸려요. 임현주 지부장은 두 아이의 엄마다. 바쁜 업무에 아이를 키우는데 필요한 시간까지 고려하면 그의 일상 은 늘 바쁠 것이다. 그런데 그 없는 시간들 가운데 그가 노동조합 일을 세워 놓은 까닭은 왜일까.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겠다

원래 성향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때 민주노총 사무실 침탈되었을 때(2013년 12월 22일, 경찰은 김명환 철 도노조 위원장 등 지도부 9명을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의 민주노총 본부 사무실에 강제 진 입했다), 그때가 큰 계기였어요. 그전에는 노동조합에 관심이 없었어요. 조합비만 내다가, 사회문제에는 꾸

준히 관심이 있어서 책이나 그런 건 꾸준히 보고 있었고…. 사무실 침탈되면서‘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겠다. 힘을 모아줘야겠다’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서울에) 올라가려고 했는데, 저희 (북구) 지부장하 고 여기 간부들이 본부(전국 공무원노조 울산지역본부) 차원에서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게 되었죠.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러고 나서 안면은 알고 있다가“뭐라도 좀 해야 하지 않겠니?” 라는 말

에“제가 해야 한다면 제가 할게요”그렇게 본부 정책부장 일을 맡게 된 거죠. 그게 지난 해 2월 달이니까 얼 마 되지 않았어요. 간부가 되고 나니 완전 생활 자체가 달라졌어요. 사고도 달라지고 사고가 달라지니 생활 이 달라졌어요. 이전에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피상적으로 보고 듣고 이 정도였지만 노조 일을 하면 서는 깊이 있게 보고 듣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더 열심히 활동을 하게 된 거죠. 불합리한 것, 구조적 인 문제 여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니까 더 고달파진 거죠, 사는 게.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 같아요.

“공무원은 아무런 특혜도 바라지 않습니다”공적연금 개악 저지를 위한 일인시위 중인 임현주 지부장 (사진 : 임현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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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달라졌다기보다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지부에 있는 간부들도 만나게 되고 전 국적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그러다 보면 거기에 관련된 책도 더 읽어보고 더 알고 싶어져 요. 전 호기심이 왕성한 편이라 책 같은 걸 많이 찾아서 보는 편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조금씩 조금씩 표 나 지 않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다른 단체들하고 연대도 하고 집회 도 가면서‘아, 우린 (상대적으로) 너무 편하게 노조 활동을 하는 구나’느끼는 게 많죠, 그렇죠. 그는 얼마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울산 본부 북구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북구는 울산에서 계속 인구가 유입되고 있는 곳이다. 공무원 수도 많고 업무도 많은 곳이다. 개악된 연금법 뿐만 아니라 당장 도입될 성과 급제나 공무원퇴출제에 대해서도 내부의 불만은 있지만 그 드러난 움직임은 둔한 듯하다. 조합원들이 스스 로는 싸우지 않으면서 노동조합 간부들에게만 기대는 듯하다는 나의 느낌을 그에게 전해보았다. 조합 간부 이기 이전에 아직 한참을 더 일할 젊은 공무원인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구조가 바뀌면 인식의 범위가 넓어진다

움직이지 않는 조합원들에 대해 섭섭하기보다는 움직여주면 좋겠지만, 또 그래야 하는 필요성을 아니까 노동조합에도 가입했겠지만 막상 하자고 했을 때는 선뜻 따라나서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런데는 분명 이유 가 있어요. 간부들이, 이것은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필요하다, 같이 가야한다,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 았을 수 있어요. 그것이 충분하지 않아서 조합원이 몰라서 가만히 있을 수도 있고 집회 같은 게 있을 때, 아, 가고는 싶은데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못갈 수도 있고. 일일이 개인적으로 싸우려고 하면 노동조합이 왜 필 요한가요. 개인적으로 말하는 것과 노동조합의 입을 통해 나가는 것은 강도가 다릅니다. 조합원들이 조합에 요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참여도가 높으면, 조합원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운영위원들이나 대 의원이나 노동조합에 와서 이야기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좀 더 많이 와서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문제가 있다, 운영위원과 대의원과 의논해서 문제제기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조합원들이 좀 과도하게 요구한다 싶어도 그건 이러이러해서 이렇다고 설명하면 됩니다. 당연합니다. 조합 원들이 참여해서 함께 싸울 상황을 못 만든 것이 큰 이유입니다. 그게 지금 지부의 실력입니다. 본부 운영위 원 하면서도 사람한테 치인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노조 전임이 아니라) 조합원들을 많이 만날 시 간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요. 더 좋은 여건을 만들면 노동조합의 힘도 더 커질 것입 니다. 구조와 사람의 문제는 함께 갑니다. 구조가 바뀌면 사람의 인식 범주가 달라집니다. 요구하는 게 달라 지죠. 예를 들어 노동조합이 10을 요구할 수 있는데 조합원들이 5, 6을 요구한다면 지도부는 그 조합원의 요 구를 따라 같이 가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지만 사람만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구조의 변화와) 같이 가 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정부와 싸우는 이유입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삼십대의 중반쯤을 걷는 삶이겠거니 짐작만 했을 뿐. 인터뷰를 마칠 때 노동르포 65


북구청장의 부당한 징계에 맞서 농성 중인 조합원들 (사진 : 임현주 제공)

까지 나는 그의 나이를 묻지 않았다. 내게 있어‘나이’ 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삶을 담은 사진조차도 거짓으로 합성하려는 위험한 시대다.‘진실’ 과‘거짓’ 의 구분 이 나이의 구분보다 절실한 시대다. 그래서 나는 한참이나 어린 그가 그냥‘동지’ 처럼 느껴졌다. 그 또한 노 동조합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서‘동지’ 라는 말의 절절함을 느꼈노라고 한다. 개악된 연금법뿐만 아 니라 당장 공무원 노동조합이 싸워야 할 일은 너무 많지만 그는 지금은 가능한 많은 이들과 함께 나갈 수 있 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그 방법 중 가장 우선인 것이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그의 마음에 담는 일이라고 한다.

“이제 좀 제대로 사는 것 같고 노동조합 활동에 욕심이 생겨요. 제대로 해보고 싶고 이 불합리한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더불어 사는 사회에 내가 좀 힘이 되고 싶다는 이런 생각을 다른 조합원들이 같이 할 수 있 으면 좋겠어요. 욕심이 생기네요.”

머리카락이 갑자기 짧아진 탓에 허전해 보이는 그의 어깨 뒤로 단풍든 가을 나무가 흔들리며 서있다. 참 고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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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서울시주민참여예산제 개선방안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

아래의 문서는 지난 4년 동안 서울시 참여예산지원협의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매년 참여예산사 업의 선정이 끝나고 차년도 제도 개선안을 마련하기 위해 지원협의회 차원에서 제출하는 개선방 안 의견서로 준비된 내용이다. 올해의 경우에는 대표집필을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이 하였기에 《미래에서 온 편지》 에 전문을 싣는다. 서울시는 해당 의견을 기초로 해서 내년도 제도운영계획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있다.(2015. 10. 현재)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한 기대

○참여예산제는 단순히 법 개정에 따른 행정절차로만 볼 수 없는 특징이 있으며, 이에 따 라 여타 참여제도보다 역동성과 갈등 가능성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음 - 무엇보다 참여예산제에 함께 하고 있는 지원협의회 민간회원의 입장에서는 서울시의 참여예산제가 (1) 시민의 역량을 강화시키면서 (2) 시민과 행정이 함께 변화하는 계기 를 마련하는 한편 (3) 기존의 하향식 예산편성 관행을 극복하는 재정민주주의의 상징 적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음

○따라서, 이번 논의가 참여예산제를 제대로 정립하고 새로운 행정 거버넌스, 참여민주주 의와 시민주도형 도시정책을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면 함

주민참여예산제 4년 간 추진경과

○천만에 가까운 인구수, 연간 20조가 넘는 재정을 운영하는 서울시에서 도입된 유래 없 는 광역도시형 참여예산제의 실험

정책포럼 67


- 250명의 시민이 직접 참여하고 500억원에 달하는 사업예산을 직접 결정하는 유형은 사례가 없음에 도 4년차의 정착기에 접어듬 - 초기에는 기존 참여제도(구 참여예산, 주민자치회, 각종 위원회 등) 경험자의 비중이 높았으나 점차 청년층을 비롯하여 처음 참여행정을 경험하는 대상이 늘어나는 추세

○매년 제도 개선을 위한 광범위한 논의와 이를 적극 반영하는 제도의 탄력성이 중요한 장점 - 2013년 분과위원장의 남녀동수제, 자체 윤리규정 마련, 2014년 온예산위원 과정의 제도화, 시민참여 단운영, 2015년 구/시사업의 분리, 시민전자투표 실시 등

○자치구 참여예산제도의 촉진보다는 사업 선정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고 참여예산제에 대한 전반적 인 인식이 낮은 한계 역시 뚜렷하게 나타남 - 자치구별 위원선정 방식, 제안사업의 자치구 꼬리표에 따른 자치구 경쟁 격화와 담당부서를 제외한 기타 서울시 부서의 제도에 대한 참여와 지원이 저조

실태분석 및 문제점

○위원공모 및 예산학교 - 이제까지 참여예산위원은 7:1 정도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높은 참여수준을 보이고 있으나, (1) 상대 적으로 50대 이상의 경쟁률이 높고 (2) 7배수에 달하는 응모자에 대한 후속 사업이 전무하며 (3) 상시 적인 위원 충원이 필요함에도 이에 대한 제도 보완이 되지 않고 있는 점은 개선해야 될 부분임 - 예산학교는 참여예산위원의 위촉 전에 한 차례 이루어지며 총 9시간 이수가 필요한 과정임. 하지만 (1) 연임위원을 위한 별도의 심화 프로그램이 부재하고 (2) 실제 참여예산위원으로서 활동하면서 겪 게되는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보수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고 (3) 예산학교의 이수자만 참여예산위원이 될 수 있는 조건에서 예산학교의 이수자들이 상시적으로 충원할 수 있는 참여예산위 원의 풀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고려되고 있지 못함

○사업제안단계 - 올 해부터 자치구 사업과 광역 사업을 분리하여 사업제안을 실시하였으나 (1) 사업의 실질적인 내용 을 보면 대부분 자치구 사업에 머무르고 있으며 (2) 매년 반복되는 사업(이를테면, 하수관로 개선, CCTV설치 등)이 참여예산사업으로 제안되고 있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함.

- 참여예산제의 특성상 생활권 사업의 비중이 높을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1) 신규사업에 대한 인 큐베이팅 기능이 전무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사업선정에서 배제되는 일(이를테면, 예산수준을 알 수 없 68


어 사업비 0원이라 표기된 사업은 분과회의서 배제됨)이 잦고 (2) 사업을 사전에 심사하는 각 부서에서 정

책사업의 수준에서 재편성하면서 신규사업이 이중적으로 배제되는 문제가 생기고 있음. - 이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형식적으로 광역사업 임에도 불구하고 의제별로 묶어 제시 된 사업들이‘구별 사업의 모음’ 이었다는 것으로, 사실상 광역사업이라 보기 힘들었다는 점임. 이는 현재 혁신적인 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구체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

○사업심사단계 - 현행 참여예산제는 자치구 참여예산위원회를 지역회의로 하는 자치구 제안사업과 소관 부서별 사전 검토를 거쳐 분과로 상정되는 광역 제안사업으로 이원화되어 있음. 이 과정에서 (1) 구 제안사업의 경 우에는 사업의 우선순위가 아니라 사업을 결정하는 제도운영의 적절성을 평가해야 됨에도 이에 대해 진행되지 못했고 (2) 부서별 사전검토가 사실상 사전심사의 의미를 띠게 되면서 참여예산위원들의 심 사가 제약을 받음 - 특히 (1) 사업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는 현장방문과 제안자 설명 등의 절차가 축소되거나 생략됨에 따라 사업의 적절성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2) 최종적인 사업선정 과정에도 현 장심사 절차가 소홀히 다뤄진다는 문제제기가 나옴 - [별첨]과 같이 참여예산위원 투표와 함께 시민전자투표를 도입한 것은 사업선정에 참여예산위원을 보충하는 역할을 적절히 한 것으로 보이며, 2013년과 2014년과 비교했을 때 선정사업의 비중 역시 건설 분야 사업이 줄어들고, 환경과 여성보육 사업이 늘어나는 변화가 나타남

○사후관리단계 - 선정된 사업의 모니터링 및 평가 과정은 이후 사업심사 및 선정과정에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하나 (1) n년도 사업의 평가가 n+1년도 사업 심사에 반영될 수 있는 제도가 없어 형식적으로 진행되 고 있고 (2) 미집행 사업에 대한 명확한 패널티가 없어서‘모니터링 무용론’ 에 대한 불신이 상당히 높 은 수준임 - 무엇보다 효과적인 모니터링을 위해서는 적절한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어야 하지만, 행정의 속성 상 추가적인 행정비용의 발생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고 기 집행된 사업에 대한 평가에 호의적이지도 않은 한계가 있음

○온예산과정 -「지방재정법」및「서울특별시주민참여예산조례」 에 의거하여, 참여예산의 범위는 직접제안사업의 선 정과 함께 서울시 전체 편성예산 및 대규모 사업에 대한 의견제시도 포함되어 있음 - 2014년 운영계획 상 온예산위원 과정을 제도화했으나, 현재까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데 (1) 정책포럼 69


기본적으로 부서별 예산편성 시점에 의견이 전달될 수 있어야 참여의 실효성이 확보될 수 있으나 해 당 부서의 비협조로 실시된 바 없고 (2) 부서별 가예산 편성 후 예산총괄부서의 편성 방향에 대한 브 리핑 등의 절차도 미비하며 (3) 최종적으로 확정된 편성예산안에 대한 의견이 실제 예산편성과정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피드백이 전무한 상태임 - 이에 따라 온예산위원 워크샵, 분과 워크샵 등을 거치며 상당 시간을 투여해 온예산과정에 참여한 시민위원들은 온예산위원 과정이 매우 중요함에도 소홀히 대해지고 있다는 불만이 지속적으로 제기 되고 있는 형편임

개선 및 건의사항

○연간운영계획 확정 시기 조정 - 참여예산사업의 경우에는 500억원의 사업비가 고정적인 점을 고려해서 전년도 12월까지 확정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 이를 통해서 차년도 사업추진 준비가 내실있게 진행될 수 있으며, 무엇 보다 제도 운영에 대한‘예측가능성’ 을 높여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임

○위원 공모 및 예산학교 - 위원의 공모와 예산학교는‘상시화’ 와 위원 구성의‘다양성’ 에 초점을 맞춰 개선하는 것이 필요함. 기존 1차례로 정례화된 예산학교를 월 1회(최소 격월 1회)로 상시화하는 한편, 찾아가는 예산학교와같 은 사업을 통해서 참여가 낮은 계층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사업이 병행될 필요가 있음

○사업제안 - 사업제안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의 반복사업에 대한 배제(일반회계 사업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업에 대안 유인구조를 만드는 한편, 이를 위한 인큐베이팅 기능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함. - 현재의 참여예산지원센터를 제도 운영의 실무부서가 아니라 사업공모 컨설팅 및 인큐베이팅을 담당 하도록 하는 기능 분배가 필요함. 이 과정에서 사업제안자가 지속적으로 사업추진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제안자의 참여가 보장되도록 함 - 사업제안의 규모가 사실상 사업심사의 질과 이후 사업선정에 따른 사회적 효과에 영향을 미치는 만 큼 (1) 직접 심사가 가능한 수준의 적정수를 고려해야 하고 (2) 새로운 사업의 발굴이 어려운 만큼 기 존의 각 부서별 위원회 구조를 활용한‘시범사업’ 들을 광역사업으로 제안받는 등의 거버넌스 활용에 대한 시도가 필요함

