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18호 (201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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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제18호

2015.3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www.laborparty.kr

값 10,000원

지금+여기 노동당 ■ 당원-되기 step 2. 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 후기 : 무언가가 된다는 것 특집

길을 묻는다

야만의시대,

기획 ■ 방사능안전급식 활동가 대담 :“정치 기획자, 그리고 책임질 활동가 필요해”


표지 이야기

당원-되기 step 2.

“당 대표 선거를 애프터서비스 해드립니다.” 지난 2월 13일.‘음기양조’ 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이 <당원-되기>라는 이름 아래, 최근 있었던 당 대표 선거 출마자들을 모두

미래에서 온 편지 제18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모아서‘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토크쇼

교 열 노정 정정은

를열었다.

디자인 고미숙

나경채 후보, 아니 나경채 당 대표 또한 이 자리에 참석해, 선거 때 이야기했던 공약들을 지키면서도 나도원 후보, 윤현식 후보가 이야 기했던 것들을 잊지 않고 함께 지켜나가며 당 의 역량 강화를 위해 생활정치 기획단 등 여 러 기획을 의욕적으로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5년 2월 26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 당원-되기 step 2. 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 후기 : 무언가가 된다는 것 전문은 6쪽~10쪽 <지금+여기 노동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 정정은 편집실 부장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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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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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차이를 인정하되 함께 전진하기|<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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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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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 당원-되기 step 2. 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 후기 무언가가 된다는 것|이춘희

특집 ■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12 러시아의 우경화 혹은 야만화|박노자 19 샤를리 앱도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엄형식 24 지금, 여기의 넷우익|박권일 29 포스트 성장 시대 일본의 사회운동|임경화 34 시리자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최백순

기획 ■ 방사능안전급식 활동가 대담 39 “정치기획자, 그리고 책임질 활동가 필요해” |노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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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4| ‘세모’활동가 양지혜 “청소년이 스스로 정치적인 세력을 만들어나가야 해요” |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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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보육협의회 소속 보육노동자들과의 만남

이게 무슨, 아이들 키우는 대책입니까|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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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제18호

・목차

쟁점토론 ■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64 노동당은 어떤 역사관 위에서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가?|햄벨스 70 역사에 대한 급진적인 질문, 마이너리거들을 위한 정치로|백승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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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슈퍼집 아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전 국민 산재보험으로|홍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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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지금 서울에서 가장‘핫’ 한 포럼, 서울적록포럼입니다|강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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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걷고 싶은 거리, 어떻게 상품이 되는가|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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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한국 대학 체제의 형성③

이승만 정권기의 사학 팽창|김예찬

삶과 문화 96

메아리공업사② 길냥이에게도 집을|화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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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치칼럼 올해부터는 <LGBT ‘I’인권포럼>입니다|박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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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칼럼 사철(私鐵)이 만든 철도의 나라|성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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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로 보는 한국언론 언론의 무리한‘박원순’까기, 중요한 건 팩트다|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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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힙합하는 당직자 윤원필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난다|최윤정 118

불온한 서재 《차브》 와 계급사회|권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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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꿈 벗이여 해방이 온다|민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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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파견의 품격?|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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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김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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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차이를인정하되함께전진하기

노동당의 새 대표로 나경채 동지가 선출되었습니다. 기관지 발행 일정과의 차이 때문에 약간 뒤늦은 인사가 되어버렸지만, 나경채 대표와 부대표로 선출된 네 분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선거 과정에서 당의 진로 등에 대한 일정한 의견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당 내에서 의견 차이가 있는 것 은 어느 나라 어느 정당에서도 당연히 존재하는 모습이므로 그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선된 새 대표 및 대표단이 선거기간에 내걸었던 자신의 입장만을 관철하려 한다면 그것은 문제일 것입니다. 당 선되지 못한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의식 또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당의 강화에 보탬이 되도록 해 야 할 것입니다.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되, 우리 사회의 진보와 당의 발전을 위해 함께 전진하겠다는 자세 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번 호 특집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치적 극우파나 종교적 근본주의의 득세는 결국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사라 져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반면 다양한 정파들의 선거연합 으로 출발해서 결국은 집권에까지 이른 시리자의 경우는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되 노동자 민중의 편에서 함께 전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내부의 차이에 대해서는 보다 여유를 갖 되, 우리 사회 지배계급의 반노동적이고 반민중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보다 단호해져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단호해야 할 것은,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지구 내지 생태계에 대한 파괴에 맞서는 일입니다. 마침 3월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진 달이기도 합니다. 후쿠시마 이후의 일본 좌파를 돌아보는 글 이나 방사능 안전 급식조례 활동가들의 대담, 노동과 녹색의 연대를 모색하는 적록포럼 소개 등은 모두 이런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린 글들입니다. 좌파란 낯모르는 사람과 지구에 대한 연대를 믿는 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차마 떠올리기 싫지만 오는 3월 8일은 故 박은지 부대표의 1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3월 8일을 단지 여성의 날로서가 아니라, 한 뛰어난 여성활동가의 기일로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이 아 니라 숱한 이들이 이 잔인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다 인간적인 사회로 바꾸는 것만이 그 분들의 뜻을 따르는 길일 것입니다. 2015년 2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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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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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무언가가 된다는 것 당원-되기 step 2. 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 후기 글 이춘희 서울 구로 당원 / 사진 정정은 편집실 부장

무언가가 된다는 건 항상 어렵다. 한 당의 당원이 되는 것도 단지 가입한다고 자연스레 되진 않는다. 가 입 후에도 이 당이 어떤 당인지, 무얼 지향하는지, 어떤 이들과 함께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당에 서 이런 것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신입당원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의욕을 가지고 입 당했지만 당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신입당원들은 차츰차츰 떨어져 나갔다. 기본적인 당규와 당헌 교육은 물론 젠더감수성, 장애인권교육들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신입당원에 대한 교육이 부재한 상황에 서 당원 배가, 1인 1당원 입당 등은‘앙꼬 없는 찐빵’ 만 계속 만들어내는 일, 좀 더 독하게 말하면 단지‘당 비 셔틀’ 만 양산하는 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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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사진설명 ① 당원들이 직접 준비한 캐리커처를 선물로 받은 세 후보 ②가장 큰 호응을 이끌어냈던 당가 쟁반노래방 ③세 후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당원

1) 그런데 요즘‘음기양조’ 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이 자발적으로(!) <당원-되기>라는 이름의 행사

로 이러한 역할들을 해내고 있다. 지난 1월 10일에 열렸던 1회 <당원-되기>에서는‘이 시대의 큰 스승’스 타강사 김민하와 함께 당 조직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번에 열린 2회 행사에서는 최근 있었던 당 대 표 선거 출마자들을 모두 모아서‘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토크쇼를 열었다.

O/X퀴즈부터 쟁반노래방까지,‘당 대표 선거’ 를‘애프터서비스’ 해드립니다.

이번 당 대표 선거는 치열했다. 결선투표 종료 직전까지도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던 만큼, 서로 간에 날 선 말이 오가며 감정이 상하는 일도 수없이 일어났다. 그 앙금은 아직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기획은 선거 이전부터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과연 그 기획대로 토크쇼가 원만히 흘러갈지 우려 반, 기대 반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우려는 말 그대로 우려에 불과했다. 행사장의 분위기는 내내 밝았고, 참석자 모두 화목한 분위기 속에 2) 서 행사를 즐겼다.“집도 절도 없다” 는 본인의 말처럼“아무것도 없잖어” 와 함께 등장한 윤현식 후보, 결 3) 4) 선투표에서 아쉽게 낙선해“좋다 말았네!” 나도원 후보, 끝으로“나~나나나~나나~나나나나~” 나경채

1) 일설에 의하면,‘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는 국가안전기획부의 원훈(院訓)을 따와‘우리는 음지에서 기획하고 양 지에서 조직한다’ 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2) <아무것도 없잖어> 장기하와 얼굴들 3) <좋다 말았네> 장기하와 얼굴들 4) <둘이서> 채연

지금+여기 노동당 7


후보까지. 세 후보가 각자의 테마송과 함께 등장하면서 시작된 토크쇼는 가벼운 워밍업을 위한 O/X 퀴즈 와 기획단 음기양조의 질문으로 진행된 1부,‘당가 쟁반노래방’ 과 장미를 돌리며 서로에게 질문하는‘장 미 토크’ 를 거쳐 청중 질문으로 이루어진 2부로 진행되었다. 분위기가 조금만 첨예해질라치면“네, 뒤풀이에서 이야기하시고요” 라는 마법의 멘트로 넘겨버리고, 지나치게 화기애애해지면 바로 주제를 바꾸어버린‘사회주의자’황종섭 당원의 명사회(?)와 함께 토크쇼 내내 훈훈한 대화들이 오갔다. 이 날의 코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코너는 단연‘당가 쟁반노래방’ 이었다. 우리 당의 당가 <대지와 미래 를 품고>는 만들어진 지 이제 갓 1년 밖에 안 된 노래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당원이 제대로 당가를 모른 다. 실제로 이날, 세 후보 중 두 후보나 당가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명예훼손 방지를 위해 누가 몰랐는지 는 언급하지 않는 걸로….) 참석한 당원들 역시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당가를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 당가

를 아는 몇몇 당원, 그리고 뜨문뜨문 아는 후보들 덕에 열 차례의 시도 끝에 다 같이 당가를 끝까지 부르며 훈훈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마무리는 훈훈했지만 당 대표 후보들도 당가를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은 입맛을 씁쓸하게 했다.

축제가 끝나도 일상은 계속 된다

밝은 분위기였지만, 그 속에서 아직 정리되지 못한 지난 선거의 앙금이 언뜻 엿보이기도 했다. 지난 선 거 과정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웠던 질문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진보재편을 내걸었던 나경채 후보와 독 8


자생존을 내걸었던 나도원 후보는“당신이 원하는 바가 관철되지 않았을 때 당신은 거취를 어떻게 할 것 인가?” 라는 질문을 꼽았고, 윤현식 후보는“당신은 독자냐? 통합이냐?” 였다고 대답했다. 각 후보의 대답 은 모두 달랐지만 그 질문들이 답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사실 비슷했다. 모두 입을 모아‘왜 이 질문이 나 와야 할까?’ 를 생각했던 질문이라고 말했다. 이 질문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앞의 질문에 그 답이 있었다. 바로 전의 질문은“당 생활 을 하면서 한 번이라도 탈당하고 싶었던 적이 있나?” 였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세 후보 모두가 2011년 9.4 당 대회 즈음을 꼽았다. 비록 실제 탈당하지는 않았지만 탈당계를 던졌던 윤현식 후보, 진보신당의 출 세주의자 5인 중 한 명으로 비판받으면서 이렇게까지 내가 활동을 해야 되느냐는 비관에 빠졌던 나경채 후보, 탈당의 갈등을 느꼈던 나도원 후보까지. 모두가 탈당의 갈등을 느꼈던 때는 당의 진로가 가장 흔들 렸던 시기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동지가 떠났다. 누구는 본의로, 누구는 본의가 아니게. 하지만 흔들렸던 그들은 당에 남았고 당 대표 후보로까지 출마했다. 선거는 축제다. 하지만 축제는 영원하지 않다. 축제가 끝난 후, 우리는 다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당 대표 후보 세 명 모두 다시 일상을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원 후보는 곧 있을 레드 어워드를 준비 하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고, 윤현식 후보는 중앙당에 있으면서 그간 소홀히 했던 당협 활동과 노 동당이 정치적 주체로서 서기 위한 정치관계법 개혁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나경채 후보, 아니 나 경채 당 대표는 선거 때 이야기했던 공약들을 지키면서도 나도원 후보, 윤현식 후보가 이야기했던 것들을 잊지 않고 함께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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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들은 항상, 지금-여기 우리 곁에

당이 힘들다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정말 힘들다면 말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힘든 시기, 위기의 때는 고쳐나갈 문제점들이 그만큼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때라는 의미이기도 하 다. 세 후보는 물론, <당원-되기>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었던 이유다. 모두들 자신이 생각하는 당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나름의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다. 자 신의 고민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이의 좋은 생각을 통해,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고민의 답을 찾고 있다. 비록 낙선했지만‘레드 어워드’ 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예술인 소셜 유니언 역시 계속 활발하게 활동 하겠다고 밝힌 나도원 후보와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정치관계법 개혁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해보겠다 고 밝힌 윤현식 후보. 진보재편을 추진하면서 당의 역량 강화를 위해 생활정치 기획단 등 여러 기획을 의 욕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나경채 대표.‘꿈과 생계를 같이 성취할 수 있는’노동당을 만들기 위한 방 법, 당의 체력을 키우고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방법을 후보들에게 물어 본 청중까지. 모두 함께 모여 위기 를 기회로 바꿀 방법을 이야기했고 생각을 나누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역량이 절대 아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당원 각자가 가진 역량을 어떻게 모아낼 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것이다. <당원-되기>는 그 좋은 예다. <당원-되기>는, 고작이라 면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 세 명의 기획단이 모여 재기발랄하고 큰 호응을 얻는 기획을 연달아 내놓 고 있다.‘희망의 진지’ 를 만들기 위해서는‘희망의 기획’ 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획을 같이할 사람들, 당원들은 항상, 지금-여기 우리 곁에 있다. 10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여기저기서 테러 소식들이 다.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사회 전체에 위협 을 가하는 혼돈의 시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혼돈과 야만의 시대, 세계 그리고 한국의 오늘을 돌아보며 진보정당의 과제를 묻는다.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11


특집 /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러시아의 우경화 혹은 야만화 타라소프, 경종을 울리다 타라소프가 본 러시아 극우주의의 성장은, 러시아의 세계체제로의 주변부적 편입 과정에 수반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이야기에 변혁을 추구하는 한국의 독자들이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해제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교수 번역 : 장석준 노동당 전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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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소프가 본 러시아 극우주의의 성장

타라소프 선생의 이름을 일부 한국 독자들은 이미 안다. 거의 십여 년 전이지만, 이제 정간된 지 오래된 《당대비평》 과《이론과 실천》 에서 그는 당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언론에서 화제로 떠오른 러시아의 사회현상‘스킨헤드’ 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스킨헤드가 화제가 된 것은 그들의 무차별적 인종주의적 공격에 한국인과 북한인을 포함한 수많은 외국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처럼 거의 150여 개의 종족집단이 공존하는, 종족적 구성이 극히 다양한 사회에서 21세기 벽두에 어떻게 이와 같은 야만이 출현 될 수 있었는가? 타라소프의 설명은 세계체제 이론 등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는 내부적으로 주로 비(非)시장 경제였기에 세계시장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장을 매개 로 해서 만들어지는 강력한 민족의식 등은 소비에트 시대에는 잘 형성되지 않았다. 민족에의 배타적인 소 속보다는, 민족구분과 무관하게 모두가 소비에트 공민이며 사실상 국가의 정규직 피고용자라는 공통적 귀속의식이 더 우선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非)민족적 공민의

비(非)민족적 공민의식을 뒷받침하는 소비에트

식을 뒷받침하는 소비에트 시대의 이데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소비에트 몰락 이후 부정

올로기는 1991년의 소비에트 몰락 이후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바로 구 소련 인구의 급격한

의대상이된다. 그빈자리를메운것이바로구 소련인구의급격한‘민족화’ 였다.