○사업심사단계 70


- 사업제안자 설명과 현장심사가 명확하게 제도화될 필요가 있으며, 심사 과정에서 있어 가장 중요한 평가의 기준으로 보장되어야 함 - 현행 4.5:4.5:1의 투표방식은 기존의 선정결과에 비춰 나름의 긍정적인 보완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 나, 사업선정을 한 차례 한마당을 통해 집중하기 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예산사업을 알리는 과정 (이를테면, 자치구별 거리투표, 한마당 일주일 전 참여예산버스를 운행하면서 현장 투표 유도 등)이 진행될 필

요가 있음 - 사업심사와 관련하여 가장 많은 분쟁이 발생하는 만큼, (1) 자치구 사업심사 및 광역 사업심사 과정에 대한 투명성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고(녹화 의무화 및 공개) (2) 제안자와 참여예산위원들이 상호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쌍방향 온라인 시스템으로 보완하며 (3) 시민전자투표시에 참여예산위원 들의 현장심사결과 등이 주요하게 참조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함 - 덧붙여 매년 서울시의 주요 의제에 대한 우선순위를 먼저 정하고, 이에 따라 최종사업 선정시 가점을 주는 방식의 의제 혹은 가치 주도적 사업선정방식에 대한 고민도 해볼 필요가 있음

○사후관리단계 - 모니터링 및 평가 결과가 차년도 예산학교 및 예산심의 과정에서 주요한 심사 가이드라인으로 제안 될 수 있는 환류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으며, 무엇보다 참여예산사업에 대한 자의적인 불용에 대해 서는 적어도 참여예산제도 내에서의 패널티가 정확하게 부여될 필요가 있음

○온예산과정 - 참여예산운영계획 상에서 뿐만 아니라 각 부서에게 시달하는‘예산편성지침’ 을 통해서도, 참여예산 과정에서 필요한 부서별 협조 의무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함. 온예산 과정은 기존의 예산편성절차 내 에서 제도화되지 않으면 형식적 운영이 불가피함. 특히 초기 제도화에는 시장의 각별한 관심이 반드 시 수반될 필요가 있음 - 특히 기존 위원의 하중을 고려해서 임기가 종료된 참여예산위원을 대상으로 별로 온예산분과를 신설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음

정책포럼 71


[첨부]

2015년도 참여예산선정결과 주요 사항

(1) 심사주체별 사업의 우선순위 - 참여예산위원의 선정 우선순위가 시민전자투표의 결과를 비교하면 상위 10개 항목에서 7개가 겹치 는 등 선정사업에는 크게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음 - 다만 시민전자투표에서 우선순위로 들어가는 사업들이 좀 더 일반적인 시설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 는 반면, 참여예산위원의 선정사업에는 프로그램 사업도 높은 순위를 보이고 있음 - 반면, 상대적으로 선호도 조사의 결과는 대부분 최종선정 사업에서 후순위를 차지한 사업들이 높은 순위를 보여 관점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볼 수 있음 참여위원 투표

순위

(2)노후불량하수관로 개선사업

1

(16개) (1)도서관 확충 및 서비스 개선

2

(12개) (7)등산로(둘레길) 정비 및 개선

3

(15개) (3)생활체육시설 확충

4

(16개) (6)자전거도로 안전시설 확충

5

(14개) (13)어린이 통학로 정비사업

6

(15개) (9)여성이 안전한 마을 만들기

7

사업(15개) (10)청소년 보호 및 활동

8

프로그램 운영(15개) (4)가로등, 보안등 설치 및 정비

9

(16개)

10

공동주택 음식물 생쓰레기 퇴비화 (14개)

시민 전자투표 (1)도서관 확충 및 서비스개선 (5)어르신 개방형 시설 지원 (16개) (8)공원 내 시설물 유지보수 (15개)

선호도 조사 (3)생활체육시설 확충 (15)CCTV설치(12개) (14)어르신 일자리 사업의 확대 (19개)

(4)가로등, 보안등 설치 및 정비

(2)노후 불량 하수관로 개선사업

(3)생활체육시설 확충

(4)가로등, 보안등 설치 및 정비

(6)자전거도로 안전시설 확충

(12)창업 및 취업 지원 사업

(2)노후 불량 하수관로 개선사업

(6)자전거도로 안전시설 확충

(7)등산로(둘레길) 정비 및 개선

(1)도서관 확충 및 서비스 개선

(11)도로 포장 및 정비(17개) (9)여성이 안전한 마을 만들기 사업

(18)공동주택 음식물 생쓰레기 퇴비화 (13)어린이 통학로 정비사업

*사업명의 앞에 숫자는 최종선정사업의 순위이며, 사업명 뒤에 붙은 숫자는 해당 주제에 포괄되어 있는 구별 사업의 개수임.

(2) 전년도와 사업선정 경향의 변화 - 자치구 사업과 광역사업의 분리, 시민 전자투표제의 도입, 개별 사업보다 의제별 묶음 사업을 선정하 는 방식의 도입 등에 따라 최종 사업선정 결과에도 큰 변화가 나타남 72


- 사업개수의 측면과 사업비 편성의 측면에서 모두 기존의 건설 편향성이 완화되는 한편, 환경 및 여성 보육 분야에 대한 비중이 높아졌음. 또 사업 개수(위쪽)에 있어서 2014년에 비해 큰 폭으로 낮아진 것 은 자치구 사업과의 분리 및 의제별 묶음 사업으로의 선정을 통해서 전체적인 사업개수가 통제되었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

<분과별 사업개수와 사업비 편성 현황>

* 위쪽의 사업비 편성 그래프의 경우에는, 2015년의 사업비 총액 변화(기존 500억원 곱해 보정한 것임

현재 375억원)를 반영하기 위해 1.333을

정책포럼 73


논평을 논평하다

역사 전쟁 혹은 역사를 위한 전투 안효상 편집위원, 대변인

[2015년 10월 8일 노동당 대변인 논평]

역사를 위한 전투 ‘역사교과서 국정화’밀어붙이기는 국민에 대한 전쟁 선포이다 기어코 정부가, 아니 청와대가 국정교과서를 도입할 모양이다. 이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가“방향은 맞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공천 방식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대립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불충을 만회하고,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연일 입을 열고 있 다.“역사학자의 90퍼센트가 좌파” 라든가, 역사교과서가“주체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는 등 익숙한 색깔론을 쏟아내고 있다. 마치 작전 개시 이전에 선무방송을 듣는 듯하다.

역사를 위한 정부여당, 아니 대통령의 전투를 보고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조지 오웰의《1984》 에 나오는 다음 과 같은 말이다.“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이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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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나오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국가인 오세아니아의 진리부의 표어이다. 현 정부와 대통령은 이 말을 픽션의 세계에서 해방시켜 현실로 가져오기로 함으로써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또 다른 가상세계로 만들고자 한다.

정부와 대통령이 국정교과서 도입을 밀어붙이면서 드는 이유는“올바른 국가관” “균형 잡힌 역사의식” “교육 현장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단일 교과서의 필요성”등이다. 현재 한국의 역사교육을“좌파” 가 주도하고 있다 는 이들의 피해의식에서 나온“균형 잡힌 역사의식” 이라는 말을 빼면 모두가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정교과서 도입을“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퇴행적인 흐름” 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때 말하는“세계적 흐름” 은 당연히,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느냐 검정으로 하느냐 아니면 자유발행으로 하느 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극단의 시대’ 를 넘어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제대로 된 삶을 누리고, 각자 자유로운 인격으로 살아가며, 공동체의 업무에 함께 참여하는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 지향하고 있다.

물론 이런 우리의 지향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의 전투와 역사를 위한 전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다. 국정교과서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친일파의 후손과 독재자의 나라이자 돈이 지 배하는 세상이라고 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땅의 역사가 연이은 고난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 한 보통사람들의 분투였다고 본다. 그렇기에 국정교과서 도입은 국민에 대한, 보통사람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 는 것이며, 역사 속에서 분투했던 우리는 이에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대통령이 지배하고자 하는 과거 에서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분투의 자원을 찾아낼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 중인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사람들은 이번 일을‘역사 전쟁’ 이라고 부르 길 원한다.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테다. 우선 기존의 교과서를 썼던 사람들, 국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대통령과 뜻이 다른 사람 모두를‘적’ 이라고 규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은 인격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 자기편이다. 다른 하나는 꼭 승리하겠다는 의지, 그것도 항 간에 떠돌 듯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7년까지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결의를 이렇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지적하듯이 역사교과서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고, 거기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를 결정하 는 일은 전쟁, 그것도 적의 절멸을 목표로 하는 전쟁의 방식으로 이룰 수 없는 목표이다. 역사가 현재의 정 논평을 논평하다 75


치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자체가 끊임없는 토론과 갈 등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역사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역사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그 시대에 적 절하다고 인정되는 방법론과 절차에 따라 연구되며, 이 또한 끊임없는 검증에 놓여있다. 그리고 역사교과 서는 이런 토대 위에 서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고,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고 토론할 때에만‘좋은’교과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물론 이 과정은 끊임없이 정치가 영향을 발휘하는, 하지만 보통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 계속된 다툼이다.《아날》 이라는 저널을 통해 역사학의 혁신을 가져온 뤼시앵 페브르가 자신의 책에《역사를 위한 전투》 라는 이름을 부여한 이유는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페브르를 비롯한 아날학파 1세대는 전통적인 역사학이 세 개의 우상, 즉 정치・개인・연대(年代)에 대한 숭배에 빠져있다고 비판하면서‘새로운 역사 학’ 을 지향했다. 이 새로운 역사학은 정치 영역이 아니라 사회경제 영역을 주된 대상으로 하고, 개별주체 가 아니라 집단주체를 역사의 등장인물로 삼으며, 이야기 방식의 서술이 아니라 구조적인 설명을 지향했 다. 이러한 혁신을 통해 아날학파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역사학의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조차 시간이 흐르고, 또 다른 혁신의 시도가 나오면서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서 한국의 지배계급 가운데 일부가 기존 교과서에 대해 문제를 제기 하고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주장과 그러한 주장의 배 경이 되는 학문적 연구 등이 적절한지가 문제시될 뿐이며, 이 또한 학문적, 공적 토론의 영역에 속할 뿐이 다. 여기에 덧붙여 그러한 주장이 동시대의 윤리적, 정치적 기준에 부합하는지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기에 지금 정부와 여당이 벌이고자 하는 역사 전쟁은 두 가지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는 이 것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는 점이다.‘역사를 위한 전투’ 에서 국가는 도리어 그러한 전투가 잘 벌어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특정 관점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학자들, 그리고 일반 시민이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유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국정교과서 집필의 방향이 되어야 한 다고 그들이 주장하는‘올바른’역사에 학문적, 윤리적 배경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학자 의‘90퍼센트가 좌파’ 라거나 딱히 어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교과서 전체를 읽어보면 교과서가 잘못되 었다는‘기운이 느껴진다’ 라는 개그 수준의 말밖에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당 내 일부가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정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는 이유는 유혹 때문일 것 이다. 가장 저열한 유혹은 아버지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명예 회복을 이룰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일종의 우상화를 하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다. 하지만 이것뿐이라면 그저 개인의 망상으로 치부하 면 될 일이다. 그 다음으로 들 만한 유혹의 방향은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일종의 갈라치기를 하기 위해 동 원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이다. 여러 가지 난제를 돌파하기 위해 교두보를 점검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 다는 말이다. 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국가주의이다. 간단하게 말해 모든 것을 추상적인 국가이성(Raison d'Etat)에 종속시키는 이념이라 하겠다. 오늘날 국가주의는 그 자체로도 문제이 76


지만, 현 정부의 권력자가 자신의 이념이나 가치를 국가 자체와 동일시할 때 현실적인 위험을 낳는다. 세 가지 유혹 모두 제각기 치명적이다. 우선, 박정희는 여전히 공과를 가려야 하는 (현재까지 많은 부분 이 드러나 있긴 하지만) 역사적 인물이지 온 국민이 떠받들어야 하는 인물이 아니다. 집안에서 그를 영웅으

로 모시겠다면 아무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분단상황에서 이른바‘종북’ 과‘좌파’ 라는 말은 주 술처럼 효과를 발휘한 것이 사실이고,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공산주의 시 대에, 그것도 북한 같은 나라를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체제의 이름으로 불러내는 것은 더 강한 독성을 가 진 약물을 투여하는 일과 마찬가지며, 임종의 순간에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하게 할 것이다. 끝으로, 국가 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가면을 쓴 권위주의적 독재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20세기만큼 웅 변적으로 보여주는 시기도 없을 것이다. 국가주의가 없었다면 전쟁과 학살과 수용소로 요약되는 20세기 의 비극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우리는‘역사를 위한 전투’ 를 환영한다. 역사가 끊임없이 새로운 입장에서 서술된다는 것 자체가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며, 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윤리적 기준에 맞는 역사를 탐구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를 위해, 앞서도 말했듯이 국가는 공적 토론을 보장하는 제도로서만 기 능해야 한다. 비단 이것은 역사학 연구와 교과서 서술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 는 개별 구성원과 사회의 모든 영역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일을 추구할 수 있는 보장 장치가 되어야 한다.

정부와 여당이 주장하는 ‘올바른’역사에는 학문적, 윤리적 배경이 없다. 그러 다 보니 역사학자의‘90퍼 센트가 좌파’ 라거나 딱히 어디라고 말할 수는 없지 만 교과서 전체를 읽어보 면 교과서가 잘못되었다는 ‘기운이 느껴진다’ 는 개그 수준의 말밖에 하지 못한 다. (사진 : 청와대 홈페이지)

논평을 논평하다 77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싸움의 한 방향은 이런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만 진정한 의미의‘역사를 위한 전투’ 가 가능하다. 우리는 현재를 미화하는 역사가 아 니라 끊임없이‘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를 묻는 역사를 탐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성찰이라고 부 른다. 성찰은 인간이 지닌 약점과 강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말이다. 인간의 약점은 성찰해야만 하는 사태 를 낳고, 인간의 강점은 성찰하는 상황을 만든다. 이때의 정치적, 윤리적 기준 또한 역사에 대한 성찰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출발점으로서의 ‘최저 기준’ 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대전, 대공황, 파시즘과 홀로코스트, 종족간의 학살, 경제적 어 려움으로 인한 인간 이하의 삶 등등 파국과 극단의 시대를 살아온 인류가 공통으로 동의하는, 아니 동의 해야 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함이다. 여기에 비추어볼 때 저들이 추구하는 역사는 그 어떤 분칠로 가리려 해도 인간의 존엄을 해치고서라도 소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위한 전투’ 를 환영한다. 그리고 역사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곳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해치는 사 태와 맞서 싸울 것이다. 이 때문에 저들의 유혹은 치명적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비밀 TF’ 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 것으 로 보인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크게 보아야 할 점은 상식적인 수준에서‘중도보수’ 라고 할 만한 사람들까지 ‘국정화’자체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어느 때보다 전선이 넓어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 등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꽤나 큰 충돌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충돌 속에서 확대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공간에서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이다. 우리가 보통사람들의 바람을 담아낼 수 있을까?

“우리는현재를미화하는역사가아니라, 끊임없어 ‘무엇이잘못되었는가?’ 를묻는역사를탐구할것이다. 우리는‘역사를위한전투’ 를환영한다. 그리고역사뿐만아니라사회의모든곳에서 인간의존엄함을해치는사태와맞서싸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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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지역에서 현장에서 79


지역에서 현장에서

우리가원하는마을을위하여 상가임차인권리상담소와 함께‘다시 시작하는’서울 마포당협 나동혁 서울 마포 당원

지역. 그래 지역이었다. 전국위원에 당선되고 마포당협 대의원이 된 후에 계획표를 짤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으로 삼은 단어가‘지역’ 이었다. 지역에 누가 살고 있으며 그/녀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누구와 함께 무엇 을 바꿀 것인가? 당선 후 1년. 스스로 이 답을 얻으려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당원 수는 많지만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탓에 마포당협은 사실상 활동이 중지된 상태였다. 최소 2년 동 안 마포에는 노동당 이름으로 현수막 한 장 걸리지 않았고 당원모임도 열리지 않았다. 일단은 마포당원들 의 욕구부터 알아야 했고, 그러자면 당원들을 알아야 했다. 흩어져있는 욕구를 모아 다시 에너지를 생산 하는 일이 시급했다. 정당에는 학교처럼 당원들이 모이는 특정한 오프라인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법은 전화뿐. 지난 연말과 올해 초에 걸쳐 있었던 당직자 선거 기간 동안 쉴 새 없이 전화를 돌렸다. 어느 지역이나 그렇겠지 만 당원들의 기운이 많이 빠져있었다. 냉소적인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그냥 처음 목표한대로 투표독려 전화까지 최소 3번 이상씩, 500명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제야 한두 마디라도 말을 거는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당원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당원모임은 술자리가 아니라 지역과 관련된 주제를 선정해 공부하 고 토론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최대한 많은 당원에게 행사를 알리고 싶었다. 문자로 일정을 공지하는 것 으론 부족해 보여 텔레그램, 페이스북메시지 등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활용했다. 그러 다 말이라도 걸어오면 대화를 시도했다.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인터뷰 형식을 빌리기도 했다.

내가 몸으로 느끼는 지역

마포는 지역활동이 매우 활발한 곳이다. 진보정당 활동가들이 선구적으로 지역정치 모델을 선도했던 곳이고, 그 성과 또한 적지 않았다. 이런 성과를 봐왔기 때문에 나 역시 마포로 이사 오고 싶다는 생각을 80


했다. 골목골목에서 강정티셔츠를 입고 콜트콜텍 에코백을 맨 사람들을 만날 때면 이사 오길 잘했다는 생 각이 든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지역공동체라는 느낌은 막연하다. 그래도 이 동네에 있으면 밤길에도 마음 편히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고. 마 을은 오랜 시간을 거쳐 복합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리라. 그런데 3년 반 전, 합정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시작된 빌딩 공사들이 마무리되면서 지금 합정은 내가 이사 올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길이 바뀌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바뀌고 가게가 바뀌었다. 그냥 말 그대로 다른 동네가 되었다. 이 장소에 YG사옥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징이다. 불과 3년 만에 일어 난 일이다. 결국 집값이 조금 싼 망원동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 망원동은 골목마다‘맛집’ 들이 늘고 찾아오는 사람 들이 많아지면서, 대형체인점들이 늘고 건물이 올라가고 주택을 개조한 가게들이 늘어나는 형국이다. 망 원역 근처에는 WM엔터테인먼트라는 기획사 건물도 들어왔다. 망원정 사거리에는 한강으로 통하는 공원 이 생겼다. 망원유수지 일대에는 한강시민공원으로 드나드는 자전거로 인해 자전거 문화가 복합된 공간 이 형성되었다. 자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 변화들이 당연히 반갑다. 그런데 동시에 불안하다. 동네가 살기 좋아지고 속된 말로‘힙해’ 질수록 집값이 올라갈 것은 뻔하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맛집을 보며 행복하다가도 집값이 올라가면 여기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 을지 고민이 따라온다. 여기에 한층 더해 서울 시는 신촌-홍대-합정을 잇는 일명‘신홍합 밸 리’ 를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고, 한강공원 망원지구에는 외국인 관 광객을 위한 공연무대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 다. 건설자본과 기업이 들어온 이후 일어날 변 화들은 자명하다. 동네가 살기 좋아진다는데 많은 이들은 미리부터 떠날 걱정을 한다.

다시, 왜 지역인가?

왜 지역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아주 간단 하다. 지역은 세상을“어떻게” 와“어디서”바 꿀까 고민하는 정당이 내린 답 중에 가장 기본 이 되는 한 축이었다. 더군다나 진보정치 토양

마포당협 당원모임 홍보웹자보. 마포당협은 건물주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곳에서 당원모임을 가지며 꾸준히 연대 중이다. (웹자보 제작 :

이 가장 풍부한 지역 중 하나인 마포에서 지역

이예반 마포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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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보정치세력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포기하는 일과 같다. 시작할 이유는 이미 충분했다. 그 다음 답은 6월 4일 당원모임에서 얻었다. 행사 제목은 <마을/지역+노동당>이었는데, 두 명의 연사 를 모셨다. 먼저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으로부터‘상가임차인권리상담소’운영사례를 들었다. 기본적으 로 건물주-부동산-임차인으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 무엇 인지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두 번째 연사는 정문식 마포당원이었다. 정문식 당원은 밴드‘여섯 개의 달’보컬이면서 동시에‘뮤지 션 유니온’ 과‘홍우주 협동조합’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지역과 예술을 접목시킨 여러 활동을 하면서 예술인도 노동자라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강연주제는‘우리가 원하는 마을이란 무엇인가’ . 서울시 가 추진하는 마을공동체사업과 도시재생사업의 현황을 설명하면서 그 안에 빠져있는 핵심적인 문제를 지 적했는데, 이 강연이 내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지역사업에는 노동이 빠져있으며, 이 관점에 대해 숙고하지 않으면 결국 살기 좋은 마을이란 기업과 자본이 좋은 마을, 건물주가 좋은 마을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얻은 답은 자명했 다. 마을이란 균질한 집단으로 이루어져있지 않다.‘모두를 위한 마을’ 이라는 표어를 내걸어도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마을이 되어야 하는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처음 이 행사를 기획할 때는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궁금증을 꼭 해소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젠트리 피케이션’ 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직역하자면 어떤 지역이 젠트리(영국 중산층을 이르는 말)화 되는 현상을 이르는데, 실질적인 의미로는 마을이 외부에 알려지고 상업지구가 형성되고 대형유통

가수 싸이가 명도소송 중인 테이크아웃드로잉 카페를 강제철거하려 한 데 항의하는 집회에 함께한 김한울 부대표(왼쪽)와 박종만 마포당협 위원장 (사진 : 나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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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마을공동체가 붕괴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지금 마포 곳곳은 극심하게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이다. 일부 지역은 어느 정도 완료되어 지역공동 체 색깔과 구성원이 빠르게 바뀌었다. 지역의 분위기를 만들었던 예술인들과 소소한 단골가게들이 사라 지고 체인점이 즐비한 상업지구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모두에게 즐거울 리 없다. 주민의 이해관계는 단일한가? 그렇지 않다. 중요한 지점은 내부에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적 조건에 따라 마을 내 구성원들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이걸 인정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가면 나중에 활력을 잃는다.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은 다양할 수 있다. 마을은 무조건 좋다는 수사는 우리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기업이나 행정권력도 활용한다. 사회시스템 변화 없이 마을 그 자체만 해방구가 될 수는 없다. 결국 노동조건이 변해야 하고, 마을 만들 기는 사회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가야 한다. 간단히 말해 지금처럼 노동시간이 길고 살기가 팍팍한 사회에서는 그 어떤 곳에도 에너지를 내어주기 힘들다. 진보정치는 지역의 약자와 싸우며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마을은 그 과정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상가임차인권리상담소에서 시작한다

서울시당은 작년부터 상가임차인권리상담소를 시작했다. 홍대 삼통치킨 앞에서 매주 진행했는데, 나 는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을 뿐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저 우리 옆 동네에서 시작했으니 잘 되었으면 좋겠다, 가끔 커피라도 사드리자는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올해 지역활동을 새로 시작 하는 입장에서 상담소는 모든 고민에 부합하는 아이템이었다. 우리가 만들려는 마을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어야 하며, 기본적으로 완고하게 형 성되어 있는 소유관계에 일정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어떤 문제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 은 잘 안다. 임차상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이해관계에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상을 이해하면 임차인 문제가 가진 사회적 위상은 명백하다. 노동시장 자체가 고용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리해고, 비 정규직, 때 이른 퇴직 등이 일반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자영업은 또 다른 노동시장의 연장이다. 이 와중에 건물주에게만 유리하게 만들어진 법과 제도와 사회적 인식은 근본적으로‘소유’ 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세 들어 살아본 사람은 잘 안다. 집 없는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를. 끊임없이 불안 속에 살 아야 하는 삶이 어떻게 영혼을 갉아먹는지를. 수많은 임차상인은 정서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마포당협에서는 여러 차례 토론과 합의를 거쳐 8월 말부터 상가임차인권리상담소를 시작했다. 상담소 를 운영하도록 허락해준 홍대 참숯만난닭갈비는 맘상모(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https://www.facebook. com/groups/mamsangmo) 회원 가게이면서, 현재는 권리금을 약탈하려는 건물주에 맞서 싸우는 곳이기

도 하다. 명도소송이 모두 마무리되고 법적인 영업기간이 지나 강제집행 계고장이 날아온 상태다. 언제 강제집행을 당할지 모르는 임차상인들은 하루하루 긴장 속에 살아간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83


마포당협에서는 강제집행을 막기 위한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목요일마다 가게 앞에 상담소를 연다. 간단하게 관련법을 공부하고 사례를 읽으며 논리를 다듬는다. 사람이 많을 때는 주변 상가에 홍보용 엽 서를 배포한다.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기 문제로 터지기 전까지 임 차상인들은 상담소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우호적이며, 무엇보다 건물주와 싸우 는 가게를 모두 지켜보고 있다. 건물주도 상담소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강제집행으로 남의 노 동을 가로채려는 그 현장에 사람들이 드나 참숯만난닭갈비 앞에 차린 상가임차인권리상담소에 함께하는 마포당원 들. 참숯만난닭갈비는 현재 권리금을 약탈하려는 건물주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중이다. (사진 : 나동혁)

들고, 세입자를 마음대로 쉽게 내쫓을 수 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건물주를 괴롭게 만드는 것도 과정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시당이 상담소를 여는 삼통치킨과 마포당협이 상담소를 여는 참숯이 모두 강 제집행 위기에 처해있다. 맘상모와 노동당의 연대와 신뢰도 강해졌고, 맘상모 회원인 임차상인이 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하는 사 례도 늘고 있다. 지역당협은 현장에서 유대를 강화하고 서울시당에서는 사례를 모으고 분석하면서 법적 대응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법률개정에 대한 의견을 낸다. 제도권 안팎을 넘나드는 정치라는 게 이런 것 이 아닐까? 함께 저항하면서 그 에너지를 모아 현실적인 제도에까지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그러면서 모두가 체념하듯 받아들이는‘조물주 위에 건물주’ 가 있는 현실에 일정하게 균열을 낼 수 있다면 분명한 성과로 남으리라 생각한다. 부수적으로 상담소는 당원과 당원, 당원과 임차상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 의 장소가 되기도 하니 일석이조 정도가 아니라 일석삼조 이상의 성과다. 마을과 도시는 매우 복합적인 공간이다. 그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은 자본과 기업이 아니다. 그 곳에 살 거나 경유하는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적 요소, 그리고 우리가 내는 세금이다. 그런데 왜 그 성과 물은 항상 자본과 기업이 독차지해야 하는가? 다시 한 번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 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본다. 공공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공공의 몫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마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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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오늘도 우리는 학교에 간다 은평당협의 은평구 사학비리 규탄 캠페인 활동 김영도 서울 은평 당원

따르르릉~ 따르르릉~ 6시 50분. 오늘도 맞춰놓은 알람이 신나게 울린다. 등교시간이다. 주섬주섬 일어나, 집에 모셔둔 은평당협 현수막을 들고 하나고로 향한다. 등교시간은 7시 20분. 요즘은 날씨도 쌀 쌀해져서 더 일어나기가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 선전전에 결석을 할 수는 없다.

조작과 은폐로 얼룩진 하나고

은평구에 있는 하나고와 충암고가 사학비리를 저질렀다. 우선 하나고는 하나금융그룹의 학교법인인 하나학원이 2010년 3월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에 자립형 사립고로 설립한 학교 다. 그러나 그 이후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되면서 각종 특혜 논란에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의회는 올해 4월 행정사무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특위)를 구성했다. 특위는 하 나고의 학생 모집 과정, 설립인허가 과정, 자립형에서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하면서 생긴 특 혜 의혹 등을 조사 중이다. 이 조사 과정에서 하나고 국어교사인 전경원 씨가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2009년 하나고 입학전형위원회에 참여해서 신입생을 뽑았다. 이 때 최종합격자를 뽑는 회의에서 성적조작 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성적조작은 가산점을 통해 남학생을 합격선 위로 올리고 여학생을 합격선 아래로 내림으로써 이루어졌다. 기숙사 남녀 성비를 맞추기 위해서라며, 학교 측이 교사들에게 남학생을 더 뽑으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그는 학교가 이명박 정부 고위인사 아들의 학교폭력을 은폐했다고도 증언했다. 2011년에 입학한 해당 학생은 명령불복종이라며 급우들을 때렸고, 피해학생에게 본인 공부 지역에서 현장에서 85


가 끝날 때까지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학교 측은 해당 학생이 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회를 통한 권고전학이 아닌, 조용히 전학을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의 자녀라는 이유로 학교폭력 을 은폐한 것이다.

양심선언 교사에게는 회유와 협박, 사찰까지

더 큰 문제는 학교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한 전경원 교사를 회유하고 협박한 일이다. 김 승유 이사장은 전경원 교사에게 조용히 학교를 떠나라고 했고, 이를 전경원 교사가 거부하자“투쟁하겠다 면 재단에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못 견디게 해주겠다” 고 협박했다. 이에 대해 전경원 교사는 언론사에 기고를 하고 인권위에 진정서 등을 제출했지만, 학교는 이를 근거 로 그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려고 시도했다. 더불어 학교는 전경원 교사가 문제제기한 내용에 대해 과장, 왜곡됐다는 내용을 신문광고에 실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고 교사들의 이름이 함께 올라갔지만, 그 또한 이사장의 반강제 때문에 실린 경우가 많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광고에 실린 것을 모르는 교사도 있었 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학부모들의 무책임한 비난은 전경원 교사를 더 힘들게 했다. 전경원 교사가 자기 자녀의 미래를 방해한다는 생각으로 전경원 교사를 담임에서 교체하도록 만들고“너는 선생이 아니라 개 XX이다. 교직에서 떠나라” 는 협박 메일을 보내는가 하면, 교무실에 들어가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특위조사로 인해 전경원 교사의 증언에 힘이 실리고 있다. 우선 하나고가 특권계층의 자 녀가 많이 다니는 대원, 영훈 국제중 학생을 일반 중학생에 비해 평균 30배 더 뽑은 사실과 지원자의 인적 사항을 가리지 않고 선발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것은 특권계층에 대한 노골적인 특혜로 비춰진다. 동시에 학교가 전경원 교사에 대한 수업 사찰도 했음을 확인했다. 학생들을 통해서 수업내용을 확인하고 그것을 학부모들에게 일부 흘리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교권침해로서, 고발 교사에 대한 신분보장을 규정 한 교원지위향상특별법을 위반한 일이다.

은평구 지역사회의 대응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보고, 은평구 지역사회는 9월부터 본격적으로 하나고 규탄시위를 진행했 다. 노동당 은평당협은 물론 녹색당, 정의당, 전교조 및 다양한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하나고 사태를 알리는 선전전 등을 펼쳤다. 9월 한 달간은 각 단위 단체가 주말을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교사들의 출근시간에 맞춰 집회 및 1인시위를 진행했다. 10월부터는 하나고에서의 규탄시위와 함께 은평구 연신내 역, 불광역, 녹번역 등에서 시민들에게 하나고 사태를 알리는 선전전 등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여기서 중심이 되고 있는 조직이 바로 노동당 은평당협이다. 은평당협은 현재 월요일 아침마다 하나고 86


하나고 앞에서 규탄시위를 진행 중인 은평당원들과 은평구 시민사회단체들 (사진 : 손은숙)

앞에서 집회 및 1인시위를 하고 있으며, 다른 요일에는 위의 지역 등에서 선전전을 집중적으로 펼치고 있 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도 호의적이다. 짧은 기간에 명문고로 입성한 하나고의 비리는 은평지역 시 민들에게도 큰 관심거리다. 물론 방해도 많다. 그 중 하나가 하나고 사태를 알리기 위한 은평당협의 정당현수막을 은평구청에서 무더기로 철거한 일이다. 당당하게 정당법에 근거해서 정당의 권리요 의무인 정치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은평구청은 하나고 학부모들의 민원 때문이라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무조건 철거한 것이다. 거대정당의 현수막은 그대로 두면서 소수정당인 노동당의 현수막만 무조건 철거하는 일은 명백한 정치적 행위다. 은 평당협 채훈병 위원장과 문미정 위원장 그리고 최승현 노동당 부대표는 은평구청에 방문하여 이에 대해 엄중하게 항의했다.