‘민족화’ 였다. 새로이 도입된 시장관계 속에서-예컨대 재래시장에서의 소매업을 독점하다시피 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코커시스 사람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경쟁의식이 성장하는 등-시장을 매개로 한 배타적 민족의식이 잇따라 발현했다. 거기에다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로의 급속한 흡수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러시아 공업의 부분적 몰락을 가져오는 등 빠른 탈산업화를 촉진했다. 이와 함께 온 것이 세계체제의 주변부다운 빈곤과 사회복지망의 파괴, 그리고 교육의 질적 저하다. 시장적인 경쟁관계에 내몰린 데다 가난해지고, 우파 이데올로기의 공세를 받고, 더 이상 무상으로 양질의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야만화를 겪게 됐다. 그 야만화의 중요한 일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소비에트 시대의 다민족 공존공생 기억 자체가 희미한 젊은 시대에 의한 배타적 극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수용이었다. 결국 타라소프가 본 러시아 극우주의의 성장은, 러시아의 세계체제로의 주변부적 편입과정에 수반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러시아가 소수민족들이 엄청난 영토를 차지하는 다민족사회인 만큼, 소 비에트 시대의 관료 출신인 러시아 사회의 관리자, 즉 푸틴정권도-비록 초기에 좌파의 성장을 예방하기 위해 극우들의 발호를 묵인해준 부분도 있었지만-결국 스킨헤드 등 공격적인 극우의 무분별한 성장을 위협으로 인식하여 그 단속에 나서기는 했다. 이런 현상이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내부안정에 해가 될 수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13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단속을 해도, 러시아가 세계체제의 주변부로 남아있는 한 극우 주의자들은 부단히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 타라소프의 예측이다. 극우들의 발호를 발본색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러시아를 세계체제로부터 차단시키고 다시 한 번 민중중심의 계획경제로 돌리는 혁명 밖에 없다. 소비에트가 몰락한 곳에서 지금도 반자본주의적 무장혁명을 부르짖는 타라소프 선생은 과연 누구인 가? 소비에트의 몰락이 그의 혁명열을 식게 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이미 소비에트 시대에 소비 에트 정권의 점차적 보수화에 맞서 진정한 혁명의 부활과 세계혁명적 공세를 호소했던‘좌파적 반대파’ 출신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소비에트 정권보다 일찍부터 왼쪽에 서왔다. 그는 1958년생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새로운 혁명에 호소하는‘신공산당’ 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었다가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당하는 등 정치적 박해를 일찍이 받은 바 있다(1975년). 소비에트 시절에는 주로 지하에서 유통하는 비공식 출판 물만 만들었다가 1988년 이후에 소련 국내외에서 활발한 집필활동을 해왔다. 이미 체제에 편입된 핵심부 (북미와 서구, 일본) 노동자들의 혁명성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그가 원하는 것은, 준 주변부와 주변

부에서의 연쇄적인 반자본주의적 혁명들의 흐름이 세계체제의 핵심부에 자원과 제조업제품의 공급을 끊 어 결국 핵심부에서의 반자본주의적 반란이 일어날 시점을 앞당기게끔 하는 것이다. 타라소프의 이론에 의하면 소련 몰락 후‘민족화’ 와 함께 소비주의적 대중의 형성이 본격화된 러시아 보다는, 어쩌면 동아시아를 위시한 여타의 비(非)서구 지역에서의 혁명적 움직임들이 더 빠를 것이다. 그 의 이야기에 변혁을 추구하는 한국의 독자들이 귀 기울이기를 바랄 뿐이다.

러시아의 극우파들*

러시아 극우파는 4개의 주요 집단으로 나뉜다. 1) 체르노소텐지(흑백인조黑百人組) : 이들은 군주제, 러시아 제국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의 재국교화 등 혁명 이전의 모범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는다. 이들은 과거의‘흑백인조’ [편집자 :‘흑백인 조’ 는 20세기 벽두에 등장한 러시아의 근황파 극보수운동의 명칭이다]를 이상적 정당으로 여기며 군주제-파시

즘을 이념으로 내세운다. 2) 다양한 색깔의 고전적 파시스트들 : 나치, 이탈리아 파시즘 혹은 서방 네오파시스트의 여러 유형이 이들의 모델이다. 3) 서방의‘신우파’ 를 지향하는 신우파 : 이들은‘신우파’ 의 요소들을 유라시아 이데올로기[편집자 : 구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을 흔히‘유라시아’ 라 칭하며, 유라시아 이데올로기는 유럽연합에 맞서 이들 사이의

* 이 글은 러시아 극우인종주의에 대한 저명한 이론가인 알렉산드르 타라소프가 네덜란드 잡지《Alert!》 에 보낸 글이다. 게재 전에 잡지가 폐간돼 미발표 원고로 남았다가 박노자 당원의 소개로《미래에서 온 편지》 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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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을 강화하려는 입장이다]와 결합시킨다.

4) 외국인 혐오 하위문화를 대표하는 나치-스킨헤드들skinheads(얼간이들boneheads) : 이들은 대 개 정치색이 약하다고? 하지만 이들은 수가 많다!

흑백인조 조직들

러시아 극우파의 이 네 부분은 모두 서로 다른 시기에 등장했고, 성쇠의 시기도 엇갈린다. 하지만 어쨌 든 모두 현재까지 존재하면서 발전하고 있고, 서로 간에 복잡 미묘한 관계를 맺어왔다. 소련 시기에는 분명 어떤 극우파, 파시스트 조직도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간혹 소수 인 원의(2~5명) 지하 우파그룹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략 결성 후 2.5년 후에는 KGB에 발각돼 탄압을 당했다. 이 중 가장 컸던 그룹이 1964년에 결성됐다가 1967년에 해산된‘민중해방을 위한 전 러시아 사 회-기독교인 연합(이하‘연합’ )’ 이다. 조직원은 28명이었다. 나중에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에 우파부터 자 유주의, 나치부터 정교회 지지자들에 이르는 선동가들에 의해‘연합’ 의 미화된 전설이 창작됐다. 이들에 따르면,‘연합’ 은 베르댜에프[편집자주 : 니콜라이 베르댜에프, 1874~1948,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며 기독교 사 회주의를 제창한 20세기 초 러시아의 사상가]식 기독교 사회주의를 추구한 순수한‘반전체주의’그룹이었다.

그러나 실제(최근 공개된 문서들을 통해 밝혀진)의‘연합’ 은 군사 규율과 질서를 지닌‘군사-정치 조직’ 이었 다. 이들은 소련 질서를 혁명 이전의 모범에 바탕을 둔 정교회적, 민족적 체제로 바꾸기 위해 무기를 은닉 하고 무장혁명을 기획했다. 달리 말해,‘연합’ 은 흑백인조 성향의 조직이었다 하겠다. 최초의 합법 극우조직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등장했다. 이런 조직들 중 최대이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디미트리 바실리에프가 이끈‘민족애국전선 기억(이하‘기억’ )’ 이다.‘기억’ 은 전형적인‘흑백인조’ 형 조직이었다.‘기억’ 은 처음에는‘역사 및 문학 연구회’ 로 시작됐다.‘역사 및 문학 연구회’시절의‘기억’ 은 분명 파시스트 조직은 아니었다. 진짜 역사와 문학을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하지만 회원 중 일부는 러 시아 민족주의, 정교회, 반유대주의 성향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민족애국전선‘기억’ 의 절정기는 지역 지 부들을 설립하고 회원을 800명으로까지 늘린 1988년 가을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서로 다른 여러 개의 ‘기억’ 들로 분열되고 말았다.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흑백인조’ 식 조직들은 비록 회원 수는 늘었지만 영향력을 상실하고 정치적으 로 주변적인 존재가 됐다. 드미트리 바실리에프의 민족애국전선‘기억’ 은 소수 그룹으로 전락하자‘농업 협동 조직’ 이 되겠다고 선언하고는 거의 모든 회원이 농촌으로 이주해서 실제 농사에 전념했다. 1990년대 와 2000년대 초에 같은 유형의 다른 많은 그룹들이 분열하거나 회원 수가 감소했고 활동도 뜸해졌다. 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15년 동안 새로운‘흑백인조’ 식 조직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은‘흑백인조’ 의 영역을 점령한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공적 조직이었다. 첫째는 정교회의 평신도 공동체이고, 둘째는 코사크 공동체다. 러시아 정교회는 공식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지만, 평신도 공동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15


체는 종교적인 외국인 혐오, 군주제 지지, 민족주의-반유대주의-반사회주의(특히 반마르크스주의) 선전, 동성애 혐오 등의 정치 활동에 직접 참여한다. 평신도 조직은 보통‘정교회 형제회’ 라 불린다.‘정교회 형 제회’ 들을 다 합쳐도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추정컨대 8천 명에서 1만2천 명 사이이다. 하지만 지방으로 내려가면 형제회의 영향력이 회원 수와 상관없이 막강하다. 러시아의‘흑백인조’ 형 극우파 중 최대 조직은 다수 대중뿐만 아니라 반파시스트조차 극우파라고 생각 하지 않는 단체다. 코사크 부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옐친 대통령 시절부터 농업 활동에 특혜를 받 으면서 극단적인 제국적, 군주제적, 정교회적 이념을 견지하고 있다. 게다가 제한된 수준에나마 무기도 소지하고 있다. 푸틴 시기에 코사크 부대들은 군대와 국경수비대에 코사크 조직을 따로 설립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이들은 극우 사상을 마음껏 선전할 수 있는 자체 교육 기관을 구비하고 있다. 코사크 부 대들은 민족적, 종교적 성격의 학살을 몇 차례 자행했다. 코사크는 집단생활을 하며 지역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다 크렘린과 러시아 정교회의 정치적 지지까지 받는다. 코사크 조직들은 일부 지역에 사실상 극우파의 섬들을 만들었다. 이런 지역에서는 무신 론적, 국제적, 반군국주의적, 반왕정주의적 그리고 반부르주아적 선전이 가능하지 않다. 현대 러시아에서 ‘흑백인조’ 형 극우파의 수를 모두 합치면 1만~1만5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코 사크를 추가한다면‘흑백인조’ 식 조직의 수는 14만~16만 명으로 늘어난다.

파시스트 조직들

2차 대전 후 소련에서는 다양한 파시스트, 네오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간혹 등장하곤 했다. 이 모두는 규모가 아주 작았고, 곧바로 KGB에 발각, 분쇄됐다. 이런 그룹의 회원들 중에 정신질환자의 비중이 높았 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들 조직의 창립자 중에 소련 노멘클라투라의 자녀들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 역시 시사하는 바 크다. 이러한 소규모 조직은 어떠한 발전적 전망도 지니지 못했고, 나라 전체의 사회 적 분위기에 영향을 끼칠 수도 없었다. 파시스트의 침략으로 약 3400만 명의 인명을 희생당한 나라이기 때문에 파시즘에 대한 전반적 거부감이 존재했던 것이다. 1990년대에 한편으로는 다당제가 들어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기를 거치며 구소련의 어두운 역사가 대중에게 공개되고 나자 상황은 반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단지 정교회-군주제-배외주의반유대주의 사상을 추종(즉, 흑백인조)하는 게 아니라 다름 아닌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따른다고 주장할 용기를 지닌 극우그룹이 등장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현대 러시아 파시스트 그룹의 지 도자와 창설자들이‘기억’ 과 같은 흑백인조 조직에서 이력을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흑백인조에서 분리돼 공개적으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내건 첫 조직 중 하나(1990년대 후반)가 러시 아민족연합(RNE)이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RNE는 소련 해체 후의 러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파시스트 프 로젝트다. RNE의 전성기(1998~1999) 회원 수는 2만~2만5천 명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러시아 파시스트 16


조직들 중에서는 최고 기록이다. 하지만 RNE의 회원 수가 복잡한 회원구조에 의해 과대 계산됐을 수 있 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회원은 지지협력자, 동반자, 전우의 3층으로 나뉜다. 덕분에 RNE 대변인은 매 번 회원 수를 달리 발표해서 사람들을 당혹시키곤 했다. RNE의 성공은 공식 억압 기구 내부로부터의 지원, 특히 내무부[편집자주 : 러시아의 경찰 기구](부처 전 체는 아니더라도 일부 고위관료)의 지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내무부가 RNE를 후원했다는 많은 증거가 있