또 하나의 비리사학, 충암고

하나고 사태도 심각하지만 은평구에서 오랜 세월 사학비리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학교는 따로 있다. 바로 충암고다. 충암고는 지난 4월 교감이 급식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에게 공개 망신을 준 일이 문제가 됐 다. 그는 학생들에게“내일부터는 오지 말라” “꺼져라, 너 같은 애들 때문에 전체 애들이 피해본다”등의 발언을 했다. 이 사실이 지역에 알려지고 며칠 되지 않아, 노동당 은평당협을 비롯한 은평구 지역사회단 체가 충암고로 가서 선전전을 하며 규탄시위를 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87


충암고의 사학비리 역사는 찬란하다. 1966년에 설립된 충암고는 그 시절, 나름 명문고로 이름을 날리 기도 했다. 하지만 1996년에는 학교 땅에 스포츠센터를 짓고 교사들을 앞세워서 학부모들에게 회원권을 강매하고, 1999년과 2000년에는 각각 난방시설 수리비 명목의 정부지원금을 횡령했다. 2007~2008년에 는 남학생 화장실 등 시설노후화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때 학생과 시민단체는 충암고 앞에서 남학생용 화장실이 한 곳뿐이므로‘똥 쌀 권리’ 를 보장하라며 요강을 들고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공 사비 횡령, 학교회계 부정, 계약직 부당채용, 신규교사 공개채용 관련 서류 무단폐기 등으로 다시 한 번 사 학비리에 얽혔다. 이에 대해서는 교육청과 법적공방도 벌였다. 이런 화려한 역사를 가진 충암고가 이번에도 사학비리를 저질렀다. 10월 초, 충암고가 급식회계와 관 련된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학교장과 행정실장 등이 거액의 급식비를 횡령했다. 특히, 거액의 급식비를 횡령하기 위해서 식용유가 새까매지도록 사용한 일은 전국을 경악케 했다. 4월에 발생한 충암고 교감의 급식비 막말 사태는 이러한 급식 비리와 연동되고 있던 셈이다. 횡령으로 인해 예산 공백이 생기니, 그것 을 막기 위해 학교 측에서 급식비 미납 학생들을 독촉하고 압박한 것이다. 이에 대해 노동당 은평당협 및 은평구 지역시민단체 등은 충암고에 대한 규탄시위를 진행 중이다. 하 나고 사태에 대한 대응과 비슷한 방법으로, 선전전 등을 통해서 충암고에 직접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지 역 시민들에게 현 사태를 알리고 있다.

시민들에게 하나고의 비리를 알리고 학교정상화를 촉구하기 위해 제작한 선전물 (사진 : 손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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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역 앞에서 하나고 비리를 알리는 선전전을 진행 중인 은평당원들 (사진 : 손은숙)

이러한 사학비리를 접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왜 교육이 돈벌이의 수단이 돼야 하는가. 특히 한국의 학교는 사학구조에 의해서 그 존재 이유가 철저하게 변질되었다. 하나고는 기업의 사회공헌이라 는 명목으로 설립됐음에도 개인의 사유화로 변질되고, 심지어 하나고에 애정을 가진 교사의 양심을 철저 하게 짓밟고 있다. 충암고 또한 불의한 재단이 똬리를 튼 채, 제 배만 불리는 데 혈안이 돼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 교육현장에도 양심 있는 교사와 정의로운 학생들이 존재한다. 하나고에는 정의의 의미와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지혜를 학생들에게 알려주려고 몸소 노력하는 교사가 있다. 충암고에는 어른에게 폭력적으로 길들여진 미성숙한 존재가 아닌, 스스로 일어나 문제를 제기하고 직접 행동하는 성 숙한 학생들이 있다. 앞으로도 노동당 은평당협은, 10월 22일 하나고 특위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그에 맞춰 다양한 형식 의 재대응을 할 예정이다. 충암고 문제 또한 은평구 지역단체와 연대하여 더욱 엄중하게 대응할 것이다. 노동당 은평당협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더 이상 지역에 사학비리라는 오물이 흘러내리지 못 하도록, 학교의 주인인 학생, 교사와 함께 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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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 라는 문제의식을 권함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

진보정당의 정치는 때때로 나침반 없이 길을 떠나는 기분이 들게 할 때가 많다. 기본적 으로 참조할 만한 역사적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마치 공룡의 뼈를 발굴 하듯이 전세계의 다양한 경험들을 탐색하고 그것을 우리의 상황에 맞춰 고민한다. 어느 때 는 조각 조각난 경험을 이리저리 끼어 맞추며 모양을 가늠하느라 시간이 걸리고, 오독이 수 반될 경우에는 경솔함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땐 현재의 문제의식을 정 확하게 반영하는 문헌이 발견되기도 하고, 그럴 때는‘발견’ 을 지나 그것을 어떻게 요리해 야 할지 궁리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제프 스펙(Jeff Speck)이 쓴《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마티, 2015)는 일종의 교양서이자 교본이다. 사람이 중심인 도시, 무엇보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하며 도시의 부가 지역으로 스 며들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데‘보행’ 이 가진 장점을 생각하게 만들고, 그 생각을 실천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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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도시의 구체적인 사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 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가진 상식을 뛰어넘고 있으며, 이는 자연스레 어떻게 이 아이디어들을 우리의 도시 에 적용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제프 스펙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 국가예술기금의 디자인 디렉터로서‘시장을 위한 공동체디자인 연구소’등을 운영하며 실제 도시정부의 교통정책을 살펴 보고 그것에 개입했다. 그 경험적 시행착오가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있다.

신촌에 보행전용거리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새로운 교통정책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대중교통 중심’ 이라 는 주장이 90년대 후반‘녹색교통운동’ 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그것이 그대로 시민단체로 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동차 중심 도시에서 바로 자전거나 트램 등의 대안교통수단으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자동 차 중심의 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몇몇 예시사례를 만들어내는‘쇼 케이스’중심의 사업으로 나타났다는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실제로 현재 서울시는 68개의 보행전용거리를 운영 중이지만 이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변화 는 거의 없다. 여기에는 새로운 도시정책이 기존의 이해관계를 해체하거나 혹은 직접적인 체감도를 높임 으로써 서울시민들의 의식변화를 경험적으로 이끌어내기보다는 최대한 갈등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조정 되었다는 배경이 있다. 이는 대표적인 보행전용거리의 사례인 신촌 연세로 사업에서도 고스란히 보인다. 서울시는 대중교통전용지구가 설치된 신촌 지역에 매 주말마다 보행자만 다닐 수 있는 보행전용거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14년 1월부터 시작된 이번 계획을 통해서,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신촌 지역의 보행전용거리는 오래된 도시의 상업지역으로 신촌의 상권을 재활성화시킨다는 명목이 컸 다. 실제로 보행환경이 나아지면서 유동인구는 늘어났으나 몇 가지 한계가 드러났다. 첫번째는 대형 가로 변의 상권과 골목길 상권이 사실상 동일한 품목으로 형성된 탓에 상권의 활성화 효과가 깊어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행정 파트너인 서대문구청의 인식이 보행전용거리 자체보다는 이를 도구로 가시적인 상권 활성 화의 성과를 보이는 데 관심이 높았다. 또 민간 쪽 파트너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라 할 수 있는 상인단체 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책의 방향은 달라졌는데 이를 시행하는 방법은 달라지지 못한 것이다. 특히 초기에 민간 파트너로 들어갔던 서울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가 사업의 시행과정에서는 전혀 개입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사업시행 초기에 논란이 되었던 노점상 철거의 타당성은 시민사회의 주도권에서 나왔는데, 사업의 진행은 기존의 전통적인 거버넌스가 독점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백남철 연구원에 따르면, 신촌 연세로를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전환하면서 1) 6개 월 동안 연세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1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5퍼센트가 감소했고 2) 점포 를 찾은 시민은 지난해와 비교해 28.9퍼센트, 매출 건수는 10.6퍼센트, 매출액은 4.2퍼센트가 증가해 상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1


서대문구청에서 발행한 구청 홍보지(2013. 10)에 소개된 신촌 대중교통전용지구 사업. 이 자료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신촌이 “유흥가 중심에서 사람 중심의 걷고 싶은 거리, 문화가 흐르는 거리로 탈바꿈 할 것” 이라고 밝히고 있다.

권 활성화의 징조가 보였으나 3) 교통정체는 여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에서도 보듯이 실제 우리 나라의 보행친화도시 전략은 어디까지나 도심개발의 다른 방식일 뿐 보행자 중심의 도시라는‘질적 전환’ 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즉 보행자들에게 주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지, 그리고 보행정책의 실행이 신 촌을 찾게 만드는지를 묻기보다는 애초 사업을 추진한 주요 핵심 이해관계자 간의 효과를 견주는 방식으 로 성과가 평가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후 운영과정에서는 지역상권의 이해관계가 주되게 관철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얼마 전 부터 심야에는 택시가 다시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가 야간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 실 심야시간에 도로환경의 위험성이 더욱 커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이 오히려 더욱 위험하다고 할 테지만, 상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문제는 도시를 바꾸는 방식

그렇기 때문에 제프 스펙이 강조하는“무엇보다도 우리는 워커블시티, 즉‘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 가 그저 멋지고 관념적인 개념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문제, 다 시 말해 국가 경쟁력, 보편적 복지,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개념이다” 92


라는 점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명확하게 기존의 이해관계를 전환시키기보다는 새로운 정책적 주도권을 만드는 문제, 즉 변화의 방향과 주체를 재구성하는 문제라는 말이다. 이 책의 처음은 우리가 교통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수준의 내용을 반박하는 데 할애한다. 이 를테면 보행환경이 상업지구의 발전은 물론이고 부동산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 자동차 사용을 억 제함으로써 석유를 통해 해외로 빠져나가는 비용이 지역 안으로 재흡수된다는 점, 자동차 이동거리가 적 을수록 기업의 생산성도 높아진다는 점, 자동차가 사실은 어린이와 청소년 사망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라 는 점, 그리고 녹색 교통수단이라고 알려진 전기자동차가 사실은 막대한 도로비용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대안일 수 없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 어느 하나 쟁점이 되지 않을 사안은 없지만, 제프 스펙은 구체적인 데 이터와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것들을 제안한다. 이 과정에서 소위 친환경적이라 불리는 그린워시 (Greenwash),‘기즈모 그린’ 에 대해서 깊게 경계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한 학자의 이

야기를 보자.

“정치인과 기업가들은 탄소를 줄이기 위해 사람들의 습관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자신을 치장하는 수 단으로 환경문제를 취급해왔다.“하던 일을 계속하라” 는 또 다른 태양광패널, 풍력발전기, 대나무바닥을 추가로 설치하라는 메시지다. 그러나 교외에 있는 집에 태양열난방을 설치한다고 해서 오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집이 있는 교외로 자동차를 몰고 가야 한다면 그 차가 설령 도요타 프리우스(1997년에 첫 출 시된 세계 최초의 풀 하이브리드 승용차이다- 옮긴이)일지라도 환경에 도움이 될 수 없다.” (58~59쪽, 재인용)

이런 조건에 근거하여 제프 스펙은 매우 구체적인 10단계의 지침을 제시한다. 큰 틀에서의 걷기의 유 용성에서 시작해서 걷기의 흥미로움을 확인하는 단계까지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각각의 단계는 주문의 내 용과는 다르게 행정에서 시민 개인으로 역할이 전환되는 경로를 갖는다.

유용한 걷기

안전한 걷기

편리한 걷기

흥미로운 걷기

단계 1:

단계 5:

단계 7:

단계 9:

차를 두고 다녀라

보행자를 보호하라

공간을 만들라

친숙하면서 특색 있는

단계 2:

단계 6:

단계 8:

얼굴을 만들어라

용도를 혼합하라

자전거를 도입하라

가로수를 심어라

단계 10:

단계 3:

유리한 곳을 선택하라

주차할 권리를 얻어라 단계 4: 교통체계를 작동시키자

예컨대 유용한 걷기에서 제시하는‘차를 두고 다녀라’ 의 주된 논의는‘먼저 교통공학자들을 없애라’ 라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3


는 다소 거친 주장이 표제로 등장할 만큼 기존 도로정책에 대한 평가가 중심이 된다. 교통 혼잡을 근거로 계속해서 확장되는 도로 건설을 실제로 중단하지 않으면 자동차 중심의 도시, 그리고 그에 따른 막대한 예산 낭비를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보스턴 대학의 매튜 터너와 하버드 대학의 질스 듀란턴은“도로의 수 용량이 늘어나면 그만큼 보행거리가 길어져서 사실상 수용량을 채우게 된다” 는 것을 일종의‘기본 법칙’ 으로서 확인했다. 이는 차량 혼잡을 막기 위해 도로를 넓히는 그간의 정책이 사실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입장에선 여전히 거리가 먼‘상식'이다. 뒤이어 나오는‘용도를 혼합하라’ 는 주장은, 그 유명한 제인 제인콥스의 주장이 왜 도시계획가들에 의 해 무시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도시가 얼마나 낭비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교외화의 사례를 통해서 분석한다. 도시생활의 밀도를 높일수록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는 동기를 줄일 수 있다. 그런데 각각 주거 지역, 상업지역으로 분리해놓는 도시계획은 필연적으로 이동거리를 전제한다. 즉, 텅 빈 사무지구를 만들고 오지 않는 기업가들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선 사람들이 살고 싶 어 하는 도시를 만듦으로써 업무시설과 기 업이 오고 싶어 하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고 주장이다. ‘주차할 권리를 얻어라’ 는 도시를 잠식하 고 있는 주차장에 대한 문제제기다. 직접적 으로는 주차시설에 부과되는 비용이 주차장 사용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올라야 하고, 오 랫동안 주차할수록 부담스러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처럼 건축면적단위당 기계 적으로 부과하는 주차장 건립 기준보다는, 오히려 그 비용을 금액으로 징수하고 아예 별도의 주차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주거지와 주차공간을 분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강 조한다.‘교통체계를 작동시키자’ 는 주문은, 자가용을 억제하기 위한 대중교통 전략 역 빅토리아 교통정책연구소는 2015년 <교통 유발과 통행 감소 : 교통계 획의 실제>라는 보고서를 통해서, 신규 도로 건설과 교통량 증가의 상 관관계를 분석했다. 그동안 나온 다양한 문헌과 사례 연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도출한 결론은 아래 그래프와 같다. 즉 도로의 수용량과 통 행량은 늘 수렴하는데, 용량을 높이면 그만큼 통행량이 늘어나 이를 상쇄하게 된다는 것이다. <Gnenerated Trafiic and Induced Travel> Todd Litman, 2015.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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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실제 작동가능성을 고려해서 설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버스 등 대중교통 이용자 들이 납세순응도가 높은 편이며, 또 자동차 없는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대중교통체계가


효과적이라는 사례는 즉각적으로 서울시의‘끊어진 경전철’노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처럼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례들을 구체적인 데이터와 사례를 통해서 반박하고, 그것을 ‘행정의 지침’ 으로 제시하는 것이 걷기의 첫 단계다.

사람을 먼저 바꾸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제프 스펙의 책에서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 부분은, 보행자 중심이라는 도시정책을‘시민 이 바뀜으로서 가능하다’ 는 식의 캠페인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서울시가 추진한‘원전 하나 줄이기’ 는 구체적인 행정의 변화나 도시공간의 변화보다는 서울시민들에게 생활의 규칙을 강제함으 로써 달성해왔고, 자전거 타기나 걷기와 같은 방식도 때때로 자전거대회나 걷기대회와 같은 대중적 방식 으로 접근해왔다. 하지만 제프 스펙이 제시하는 10단계는,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는‘반즈 댄스’교차로(교차로에 십자형 태의 횡단보도를 놓는 것)나 일방통행로 자체가 사실은 자동차 중심의 도시환경을 위해 도입된 것이며 차도

와 보도 사이의 둔덕이 오히려 자동차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또, 빨간불일 때 우회전이 가 능하도록 한 교통신호가 사실상 전형적인 미국적 신호체계라는 말 역시 놀라움을 준다. 그리고 자전거가 차도를 함께 사용하는 것보다는(이것은 소수의 전형적인 라이더만 가능하다)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전용도로 가 더욱 효과적이며, 공공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설사 운전자의 시야를 가리더라도 운행속도 를 늦출 수 있는 가로수를 세우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제시한다. 마지막 단계는“승자를 뽑는 것” 이다. 애초에‘목도리 가게나 운전자전용 패스트푸드점이 즐비한 공 간’ 에 돈을 들이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곳이 어 디인가” 라는 질문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이런 관점은 많은 대안적 정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다. 가장 가시적인 곳, 가장 눈에 띄는 곳을 우선시하지만 제프 스펙이 제안하는 곳은 가장 적은 비 용으로 성공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성공이 더 많은 비용을 감수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제프 스펙이 보 기에 가장 적절한 곳은 민간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다. 이런 곳에는 공공공간을 만듦으로써 거리의 풍경을 바꿀 수 있고, 이미 확보된 공개공지를 통해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도 많다. 이런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보행 중심 도시가 확산되는 정책의 선순환 구조를 구상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시스템적 고민은 소위 토건세력들이 늘 해왔던 것이기도 하다. 1966년, 미국의 이해관계자 잡지인《아스팔트 블러틴》 에는 건설산업계의 사고방식이 간명하게 드러난 그림이 게재되었다. (1) 일단 적은 돈으로 길을 만들 수 있다고 제안해서 성사시키면, (2) 이는 자연스럽게 교통수요를 유발하게 되고, 도로세가 많이 걷힌다. (3) 이렇게 걷힌 도로세는 추가적인 도로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을 높인다. (4) 그 리고 많아진 도로는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더 많은 통행량을 만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시 도로를 놓아 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다시 1-2-3-4의 순환이 시작된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5


제프 스펙의 책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은 이런 연쇄의 고리를 끊어내는 방법이다. 즉, (1)의 흐름을 보행 중심으로 전환시켜 확대하면, 자연스럽게 2-3-4로 가는 (+)의 시스템 루프를 완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 이다. 이것은 사람의 인식을 바꿔서 좀 더 나은 사람들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더 나은 환경 을 만들어서 사람이 나아지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동의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당원들 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토론해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면서 내내 머릿속으로는‘서울이 이렇게 바뀐다면 어떨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를 내내 고민했다. 경험적으로 이렇게 쓸모 있는 매 뉴얼은 보기 힘들다. 특히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집은 더더욱 찾아 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 책을 꼭 소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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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 ⑲

시리자의재집권(?) 안효상 편집위원

브레히트가《갈릴레오의 생애》 에서 쓴“이성의 승리는 이성적 사람들의 승리이다” 라는 말은 직설법 문 장임에도 현실의 무자비한 힘을 고려할 때 두 가지 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과연 이성이 승리하는가?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환상으로 부서진 이성

올해 초 그리스 총선에서 시리자가 승리했을 때 그 기쁨을 떠받친 것은‘반긴축’ 이라는 분명한 대안이 었다. 이는 당연하게도 2010년부터 시작된 구제금융이 낳은 반민중적 효과를 교정하려는 급진좌파의‘이 성적인 결론’ 이었고, 이에 대중이 호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리자는 이성적인 사람들로 등장했다. 그 이후 이 이성적인 사람들은 유로그룹과의 협상에서도 이성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들은 유로존에서 나 가지 않으면서도 긴축기조를 제거함으로써 그리스 민중의 삶을 돌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후일 바루파키스 전 재무장관 등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협상 과정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았다. 그리스에 가혹한 구제금융 조건을 강요할 경우 민중의 삶은 완전히 파탄날 것이라는 인도주의적 호소, 또 한 이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그렉시트를 할 경우에는 유로존 자체가 위기가 빠질 것이라는 이성적인 예 측에 기초한 설득 모두가 채권자들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고, 결국 시리자는 굴복했다. 물론 그리스 민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의 자리에 오른 시리자가 그냥 굴복할 수는 없었다. 부채탕감은 없이 더 많은 긴축만이 있을 뿐인 채권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두고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투표 라는 수단을 동원했다. 이때 그리스 민중은 다시 한 번 이성적인 선택을 했다. 제3차 구제금융 협상안에 반대하는 것은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나간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유럽연합에서 탈퇴한다는 의미라는 유 럽과 그리스 내 우파언론의 집중포화에도 불구하고 투표자의 61퍼센트가 반대(OXI)를 선택했고, 그럼으로 써 이들은 인간의 존엄한 삶을 지키겠다고 뜻을 모았다. 이렇게 1월 25일은 7월 5일로 이어졌다. 그런데 치프라스 총리는 이런 국민투표를 한낱 에피소드로 만드는 데 한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제3차 먼 좌파 이웃 좌파 97


구제금융 협상안을 받아들임으로 써 이미 채권단에 굴복했던 치프 라스는 국민투표의 결과에도 불구 하고 자신만이 이성적인 사람인 체 했다. 유로존에서 나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협상안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 은 없다는 것이 그의 이성이었다.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를 앞두고 거리에 나란히 붙은 구제금융 협상안 찬성 (NAI) / 반대(OXI) 홍보포스터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한 이유가 (좌파) 유 럽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 고 말한다.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 이 현재로서는 적절한 방법이다. 사실 유로존이 출범할 때부터, 서

7월 5일 시행한 구제 금융 국민투표 결과. 전체 투표율 62.5퍼 센트 중 투표자의 61 퍼센트가 구제금융 협상안 반대에, 39퍼 센트가 찬성에 투표 했다.

로 다른 경제적 힘이 있는 나라들 을 하나의 공통 통화로 묶을 경우 개별국가가 경제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통화정책을 취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여 기에 더해, 특히 독일의 요구로 엄 격한 재정정책까지 요구되었기 때 문에 개별국가는 경제운영과 관련 해서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스는 이런 유로존의 문제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일 뿐이다. 물론 유럽연합으로 표현된 유럽통합은 전쟁을 억지하고 공동의 번영을 가져오겠다는 이상으로 추동되 었다. 20세기 전반에 민족들 간의 경쟁에 따른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을 겪은 유럽으로서는 어쩌면 다른 선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유럽연합과 유로존은 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구현하는 제도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전쟁 억지와 공동 번영이 아니라 도리어 국내외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그렉시트, 즉 개별국가가 경제와 통화 발행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겉보기에는 후퇴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난제를 해결하는 우회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98


이렇게 또 다른 이성이 있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수는 아니지만 치프라스의 노선에 반대 하여 시리자를 나갔다. 이로 인해 시리자-그리스독립당 연립정권은 재구성되어야 했고, 8월 20일 치프라 스 총리가 사임하면서 조기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

환상 속의 이성

유로존을 탈퇴하겠다는 실질적인 계획이 없이는 구제금융을 둘러싼 협상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 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치프라스나 시리자 정부 내 유럽주의 온건파가 그런 상황이었고, 그 결과는 앞서도 말했듯이 굴복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거나 조심스럽게만 말해졌지만, 그런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 적인 것이 시리자 내 좌파그룹인‘좌파 플랫폼’ 의 코스타스 라파비차스의 계획안이었다. 올봄 라파비차스 는 독일의 동료 경제학자인 하이너 플라스벡과 함께 <그리스를 위한 사회적・민족적 구조 프로그램>을 작 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유럽통화동맹 내에서는 부채탕감, 긴축제거, 회원국 자격 유지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른바“불가능한 3요소” 이다. 따라서 민중의 삶을 우선하는 급진적인 정부라면 앞의 두 가지, 즉 부채탕감과 긴축제거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 프로그램은 권고한다. 이에 따라 통합된 방책들로는“부채를 탕감하고, 균형예산을 거부하며, 은행을 국유화하고, 조세개혁 을 통해 소득과 부를 재분배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며, 노동관계 법률을 회복하고, 공공투자를 늘리며,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관계를 재규정하는 것” 을 든다. 또한 이러한 방책들은 유로존이라는 엄격한 틀 내

코스타스 라파비차스 (Costas Lapavitsas)

먼 좌파 이웃 좌파 99


에서는 채택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국가통화를 재도입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럽통화동맹에 서 나오는 과정을 29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런데 당시에 이 프로그램은 공적토론이라는 연옥에조차 끼어들 수 없었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그리스 정치계급 모두가 통화동맹에서 나간다는 것을 꿈조차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치프라스 등 시리자 주류가 이성이라는 무기로 채권단을 설득하려 했기 때문이고, 아직 그리스 국민 다수 가 이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말에 구제금융 협상안이 나왔을 때 환상은 깨졌고,‘반대’ 라는 이성이 공적인 자리를 차지 했다. 하지만 치프라스는 이를 다시 자신의 환상적인 이성으로 바꿔치기했다. 그리고 여기에 저항하는 또 다른 이성적인 사람들은 8월에‘민중연합’ 을 구성했다. 민중연합은 시리자 내 좌파 플랫폼 출신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치프라스의‘투항’ 에 반발하는 사람 들이 만든 정치연합이었다. 이들이 모인 구심점은 원래 시리자가 했던 약속, 즉 긴축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라파비차스의 프로그램에서 제시된 유로존 탈퇴 및 경제적 주권 회복이다. 앞서 말한“불가능한 3요소” 를 고려하면 이성적인 선택이고, 적절한 대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9월 20일 조기 총선의 결과는 또 다른 이성의 시간이 도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성과 환상의 교착

9월 20일에 있었던 선거 결과, 시리자는 35.5퍼센트를 득표해서 전체 300석 가운데 145석을 획득했 다. 지난 번 정부에서 연정을 한 그리스독립당은 3.7퍼센트 득표로 10석을 얻었다. 두 당은 지난번과 마찬

9월 20일 조기총선에서 시리자가 승리함으로써 총리로 재신임을 받은 치프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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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로 이번에도 연정을 구성했다. 하지만 이런 선거 결과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56.6퍼센트에 머무른 투표율이다. 이는 1974년 민주 화 이래 가장 낮은 투표율이며, 지난 1월 총선의 63.6퍼센트와도 비교되는 수치이다. 이는 국민투표 결과 가 손쉽게 뒤집히는 것을 눈앞에서 본 대중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탈정치화 혹은 비정치화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신민당, 사회당, 공산당 등의 기존 정당은 비슷한 결과를 얻었지만, 새로이 반긴축을 내건 민중연합은 2.9퍼센트를 얻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는 절대적 시간 부족이라는 상황적 요인과 이른바‘플랜 B’ 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민중연합의 일부는 앞서 살펴본 프로 그램을 분명하게 자기주장으로 삼고는 있지만 이를 대중적인 의제로 아직 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에 나선 그리스 국민은 최선은 물론 아니고 차선도 아닌 차악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기준은 누가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느냐가 아니고 그저 현 상황을 누가 더 잘 관리할 수 있는가 이다. 이렇게 시리자는 재집권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은 교착상태이다. 물론 시리자의 재집권을 정권의 연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1월 총선부터 8월말 치프라스가 사임 할 때까지 시리자가 보여준 궤적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이자 경제위기 시기의‘개혁주의’ 가 헤라클레스 의 과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개별국가가 기존의 위치를 지키면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주권을 발휘해서 민중의 존엄한 삶을 지키려는 시도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방파제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질 운명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간단하게 국제주의를 주장한다고 될 일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 구체적인 계기를 포착하는 것 이 중요하지 공허한 슬로건을 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 그리스의 상황을 보면 그런 계기가 아주 멀 것 같지는 않다. 지난 5년 동안 그리스는 긴축정책으 로 인해 대다수의 소득이 격감했고, 그 결과 전체 3분의 1 이상이 빈곤선 아래에서 말 그대로 연명하고 있 다. 이런 상황에서 시리자-그리스독립당 연립정부는 10월 16일에 구제금융의 조건이 되는 첫 번째 긴축 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아마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물론 집권 시리자는 조세개혁과 부패척결로 상황을 돌파하려고 한다. 하지만 부패와 낮은 세금이 그리 스 상층 엘리트가 그동안 이윤을 확보해온 일상적 방식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쉬운 과제가 아니다. 게 다가 유로존 통합 이후 그리스에 투자한 유럽자본은 기존 체제에 끼어드는 방식으로 일을 벌였기 때문에 이런 개혁에 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제3차 구제금융에 따른 긴축안이 효과를 발휘할 때 다시금 민중적 저항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테고, 여기에 누가 이성적인 대안을 제출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의 대안은 무조건적인 유 럽주의를 버리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 나머지 유럽의 좌파가 어떻게 호응할지는 또 다른 문제 로 남을 것이다.

먼 좌파 이웃 좌파 101


화요일의 약속 - 두 번째

무대에 정치적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변방의 예술가, 임인자 사진・글 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지난여름 두 편의 연극을 보았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거장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게공선》 (1929)을 각색한‘극단 공’ 의 동명 연극과‘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활동가들의 토론극《똑바로 나를 보 라 2》 . 두 연극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첫째, 두 작품 모두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 노동자들 의 삶을 다루었다.《게공선》 은 게를 잡아 가공하는 어선이자 공장인 게공선 노동자의 삶을,《똑바로 나를 보라 2》 는 성노동자의 삶을. 둘째, 두 연극 모두 작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서울 변두리 지역의 극장에서 상연되었다.《게공선》 은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공장 2층에 있는‘인디아트홀 공’ 에서,《똑바로 나를 보라 2》 는 서울 성북구의‘미아리 예술극장’ 에서. 마지막으로 셋째, 두 연극 모두 공교롭게도 같은 연극제의 초청 작이었다. 올해 벌써 17회째라고 하는 서울변방연극제. 102


공교롭게도? 아니다.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알고 보니 두 연극 모두 같은 연극제 초청작이었다고 할 것 이 아니라, 서울변방연극제 초청작이었기 때문에 두 연극 모두 봤다고 해야 한다. 변방의 이야기를 변방 의 방식으로 변방의 지역에서 들려주려는 신중한 기획의 산물이었다고나 할까. 2010년 봄에 인터넷 검색 창을 뜨겁게 달궜던‘광화문 괴물녀’ 도 서울변방연극제 기획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임인 자 예술감독이 있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변방연극제의 예술감독으로 일해 온 임인자 감독 덕 에, 우리는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최전방에 있는 연극들을 검색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꼭 한 번 만나서 변방의 연극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마침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검열과 배제를 위한 블 랙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괴소문도 들리는 바,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겸 두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임 인자 예술감독과 잡았다.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 많은 사람들에게 연극은 여전히 낯설다. 더구나 서울변방연극제는 그야말 로 변방에 있는 연극제여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서울변방연극제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이 연극제와 임인자 감독이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듣고 싶다. 임인자(이하 임) : 변방연극제는 1999년《젊은 연출가들의 속셈전》 이라는 이름의 실험연극제로 시작 했다. 자유로운 창작과 실험 정신을 모토로‘서울공연예술가들의 모임’ 이라는 단체에서 만들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연극인들이 기성과는 다른 연극을 해보고는 싶은데 혼자서는 못하니까 같이 만들어 보자고 해서 축제 형식이 되었다. 초기에 워낙 좋은 연극들이 많았다. 멀티미디어를 많이 활용했다. 특히 영상매

2015년 8월 2일《똑바로 나를 보라 2》공연이 끝난 후의 임인자 예술감독

삶과 문화 103


체들이 적극적으로 무대로 들어왔다. 1회 때 6작품인가 7작품인가 올라갔는데 그때 나는 그 작품을 모두 본 관객이었다. 2회 때는《낙서하 는 남자》 라는 작품에 배우로 참여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기획 일을 하고 있었는데, 2004년에 변 방연극제 사무국에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연출가들이 돌아가면서 사무 국장을 맡았다. 7회 정도 되니까 창작자들이 기획까지 맡는 게 버겁고 축제를 운영하는 게 힘드니까, 기획 및 운영과 창작을 분리하게 된 것이다. 2010년부터는 예술감독으로 일하게 되었다.