다. 첫째, RNE는 재정을 공개하는 유일한 극우조직이다. 재원은 RNE가 전국에 설립한 민간 경비 업체에 서 나오며 그 이윤이 상당하다. 민간 경비업은 내무부의 인가를 받아야 하고 그 엄격한 통제 아래 있는 영 역이다. 따라서 내무부의 지원이 없다면 현대 러시아에서 RNE처럼 다수의 민간 경비 업체를 설립하는 일 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일부 지역에서 지역 억압 기구에 속한 훈련 시설이 RNE 회원의 훈련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공 공연한 사실이다. 셋째, 1990년대 중반에 보로네즈에서는 내무부 요원과 RNE 회원들이 함께 시내 순찰 을 돈 일이 벌어졌다. 당시 RNE 회원들은 검은 셔츠, 나치 갈고리 십자가 등의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었 다. 넷째, RNE 전우들 중에는 전직 경찰관뿐만 아니라 현직들도 다수 있었다. 이는 러시아 실정법 위반이 었지만, RNE에 대해서 이 법이 적용된 적은 없다. 이외에도 RNE가 내무부의 피조물이라는 수많은 증거 들이 있다. RNE의 쇠퇴도 내무부에 대한 의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 KGB 요원이었던 푸틴이 권좌에 앉자 내무 부와 KGB(현재는 FSB) 사이의 전통적 대립이 내무부와 새 새통령 사이의 대립으로 모습을 달리 했다. 취 임하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난 뒤에 푸틴은 내무부 요직에 자신의 충복들을 앉혔다. 그리고 내무부 고위관 료들을 대거 해고하고‘제복 입은 괴물들’ , 즉 범죄자가 된 내무부 요원들을 구속했다. 내무부의 피조물이 었던 RNE는 반푸틴 입장을 취했다. 기존 RNE 지도자 바르카셰프의‘오른팔’ 이었던 올레그 카신(전문가 들은 그가 FSB 끄나풀이라 한다)이 2000년 당대회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르카셰프를

쫓아낸 뒤에 그는 바르카셰프가‘시오니스트’ 이고‘알코올 중독자’ 에다‘정교회의 적’ 이라고 공격했다. 바르카셰프는 당대회를 따로 열어 카신과 그 추종자들을 파문했다. 분열 이후에 카신 추종자들은 RNE이 라는 이름을 유지했고, 바르카셰프 추종자들은‘러시아 수호대’ 라는 이름을 내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포볼지에의 일부 조직은 두 지도자 모두와 분리해 새 조직을 출범시켰다. 이 조직을 이 끈 것은 랄로치킨 형제였고, 역시 내무부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랄로치킨 형제는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고, 순전히 종교적인 조직이 됐다. 이 세 분파 어디에도 결합하지 않은 잔류 그룹들 이 약 70여 개가 된다. 수년 동안 검찰청은 이들에게 활동금지령을 내렸는데, 이는 카신파나 바르카셰프 파에 합류하라는 압력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2005년까지 RNE와‘러시아 수호대’모두 전국적으 로 2천5백에서 4천 명의 회원을 유지했는데, 회원 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이로써 한 강력한 파시스 트 정당이 무너진 것이다. RNE 이데올로기는 나치당의 산물이지만, 나치로부터 직접 따온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 이데올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17


RNE의 이데올로기는 러시아 대국 쇼비니즘,

로기에는 러시아 대국 쇼비니즘, 인종주

인종주의, 국군주의,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

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

적극적인 반공산주의, 평등주의와 무신론에 대 한증오등의필수요소들을포함하고있다.

적극적인 반공산주의, 평등주의와 무신 론에 대한 증오 등의 필수 요소들이 포 함돼 있다. RNE는 정교회에 충실하다 고 하면서 동시에 아리안 이교 신앙을

떠받든다. 그래서 나치당의 이데올로기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독일 나치와 마찬가지로 RNE도 공산주의를 단순한 정치 세력이 아니라‘국제 유대 무리의 꼭두각시’ 라 여긴다. 이들은 공산주의가‘유대 인 무리’ 의 지령 아래 발전한 사악한 마르크스 이데올로기를 따르며,‘시온 장로의 전 세계적 음모의 꼭두 각시이자 인간의 얼굴을 한 사탄이 주도하는 국제 유대 범죄단’ 의 도움으로 러시아에 도입됐다고 본다. 러시아에서 성공한 파시스트 조직의 또 다른 사례는 A. 이바노보-수크하레프스키가 주도한 인민민족 당(PNP)이다. 이 역시 내무부의 피조물이다. 이 조직이《나는 러시아인》 이라는 꽤 질이 높고 발행 부수도 많은 신문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내무부의 재정 지원 덕분이었다. 당원이 1천 명 정도였는데도 전국에 이 신문을 배포할 수 있었다. 반면 RNE는 수천 명의 회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신문《러시아의 질 서》 를 부정기적으로만 간행할 수 있었다. PNP는 1995년에 등장했으며, 2003년에 당원 수가 돌연 증가했다(1만 명이라 주장하지만, 더 현실적인 수치는 5천~6천 명). 이 당은 결국 내무부 정책 변화의 희생양이 됐다. 2003년 10월에 당대표 이바노보-

수크하레프스키가 폭탄 사고로 큰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은 정보 당국의 소행이라 할 수 있다(아마도 FSB). 이후 PNP는 위기를 맞았고, 일부가 분열하기도 했다. RNE의 역사가 반복된 것이다.

이바노보-수크하레프스키가 창안한‘루시주의’ [편집자주 :‘루시’ 는 고대 러시아인의 명칭이다]라는 독특 한 이데올로기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PNP는 다른 모든 파시스트 조직들과 구별된다.‘루시주의’ 는 흑백 인조 이데올로기를 나치의 민족사회주의와 결합한다. 이들은 히틀러와 니콜라이 2세를 20세기의 영웅으 로 평가한다. 히틀러는‘유대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한 니콜라이 2세의 복수를 감행한 인물’ 이고, 히틀 러의 계획은‘무신론적 볼셰비키에 의해 노예가 된’러시아에‘스와스티카, 즉 기독교의 십자가 상징’ 을 복원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현재 러시아에는 40개 이상의 파시스트, 네오파시스트 정당들이 있지만, 대개 아주 소규모다. 90년대 에 80개 이상이 등장했지만, 이후 절반이 사라져버렸다. 네오파시스트의 수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없 다. 아마도 FSB는 정보를 지니고 있을 테지만, FSB는 심지어 검찰청에도 이를 공개하지 않는다. 개인 연 구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파시스트・네오파시스트 조직에 속한 인원은 1천2백~1천5백 명 정도다. 이는 RNE의 절정기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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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샤를리 앱도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샤를리 앱도’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전환적 사건’ 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주요 쟁점들은 오늘날의 세계가 당면한, 그러나 현재 의 사회체제가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로 이어진다.

엄형식 유럽당협 당원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19


‘전환적 사건’ 으로 인식된 샤를리 앱도 사건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매 순간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건들은 관련 정보가 우리 인지영역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라지거나, 도달하더라도 크게 주목받지 않는 반면 어떤 사건들은 역 사를 바꾸는 전환점으로 곧바로 인식되거나, 시간이 흐른 후 사후적으로 평가되곤 합니다. 왜 어떤 사건 은 보다 가까운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해외단신으로 처리되어 우리의 기억에 서 곧 사라지고, 왜 어떤 사건은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재규정하는 역사적‘전환점’ 으로 인식될까요? 여러 설명이 있을 수 있겠 지만, 제가 주목하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 빠르게 기존 정보 및 해석과 정렬되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 래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상징으로 전환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과정의 상당 부분은 언론과 소위 오 피니언 리더들의 해석을 통해 진행되지만, 일반 대중 역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판단을 통해 주 어진 정보와 해석을 다시 해석하면서‘전환적 사건’ 을 통한 재해석에 참여하게 됩니다. 지난 1월 7일 프랑 스 파리에서 벌어진‘샤를리 앱도’사건 역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왜 그러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새로운 해석의 지표를 던져주는‘전환점’ 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샤를리 앱도 사건 및 사건 직후에 있었던 테러 용의자들과의 총격전을 경험한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이 사건들을 통해 확인된 문제와 이를 대처하는 방향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고 있고, 그 주요 쟁점들이 오늘날의 세계가 당면한, 그러나 현재의 사회체제가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로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안정추구’ 의‘균’ 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

오늘날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기술적 변화는 시공간의 개념을 변형시키면서 사람들이 생각하 고 행동하는 방식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존 지식과 가치가 가졌던 권위가 무너지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제도와 질서, 그리고 사회체제는 항구적인 불확실 상태에 놓이고 있습니 다. 서구열강의 산업적, 철학적, 군사적 헤게모니 아래 설계된 2차 대전 이후 현대사회의 많은 전제들이 의심받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지혜로 형성된 문화와 도덕의 많은 부분은 더 이상 유효 하지 않아 보입니다. 기술의 발전과 세계화라는 현상은 이전 어느 시대도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들을 우리 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소통매체의 진화는 우리 주변의 작은 이슈와 문제들까지 공적논쟁의 장으로 흡수 시키면서 정치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민주적이고 합리적 의사소통의 토대로서 제도와 규범에 의해 설계된 근대적 의미의 공공영역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고, 기존 경계가 허물어지는 속도에 비해 새로운 공공영역이 제도적으로나 실체적으로 자리잡는 것은 훨씬 더 느려 보입니다. 이러한 변화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그 속에서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근본적으로 20


인지적 피곤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현대인들은 근본적으로 인지적 피곤을

인지적 피곤함은‘안정추구’ 라는‘균’ 의 서식처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안정추

가 됩니다. 대부분의 균들이 그러하듯이 안정추 구라는 균도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안정추구 라는 균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것을 익숙한 방식

구’ 라는‘균’ 은 이 인지적 피곤함을 서 식처로삼는다.

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인지적 피곤함을 줄 일 수 있게 됩니다. 안정추구라는 균이 없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쏟아지는 변화와 새로운 정보 속에서 공 황상태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특정한 권위에서 비롯되는 비교적 일관된 해석 틀에 의존할 수 있다면 세 상을 이해하기 위해 개개인이 들여야 하는 노력은 상당한 정도로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이 오늘날 사회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권위도 절대적인 해석자의 위치를 가질 수 없고, 인지적 피곤함은 사실상 불치병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자명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안정추구라는 균이 점점 병리적인 상태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불안한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보다는 안정추구라는 균을 숙주로 삼는 가상적 권위들에게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넘기고 있는 것입니 다. 이러한 현상의 경증으로는 자기계발 및 코칭 열풍을 들 수 있고, 중증은 종교, 사상, 문화의 영역에서 증가하고 있는 근본주의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샤를리 앱도 사건,‘안정추구’ 의 증가가 불러온 병리적 현상

하지만 안정추구라는 균은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수치가 높아지기도 하고, 많은 순간 위험수위를 넘나듭니다. 하지만 병리적 현상이라도 별다른 사회적 문제와 피해를 낳지 않는다면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문제는, 자신에게 인지적 안정을 주는 신념체계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과 실 제로 이를 실행에 옮기는 행위가 증가하고 있고, 이것이 또 다시 다른 상대방들 내부의 안정추구 균을 증 가시킴으로써 병리적 상태를 상승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샤를리 앱도 사건은 이러한 일련의 연쇄적 과 정이 극적으로 표출되었던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균’ 의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근본주의 또는 극단주의를‘인격화된 실 체’또는‘실체를 가진 세력’ 으로 표현하지 않고자 함입니다. 안정추구 균의 병리적 발현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문제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근본주의, 극단주의, 극우/극좌 경향에서부터, 사회적인 문제로 지목되지 않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고 있고, 더 가까이 보면 우리 주변의 일상 에서도 흔하게 확인되는 현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병리적 현상을 극단주의자, 근본주의자와 같은 표현으로 인격화하고 더 나아가 제거되어야 할 대상, 즉 악마화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고자 한다 면, 문제를 실체적으로 이해할 때 겪어야 하는 인지적 피곤함을 회피하고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이라는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21


빠른 답을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병리적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 은 안정추구라는 균이 어떤 조건 에서 병리적 현상으로 전환하는 가를 이해하고 그 조건들을 제거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개개인으로 부터 사회시스템 전반에 이르기 까지 안정추구 균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항구적 불확실성 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는 도덕, 가치 및 제도를 갖추는 것이 필 요할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지평을 넓혀야 할 때 “웃겨서 죽지 않으면 채찍 100대!”2011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총선에서 승리하 자 샤를리 앱도가 이를 풍자하고자 펴낸 샤리아 앱도. 샤를리 앱도의 만평은‘표현 의 자유’ 를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지, 논쟁을 자주 불러일으켰다.

제가 공부하는 사회학은 명시 적이건 암묵적이건 간에 연구를 하는 사회학자가 규범적으로 지

향하는 가치를 통해 사회를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불어권 사회학에서 규범적 가치로 `’ 서‘공존(vivre ensemble)’ 과‘다원성(pluralite) 이 점점 더 많이 언급되고 다루어지는 것은 주목할 만 합니

다. 이 연구들은 단순히 좌파와 우파, 기독교와 이슬람, 친환경주의자와 성장주의자라는 잘 정의되어 있 는 가치와 신념의 다양함을 넘어, 기존 서구사회 합리성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다른 문화권의 삶의 방식들이나 해당 사회 내부의 일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에 대해서도 옳고 그름 의 문제를 넘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묻고 있습니다. 인종, 종교, 정치, 신념,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성이 불가피하게 동 반하는 불확실성과 인지적 피곤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 분명 아닙니다. 도리어 귀 찮고, 복잡하고, 인내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공존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 한의 조건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는 지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조금 씩 더 불편하게 사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과 함께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그러나 실존적 22


인 요구입니다. 정권교체와 사회정책의 변화로 국한해 해석된 정치는 이 요구들에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와 주변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이러한 노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함께 고민 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찰적 좌파의 불씨 놓치지 말아야

현대사회의 대중정당이 권력과 정책의 문제를 넘어 규범과 가치, 도덕의 문제까지 공유하는 집단이 되 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정치시스템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게임이 우 리 모두의 실존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면, 실존적 토대로서 공존의 조건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를 추구하는 노력은 정치의 의미와 정치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통해 중요한 정 치의제로 포함돼야 할 것입니다. 현재 노동당이라는 지붕 아래에 모여 있는 우리가 더 큰 진보정당의 한 부분으로 합쳐질지, 이 지붕을 더 오랫동안 쓰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이 되건 현재 정치체제에 참여하면서도 현 재 정치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사회의 문제 를 비판하는 동시에 비판하는 우리 스스로의 규범적 토대도 의심할 수 있는 성찰적 좌파의 불씨를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령, 연대적 가치 및 합리성과 효율성 위

현재 정치체제에 참여하면서도 그가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 는 동시에 비판하는 우리 스스로의 규범

에 구축된 복지시스템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

적 토대도 의심할 수 있는 성찰적 좌파의

는 사회복지사와 자기 주변 환경에 대한 단순

불씨놓치지말아야

한 애착과 경험을 통해 습득된 선입견에 따라 행동하는 복지수혜자 사이의 관계를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가치충돌로 이해하는 접근은, 우리가 당연한 것 으로 여기는 현재 형태의 민주주의 제도나 공공성의 개념도 누군가에게는 다른 형태의 억압이 될 수 있음 을 환기시켜 줍니다.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23


특집 /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지금, 여기의 넷우익 한국의 온라인 극우주의 개괄 오늘 한국사회에 횡행하는 우익이 만들어내는 모든 살풍경들은 실은 정치를 매개하는 조직이 몰락한 시대에 적나라하게 드러 난 반정치의 얼굴이다.

박권일 기관지 위원,《지금, 여기의 극우주의》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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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 소위‘애국보수세력’ 이 모였다.‘해방 이후 최대의 우익 집회’ 라 불린 이 모임은‘반핵 반김(정일),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 였다. 초대형 스피커에서는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였다. 군중은 한 손에 태극기를, 다른 손에 는 성조기를 들고“대한민국 만세, 미국 만세, 유엔 만세!” 를 외쳤다. 천주교한민족돕기회 회장 봉두완 씨 가 단상에 섰다. 그는 엄청난 인파에 고무된 듯 격앙된 목소리로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총재를 소개한 다.“여러분, 이철승 씨는 비록 전라도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입니다!”

행동하는 우익, 분화하는 우익

돌아보면 이때가 한국 우익에게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출범과 함께 우익들은 이 전 정권-그 정권 역시 개혁성향 정권이었음에도-에서와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리 로 쏟아져 나왔고 온갖 종류의 사안에서 격렬한 증오를 드러냈다. 무엇보다 그것이 투표로만 표현되는 것 이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됐다.‘한국 우익’ 과‘직접행동’ 은 사실 어색한 조합이다. 우익에 대한 그간의 이미지는 대충 이러했다. 평소엔 정치적 토론을 선호하지 않지만 막상 투표소에선 거의 맹목적으 로 극우보수 정치세력에게 표를 몰아주는 고령자. 이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적 토론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권도, 시스템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세팅되어 있는데 뭐 하러 토론 같은 걸 하겠는가. 그냥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두 번 연속으로 개혁정권 시대를 맞고 보니‘이대로는 정말 큰일 나겠다’ 는 위기감이 전례 없는 강도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정권의 탄생 과정상 극우보수 세력에게 나름 타협적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도 그랬던 김대중 정권과 달리 노무현 정권은 당시 월간《말》 이 표현한 것처럼“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는 대통령” 이었다. 당내경선 승리도 힘들었던 후보 노무현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만든 건 자발적으로 모여 헌 신한 시민들이었다. 노 정권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우익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지지만(예컨대 사학법), 이미 정권출범 극초반에 우익들은 극도의 공포를 안고 있었다.‘온라인 여론전에서 완벽히 밀렸

다’ 는 반성 역시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그들은 이제 변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행동하는 우익은 동시에‘산개’ 하고‘분화’ 하는 우익이었다. 내부 헤게모니 투쟁도 격화되었다. 상대적 으로 젊은 세대에 속하는, 그리고 주류에 진입할 기회를 노리던 극우보수 세력들은 온라인에서 매체를 만 들어 본격적인 담론투쟁에 나섰다. 신혜식 씨가 만든《독립신문》 이 대표적이었다. 이 매체는‘임동원 간 첩설’ 에서부터‘촛불시위 최초 제안자가 알고 보니《오마이뉴스》기자였다’ 는‘폭로(?)’ 에 이르기까지 우 익 내부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낼만한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2002년 촛불시 위를 제안한 아이디‘앙마’ (김기보 씨)는 오마이뉴스 상근기자가 아니라 시민기자로 기사투고를 한 것이었 다. 온라인 극우세력 내에서 활발히 통용되는‘애국세력/매국세력’같은 어휘들을 온라인에 정착시킨 것 도 당시 신혜식과 같은“청년보수” 들이었다.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25


현실권력을 지향하는“청년보수” 의 흐름은 이후 지금까지 쭉 이어져오고 있다. 반면 이와는 좀 결이 다 른 온라인 우익“넷우익” ( )들이 존재한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급격히 덩치가 커진 다문화 반대 커뮤니티 들과 2013년 이후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온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등이다. 전자는 21세기 서유럽이 나 일본 등에서도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극우주의자들과 유사하다. 편의상‘통상형(通常型) 넷우익’ 이라 부르자. 후자는 한국사회와 온라인 상태계의 특수성이 중첩되어 특이한 모습이 된‘기행형(奇行型) 넷우 익’ 이다.

다문화반대카페, 일베, 개신교 신극우, 그리고…

반 이주노동자 담론은 2000년대 중후반 인터넷에서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그중 가장 많은 회원들이 활동하던 커뮤니티 중 하나가 다문화정책반대 카페다(2015년 현재 거의 활력을 잃었는데 일베의 부상과도 관 련이 없지 않을 게다). 이 커뮤니티의 담론분석을 시도한 2010년 무렵은 제법 많은 글들이 올라오던 시기였

다. 2012년 출간된 책《우파의 불만》 에서 나는 이들을 학계의 뉴라이트 담론과 구별되는 기층우파 담론으 로 규정한 적이 있다. 이들은 경제담론과 민족담론을 결합한‘국익주의 담론’ 을 선호했고 주된 프레임으 로 사용했다.‘이주노동자들이 민족정기를 흐리고 에이즈를 퍼뜨리며 범죄를 양산한다’ 는 식의 민족담론, 보건담론, 치안담론들도 자주 등장한다. 이들 담론은 서유럽의 네오 나치나 일본 재특회(재일특권을 용납하 지 않는 시민모임)와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념체계와 운동의 목표, 적대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운동으로서 맹아를 분명히 품고 있다.‘통상형 넷우익’ 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강자와 현실권력에 관대한 일베와 달리 반다문화카페는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모두를 적 으로 돌린다는 점이다. 반 이주 담론 주체들은 자신들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주장을 현실 정치세력 중 어느 곳도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혹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이념적 아노미와 반 이주 담론 내부의 크고 작은 담론투쟁 등을 거치면서 반 이주 담론은 자신과 적의 정체성을 점차 분명히 규정하면서 대항담론으로 성장해왔다. 아직까지 반 이주 담론이 현실 정치세력으로 응집되진 않았다. 자 신들이“정치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 (<정치세력화에 대해서>, 다문화정책반대 카페)이라면서 반 이주 담론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정치세력화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글이 가끔 올라오긴 했지만, 실제 강한 조직화 움직임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주 문제가 좀 더 첨예화할 가까운 미래에, 반 이주 담론이 지금 재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적대의 구도가 정치적 대변세력을 만나 일거에 전면화할 가 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013년 봄, 소위‘홍어택배’사진으로 사회를 경악시킨 뒤 여전히 위세를 과시 중인 일베는 이제 한국 넷우익의‘대표선수’ 가 되었다. 일베의 담론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여성혐오“김치녀” ( ,“탈김치”등) 담론 과 호남혐오 담론“홍어”등) ( 이다. 인터넷 놀이문화의‘막장성’ 을 이어받은 이들이 혐오표현을 특정한 집 단을 향해 뿜어내기 시작하면서 일베는 뜨겁고 거대한 사회문제가 됐다. 그런데 일베의 담론과 문화를 26


‘이념’또는‘(극우주의) 사회운동’ 의 차원에서 바라볼 경우 분석이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친목질 금지’ 를 통해 엄격하게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을 차단 하고 있다. 물론 일베는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의 주요 무대인만큼 현실정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현실권력과 극 우보수 세력은 분명히 일베를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일베 스스로가 이념에 기반을 둔 사 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조직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일베의 혐오표현들과 약자배제의 언어들은 공적영역에서 지지자들을 모을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정치세력화를 고민한다 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테다. 누가 공론장에서 공공연히 그들의 담론을 지지하겠는가? 새누리당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정치인조차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일베는 아랑곳하지 않고‘막장성’ 을 하나의 유희이자 쾌 락으로 소비하고 있다. 내가 일베에 대한 어떤 분석에서“일베는 이념을 위해 주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주목을 위해 이념을 추구한다” 고 지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지금 ( 여기의 극우주의》 (2014) 53쪽). 일베는 이 런 면에서 통상형과는 다른‘기행형 넷우익’ 이라 하겠다. 넷우익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세력은‘개신교 신극우(크리스천 네오 라이트 Christian Neo-Right)’ 다. 본래 한국의 친일-친미 보수세력과 반공보수 성향 개신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적・이념적 친연성을 지닌다. 이승만 지지세력은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를 만들어 미군정과 분단세력에 적극 협조했고, 한 민당에는 누구보다 개신교인들이 많이 참여했다.“해방 직후 이승만이‘반공’ 을 주창하고 나섰을 때 정권 의 종교적 주체는 바로 개신교였다.” (서정민, <해방직후 한국 기독교계 동향>,《기독교사상》 , 1985) 한기총(한국 기독교총연합회)은 바로 이 역사성의 적통을 잇는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개신교 신극우’ 는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약한 세력이다. 밝은인터넷세상만들기운동본부, 한국인터넷선교네트워크 등의 단체명으로 모여서 집단행동을 하는데, 한기총과는 행동양식과 전략이 상당히 다르다. 대표적인 리더로 안희환 목사가 있다. 이들 세력 은“밝은 인터넷 세상” 을 표방하면서 대형교회 비판글을 블라인드 처리하거나“바른 성문화” 를 표방하면 서 반동성애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동성애 조항을 문제삼아 서울인권헌장을 사실상 폐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도 이들 개신교 신극우들이었다. 이들은 반공주의, 반다문화, 반동성애 주장을 담은 선전 물을 대량으로 뿌리면서 순식간에 거대한 넷우익 세력으로 부상했다. 개신교 신극우는 사회운동으로서의 요건‘정체성’ ( ,‘적대자’ ,‘사회적 목표’ )을 명확히 갖추고 있는 만큼, 기행형보다는 통상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점점 더 활발히 활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정치의 얼굴들

오늘 한국사회에 횡행하는 넷우익들이 발생한 경로와 표층적 동기는 제각각이다. 그들은 하나로 싸잡 아버릴 정도로 동질적인 주체들이 아니다. 서로 갈등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심층동기의 수준에서 본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27


다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종의 멘탈리티가 있다. 나는 그것을 통칭해‘상상된 착취(imagined exploitation)’ 라 부르고 있다. 이들은 공히 자신을 부당한 착취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며, 공동체의 구성

원으로서 당연히 받을 몫을 내부의 타자에게 빼앗겼다는 박탈감을 내면화한다. 이런 박탈감은 불공정성 에 대한 직관적 인식, 그리고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확신과 단단히 결부된다.‘상상된 착취’ 는 체제 모순에 대한 두 가지 무력한 대응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제시한 것, 즉‘전기적 해법(자기계발)’ 과‘상상 적 해법(희생양 찾기)’중 후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상상적 착취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은 나보다‘자 격(membership)’ 과‘능력(merit)’ 이 없는데 몫을 더 받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향해 증오와 혐오를 드러 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실제 그들을 분류하고 착취하고 배제하는 주체는 내부의 타자들, 이를테면 이주 노동자나 여성들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임에도 이들은 자본과 국가에 저항하지 못한다. 자신의‘자격 있음 /없음’ 과‘유능/무능’ 을 인준해주는 주체가 다름 아닌 자본과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살풍경들은 실 은 (진보운동 뿐 아니라) 정치를 매개하는 조직이 몰락한 시대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반정치의 얼굴이다. 다 음 인용으로 글을 맺는다.