예술의 변방에서 세계의 변방으로

미 : 변방연극제 작품들은 형식적으로 실험적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으로 강한 발언들을 담고 있어서 관객으로서 무척 반가우면서도 놀라웠다. 이런 연극제를 기획하게 된 개인적인 계기가 있는가? 임 : 실험연극제로 시작한 만큼, 변방연극제의 목표는 기성 무대의 문법과 언어를 새로운 감각으로 바 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변방이 무엇인지 자체를 고민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예술의 최전선으로서 의 변방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세상에 좀 더 눈을 뜨면서는 예술의 변방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변방 까지 고민하게 되었다. 예술과 사회문제의 관계는 사유로서보다는 감각으로 받아 들였다. 89년 5월, 광주에 있는 중학교에 입 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 등굣길에 이철규 열사의 포스터를 봤다. 그때는 이철규 열사인줄도 몰랐다. 눈이 튀어나와 있고 얼굴이 검은 보랏빛 몸체였는데 거기에“이것이 어찌 익사란 말인가?” 라고 쓰여 있었 다. 어렸지만, 뭔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구나,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그 포스터를 학교 앞에 붙여 놨을까 궁금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대학생들이 붙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금남로 주변의 민중회화를 보면서 세계에 대한 질문의 감각을 키웠다. 학교가 너무 멀었고 집에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나는 금남로에 있던 독서실에서 살았다. 독서실에서 자고, 금남로 근 처 도서관으로 책 보러 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면서 금남로를 계속 지나다니게 되었고, 전시되어 있는 시와 그림, 특히 풍자화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풍자화 중에 레이건, 전두환 같은 사람들의 얼굴을 굉장히 희화화한 그림들이 있었다. 전두환이 누군지도 모르고, 레이건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 그림들이 내게 질문을 갖게 했다. 서울에 와서는 연극을 전공을 했다. 2학년 1학기 현대연극 수업시간에 문화상호주의를 배우면서 서구 의 실험극이 동양의 문화를 어떻게 흡수했는가 배웠다. 뉴욕에서 활동한 리차드 쉐크너가 환경연극을 주 장하면서 기성 무대질서의 변화를 주장하는데, 그 원천에 인도 바라나시 건너편 마을에서 열리는‘람릴 라’축제가 있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97년 7개월 간 인도 를 여행했다. 라마야나 서사시를 재연하는 이 이동식 연극 과정에서 마을의 집과 성벽이 가진 장소의 성 격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어릴 적에 금남로에서 체험한 것을 연극 이론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104


‘광주사태’ 가‘광주민주화항쟁’ 으로 불리기 시작하던 무렵, 차만 다니던 금남로 분수대 주변 도로는 사 람들이 안건을 가지고 모이는 회합의 장, 축제의 장이 되었다. 인도의 경우 소랑 사람이랑, 자전거랑 릭샤 와 자동차들이 도로 위에 항상 같이 있었다. 카오스 속 질서가 나는 너무 좋았다. 그게 광장의 에너지다. 기존의 질서, 차만 다녀야 하던 곳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뀐다. 나는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 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자동차 길로만 다녀야 하고, 사람은 사 람 길로만 다녀야 하고…. 예술은 그 제도에 균열을 낼 수 있고, 일시적으로나마 바꿔낼 수 있다. 그게 사람들에게 좋은 파급을 미 친다면, 어떤 일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감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들을 연극이 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 기성 드라마 구조나 관람 방식과 다르게 새로운 무대 언어에는 무대를 변화시키는 동력 같 은 것이 있다. 웃고 울기 위해서 연극을 보는 게 아니라, 무언가 함께 이야기하고 감각을 교류하기 위해서 연극을 보는 것이다. 이 광장에서의 경험 때문에 극장 안, 무대 위에서 하는 연극보다는 극장 밖 거리에서 의 연극, 장소 특정적 연극을 많이 하게 되었다.

다른 선택, 하지만 어떻게 다른?

미 : 그 포스터를 중학교 등굣길에 붙였을 사람이나 금남로의 문화제를 기획한 사람도 자신의 행위가 한 사람의 삶을 이렇게까지 바꾸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어떤가? 그 포스터를 보지 않았다면, 또는 변방연극제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 무 버거운 짐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임 : 나는 그게 각성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내 자신의 삶이 너무 엄격하고 너무 올바른 길을 찾아서 살려고 하더라. 트라우마 센터에 찾아간 적도 있다. 나는 사회적 각성이라고 생각했는데, 트 라우마라고 하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막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의 죽음이 나도 모르게 나에 게 큰 상처가 됐구나, 내가 너무 심하게 애썼구나 싶었다. 그게 사실 시대의 상처다. 어렸을 때부터 지병이 있어서 늘 한계가 있는 상태에서 살아 왔다. 그러다 보니까, 재미있게 열심히 사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 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인 욕망체계에서 벗어나 있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돈 에 신경을 안 쓴다. 변방연극제에서 일한지 11년째,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다. 축제를 하려면 빚도 내야 하는데, 대출은 어차피 안 되니까 카드론을 쓴다. 워낙 많이 써서 카드론 이자가 20퍼센트를 넘는다. 빚이 많아서 짬짬이 강의하고 원고 쓰는 등 아르바이트를 계속 해 왔다. 연극인 평균 연봉이 500이라고 하면 연극하지 않는 사람들은 웃겠지만, 그게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인들이 연극을 계속 하는 것은, 단 순히 그들의 표현욕구가 넘쳐서가 아니다. 자신 삶에 대한 선택이다. 그런 선택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성공인가에 대한 다른 기준을 경험할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삶과 문화 105


①제12회 변방연극제, 도시기계 요술환등과 산책자의 영리한 모험, 2010 ②제13회, 변방연극제 돼지와 나, 2011 ③제14회 변방연극제, 연극 없는 연극 정치 없는 정치, 2012 ④제15회 변방연극제, 사건일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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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제16회 변방연극제, 연극이라는 광장에서, 2014 ②제17회 변방연극제, 십오원오십전, 2015

그런 무대를 만들 때 무대 아래 현실을 잘 사는 것도 중요하다. 예술가는 현실의 질서로부터 벗어나야 한 다고 생각한다. 삶은 엉망진창으로 살면서 발언만 비판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무대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는 창작의 방식, 표현 방법의 문제인 동시에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 삶 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형제복지원이나 기지촌의 삶과 같은 현실의 이야기들이 무대에 올라올 때에는, 연극을 하는 우리나 판을 만드는 기획자나 모두 무 대가 귀중히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고민을 한다. 관객 입장에서는 다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으 나, 그 무대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바뀐다. 무대를 만들어가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나. 연습을 하고 일상을 살아내는 시간에도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다 해서 무대까지 갈 수밖에 없다. 잠깐이지만 누군가 질문할 수 있게 하고, 정의내릴 수 없지만 무언가 감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 다고 본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건 간에 그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 삶이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 중학교 때 봤던 포스터를 통해서 시작한 질문이 내게 계속 작동해 왔다. 그 사 삶과 문화 107


이에 나는 계속 성장했고 이 사회를 살아왔다. 내가 어떤 발언을 하게 되는 것은 벌써 30년이 지난 시점이 다.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하는 질문인데 다시 하게 된 시대상황이 안타깝지만, 30년 전에 했던 질문을 나 는 여전히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서 발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 각한다. 나의 생각을 바꾸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압사당하는 아래로서의 변방

미 : 제도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혹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술을 특 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유희를 위한 유희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부터 불순하다는 얘기를 듣지는 않는가? 임 : 어떻게 보면 나는 사실 예술지상주의자다. 예술은 마치 치외법권 지역 같은 곳이다. 왜냐하면 가 장 자유로워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가들이 다들 너무 점잖다고 생각한다. 더 미친 예술가가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하는 질 문인데 다시 하게 된 시대상 황이 안타깝지만, 30년 전에 했던 질문을 나는 여전히 계 속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서 발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예술이 중요하 다고생각한다. 108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내 한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너무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한 것이 아닌가 반성했다. 사회적 목소리로서의 예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미국대사관 100미터 이내에서는 일인시위도 할 수 없다. 그런 경계, 보이지 않는 경계를 탐색하고, 도시에 쌓여 있는 제도적인 그물망을 흔들겠다는 목표로 장소특정적 연극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했다. 2010년 광화문 광장에서 공연했던《도시이동연구: 당신의 소파를 옮겨 드립니다》 (이경성 연출)이 그렇 다. 광화문 광장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제도의 층위를 찾아서 곳곳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배우 성수현 씨 가 도시의 괴물성을 주제로 자신의 작업을 하고 싶다며, 괴물녀로 분장해서 도시를 거닐었다. 우리는 이 것을 영상으로 촬영해서 온라인상에 퍼뜨렸다. 괴물을 찾는다는 전단도 뿌렸다. 이 퍼포먼스가‘광화문 괴물녀’ 라는 이름으로 실시간 검색에 올라가기도 했다. 광화문과 청계천 주변에서 영상을 찍는데, 그 주 변에 경찰이 많지 않나. 괴물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왜 이런 걸 하느냐 난리가 났었다. 우리는“공연 이다” ,“퍼포먼스다” ,“행위예술이다” 고 했다. 사회적으로 좀 더 눈을 뜨게 된 것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인 한종선 씨를 만나고 나서부터이다. 2013년 3월에 장지연 연출가가 전화를 해서,“만약 우리 사회가 하나의 극장이라면 거기에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고 했다. 나는 연극을 통해서 세계 를 이해한다. 그 전에 누군가 내게 부랑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2013년 제15회 변방연 극제에서는 형제복지원 문제를 다룬 작품《우리는 난파선을 타고‘유리바다’ 를 떠돌았다》 (장지연 작연출) 를 초청했다. 나는 한종선 씨를 무대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분을 만나면서 경계의 안과 밖에도 끼지 못하고 그 밑에 깔린 사람들, 우리 세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0년대 형제복지원이 부랑인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청소를 자행했는데, 한종선이라는 사람이 2012년도에 국회 앞에서 1인 시 위를 하면서 스스로‘나는 누구인가’질문하기 전까지 그들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마찬 가지였다. 그렇게 압사당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내게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나랑 나이가 같았다. 나는 제도 안에서 학교 다니면서 연극 공부도 하고 살아왔지만, 그는 학교도 다니지 못하 고 삶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좌우라는 것이나 안팎이라는 것마저도 내게는 기득권으로 여겨진다. 그 밑 에 깔려있는 사람들을 더 주목하게 된다.

무대 - 정치적인, 가장 정치적인 공간

미 :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창작지원 대상에 선정된 작가와 작품들 중 정치적 편향성을 이유로 선정을 취소하거나 작가로 하여금 지원금을 포기하도록 종용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변방연극제도 예전 에 이런 지원금을 받은 것으로 안다. 사회비판적이거나 정치적인 작가와 작품들이 공적인 지원에서 배제 삶과 문화 109


되는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임 : 변방연극제도 우수예술축제로 선정되어 지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지원에 의존해서 마치 쳇바퀴가 돌 듯 창작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모금학교 다니면서 모금하는 법을 배우 고, 자유로운 창작과 독립적인 제작을 모토로 삼아서 크라우드 펀딩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을 했는 데,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런 일이 지속 가능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예술이 독립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이고 독립을 잘 하기 위해서 지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용역 주듯이 예 술가에게 뭐 하나 떼 주는 문제가 아니다. 혼자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예술지원이라는 후원제도가 있다 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검열 사태를 우리의 자유로운 정신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로 받아들인다. 작품이 옳다, 그르 다 판단하는 것은 예술가와 관객의 몫이다. 그런데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사전에 칼 자루를 들이댔다. 이는 엄연히 작품에 대한 검열이고 훼손이고, 우리 사상에 대한 칼질이다. 만약 예술이 정치적이라고 하면, 다 없앨 것인가? 아니지 않나? 나는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라 생각한다. 사람의 모든 표현은 정치적이다. 정치적 중립성은 어떤 사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 유보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균형 있게 듣는 것이다. 하지만 무대는 아니다. 무대는 표현하고 발언하는 자리이다. 그곳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자유로운 의견이 있을 뿐이다. 정치적 중립성이 필요한 곳은 오히려 형평성과 공공성을 고려해서 작품을 지원해야 하는 자리이다. 이 작품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으니까 지원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행위이다. 국가 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건지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통제하려고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 는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독려해야 할 곳이다. 국민은 하나의 의견만 가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가 지고 있다. 이러저러한 다양한 입장들을 같이 공유하고 협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해보자 고 제안하는 곳이 국가다. 그런데 국가기관은 이렇게 생각하니까 예술가들은 조용히 하라? 그게 독재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술이 더 정치적이어야 한다. 예술이 이런 모든 공공사안들을 얘기할 수 있는 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 : 지원금을 이용해서 현 체제를 비판하는 예술에 대한 배제가 강화되는 한편,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으로 체제 순응적인 예술에 대한 독려도 강화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체제 순응적인 예술에서 강조하는 것도 창조성, 다양성, 독립성 따위라는 점이다. 예컨대 서울하이페스티벌과 같은 관 주도의 문화예술축제 나 기업의 광고에서도 다른 감각, 장소특정성, 심지어 질서에 균열내기 등을 강조한다. 어떻게 구별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보는가? 임 : 올해 3월 11일에 대학로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과 함께 연극인들이 대학로에서 상여를 매고 곡 소리를 냈다. 죽음의 증후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증후가 현실이 돼서 거의 목 앞에 와 있는 상황이다. 이 제는 어떻게 예술이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예술은 무엇을 회복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 각한다. 그 전에는 동원이 되더라도 동원이 되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고, 지원을 받더라도 지원제도 110


에 대한 비판보다는 지원 여부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선이라고 생각했던 제도가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는 지원금을 신청하거나 신청하지 않거나,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서울 하이페스티벌의 경우는 제도권에 의해서 계획된 예술이다. 제도권에서는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해방공간을 만들 수 있다. 그건 제도권이 하는 쉬운 선택이다. 그런 것이 사람들에게 균열을 줄 수 있을 까? 제도가 할 수 있는 것은 해방체험일 뿐이지 해방이 아니다. 어떤 형태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될 것인가 생각하면 다른 형식이 될 것이다. 이 축제가 왜 필요한가, 왜 있어야 하는가 생각하면 어디에 균열을 내야 하는가 결정할 수 있다. 자본에 복무하는 예술가들이 다름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언정, 그들은 아래가 아니라 꼭대 기, 최상의 기업을 향하고 있다. 역시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감각하게 하는 예술을 경험한 사람은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이나 소비자로서 어떠한 것을 선택하거나 할 때 자신들의 소비 행위가 결국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 그게 후기자본주의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라면 역할 아닐까. 미 : 마지막 질문이다. 오늘 대화만으로 보면, 인생에서 주요한 몇 가지 분기점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에 보았던 이철규 열사 포스터, 고등학교 시절에 경험한 금남로 문화제, 대학교 시절 현대연극 수업과 인 도여행, 마지막으로 변방연극제 예술감독. 어떤가, 다음 분기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임 : 재단을 만들고 싶다.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기업 말고는 예술지원재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술가 지원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휘둘리는 제도 속에서는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이 힘들다. 예술가들이 큰 금액을 필요로 하는 단계도 있는데, 그럴 때 지원할 수 있는 재단이 필요하다. 물론 현재 나 는 무일푼이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지원 프로그램과 재 단을 만드는 게 내 꿈이다.

삶과 문화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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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옥상에 텃밭을 마련해 작물을 가꾸고 있지는 않지만, 전화 051-701-1712 전자우편 eco-echo@naver.com

농부들이 어렵게 목화농사를 지어 얻은 면직물을 아끼고 재사용하는 것 또한 ‘도시농업’ 이라고 에코에코는 생각합니다.

해운대구 마을기업 에코에코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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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치 칼럼

성정치, 내가‘나’ 로 살게하는우리모두의정치 백시진 성정치위원

“성정치위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 성정치위원회에서 활동을 하다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성정치’ 라는 단어를 보면 ‘성’ 적으로 무언가 활동을 하는 것 같은데, 그 경계는 모호해 보인다. 게다가 이것이 여성운 동을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퀴어운동을 하자는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다시 금 질문을 해보자.‘성(sexuality)’ 은 무엇인가. 이것은 여성과 어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일상과 정치영역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고, 우리는 이를 어 떻게 드러낼 것인가. 성정치위원회는 이 고민을 안고 지난 9월부터 본격적으로 세미나를 시작했다. 세미나의 첫 번째 주제는‘퀴어’즉 성정체성, 성적지향이다.

첫 번째 세미나 … 이성애중심주의 깨부수기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성 혹은 여성이‘된’ 다. 자신이 가진 성기에 따라 주민등록 번호 뒷자리가 결정되는데, 이는 남성을 뜻하는 1과 여성을 뜻하는 2로만 나뉘어있다. 우리 는 남성 성기를 가진 아이에겐 로봇이나 권총을, 여성 성기를 가진 아이에겐 인형을 선물한 다. 또 하늘색과 분홍색의 옷을 각자에게 입히면서 이 아이는‘특정한 성을 지니고 있다’ 고 지속적으로 인식시킨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여성스러운’혹은‘남성스러운’복 식과 행동을 갖추고 남성과 여성 중 한 가지 성을 가진 채 살아간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성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을 지속적으로 수행(performativity)하면 서 자신이 그 둘 중 하나를 지녔음을‘증명’ 한다. 삶과 문화 113


하지만 정말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성만 존재할까? 여성과 남성 이외의 성은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 남 성 성기를 가진 존재가 XX염색체를 가졌다면(혹은 이 반대라면) 이 사람은 여성인가? 남성 성기를 가졌으 니 남성인가? 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를 둘 다 가지고 태어난 인터섹슈얼(간성)은 여성인가 남성인가?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남-여성 이분법은 생물학적이거나 태생적이지 않다. 이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관념이다. 사람들은‘일반적으로’타인을 남성이나 여성이라 생각하고 각자의 성역할 을 정한다. 다시 말해 치마를 입은 사람은‘당연히’여성이라 인지하고, 그 사람을 감성적/비이성적이거 나 자궁을 가진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람들은‘일반적으로’치마를 입은 사람

치마를 입은 사람이 남성 성기를 가졌는지 아

은‘당연히’여성이라 인지하고, 그 사람을

니면 둘 다를 가졌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

감성적/비이성적이거나 자궁을 가진 존재

가? 우리가 인지한 것은‘치마를 입은 사람’

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한

일 뿐, 이 사람이 여성이라는 보장은 하나도 없다. 혹 그 사람이 특정 성기를 가졌다 하더

것은‘치마를 입은 사람’ 일 뿐, 이 사람이

라도 이것만으로 성을 분간하는 작업은 극히

여성이라는보장은하나도없다.

폭력적이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성기와 다 른 성정체성을 가졌으며, 여성/남성의 경계

를 넘나드는 젠더퀴어도 있다. 게다가 인구 중 10퍼센트는 자신의 성기와 염색체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성애중심주의-이성애매트릭스는 성기/염색체를 중심으로 모두를 남녀로 구분하고 그 각자의 성역 할을 형성한다. 우리에겐 어떠한 선택권도 없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다른 성들, 즉 간 성・무성・트랜스젠더・젠더퀴어가 드러날 수도 없다. 퀴어는 자신이 이성애자나 시스젠더(생물학적 성기 와 성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가 아님을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이를 납득시켜야 한다.

이 이성애매트릭스는 동성애/이성애와도 연관된다. 리처드 도킨스는《이기적 유전자》 에서“살아남은 자기복제자는 자기가 들어앉을 수 있는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를 스스로 축조한 것이다” 라 밝히면서 재생산에 대한 욕구가 마치 자연적인 것인 양 말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이성애자는 자연적인 욕구/섭리를 따르는 자이고 동성애/도착적성행위자는 섭리에 반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불임의 시스젠더 이성애자나 비혼, 딩크족(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부부를 일컫는 용어) 또한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지만 주된 비난의 대상은 동성애자이고, 이들을

향한 혐오의 정도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서울시청 앞에선 매일‘사회악을 조성하는 동성애’반대 캠페인 이 열리고, 동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갖는 것만으로도 지옥불로 뛰어드는 행위라 말한다. 우리의 감정은 이성애매트릭스에 의해 재단 당하고 통제 당한다. 우리는 (성기를 중심으로 한)생물학적 성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여성스러움 또는 남성스러움을 따르 기 위해 일부러 거친 말투를 쓰거나 조숙해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혹자는 여성은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해 야 하니 몸을 가지런히 하고, 남성은 특유의 욕망으로 끊임없이 다른 여성을 탐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 114


만 이마저도‘구성’ 된 존재라면 이런 식으로 여성성과 남성성을 나누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성애와 동성애를 굳이 나누어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할 필요가 있을까?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권은 없는 것인가? 그리고 남성과 여성 둘 중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존재를 위한 언어는 무엇인가?

두 번째 세미나 … 트랜스젠더 알아보기

트랜스젠더의 일반적 정의는‘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과 스스로를 인식하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 람, 혹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에 부여하는 사회적 성역할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젠더를 실천하는 사람을 지칭’ 한다(출처 : <트렌스젠더> 한국성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하지만 이 속에도 의료적 조치, 의복양식 선택에 따라 트랜스섹슈얼(호르몬 투여,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는 사람)이나 크로스드레 서(이성애자이면서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긴장 해소 등의 이유로 이성복장을 선호하는 사람, 성적만족감 성취를 하 지는 않음) 등의 여러 개념이 등장한다.

트랜스젠더는 일반적으로 남성 성기를 지니면서 여성 성별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트랜스젠더 내에도 다양한 결이 존재한다. 따라서 트랜스젠더에 대해선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설립준비위원회 조각보의 강연으로 알아보았다.

아래 내용은 강연 당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1916년에 최초로 성전환 시술이 이뤄지고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에는 질 성형수술을 처음으로 시 도한다. 이후 해리 벤자민이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트랜스섹슈얼, 트랜스베스타잇 등의 용어를 부정적으 로 사용,‘교정의 대상’ 으로 기술한다. 이렇게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이 지속적으로 형성되던 도중, 1966년 8월 샌프란시스코 컴프톤 카페테리아 항쟁(Compton’ s Cafeteria riot)이 일어난다. 이후 1979년 제니스 레이몬드가“트랜스섹슈얼들의 존재 자체가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이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이 들은 질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여성의 몸을 전유하려 한다” 고 비난하는데, 이에 1987년 샌디 스톤이《제국 의 역습》 에서 트랜스 섹슈얼리즘을 재정의하고 트렌스젠더의 삶과 경험을 살펴보면서 트랜스젠더 논의의 폭을 확장시킨다. 1993년 영화《소년은 울지 않는다》 가 개봉하면서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한 관심이 환기,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는 존재한다. 심지어 이 폭력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일상화 되고 있어 더 큰 문제를 낳고 있다. 미국에선 트랜스젠더를 강제 전역시키거나 군 복무 중 전환치료를 받 1) 게 한다. 이전 미국에선‘Don’ t ask, don’ t tell’ 이 성소수자 지지의 척도였다면 이제는 그것이 트랜스

1) 1993년 12월 21일부터 2011년 9월 20일까지 시행된 미국의 동성애자 군 복무 금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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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복무 문제로 바뀔 정도로 미국 사회 내 중요한 이슈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선 어땠을까? 한국에서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21년으로 남아있지만, 일제시대에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해 크게 기록된 바가 없고 주로“일본에서 누군가 성전환을 했다더라”식 의 보도를 하며 트랜스젠더 또는 인터섹슈얼을 단순한‘호기심’ 의 대상으로 본다. 60년대 이후에는 트랜 스젠더에게 수술할 비용을 지원하자는 내용이나 성전환의 방식에 대해 논하는 등 트랜스젠더에 대한 온 정적인 시선을 보이는 반면, 80년대로 넘어오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기괴한 르포기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선정적으로 표현하거나 태국에 가면 트랜스젠더가 많다는 등의 기사로 이들의 현실을 왜곡한다. 특히 90년대에《쇼킹 아시아》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질 성형 장면이 삽입되면서 트랜스젠더 는‘이상한 것’ ,‘기괴한 것’ 으로 여겨진다. 2001년 하리수가 화장품광고 모델로 데뷔를 하고, 2002년 김흥신 의원이 성별정정에 관한 법을 발의 하면서 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이후 2006년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를 실시, 이 과정에서 최초 의‘성전환자모임 지렁이’ 가 출범한다. 교도소 내 트랜스젠더 대우 문제, 형법상에 강간죄의 대상이 여성 으로만 한정되는 문제, 트랜스남성의 목소리를 담은《3xFTM》개봉 등 성소수자 인권의 목소리를 높이면 서 트랜스젠더 운동 또한 성장해갔다. 현재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사안은 크게 군 문제, 성별정정, 트랜스젠더 친화적인 의료 환경 제공 등이 있다. 최근 병무청에서 트랜스젠더에게 고환적출수술을 강요하거나, 면제판정을 해놓고 9년 뒤 면제를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혹은 성별정정 시 의료적 조치를 요구함으로써 성별정정에 장애물을 설치한다. 의 료적 조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뿐더러 이에 따르는 위험 수준도 높다. 그만큼 의료적 조치는 본인의 결 정에 따라 이뤄져야 하지만 선택권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한국사회에서‘나 자신’ 으로 살기 위해선 많은 것을 감내하고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성에 알맞는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던가? 나는 시스젠더 여성으로 몇 십 년을 넘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때는 남자아이처럼 걷고 싶어서 일부러 팔자걸음을 걷 고 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여성적인 모습을 보이며 다른 사람에게 아양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다면‘나’ 는 과연 단일한‘여성’ 인 걸까? 나는 여성으로 학습된 것이 아닐까? 만약 우리에게 성기에 따른 특정한 성으로 살라는 사회적 요구와 압박,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면 이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나’ 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살피면서 이 간 극을 드러내야 한다. 그럼으로써‘나의 정체성’ 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고 내가‘나’ 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성정치는 단순히 성소수자나 타자화된 사람들의 정치가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성으 로만 구성되어 있는 사회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야심찬 구호이며 우리 모두의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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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으면 좋은 책 《젠더 트러블》주디스 버틀러 | 문학동네 | 2008 섹슈얼리티의 시작을 알린 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기존 철학자들의 이성애중심성을 살펴보고 이를 해체하면서,“젠더, 섹 스는 구성된 것이며 이는 이성애매트릭스에 의한 것이다” 라 밝힌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생물학적 성은 사회적 산물이란 말이다. 사실 이 책은 그해‘가장 못쓴 책’ 으로 선정될 정도로 내용이 난해하고 어렵다. 단어 자체가 모호한데다가 철 학적 개념이 버물려있어 한 장만 읽어도 금세 질색한다. 하지만 버틀러 이후에 여성주의의 판도가 바뀌었을 만큼 여성운동사, 퀴어운동사에서 중요한 책이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젠더트러블》 이 어렵다면 역자 해제집《젠더는 패러디다》 가 있으니 이쪽을 참고해도 좋다.

《진화의 무지개》조안 러프가든 | 뿌리와이파리 | 2010

《젠더 무법자》케이트 본스타인 | 바다출판사 | 2015

러프가든은‘성이 남성-여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자연

젠더의 개념부터 이성애매트릭스, 트랜스젠더리즘을 쉽

적이다’ 라는 명제를 통쾌하게 반박하면서 진화 생물학

게 설명한다. 그리고 중간의‘막간극’ 을 통해 이를 보

적 관점에서 성적 다양성을 살펴본다. 퀴어에 생물학적

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젠더 무법자》 에 대한 리뷰

으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이 되는 사람들에게 추

는《미래에서 온 편지》2015년 5월호 <불온한 서재>에

천한다.

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 을유문화사 | 2010 •성적소수자사전 http://kscrc.org/bbs/zboard.php?id=press_dictionary 한국성적소수자문화 인권센터 | 2002-2004 • 《The Transsexual Empire : The Making of the She-Male》Zenith Raymond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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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칼럼

수학이취미가될수있을까? 나동혁 서울 마포 당원

한때, 수학이 취미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불면증이 심할 땐 숙면을 취하려고 수학문제를 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 을 보일까? 이십대 후반, 수학은 잠 못 이루는 나에게 가장 확실한 수면제였다. 아무런 이해 관계 없는 순수한 몰입. 물론 말 그대로 한때였지만. 일상생활에서 수학적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어떤가? 중학교 때 그런 친구가 한 명 있었 다. 나에게 맨홀뚜껑이 왜 동그란지 아냐고 묻던(지금 혼자서 왜 맨홀뚜껑이 동그란지 생각 중 이라면 당신도 그런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일상에서 수학적인 언어를 많이 쓰는 사람은 애석

하게도 친구가 많지 않다. 맨홀뚜껑을 언급하던 그 친구도 그랬다. 외로웠는지 결국 나중에 는 종교에 심취하더라만. ‘오덕’ 이란 말은 일본어‘오타쿠’ 에서 왔다. 마니아보다 조금 더 심하게 어떤 특정 분야 에 매달리는 사람을 오타쿠라고 부르는데 비디오게임 오타쿠, 애니메이션 오타쿠 하는 식 이다. 70~8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오타쿠란 단어는 한국에 넘어오면서 오덕, 오덕후, 덕후 등등으로 변용되었다. 오덕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이미지를 내포하지만, 단연 압도적인 이미 지는“집착”내지는“몰입” 이다. 그래서 오덕이란 말은 어떤 이에겐 칭찬처럼 들리기도 하 고 어떤 이에겐 욕처럼 들리기도 한다. 집착이나 몰입이란 면에서는 수학도 둘째가라면 서럽지만‘수학 오덕’ 이란 말은 쓰지 않 는다. 아무래도 오덕이란 말을 직업이나 전공에 붙이지는 않으니까. 오덕이란 말에는 대가 없이 몰입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대가 없이 수학에 몰입한다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긴 한 데, 역사 속 수학자들은 사실 대부분 수학 오덕이었던 경우가 많다. 직업으로 수학자를 선 택한 사람도 많지 않다. 순수학문이란 말이 대체로는 의미가 없지만 여전히 그 말에 그나마 가장 어울리는 분야가 수학인 건 분명하다. 118


수학적 태도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수학을 잘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논리적이 지만 소통에 서투르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감정표현이 원활하지 않으며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사람들에 게 잘 알려진《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를‘화성에서 온 수학자, 금성에서 온 ○○○’ 과 같은 표현으로 바꾼다면 ○○○ 자리에는 무엇이 올 수 있을까?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겠지만 의외로 생각처럼 대립지점이 명쾌하지는 않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단순한데, 어떤 직업군에도 수학적 마인드가 필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수학자’하면 사람들은 흔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거나 밤새 연습장에 끄적거리며 문제를 푸는 집요 한 장면만을 상상한다. 하지만 의외로 직관적 상상 력에 기댄 수학자들도 많다. 가우스는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공상을 하다가 나뭇잎이 중심에서 멀어질 수록 바람에 떨어지는 빈도가 낮다는 사실을 발견하 고 소수의 빈도를 고민했다. 이 고민을 이어받은 제 자 리만은 제타함수란 개념을 도입하는데, 리만가설 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난제로 유명하다. 리만가 설은 1900년 수학자대회에서 힐베르트가 제시해서 유명해진 23개 난제에 포함되었고,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리만이 쓴 논문은 고작 10 페이지에 불과하다.1) 오일러는 아예 증명을 생략하 고 결론으로 건너뛴 다음, 몇 년 후에 증명을 완성하 는 경우도 있었다. 편집증적으로 매단계마다 논리적 정합성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렇게나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다가 문득 큰 물고기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 (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위) 에바리스트 갈루아 (Evariste Galois) (아래)

길어올리듯 아이디어를 낚아채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감성이 고도로 절제되어 있거나 세

1) 리만은 논문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남겼다.“...모든 근이 이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물론 이는 엄밀한 증명을 거쳐야 한다. 다 만 본 논문의 주제에는 벗어나므로 헛되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막고자 이쯤에서 다음으로 넘기기로 한다.”미치고 팔짝 뛸 노릇 이다. 리만이 아껴야 했던 그 몇 시간 때문에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수학자 들은 최적화된 기호로 표현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서인지 미니멀리즘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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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과 동떨어진 은둔자적 이미지와 상반되는 수학자도 많다. 프랑스 천재 수학자 갈루아는 프랑스혁명 당 시 급진공화주의자였다. 오늘날로 치면 열혈운동권 학생이었단 얘기다. 퇴학, 체포, 수감 등이 일상적으 로 반복되다가 스물한 살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결투를 신청해 총에 맞아 숨진다. 한 편, 수학자에게 씌 워진 순수한 지식인 이미지는 어떤가? 대한수학회 회장이었던 최윤식은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승만 정부 의 해괴한 주장을 앞장서 주장한 사람이다. 그가 반올림 의미조차 제대로 몰랐을 리는 없다. 흔히들‘수학’하면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대뇌피질을 발달시키는 고된 과정을 떠올린다. 대충 은 맞는 이야기다. 토론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의견교환 과정에서 논리가 다듬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수학이라는 언어는 소통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학자들이 뭔가를 알아가는 과정에는 대체로 등장인물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수학자 자신만 등장하는 모노드라마인 경 우도 많다.