“정당정치와 분배 구조가 현실의 모순을 반영하지 못할수록, 정치는 사회경제적 불만을 생산력과 제도로 해결하기보다는 어떻게 대중에게 즉각적인 쾌락을 주느냐를 가지고 경쟁하는 게임이 되기 쉽다. 모두에게 ‘빵’ 을 주진 못하지만‘2등 국민’ 을 차별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행위를 방치함으로써 불만을 위무하는 일종 의 극장형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차별이 당연시된 사회에서는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이 매우 강력하 고 실제로 대중의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함에도 그 에너지가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상승하지 못하고 불 완전연소 해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반정치화(anti-politicization)’현상이다. 반정 치화의 형식은 다시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반정치적 정치(anti-political politics)’ 와‘정치적 반정치 (political anti-politics)’ 가 그것이다. 다문화반대카페의 담론은 반정치적 정치다. 즉,‘민주화’대‘산업화’ 라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허구적 적대를 내파하면서 우리가 실제로 직면한 적대가 얼마나 외설적인지 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반면 일베는 정치적 반정치다. 즉, 이데올로기 투쟁의 외피를 걸친 맹목적인 주목 경쟁을 통해서,‘우파의 불만’ 을 표상하는 거대하고 황량한 공백으로 출현한다.” 박권일,《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2014),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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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권에 맞서 대안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공산당의 홍보 포스터(좌)와 공산당의 의석 수가 늘어난 데 감사를 전하는 포스터(우 아래) (사진 : 정정은 편집실 부장)

특집 /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포스트 성장 시대 일본의 사회운동 3.11은 좌파운동의 기회인가 위기인가 3.11 이후 급격히 표면화된 사회모순에 대해 일본의 정치권은 기능부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런 위기를 틈타 극우들은 재빨리‘안보몰이’ 를 시작했 다. 일본 좌파들에게는 지금이야말로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임경화 서울 금천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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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도‘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진재와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원전사고는 다량의 방사성 물질을 광범위하게 누출시켜 바다와 대기 그리고 대지를 치명적으로 오염시켰다. 후쿠시 마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기약 없는 피난생활을 강요당해야 했다. 눈에 보이지 도 않고 냄새도 없고 증상이 당장 나타나지도 않는 방사능 피폭이라는 공포가 일본 전역을 뒤덮었다. 하 지만, 패전 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불린 이 사태에 직면해, 일본정권은 국민의 안전을 우선하기보다는 위 기에 처한 자본을 구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그들은 자숙 분위기를 조성해 언론 통제에 나섰 고 사고를 은폐하고 축소했다.‘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거나‘당장은 건강에 영향이 없다’ 는 위압적 인 거짓말로 오염지역에 사람을 살게 하고 오염된 것을 먹고 마시게 하면서 원전 재가동에 박차를 가했 다. 거기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는 국가는 없었다. 분노를 참다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없다는 절박함 속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광장을 가득 메웠던 일은 지금 도 생생하다. 안보투쟁으로 촉발된 60년대의 데모 이래로 40여 년 만에 광장이 열린 것이다. 그 후로 이 제 4년이 지나려 한다. 지금도 매주 금요일에는 국회 주변에서 원전반대 데모가 계속되고 있지만, 원전사고 피해자들의 상황 은 어떠한가. 어이없게도 그 사이 이 참사로 형사책임을 추궁당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피해 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손해배상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하고, 기존의 배상도 축소 또는 종료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상황이 이런데도 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은 2013년부터 흑자를 내고 있고, 은행들과 주주들도 다 무사하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연극 같은 상황 속에서, 아베 신조 수상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고농도 오염수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고 세계를 향해 거짓말을 했다. 그럼에도 피재민들의 실제 상황은 거의 변한 것이 없다. 그들은 방사능오염의 주범인 세슘137의 방사선 강도가 반으로 주는 데에 30년이나 걸리는 그 땅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방사선 감수성이 어른에 비해 월등히 높은 아동들 중에는 이미 112명 (2014년 12월 25일 현재)이 갑상선 암에 걸렸거나

3.11 대참사가 일본 사회에서도 우리의 기억에서도 점차 잊히고 있다. 이런 의

암으로 의심된다고 밝혀졌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참사 당시 사람 들을 공포와 분노에 떨게 했던 바로 그 이유, 즉

미에서 3.11이 초래한 진정한 위기는

방사능 피폭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고

실은이제부터라고하겠다.

증상이 당장 나타나지도 않고 입증하기도 힘들 다는 이유 때문에 3.11 대참사는 일본 사회에서

도 우리의 기억에서도 점차 잊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선 3.11이 초래한 진정한 위기는 실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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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은 사회 모순을 표면화했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아무리 피해자들을 무시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연극을 해도 일본사회 는 이미 대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원전사고는‘Japan as Number One’ 이라 불 렸던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고도경제성장시대가‘잃어버린 20년’ 이라는 장기침체기를 거쳐 이제 는 성장시대가 끝났음을 극적인 형태로 알린 사건이었다. 실제로 2014년에는 리먼쇼크 이후 5년 만에 마 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본격적인 포스트 성장시대의 도래가 선명해졌다. 가장 강렬하게 시대의 전환을 알린 것은 무엇보다도 원전 신화의 붕괴 그 자체였다. 원전은 일본형 공업화 사회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급속도로 늘어나는 전력수요를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정부가 원전 도입을 주도했고, 전 력회사에는 독점적인 지위가 부여되었다. 학계와 미디어 등은 원전이야말로 고도경제성장시대에 걸맞은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에너지라는‘원자력 안전신화’ 를 확산시키며 원전을 둘러싼 이권을 공유 했다. 이‘신화’ 에 대한 비판은 70년대부터 줄기차게 있어왔지만, 경제적 번영을 뒷받침하는 동력이라는 환상을 깨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다. 그 환상이 3.11을 계기로 철저하게 무너진 것이다. 제대로 추산조차 할 수 없는 사고 비용에 핵폐기물 처리 비용, 폐로 비용 등을 더하면 원전은 전혀 경제적이지도 안전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은 에너지원임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3.11 대참사로 드러난 원전의 민낯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70년대부터 반핵・반원전을 일 관되게 외쳐 왔고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반원전운동의 상징이 된 원자력공학자 고이데 히로아키 씨가 주장하듯이, 원전은 철저하게 약자의 희생에 기반을 둔 산업이라는 것이 후쿠시마의 비참한 현실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지방에 원전을 건설하여 지역주민들에게 위험을 떠넘긴 결과인 것이다. 가난으로 인해 저임금 고위험 불안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원전 노동자들의 존재도, 부유층 들이 먹지 않는 방사능 오염 식품들이 약한 곳, 낮은 곳을 찾아 유통되는 구조도 주목되었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격차사회’논쟁이 뜨거워져 양극화 사회의 급속한 진전, 비정규 고용, 지방의 피폐 같은 의제들이 논의되어 왔는데, 원전사고가 이러한 사회적인 이슈를 전면화시켰다. 3.11 참사로 촉발되 어 미증유의 고양기를 맞고 있는 일본의 사회 운동은 포스트 성장시대의 다양한 문제들과 복잡하게 결합하며 시대적 전환기에 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3.11은 좌파운동에게 새 로운 시대의 합의 도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

3.11 참사로 촉발되어 미증유의 고양기를 맞은 일본의 사회운동은 포스트 성장시대 의 다양한 문제들과 복잡하게 결합하며 시대적전환기에임하고있다.

다.‘1억총중류사회’ 를 구가했던 60년대 중반 부터 80년대에 일본사회당이다 일본공산당 등의 혁신계 정당들의 지지율이 3분의 1로 급격히 하락하고 노조의 전국조직(총평)이 해산한 것을 고려하면, 부의 재분배를 외치는 좌파정당의 등장이나 노동자들의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31


재조직 과제는 이 시대의 절박한 요구이기도 하다. 포스트 성장시대의 도래가 일본사회에 초래한 또 하나의 주목되는 변화는, 전후 고도성장시대를 뒷받 침했던 또 하나의 기둥이었던 미일안보동맹체제에 균열이다. 전후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군에 내어줌으로 써 얻어진‘평화’속에 경제적 풍요를 구가해 왔지만, 경제성장의 끝은 일본 사람들의 대미 인식의 변화에 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간 경제적 우월의식에 가려져 있던 대미 종속성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3.11 이후 개시된 후쿠시마 탈원전운동이 3.11 이전부터 지속돼 온 오키나와 반기지운동과 연동하면서 대미 종속 논의가 보다 가시화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운동들이 오키나와나 후쿠시마에 미군 기지나 원전을 강요하며 경제성장의 이익은 본토나 도시가 독점하고 그 피해는 양 지역에 외부화시켜 온 전후 일본의 구조적 차별에 반대하면서, 일미핵동맹을 중핵으로 하는 일미안보체제 자체를 문제 삼기 때 문이다. 즉, 핵의 군사적 이용의 희생양이 된 오키나와와 핵의 평화적 이용의 희생양이 된 후쿠시마 모두 미국과 일본의 비대칭적 동맹관계의 결과로 보고, 그 구조 속에서 원전 가동과 재처리공장 건설 등을 통 해 잠재적 핵보유국의 꿈, 재무장의 꿈을 키우는 일본의 패권국 욕망의 대미종속성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불어라, 안보의 바람이여!

그런데 이렇게 급격히 표면화된 다양한 사회모순에 대해 일본의 정치권은 기능부전에 빠져들었다. 그 리고 이런 위기를 틈타 극우들은 재빨리‘안보몰이’ 를 시작했다. 반원전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도쿄 도지 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가 센카쿠 열도의 구입 의사를 표명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일거에 악화시켰다. 이 후 한중일 3국의 관계는 심각한 대치국면에 빠져든다. 3.11이 있었던 2011년 이후,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일 본인들의 호감도가 급격히 하강했다. 일본을

‘참사 편승 정치’ 가 일본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이른바‘평화헌법’개정을 통해 전쟁 을 할 수 있는‘보통국가’ 가 되려는 움직임 마저전면에부상했다.

둘러싼 동아시아 곳곳이 분쟁지역화 되고 주 변국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일본 내에서도 불안이 조성되었다. 이른바‘평화헌법’개정 을 통해 재무장을 하여 전쟁을 할 수 있는‘보 통국가’ 가 되려는 움직임이 전면에 부상했다. 나오미 클라인이“국가적인 큰 재난이나 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우왕좌왕하고 권력자들은 이때를 틈타 국민들을 그들이 원하는 데로 이끌어 나가려 한 다” 고 언급한 이른바‘참사 편승 정치’ (쇼크 독트린)가 일본에서 본격화한 것이다. 3.11은 미국에게는 자민 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불안정해졌던 미일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자민당에 게는 잃었던 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군비강화노선을 주장하는 개헌파 세력들에게는 3.11 은 의심할 여지없는‘천우’ 였다. 32


그들은 안전보장에 관한 국민의 알 권리를 턱없이 제한한 특정비밀보호법을 성립시켰다(2014년 12월 시행). 또한 미국과 중요 정보를 공유하며 수상이 상시적으로 군사나 외교정책을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

는 일본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설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을 위한 헌법의 해석개헌, 무기수술 금 지 3원칙 철폐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조치를 취해 전쟁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기정사실화하고자 한다. 최근에는 IS에 의한 일본인 인질 처형 사건을 구실로 중동지역에서‘적극적 평화주의’ 라는 이름의 대테러 전쟁을 전개하려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우경화 움직임은 정권 비판에 대한 자유나 민주주의의 가 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이는 국경 없는 기자회가 매년 집계해 발표하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를 통해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본은 2010년까지 이 집계에서 세계 상위권을 자랑했는데, 3.11 이후에는 불투명한 보도나 정부의 미진한 정보 공개, 특정비밀보호법의 제정 등이 반영되어, 2010년에는 세계 11위 이던 순위가 2011년에 22위, 2013년에 53위, 2014년에 59위, 2015년에는 61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참사 편승 정치’ 의 상황은 패전 후의 일련의 민주주의 개혁을 끊임없이 패전 이전의 체제로 되돌리려고 했던 보수정당들의 동향과 흡사하다. 이에 대항해서 사회당과 공산당 등의 혁신 정당 들이 전전 회귀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헌법 수호‘평화 정당’ 으로서 맞서면서 이른바‘55년체제’ 라는 정치구도가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최근 일본공산당이 총선에서 잇따라 의석수를 늘리고 정당 지지율을 늘리고 있는 것은 전후 오랜 기간 뿌리내린 반전평화의 가치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 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일본공산당은 현재의 일본을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국 가이면서도 미국에 의해 장악당한 사실상의 종속국으로 보고 현 단계에서 일본에 필요한 변혁을 민주주 의혁명으로 보는데, 민주주의적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이 시기에 이런 관점이 다시 한 번 설득 력을 회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 회귀적인‘호헌 vs 개헌’ 의 대립구도는 포스트 성장시대의 다양한 좌파적 의제들 의 상대적인 경시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정권비판에 대해 자숙 분위기가 조성되고 거기에 혁신정당 들까지도 말려드는 형국에서, 안타깝게도 3.11을 계기로 표면화했던 각종 사회적 이슈들은 후경화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좌파들에게는 최대의 위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좌파운 동은 지금 우경화의 흐름에 맞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수호하면서 좌파적 의제를 이슈화하고 신자유주의에 맞선 자본주의 변혁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극히 복잡한 과제를 떠맡고 있다.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33


특집 /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시리자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전 유럽을 상대로 한 시리자의 전투는 일단 첫 고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시리자가 쟁취한 눈앞의 붉은 카펫은 일단 사치스러워 보인다. 몇 가지 키워드로 시리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예측해보자.

최백순 기관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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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한 우파언론들의 동맹은 일찍이 없었다. 전 유럽의 언론들은 지난 백년간 가장‘위험한 붉은 정권’ 이 탄생할 것이라는 경고를 연일 내보내며 시리자(SYRIZA)에게 맹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전 유럽 을 상대로 한 시리자의 전투는 일단 첫 고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신민당(ND) 과 범 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의 양당체제를 와해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시리자가 쟁취한 눈앞의 붉 은 카펫은 일단 사치스러워 보인다. 집권에 성공한 정당이라면 싸워야할 적이 국내에 존재하는 것이 상식 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자는 싸워야 할 적들이 모두 국외에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일대 결전을 벌 여야 하는 상대는 이른바 트로이카들이다.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이 바로 그들이다. 유럽의 어느 정권도 이런 괴물들에 한꺼번에 대항해 싸웠다는 역사는 찾기 힘들다. 알렉산더 대왕의 근거지였던 그리스의 항구도시 이름을 딴 <테살로니키 프로그램>을 실행할 기회마저 시리자가 과 연 잡을 수 있을까. 몇 가지 키워드로 시리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예측해보자.

신타그마 광장

2012년 4월 4일 신타그마 광장에서는 할리우드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한 노 인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맞은편의 의회건물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근을 서두르던 아테 네 시민들은 영화 같은 한 장면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른 노인은 방아쇠를 당기 며 삶을 마감했다. 그리스에서 흔히‘긴축살인’ 이라고 불리는 이런 자살의 이면에는 평생 넣은 연금이 관 련되어 있다. 구제금융을 해주는 대가로 트로이카가 연금 삭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유서에서 집 권당인 PASOK을 비롯한 긴축에 동의하는 정당들을 나치의 부역자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노인은 쓰 레기통을 뒤지며 살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삶 대신에 존엄을 선택한 것이다. 4월 한 달간 신타그마 광장은 긴축살인에 분노하는 시위대의 화염병으로 뒤덮였다. 5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지난 40년간 노동자의 벗을 자처했던 PASOK이 받은 성적표는 충격적이 었다. 과반수가 넘게 차지하고 있던 160석의 의석수가 41석으로 급락했다. 13석에 불과했

연금과 복지국가를 믿고 지지했던 노동자

던 시리자는 52석을 획득하며 제2당으로 올

에게서 PASOK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빼

라섰다. 70년대부터 신타그마 광장의 주인은

앗았다. 광장에서 노동자와 새롭게 바리

PASOK이었다. 광장에서 노동자의 미래를

게이트를치고싸운것은시리자였다.