어이없는 죽음, 아르키메데스

아르키메데스는 그리스 시대 최고의 수학자로 평가받는다.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를 다섯 명만 뽑으라고 한다면 아르키메데스가 꼭 들어갈 것 같다. 그 정도로 알아낸 게 많 다. 원의 넓이, 원주율 파이(pi)의 근삿값, 구의 부피, 구의 겉넓이, 원기둥과 원뿔의 부피비 등등 뭐 아무튼 엄청나게 많이 알아냈다. 금관이 순금으로만 이루어졌는지 불순물이 섞였는지 알아내라는 왕의 명령에 고심하던 차에 욕조에 몸을 담갔다가 밀도 개념을 알아내고“유레카” 를 외쳤다는 그 사람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아르키메데스에 얽힌 일화는 많다. 포물선에서 빛의 진행경로를 기하학적으로 이해한 아르 키메데스가 아주 커다란 포물면 거울로 햇빛을 모아 배를 태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가하면 지렛대의

▲아르키메데스와 아르키메 데스가 제작한 나선양수기가 그려진 이탈리아의 우표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그 린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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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를 이해한 후에“나에게 아주 큰 지렛대만 주면 지구를 들어 올려 보이겠다” 고 폼을 잡기도 했다. 그 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 명확한 문헌정보로 남아 있는 게 없기 때 문이다. 후대에 언급된 이야기들은 미화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생각해보자. 포물면 거울로 빛을 모아 배를 태우려면 거울이 엄청 커야 하는데 기술적으로 그게 가능했는지 의문이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어릴 적 에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본(아이고 끔찍해) 사람은 알 텐데 점화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상당하다. 상대편 병사들이 삼겹살도 아니고 자기 몸이 뜨거워지는데 불이 붙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아무튼 그런 점을 감안하고 얘기하자면, 아르키메데스는 죽음 또한 수학자답다. 아르키메데스는 이탈 리아 옆에 있는 시칠리아 섬에 살았다. 아리키메데스가 살던 당시의 시칠리아 섬은 시라쿠사라는 도시국 가였다. 때는 바야흐로 그리스 시대가 저물고 지중해 패권이 로마로 넘어가던 시대였다. 그런데 시라쿠사 는 사방이 절벽에 가까운 섬이어서 끝까지 완고하게 버텼다.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신무기 덕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결국에는 시라쿠사도 로마에 굴복했다. 오늘날에도 그렇겠지만,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세계적 으로 유명한 두뇌들을 쉽게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지중해 일대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 자였다. 로마군이 밀려올 때 아르키메데스는 바닥에 원을 그리고 뭔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당시는 종 이가 흔하지 않던 시대였으니까. 아르키메데스는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로마병사 가 그 원을 밟아서 그림이 뭉개졌고, 화가 난 아르키메데스가“내 원을 밟지 마” 라고 소리치며 로마병사를 밀쳐냈단다. 화가 난 로마병사 손에 아르키메데스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수학계의 베토벤, 오일러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대부분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안다. 모차르트가 천재 이미지라면 베토벤은 처 절한 노력가 이미지다. 물론 천재니 노력가니 하는 것도 상대적 이미지일 뿐 다들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 람들이다. 베토벤이 귀가 먼 상태에서 음악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 텐데, 악성(음악 의 성인)이란 별명은 그 엄청

난 집중력에 걸맞는 찬사다. 수학에도 모차르트와 베 토벤 같은 사람들이 있다. 모 차르트에 비유하기엔 가우스 가 제격이다. 가우스는 자다

가우스가 그려진 독일의 10마르크 지폐, 가우스 얼굴 왼쪽에는‘가우스의 종형 곡선과 이 곡선의 식이 그려져 있다.

삶과 문화 121


가 일어나면 공식을 하나 만들어냈을 정도로 수학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알고 보면 천재 가우스도 엄청난 노 력가였다. 노력이란 말이 너무 많이 오염되 고 있으니 달리 설명하자면 엄청난 수학 오 덕이었다. 어딜 가나 수학 생각만 했으니 말 이다. 학창시절에는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하 고 놀지 않고 매일 약수, 배수 계산을 했고, 말년에는 괴팅겐 대학 천문대학장을 지내면 서 거의 천문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 다. 그렇다면 수학계의 베토벤은 누구인가? 오일러가 가장 적합하다. 오일러 역시 엄청 나게 많은 논문과 공식을 발표한 것으로 유 명한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말년에 시력을 잃었다. 원래부터 엄청난 집중력을 자랑하던

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오일러는 밤새 수학문제를 푸는 일이 많았 다. 당시는 조명도 지금처럼 발달한 시대가 아니고 의견교환도 서신으로 하던 때다. 결국 과도하게 눈을 혹사시킨 오일러는 녹내장으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문제풀이를 즐겼 고 결국에는 남은 한 쪽 눈마저 시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도 시력을 잃은 후 그가 발표한 논문의 양이 엄청나다. 심지어 나머지 한 쪽 눈마저 시력을 잃게 되자“좌우가 균형이 맞지 않아 불편했는데 이제야 안 정감이 드는구만” 이라고 했다니,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낙관주의만큼은 정말 흉내 내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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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소설이 불가능한 시대의 소설 정현석 당원의 낯선 소설《얼음새꽃》 얼음새꽃 정현석 / 비유어셀프(Be Yourself) / 2015년 7월 / 13,000원 백상진 서울 영등포 당원

소설이 불가능한 시대

“北‘국정화 반대 총궐기투쟁’지령”소설이 아니다. 30년 전 신문기사의 헤드라인도 아니다. 2015년 10월 28일,‘광복 70주년’ 을 맞은 대한민국의 한 석간지,《문화일보》 의 1면 탑 기사다. 아찔하다. 대통령 지지율이 위태로울 때마다 북을 호출해대는 습관은 이제 꽤 많은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러운 것 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그러나‘좌익’ 과‘간첩’ 이 동의어로 취급받는 시대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이 경우 오래된 관습에 대해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움과 낯섦은 지리멸렬한 투쟁의 성과다. “선진일류국가, 튼튼한 안보가 뒷받침합니다. 국가정보원은 간첩, 좌익사범, 국제범죄, 테러, 산업스파 이, 사이버안보위협 신고・상담을 위한 111콜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고・상담전화는 국번 없이 111

“北2‘국정화반대총궐기투쟁’지령” 소설이 아니다. 30년 전 신문기사의 헤드라인도 아니다. 2015년 10월 28일, ‘광복70주년’ 을맞은대한민국의한석간지의1면탑기사다. 아찔하다. 삶과 문화 123


입니다.”하루 수천 번 지하철을 통해 재생되는 방송이다. 아주 낯익지 않은가? 한편으로, 아주 낯설어야 하지 않는가? 여전히, 이렇게, 일상은 얼룩져 있다.

정현석 당원의 첫 소설‘처녀작’ ( 은 내게 낯선 표현이다)인《얼음새꽃》 은 201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 람들에게 여러모로 낯익은 풍경들을 담고 있다. 독재를 꿈꾸는‘통령’ , 통령을 비판하는 누리꾼, 체제의 전복을 꾀하는‘기억하는 사람들’ , 공안에 의한 무고한 시민의 희생, 뿌려지는 삐라, 북의 소행이라며 그 소식을 전하는 언론, 대학가에 나붙는 대자보…. 익숙하지 않은가? 그는 4.19항쟁과 80년 광주의 선혈,‘안녕들 하십니까’운동으로 드러난 청년들의 비참한 현실과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외쳤던 구호까지, 자신이 읽고 겪은 대한민국의 모든 ‘스펙터클’ 을 소설에 담아냈다. “그 어떤 창조적인 상상력으로도 현실을 따라잡을 수 없다. 유감이다.”소설《소수의견》 의 손아람 작가 가 자신의 소설을 끝맺으며 쓴 말이다. 바야흐로 소설보다 소설 같은 현실이 있으니 소설이 불가능한 시 대라 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정현석 당원은‘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현실 속에서 작가라는 정체성을 단 채로‘행동’ 하 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저‘사회비판적’작품을 하나 더 만들어낸다는 게 아니다. 그는 글 쓰는 자신의 ‘업’ 과 사회의 모순을 자신의 삶을 통해 만나게 하려고 애써왔다.‘예술가, 안녕들 하십니까’활동에 그 행 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소설《얼음새꽃》 의 배경인‘공화국’ 은 2015년의 대한민국이라고 이해하고 읽어도 무방한 설정이지만, 정씨 통령의 3대 세습 부분만은 북한의 지도체제와 유사하다. 반면 소설 속에서의 억압적인 북한체제는 이미 인민의 힘을 통해 해방된 후다. 아주 현실적인 사건들과 비현실적인 설정이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나는 그가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국 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집회에 참여할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이 인

소설《얼음새꽃》 에는현실적인사건과비현실적인설정이혼재되어있다.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소설책을 덮고 나서 참을 수 없는 이 나라의 야만이 조금은 낯설어졌다면, 그 의미 는충분하지않을까? 124


도통행을 저지당하며, 시골의 할매들이 헐벗은 채 평생 살던 터에서 쫓겨나고, 행정부가 단독으로 국정교 과서에 대한 예산을 남몰래 편성해 운영하는, 참을 수 없는 이 나라의 야만이 조금은 낯설어졌다면, 그것 만으로도 비유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 소설책을 덮고 나서‘아무리 그래도 이 나라가 독재는 아니 지’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꺼림칙한 구석들이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가?

“당장 박근혜 탄핵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난 당 장이라도 촛불 들고 가서 뭐라도 하고 싶어.”

메르스가 창궐하고 정부는 헛발질만을 적립하 고 있던 어느 날, 누가 봐도‘평범한 여대생’ 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서 친구와 나누던 대화다.

“박근혜 정부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독재죠.” “겉으로는 민주정부를 표방하고 있는데요?” “누가 봐도 민주주의 안 하고 있잖아요.”

《한겨레21》인터뷰를 통해 한국역사를 진단한 후지이 다케시의 말이다. 이쯤 되니 이 나라의 수 상한 구석들을 익숙해지게 만들었던 감각들이 낯 설게 느껴진다.

서울정부청사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일인시위 중인 정현석 당원 (사진 : 청년예술인행동)

‘대한민국과 쏙 닮은’공화국이자‘말도 안 되는’독재국가의 이야기를 담은《얼음새꽃》 은 이렇게 소 설이 불가능한 시대의 소설을 보여준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들은 관습처럼 반복된다.‘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 고, 우리의 감각에 혹독한 리셋(reset)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지겹게 일어나는 익숙한 일들을 낯설게 만드는 일을 이 소설이 맡아주기를 기대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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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비정상의정상화, 정상의비정상화 박권일 편집위원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만날 때마다 당신께선 이렇게 말씀하신다.“이제 니도 적은 나이가 아니데이. 좀 정상적으로 살아야제.” ‘아버지 저 잘 살고 있어요’ 라고 말씀드리면,“넌 비정상” 이라고 대뜸 받으신다. 그리고 당신 친구의 아들 딸 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들 쑥쑥 낳고, 보너스 타서 아버지에게 차도 뽑아주고, 해외여행도 시켜주는,‘아빠친구아들딸’열전. 그런데 최근 들어 아버지와의 이 정상・비정상 논쟁(?)에서 눈에 띄게 나의 입지가 넓어졌다. 청와대에 계신 분 덕이다. 본래 아버지에게 정상과 비정상은 물과 기름처럼 또렷이 구분되는 것이었고, 너무 자명 해서 설명이 필요 없는 이항대립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비정상의 정상화” 를 언급하며 모종의 통치행위를 벌일 때마다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은 새로이 갱신되고 기상천외하게 정의되어야 했다. 평소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던 아버지였기에-정치성향을 굳이 규정하자면‘중도 부동층’정도겠 다-, 박근혜식‘정상’ ‘비정상’용법이 충격과 혼돈 그 자체였으리라. 그러니 아버지와의 논쟁에서 박 대 통령 카드를 꺼내든 전략은‘신의 한 수’ 였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보세요. 정상이니 비정상이 니 하는 말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인 거예요. 아버지 말씀처럼 명백한 게 아니라니깐?”상대가 자명하다고 전제한 개념을 흔드는 데 성공하면, 주도권은 이쪽이 쥐기 마련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를 가지고 박근혜 대통령이나 우리 부자의 옥신각신을 논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의 미값이 적어 보인다. 우리는 똑같은 말로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경제신문 같은 데 종종 등장하는‘뉴 노멀(New Normal)’ 이니‘뉴 앱노멀(New Abnormal)’같은 말을 떠올려보자.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저성장・저소비・규제강화 등의 흐름이 새로운 표준이 된 것을‘뉴 노멀’ 이라 부르 고, 이 흐름이 예측불가능하게 흘러가는 것을‘뉴 앱노멀’ 이라 부른다. 이 말은 결국, 과거에는‘예외상 태’내지‘비상사태’ 라 규정되던 불황, 유동성 위기 따위를 자본주의의‘정상상태’ 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에 가 닿는다. 즉,‘비정상의 정상화’ 다. 하지만 좌파라면, 단순히 호황기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체 념적 규정이나 기대에 대한 감가상각을 넘어 좀 더 급진적으로 이를 전유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역 사의 개념에 대하여》 에 나오는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구절처럼 말이다. 거기서 그는 마치‘비정상이 정상 이 되었다면(비정상의 정상화) 그 정상을 다시 비정상화해야 해방이 도래할 수 있다(정상의 비정상화)’ 고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예외상태(Ausnahmezustand)’ 가 상례임을 가르 쳐준다.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역사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 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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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야기

“헬조선을 바꿀 ‘헬조선 탈옥선’ 이 출발합니다” 노동개악저지 집중투쟁을 시작하며 노동당은 전국위원회를 통해 2015년 4분기 핵심사업 의 하나로“노동개악저지”투쟁을 채택하였다. 그 주요 사업 중 하나인 전국 순회 투쟁을 위한‘헬조선 탈옥선’ 이11월3일항해를 시작한다. 탈옥선이 전국 곳곳에서 정박할 곳은 단순히 상징적

미래에서 온 편지 제25호 발행인 구교현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강남규 김건담 김일란 김철 김혜연 박권일 안효상

양솔규 이승원 정정은 현린 교 열 김혜연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5년 11월 2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인 공간이 아니다. 헬조선의 노예들이 생존을 위해 분투

전 화 02) 6004-2006, 2007

하는 현장이다. 노동개악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 민중이

팩 스 02) 6004-2001

있는 현장 곳곳에 탈옥선이 닿을 수 있도록, 당원 여러

이메일 laborzine@gmail.com

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바란다.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 노동개악저지 집중 투쟁 일정이 담긴 글 전문은 6~14쪽 사진 : 정정은 편집실장

<지금+여기 노동당>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가격 10,000원


2015. 11

제25호

2015. 11

지금+여기 노동당 ■ 노동개악저지 집중투쟁을 시작하며

특집 ■ ‘노동개악’ 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 기획 ■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

값 10,000원

헬조선에 갇힐 것인가? 헬조선을 바꿀 것인가?

www.laborpart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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