말하고, 연금과 복지국가를 주창하며 우파들 과 싸웠다. 40년 후, 연금과 복지국가를 믿고 지지했던 노동자에게서 PASOK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빼앗았다. 신타그마 광장에서 노동자와 새롭게 바 리게이트를 치고 싸운 것은 시리자였다.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35


알렉시스 치프라스

마놀리스 글레조스

마놀리스 글레조스(Manolis Glezos). 이 인물을 설명하려면 한 문장이면 족하다. 그리스 레지스탕스 역 사의‘살아있는 화신’ . 1941년 5월 아테네를 점령한 나치는 파르테논 신전 앞에 자신들의 깃발을 게양하 며 자축했다. 그리스인들의 모욕감은 두 배가 되었다. 그런데 칠흑같이 캄캄한 어느 날 새벽, 스무 살의 청 년 두 명이 아크로폴리스 절벽을 타고 올랐다. 이윽고 신전 앞에서 나부끼던 나치의 깃발은 글레조스의 손에 의해 새벽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네 번의 투옥, 두 번의 사형선고, 두 번의 국회의원 옥중당선이 그가 쌓아 은 이력이었다. 한 번의 탈옥은 덤이다. 그리스 군사독재 시절에서도 고난을 겪는 상징적인 인물 중 의 하나였다. PASOK이 창당되자 그는 아테네를 기반으로 우파들에 맞서 싸우는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7 년 후, 비록 사민주의 정당이지만 그리스 최초의 좌파정권이 탄생했다. PASOK은 그에게 마지막(?) 임무 를 맡겼다. 직선으로 뽑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또다시 PASOK의 선봉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유럽의 원으로 브뤼셀에 도착한 그는 급진좌파정당 소속의원들에게 더 인기 있는 그리스 정치인이었다. 유럽의 회의 공산당 계열 의원들도 그에게는 존경을 담아 예우했다. 인고의 시절 그가 그리스공산당의 기관지 편 집장을 맡아 우파들과 사선을 넘으며 싸운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칠순을 앞둔 마놀리스 글레 조스의 긴 여정은 PASOK을 대표하는 유럽의원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36


SPACE

그리스에도 불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광풍은 좌파들에게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 된 것은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개최될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국제행동을 앞두고였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그리스의 다양한 좌파세력들이‘SPACE’ 라는 일시적인 동맹체를 조직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조직했고 거리로 나와 민중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신타그마 광장은 연일 전선의 출발점이었다. 영국노 동당의 블레어가 그랬고, 독일사민당의 슈뢰더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의 집권당인 PASOK 역시 신자 유주의의 전도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SPACE를 중심으로 하는 선거연합이 결성됐다. 물론 오랫동안 함께 투쟁했던 시나 스피스모스(Synaspismos)도 주도적으로 참여 했다. 여전히 스탈린주의 경향이 남아있는 공 산당 계열부터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세력까 지 참여한 선거연합의 탄생은 위기감과 기회 를 동시에 보여주는 시대적 결과물이었다. 하

공산당 계열부터 사회민주주의 세력까지, 다양한 좌파세력들이 참여한 선거연합의 탄생은 위기감과 기회를 동시에 보여주는 시대적결과물이었다.

지만 선거란, 다국적군이 모여 자신의 목소리 를 합친다고 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선봉장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테네의 신타그마 광장에 팔순의 마놀리스 글레조스가 나타났다. 그의 이야기는 간결했다.“PASOK은 더 이상 민중의 편이 아니다.”선거 는 범좌파 선거연합이 기대하던 것 이상의 약진으로 끝났다.

SYRIZA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좌파들의 단결을 위한 논의가 진행됐지만 쉽지 않았다. 우선 여전히 그리스에 서 유의미한 지지율을 가지고 있는 공산당 계열들이 분립되어 있는 상황이 논의를 더디게 만들었다. 또 하나는 선거연합이 일회성인지 단일한 연합정당으로 가는 과정인지에 대해 이견들이 노출됐다. 다수파인 시나스피스모스는 추후에 논의할 문제라며 전략적으로 후퇴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연합정당으로 가는 길목이 될 것이라는 문제제기와 의심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스공산주의조직(KOE)이 대표적인 예였 다. SPACE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했던 KOE는 끝내 선거연합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SPACE에서 활 약했던 재생공산주의생태좌파(AKOA)가 참여하면서 선거연합은 힘을 얻었다. 영향력이 있지만 화석화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스공산당에서 이탈한 좌파행동통합운동(KEDA)도 참여를 선언했다. 신타그 마 광장의 투쟁에서 언제나 조명을 받았던 행동하는 시민들(Active Citizens)의 적극적인 참여는 가장 큰 응원군이었다. 행동하는 시민들을 이끄는 사람은 다름 아닌 팔순이 넘은 노구의 레지스탕스 마놀리스 글 레조스였다. 글레조스는 시리자가 집권할 때까지, 신타그마 광장에서 또다시 10년을 싸웠다. 그를 두고 특집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37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과도한 수사를 동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흔 살의 노구임에도 광장에서 물대포 를 맞으며 전경들의 방패에 맞서 몸싸움을 벌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의원으로 브뤼 셀연단에서 트로이카에 맞서고 있다. 아흔 넷, 노 투사의 싸움은 현재형이다. 급진좌파연합이라는 이름의 시리자는 2004년에는 6석을, 2007에는 14석을 얻으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트로이카

유로존 재무장관 연석회의가 진행 중이다. 물론 재무장관들은 트로이카의 입장을 대변한다. 안개 속의 협상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2월 말에 돌아올 만기채권을 그리스가 막을 능력이 일단 없기 때 문이다. 시리자의 기본전략은 만기채권을 6개월간 연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조건으로 계약을 맺 는 것이다. 이를테면 재정규모와 연금문제에 강제성을 둔 조항을 삭제하거나 최소한 협의수준으로 후퇴 시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치프라스가 백기를 들 가능성은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파국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자의 다수파인 시나스피스모스를 이끌고 있는 치프라스는 유 로존 탈퇴를 일관되게 반대해왔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협상을 이끌고 있는 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 이 시리자 내에서 유로존 탈퇴를 강력하게 주장해 온 인물이란 것이다. 피레아스 항구 지역에서 대거 득 표한 시리자의 집권은 그 항구 어디에서

피레아스 항구 지역에서 대거 득표한 시리자 의 집권은 그 항구 어디에서 좌초할 것인가. 이 위험한 정권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좌초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배수진을 친 시리자의 결단에 유로존 국가들이 조금 씩 흔들리며 밀리는 분위기다. 총리에 오 른 치프라스의 첫 행보는 나치에게 학살

안개가 걷히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당한 레지스탕스가 묻힌‘케사리아니’ 를

않을것같다.

방문하는 것이었다. 트로이카에게 최대 입김을 가진 독일을 의식한 행보였을까.

마놀리스 글레조스도 연단에서 독일은 그리스에게 빚이 있다고 말하며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역설적이 게도 지금까지 가장 비협조적인 것은 독일사민당이다. 이 위험한 정권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안개 가 걷히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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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방사능안전급식 활동가 대담

“정치기획자, 그리고 책임질 활동가 필요해” 2013년 노동당이 진행한‘같이 쉬자 빨간날’캠페인은 울산 동구 비정규직 노동 자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노동조건 실태조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사업이다. 의 정부 당원들의 뉴타운 반대 운동은 전국 최초로 뉴타운출구조례를 만드는 데로 이어졌다. 지역에서 진보적인 의제를 어떻게 발굴할 것인가? 이에 그치지 않고 어 대담 김상철 서울 영등포 김종철 서울 동작 김희서 서울 구로 최혜영 경기 의정부 정리 노 정 편집실장 사진 정정은 편집부장 녹취 이춘희 서울 구로 당원

떻게 사업으로 기획하고 진행할 것인가? 사업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인 맥을 뚫을 것인가? «미래에서 온 편지»는 각 당협과 시도당이 지역에서 사업을 기획하고 집행할 때 참조 체제가 될 수 있도록 지역 활동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계속 실어갈 예정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4주기가 되는 2015년 3월, 지역 에서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 식재료 공급 지원 조례(이하‘방사능안전급식조 례’ )>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당원들을 만나보았다.

사회 : 많은 당원들이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방사능안전급식조례 운동을 펼치고 있다. 경기도 군포와 서울 구로구에서는 주민발의로 조례안을 발의했고, 특히 구로구의 경우 기초의원 당선으로까지 이어졌 다. 또한 탈핵문제와 안전문제를 생활과 밀접한 의제로 연결시켰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진보정당 에서 방사능안전급식조례 운동이 어떤 중요성과 의미를 갖는지부터 얘기해보자. 김희서 : 단순히 학교급식 운동으로 볼 수도 있고, 지방자치와 주민참여를 배우는 교육의 공간, 방사능 의 위험성과 급식안전에 대해 알리는 교육 공간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나는 탈핵, 반핵으로 가는 사전 전지작업, 대중적인 교두보라는 데 강조점을 두고 싶다. 사회 : 지역 주민들은 얼마나 공감하고 반응하나? 김종철 : 사실 원래는 우리가 먼저 취지를 내세웠다기보다 주민들이 이런 활동에 대해 공감하고 이런 게 꼭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밝혀 왔는데 선뜻 나서서 하지 못하고 있다가 우리 당원들이 하자고 하니까 힘을 받게 된 측면이 있다. 애초에 (주민들로부터) 요구가 없었던 의제를 우리가 갑자기 만들어서 하면 그게 성과가 있을까 싶다. 주민들로부터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기획 방사능안전급식 활동가 대담 39


사회 : 구로구에서 조례가 주민발의되고 제정되어 통과하기까지 당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들었 다. 구로 민중의집 강상구 대표가 기획을 하고, 김상철 당시 서울시당 처장이 조례안을 작업하고, 구로구 에서‘방사능 안전 급식 지킴이’ 라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참여했다고 하던데, 그 과정을 당원들과 구체적 으로 공유하고 싶다.

왜 방사능안전급식인가

김상철 : 2013년에 서울교육청에서 방사능안전급식조례가 하나 만들어졌다. 녹색당을 비롯해 급식 운 동을 하던 단위들이 조례안을 만들었는데, 이게 심의 과정에서 엄청나게 수정이 되어버렸다. 원래는‘방 사능 물질로부터 안전한’급식조례인데 심의 과정에서‘방사능, 농약, 중금속’등등이 나열되면서 사실상 방사능안전급식조례의 의미가 퇴색됐다. 그 조례가 쓸모없다는 반성적인 평가가 나오고, 2013년 12월부 터 다른 조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때 마침 지방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구로지역의 강 상구 동지가, 특히 생협 활동도 하고 계셨으니까, 방사능안전급식이 의제가 될 것 같다고 제안해주셨다. 교육청의 방식이 아니라 자치행정기구인 구청을 매개로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자고. 그게 마침, 학 교급식조례지만 교육청조례 외에 행정조례로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당의 목적과 맞은 거다. 구로에서는 (당 사업으로 치고 나가기보다) 그걸 매개로 해 지역단체를 묶고 별도의 단체를 만듦으로써 주민 들을 견인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지역에 정치 기획자가 있고, 서울 판이 바뀌어 가는 흐름이 있었던 동시에, 지역에 그 운동을 책임질 수 있는 지역 활동가가 있었던, 조건들이 딱 맞아 떨어진 사례였던 것 같다. 이중에 어느 하나라 도 잘 갖춰지지 않았다면 내용이 없거나 혹은 질러놓고 책임을 못 지거나 했을 거다. 사회 : 2013년 9월에 논의됐던 교육청조례 가 무엇이 문제였는지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달 라. 김상철 : 방사능안전급식조례 제안을 하다 보면 걸리는 게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전수조 사를 받을 것이냐 안 받을 것이냐. 그리고 국 가 기준치보다 강화된 기준치를 사용할 거냐 말 거냐. 사실 늘 있는 갈등인데, 교육청 조례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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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두 가지가 다 빠진 조례다. 전수조사도


아니고 조사 결과에 대한 공개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국가기준치로만 했던 거여서 실제로 방사능 운동단 체들, 그러니까 탈핵 운동단체들 입장에서는 그냥 지금 정부에서 하는 그대로 하는 게 더 낫지 않냐, 똑같 다, 이런 평가를 받은 거다. 사회 : 경기도 군포와 서울 구로 외 다른 지역은 지금 상황이 어떤가? 김상철 : 경기도 의정부와 서울 양천도 모두 주민발의로 발의에는 성공했는데 의회에서 심의가 되지 않고 계류되어 있다. 사회 : 아무래도 의원 발의안이 아니라 한계에 부딪힌 건가? 김희서 : 의원 발의안이 아닌 주민 발의안이기 때문에 원래는 더 부담을 느끼고 더 적극적으로 반영해 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있다. 의원들은 열 몇 명이지만 주민은 몇 천 명이다. 그 주민들의 직접적인 의사 를 반영한 게 주민 발의안이다. 그런데도 지방자치가 주민들보다는 그냥 정당이나 당협 위원장에 의해 좌 우되는 구조기 때문에 의원들이 주민을 별로 안 무서워하는 거다. 주민들의 이런 요구를. 그래서 그냥 계 류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정치적인 확신의 여부도 문제가 된다. 진보정당처럼 방사능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 말고는‘국가 기준치 이상으로 걸리는 것도 거의 없는데 뭐가 문제냐’ 고 한다. 우리는 기준 치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거고. 실제로 다른 나라의 경우 아이들 급식에 훨씬 더 엄격하 게 기준을 적용한다. 그런데 그분들 같은 경우에는‘국가에서 어련히 알아서 기준치를 만들어 놨을 텐데 유별나게 뭘 그렇게까지 하나, 몇 억씩 몇 천만 원씩 예산 투입하는 건 어렵지 않냐’이런 논리다. 사회 : 조례의 구속력이 어느 정도일까? 일반 당원들이나 독자들로서는 조례가 왜 중요하고 어째서 통 과시켜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을 것 같다. 김상철 : 행정을 움직이게 하려면 딱 하나가 있어야 한다. 바로 법적근거다. 보통 조례는 상위법에서 위임한 내용으로 만들거나 혹은 상위법의 내용이 너무 허술해서 그걸 좀 구체화하기 위해서 만든다. 그렇 게 조례를 만들어 놓으면 적어도 그 조례에 규정되어 있는 법적근거에 대해서 행정이 집행을 해야 될 의무 가 생기는 거다. 법적근거를 갖고 단체장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사실 조례만한 수단이 없다. 김희서 : 그리고‘주민발의’조례라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조례는 의원이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주민들이 모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방사능안전급식조례의 경우, 조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 만 많은 국민들이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해 인지하고 공감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핵심이다. 아직 우리 사회 는 원자력 안전에 대한 홍보비용도 엄청나게 많고,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보다 느끼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을 직접 만나고 설명하고 의견을 듣고 또 때로는 논쟁하면서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켜 나가는 데 의의가 있다.

서명 운동 vs 조직 가동

김희서 : 서울 구로구의 경우 주민발의 서명 요건(유권자의 2%)이 7천 명이었다. 주민발의를 해서 7천 기획 방사능안전급식 활동가 대담 41


명의 서명을 받으려면 그 세 배, 네 배의 주민들을 만나야 된다. 만났다고 다 서명해주는 게 아니니까. 그 리고 서명해주는 사람도 딱 한 번 만나고 서명해주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열 번씩 서 있으면 한 세 번은 ‘쟤네 뭐야?’이러고 보기만 하다가 네 번째에는 유인물 읽어보다가, 여덟 번쯤 보면‘내일은 서명 해야 지’했는데 내일도 못하다가, 정말 열 번 만에 그렇게 서명을 하는 경우도 있다. 김종철 : 동작구에서는 처음에 어떻게 서명 받으면 좋을지 몰라 헤맸다. 출퇴근 시간대에 좀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아침 출근시간대에 무조건 뿌린다. 그리고 퇴근시간대에 그 자리에서 또 해. 그러면 진짜 많 이 한다. 김희서 : 같은 자리에서 막 열 번씩 한다. 김종철 : 그걸 모르고 막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출근할 때는 여기서 하고 퇴근할 때는 저기서 하고, 그 러면 안 된다. 아침에는 바쁘니까‘이게 뭐지?’하고 지나가기만 하는데, 유인물을 읽고 공감한 사람이 ‘아 내가 서명했어야 했는데 그냥 왔네?’그럴 때 다시 하려고 하면 그 자리에 또 돌아가야 하니까 굉장히 힘들다. 구로구의 경우가 아주 모범적인 사례다. 동작은 너무 늦게 시작했다. 또 선거가 다가오니까 사실 상 하기도 어려워졌고. 당원들과 함께하는 주민들이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할 거라는 걸 공유했으면 더 좋았겠다. 김희서 : 구 단위로 봤을 때 하나의 사안이 이슈가 되게 만들려면, 유인물 주고 얘기도 나누고 선전도 하고, 적어도 석 달이 걸린다. 방송에서 만날 빵빵빵 터뜨려주는 의제가 아니고서야, 예를 들어 이수역 3 번 출구 한 군데 잡아서 열 번 정도는 서 있어 야‘쟤네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구나’인지가 된다. 거기에 동의를 하는지 안 하는지는 별개 의 문제다. 김상철 : 서울시당에서 했던 상가임차인 상 담소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기적으로, 정 해진 시간에, 예측 가능한 장소에서 늘 그 의 제를 갖고 움직이고 있으면 그게 각인이 되는 거다. 그 과정은 지속적이고 일관되어야 한다. 최혜영 : 경기도는 약간 다르다. 경기도당 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사업을 하기로 결정 했기 때문에 철저히 후보를 전면에 배치하고 후보가 대표 청구인으로 뛰면서 주민발의로 간다는 전략이었다. 지역마다 특성이 약간씩 다른데, 군포는 후보가 거리에서 주민서명을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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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받았다면, 의정부는 지역시민사회단체와


종교단체, 학부모 단체, 주민들을 최대한 조직 했다. 참여단체들 순회 교육도 하고, 지역의 모든 종교단체와 유관단체들이 서명에 참여하 도록 최대한 조직했다. 협동조합 조직들이 앞 장섰고, 교육단체와 정당들도 열심히 했다. 특 히 입학시기인 3월에는 의정부 전 학교의 학부 모 총회나 학교 운영위원회 정보를 파악해, 각 단체들이 권역별로 나눠서 서명을 받았다. 거 리서명보다는 단체를 매개로, 찾아가는 서명 이나 설명회 등을 한 셈이다. 사회 : 설명회 같은 걸 계속 했다는 건가? 최혜영 : 교육 자료도 만들고, 동영상으로 설명회도 하고, 참가 조직이 연관되어 있는 모 든 행사나 일정들을 찾아다녔다. 물론 거리서 명을 함께 했지만, 협동조합 총회, 신협 총회

김희서

등은 인원이 엄청나다. 중간에 대박을 터뜨린 게 천주교였다.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적극 결합해, 주임 신부님들의 도움으로 의정부지역 성당 대 부분에서 신도들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초반에 나는 어떻게 3개월 만에 서명을 받나,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그걸 지역에서 참가단체들의 힘으로 해내는걸 보고 깜짝 놀랐다.

중요한 건 단체장의 의지다

사회 : 공무원들과의 갈등이 계속 있었다고 들었다. 악의적으로 예산을 부풀리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식으로. 김상철 : 서울시도 그랬고, 구로도 그랬고, 양천도 그랬고. 동작도 아마 그래서 반대했을 거다. 재밌는 게, 지역에서 겪는 행정의 논리가 거의 다 똑같다. 공공행정 안에서 방사능의제들에 대응하는 논리를 자 기네들끼리 서로 전파하고 공유하는 것 같더라. 구 단위나 시 단위는 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급기관 에 물어보기 마련이다. 그러면 거기서 표준화된 답변이 기초 수준까지 똑같이 내려오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비용과 관련된 부분이다. 정말 황당하다. (방사능 측정하는) 기계를 사랬더니 그걸 작동하는 인력을 고용해야 한다면서 연봉 4천5백만 원짜리 경력직 고용비용을 책정한다. 그렇게 예 산 7~8억을 갑자기 만들어낸다. 다른 지역에 확인해보면 마찬가지 이야기들이 샤악~ 돌고 있다. 김희서 : 조례를 일단 만들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를 집행하는 건 자치단체장의 의지다. 이 사람이 하 기획 방사능안전급식 활동가 대담 43


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는 거고, 싫다고 하면 안하는 거다. 구로구청에서도 예산이 7~8억 정도라고 얘기했 다. 돈 많이 들어서 못한다는 거다. (방사능 측정) 검사를 제대로 하려면 멸균검사실도 지어야 하고, 기계도 사야 하고, 전문인력 교육도 시켜야 한다고 핑계를 댄다. 그러면서 전문인력 인건비 예산으로 1인당 6천 만 원을 잡는 식이다. 김상철 : 허허, 저기는 4천5백이었는데. 김희서 : 서울시 교육청의 경우 이번에 기계 한 대를 마련했다. 검사할 의지가 있으면 기계 사다가 교육 청 옆에 놓고 보건환경연구원에 직원 보내서 교육시킨다. 그렇게 하니까 방사능 측정 결과가 나온다. 중 요한 건 의지다. 시장이든 자치단체장이든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김상철 : 서울시 조례를 만들면서 담당 공무원들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방사능에 대해서 일종의 미 신 같은 걸 갖고 있다.‘기준치는 안전치’ 라는 미신이 하나고, 두 번째는 방사능의 위험을 축소하려고 하 는 게 굉장히 심하다. 공무원들의 대응 논리들이 중앙정부와 거의 같다. 탈핵의제와 관련해서는, 어우~ 이야기가 안 통하는데 미치겠더라. 김종철 : 후쿠시마 사고마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김상철 : 그러니까요. 말도 못 꺼냈을 거야. 최혜영 : 광역 담당 공무원들은 그래도 좀 똑똑한 것 같고, 기초 지자체는 주민발의도 난생 처음 해보는 거라 주민발의에 대한 이해도 없다. 방사능? 그건 또 뭐여? 이런 식이다. 김희서 : 공무원도 교육을 시켜야 한다. 우 리도 김익중 교수 모셔와 임원들부터 교육시 키려 한다. 내가 볼 때 그 분들 특별히 무식해 서 모르는 게 아니다. 전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무지다. 구로구에서 조례 만들어지고 올해 처 음으로 예산 반영하면서 몇 가지를 추진중인 데, 그중 하나가 교육이다. 학교 운영위원들이 나 급식 모니터링 학부모 대표단이 학교마다 있다. 이런 분들을 전부 다 모아 1년에 두 번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두 번째로 시범학교 운영을 한다. 두 개 학교를 선정해 일주일에 하나씩 무조건 (방사능) 검사를 다 하는 거다. 뭘 검사할지는 학교에서 정한다. 수산물 중에 뭘로 할래, 아니면 버섯 중에 뭘로 할래. 이 데 이터가 축적되면 이후에 이걸 확대할 생각이 최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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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구로구에서 올해 총 250건을 검사할 예정


이다. 조례에 있는 내용은 일단 전부 다 반영시켜서 진행 중인 상황이다.

술 먹고 한탄만 하지 말고

최혜영 : 방사능안전급식 사업을 하다 보니 이게 우리 당의 대표적인 정치기획 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광역단위의 대응도 해보고 지역에서, 바닥에서 직접 뛰어보니 되게 아쉽더라. 지나고 나니 몇 개 당협에서 밖에 하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 당이 지금처럼 당세가 약할 때는 이것저것 다 하면 안 된다고 본다. 노동과 생태, 두 개의 축을 갖고 대표사업 두 가지만 해야 한다. 노동사업은‘같이 쉬자 빨간날’ , 생태사업의 경우는 방사능안전급식조례다. 하나씩만 집중해서 파야 한다. 중앙당, 시도당, 당협 당부가 이걸 전략사업으로 잡아 5년, 10년을 가져가야 한다. 방사능안전급식 운동을 하면 할수록 이게 미 래의제구나 싶다. 이걸 갖고 10년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업은 학교급식 운동이자 동 시에 여성의제이자, 지역의제이자, 지방자치의제다. 그리고 교육의제다. 농업의제이기도 하다. 김희서 : 혁명의제기도 하다. 최혜영 : 그렇다. 더군다나 탈핵문제나 협동조합 운동이 계속 뜨고 있다. 협동조합도 묶을 수 있다. 과 거 그 어떤 대중운동 조직보다도 생협 조직들을 훨씬 잘 묶을 수 있다. 우리는 과거 학교급식조례제정 운 동의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이 의제를 감각적으로 탁, 잡은 거잖나. 현재도 노동당이 주도적으로 하고 있 잖나. 지금이라도 팀을 짜든지 당에서 핵심적인 정치기획 사업단을 짜서 유기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그리 고 중앙당부는 이걸 가지고 계속해서 노동당을 띄워야 한다. 그 다음에 시기적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 선거를 겨냥하고 후보를 띄워서 주민발의를 해야 한다. 이런 건 주민발의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당선을 시키겠다는 미친 듯한 욕구가 없으면 어떤 조직도 성사시킬 수가 없다. 책임지는 조직이 없으면, (선거 시기가 아닌) 평이한 시기에는 주민발의까지 갈 수가 없다. 지나 고 보니 지난 지방선거 1년 전쯤에 이 판단을 했다면 정말 좋았겠다 싶다. 향후에 선거 전에 이런 대표적 인 정치기획 사업을 짜고 이걸 각 지역의 지방선거와 어떻게 연결시킬지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의제건 꾸준하게 2~3년 기본으로 해야 하고. 거기에 사람과 돈을 투자해서 성과를 내고 그걸 통해 선거에서 성과 를 내야지, 당인데. 그래서 그런 구도와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여우같은 기획을 해야 한다. 이는 먼저 활동 한 활동가들의 몫이다. 과거 당의 경험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당이 그냥 놀이터도 아니고, 중앙정치만 얘기하면서 만날 술 먹고 뒷담화 하고 이럴 때가 아니다. 당세가 미약하면 미약한대 로, 좀 길게 가더라도 꾸준히, 정치적으로 성과가 있는 정치사업을 해야 한다.

기획 방사능안전급식 활동가 대담 45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4

‘세모’활동가 양지혜

청소년이스스로 정치적인세력을 만들어나가야해요 벌써 300일이 넘은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16일, 그 날 이후 참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많은 사람들이 활동에, 정치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의 청소 년들도‘가만히 있을 수 없다’ 며 거리로 나왔다. 당시 청소년‘가만히 있으라’제안자 중 한 사람이자‘청소년 세미 나모임 세모’ 에서 활동 중인 양지혜 당원을 만났다. 현재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양지혜 당원은 최근‘정리해고 비정규직 전면 폐기를 위한 오체투지 행진’ 에 참가하기도 했다.

인터뷰・정리・사진 : 강승 청소년위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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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30일 세월호 집회에서 단식에 참여한 양지혜 당원 (사진 : 장성렬)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47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청소년 세미나모임 세모’ (이하 세모)에서 활동하는 양지혜라고 합니다.‘안녕들하십니까’ 할 때 대자보를 붙이고 난 후‘청소년 안녕들하십니까’토론회에서 세모를 알게 되었는데요, 세모에서 활 동을 하던 중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 세모 멤버들이랑 다같이‘가만히 있으라’ 에 참여하기도 하고,‘청소년 가만히 있으라’등을 통해 세월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청소년들에게 모이자는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단 식도 하고‘방과후 농성장’ 도 진행했죠.

지금 활동하시는‘세모’ 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 또 무엇을 해왔나요? 세모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청소년이 직접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모임이에요. 제가 들어갔을 즈 음에는 월별로 날짜를 맞춰서 공부를 했어요. 예를 들어 3월에는 3월 8일 여성의 날에 발맞추어 여성주의 를 공부하고, 4월에는 식목일이니까 생태주의를 공부하고 밀양에도 다녀왔어요. 그러다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거죠. 우리가 배웠던 것들을 실천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때부터 세미나를 하 지 않고‘가만히 있으라’침묵행진을 계속 같이 했어요. 그 속에서 청소년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청소년 가만히 있으라’침묵행진 제안을 했어요. 그 이후에는‘방과후 농성장’ 이 란 걸 진행했어요. 청소년들에게 고립된 책상에서 벗어나 함께 연대하고 슬픔과 고통을 나누자는 말을 전 달하기 위해서였죠. 그러고 나서 청년초록네트워크라는 단체와 같이 생태주의 세미나를 하고, 동북아시 아의 청소년 및 청년들과 탈핵 같은 생태의제를 고민하는‘푸른하늘 겨울캠프’ 를 같이 기획하고 참여했어 요. 지금은 세모 여러분들이랑 같이 올 한해 세미나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안녕들하십니까’ 가 2013년에 있었는데 그 때 어떤 대자보를 쓰셨나요? 당시 10월에 밀양에서 행정대집행을 한번 했잖아요. 그 일을 보고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사람들이 대자보를 써서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 알리고 함께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걸 봤 어요. 그리고‘이런 방법으로도 연대하고 함께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자보를 쓰게 됐어요. 대 자보의 주된 요지는‘흔히들 출세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 우리가 나갈 세상, 지금 존재 하는 세상에 대해 한 번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거였어요.

그 이후에 학교나 학생들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어땠나요? 교감선생님이랑 면담을 했고요.(웃음) 제가 굉장히 외진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여서 큰 반향은 없었는 데, 주변 사람들이‘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 라는 걸 눈여겨봐줬고 포스트잇으로 응원도 좀 받고 그랬어요. 사실 붙이면서 저도 되게 두려웠거든요. 그런 것들이 저에겐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울기도 하고. 그런 48


데 한 번 대자보를 붙여봄으로써 결국 이런 걸 좀 느꼈던 것 같아요. 목소리를 낼 수 있 는 공간이 있는 게, 그리고 청소년이 주체 가 되어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겠구나. 사실 대자보 붙일 때도 처음에는 학생 게시 판이 없어서 못 붙였거든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청소년 가만히 있으라’ 를 제안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는 데, 어떤 계기로 그런 활동을 하게 되셨 나요? 세월호 참사가 있었을 때 저는 학교에 있었는데, 계속 신경도 쓰이고… 일상 어딘 가가 계속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어요.‘내 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생각하다가, 용혜인 당원이 제안했던‘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에 나갔어요. 그리고 걸으면서 여 러 생각을 했어요. 첫 번째는‘가만히 있으 라’ 라는 말이 당시 세월호에서만 있었던 말 이 아니라, 우리나라 현재 교육체제 자체를

“한 번 대자보를붙여봄으로써, 목소리를낼 수

드러내는 말이자 청소년들을 가장 강하게

있는 공간이 있는 게, 그리고 청소년이 주체가

억압하고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었어요. 두

되어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번째는, 그런 집회들에서 청소년들을‘우리

했어요.”

아이들’ 이라고 지칭하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대상으로, 혹은 피지 못한 꽃이란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게 청소년에게는 사실 또다시‘가만히 있으라’ 는 말로 적용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청소년들이 많이 모여서 집회에 참여하고 이 일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50여 명의 청소년들이 모여 함께 행진을 했죠. 이 행진을 하면서,‘가만히 있으라’ 는 말이 단순히 세월호에서만 있었던 말이 아니듯이 죽어가는 사람 도 단순히 세월호의 탑승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가만히 있으라’ 의 희생자는 결국 지금의 입 시경쟁교육의 희생자가 아닌가 하고요. 그런 면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단순히 세월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계속 있어온 일들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49


작년 9월 3일 세월호 집회가 끝난 후의 양지혜 당원 (사진 : 장성렬)

작년에 친구한테 연락을 받았거든요. 친구네 학교에서 1학년 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최근에 자살을 했 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그 죽음이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야기되지 않았고, 선생님들도 그저 침묵하면 서 그날의 일과를 진행했대요. 그냥 말 그대로 시체만 치워진 죽음이 되어버린 거죠. 그때 느끼는 게 많았 어요. 첫째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외면하고 다른 것들, 이를 테면 입시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둘째는 청소년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 개개인이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힘 듦이라거나 압박감은 다 지워지고 서울대에 합

“모두가 (타인의 고통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면, 결국 나 자신이 가지게

격한 사람들의 플래카드만 나부끼게 되는, 이 런 것들이 입시경쟁이 감추고 있는 면이라고 생각했어요. 입시경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계

되는 고통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겠구나

속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성공을 할

하는생각이들었어요.”

수 있다고 하죠. 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수많은 죽음이 깔려있어요. 그리고 모두가 그것에 침

묵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면, 결국 나 자신이 가지게 되는 고통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 이 들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노란 리본을 달지 말라” 고 했던 교육부의 지침처럼, 오늘날에는 정말로 인간 50


적인 교육보다는‘인간성을 떼어내는’방식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학교나 다른 여러 교육현장에서 그런 것을 경험하시거나 심각하다고 느꼈던 적이 있을 텐데요.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당연하게 퍼져있어요. 너무나도 흔한‘너희는 이런 식으로 해서 대학에 못 간다’ 같은 말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학교가 정말 사람을 위한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입시를 위한 교 육을 하고 있다는 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요. 학교가 진정한 배움의 기관이 아니라 학벌을 쌓는, 더 나은 학벌을 위한 기관일 뿐이라는 걸.‘대학에 꼭 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라 고 하는 사회 속에서 말이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잃어버린 게 많겠지만, 크게 느낀 부분은 동료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였던 것 같아요. 어떤 아이가 갑자기 학교에 안 온다거나 아프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채는 사람이 없어요. 마치 유령인 것처럼 말이죠. 나 이외의 혹은 내가 하는 공부 이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게 되면서 시각이 협소해져요.

그렇다면 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세모에서 활동하면서 특히 그런 부분을 많이 고민했어요. 세모는 아무래도 입시만을 위한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태어났으니까요. 우선 동등한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생과 교사가 동등 한 위치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교육 말이에요. 예를 들어 부모나 교사 와의 대화 속에서 청소년이 동등하게 대화하기는 정말 어려워요. 그렇다 보니, 청소년은 가만히 있어야 하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의지에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 같아요. 또 지금의 학교교육은 입시를 할 사람만 끌고 가는 교육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수업시간에도 한 30명 은 자고 나머지 10명을 입시로 끌고 가는 형태죠. 그렇지 않고 개개인이 학교에서

“청소년이 목소리를 내고 우리는‘당신들과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것의 가치를 찾을 수

동등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라고 이

있는 교육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 었어요. 구체적으로는 이런 부분에서 청소년이 목소리를 내고 우리는‘당신들과 동등한

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결국 이런 것들을 이 뤄내기 위해 청소년 스스로 정치적인 세력을 만들어나가야하지않을까싶고요.”

소통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라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교육의 구체적인 상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을 하고 있는 부분인데, 적어도 그런 것들 일 부가 세모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해요. 종합적으로는 결국 이런 것들을 이뤄내기 위해 청소년이 스스 로 정치적인 세력을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고요.

그러면 이제 이야기를 약간 돌려서 노동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게요. 노동당은 어떻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1


정리해고 비정규직 폐기를 위한 2차 오체투지 행진에서 양지혜 당원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사진 : 장성렬)

게 알고 입당하게 되셨나요? 주변에 있는 많은 활동가들이 노동당원이라서 이 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강령 등을 훑 어보면서‘괜찮은 당이구나’ 라는 생각 정도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생각하는 청소년 정치세력 화라는 것이 정당운동과 무관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당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청소년이 입당 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죠.

청소년 정치세력화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상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일단은 동아리 네트워크라는 걸 기획하고 있어요. 그 동안 산발적이고 단기적이었던 동아리 활동들이 서로 엮이고 축적되면서 결국 각 분야에서 하나의 세력이 되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네트워크죠. 저는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학교에 불만이 많다고 생각을 해요. 동아리를 꾸리면서도 학교 측에 불만이 없는 동아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불만을 단순히 동아리 내부에서 해결한다거나 혼 자 삭히는 것이 아니라, 동아리 연합이 되어 엮이고 뭉친다면 단순히 불만으로 끝내지 않고 어떤 해결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는 중에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입지가 조금 더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요. 어떤 불만들을 말 그대로‘정치적’ 으로 해결하자는 게 첫 번째 생각이고, 두 번째는 정치적으로 더 큰 목소리를 내자는 거예요. 동아리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환경동아리, 토론동아리 등등. 그런데 예를 들어, 환경 동아리 여러 개가 서로 뭉치면 현재 환경 현안에 대해 청소년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겠죠. 52


우리가 어떤 문제의식을 느꼈을 때, 그

“어떤 문제의식을 나 혼자 느끼는 걸 넘어,

문제의식을 나 혼자 느끼는 걸 넘어서 그걸

그걸 공유하고 이에 대해 사회에 주장했을

공유하고 이에 대해 사회에 주장했을 때 정 치적인 것이 되고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 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서 동아리 네

때 정치적인 것이 되고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고생각해요.”

트워크가 사람들을 엮어내면서, 기존의 불 만이나 문제의식을 정치적으로 표현할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 당직선거 때도 그렇고 노동당이 청년 주체, 젊은 주체를 강조하고 있거든요. 직접적으로 호 명되지 않았지만,‘청소년의 노동당’ 으로도 분명 거듭나야 하겠죠. 청소년의 노동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있는 청소년 당원들이 노동당 청소년위원회를 중심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은 굉장히 규모가 크잖아요. 노동당도 14,000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어 요. 그런 큰 규모 안에 있는 많은 청소년들이 같이 뜻을 모으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 정책당대회 때 청소년 참정권 운동을 정치관계법 개정과 함께 노동당의 주요 의제로 내세 우자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청소년 참정권을 내세워서 청소년들의 지지를 이 끌어냄과 동시에 청소년을 정치적인 세력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까요?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참여하는 사회참여 동아리도 청소년 참정권 캠페인을 진행했 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되게 의외였어요. 제가 다니는 학교의 청소년 중 60퍼센트 정도가 참정권에 반대 했거든요. 본인에게 참정권을 주겠다는데도 반대한 거죠. 이게 결국 사회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 고 있지 않나 싶었어요.‘청소년은 미성숙하니까 표를 주면 안 될 것이다’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거꾸로 보면 이게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계급, 계층에서 화두가 될 수 있다고 생 각해요. 교사도, 학부모도, 또 정치에서 소외된 계급들에서도요. 예를 들면 비슷한 이유로 대중들에게 권 력을 주면 안 된다고들 하잖아요. 이러한 논쟁을 통해서 기존의 청소년에 대한 관념들, 어떤 인간이 미성 숙하거나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서 정치적 힘을 박탈당해야 한다는 관념들을 깨어나갈 수 있었으면 해 요. 청소년 스스로도 그렇고, 비 청소년인 사람들도요. 그래서 이런 기획을 계속 던지는 건 바람직한 일이 라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더 있나요? 작년에 많은 걸 시작한 것 같아요. 세모도 그렇고, 세월호 참사 이후 활동들도 그렇고. 그러면서‘정치 가 내 삶에서 되게 중요하겠구나’ , 또‘내가 어떤 입장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구나’ 를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3


“청소년뿐만 아니라,‘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 고 얘기되는 다양한 주체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질수있는기획들을만들어나가고싶어요.”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청소년뿐만 아니라 지금‘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 고 이야기되는 다양한 주체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질 수 있는 기획들을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육의 목적이 입시가 되잖아요. 특히‘고3’ 은 더 그렇고요. 그런데 제가 다니 는 학교의 경우, 반에서 절반 이상은 대학을 안 가거든요. 그래서“나는‘고3’ 이지만 공부하기 싫어, 대학 가기 싫어”이런 느낌으로 동아리를 만들어서, 자유롭게 놀기도 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배우기도 하며 살 아가는 기회를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입시나 학벌이 청소년과 청년, 대학생들을 이어주는 하나의 큰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도 들어요. 어쩌면 청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이 이어지는 지점,‘젊은 노동당’ 이 치열하게 파고들 지점 중 하 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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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이게 무슨, 아이들 키우는 대책입니까 보육협의회소속보육노동자들과의만남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5


노동르포

이게 무슨, 아이들 키우는 대책입니까 보육협의회 소속 보육노동자들과의 만남 서분숙 기록 노동자

2015년 2월 11일. 부산으로 가는 새벽 첫 기차를 탔다. 내가 살고 있는 울산에서 부산까 지는 기차로 약 한 시간 이십분 정도 걸린다. 부전역에 도착하니 여덟시 이십분. 부산시청 광장에서 기자회견이 열리기까지는 한 시간 삼십여 분이 남아있다. 설날이 가까워서인지 역 앞에 있는 부전시장은 새로운 물건을 들여놓고 진열하는 상인들의 모습들로 분주하다. 곧장 시청으로 갈지 아니면 잠시 이곳 시장을 둘러보고 갈지 망설이다가 나는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시장은 내 유년의 놀이터이다. 어머니는 노점상인이었다. 달리 맡길 곳이 없었던 나를 업고서 어머니는 시장에 첫 발을 내딛었다. 처음엔 무를, 나중엔 조금 더 이윤이 남는 고등 어를 팔며 어머니가 노점에서 단련이 되어가는 동안 나도 그곳에서 걸음마를 시작했고 말 을 배웠다. 어느 날인가, 길을 잃어버린 나를 어머니는 반나절이나 찾아 헤매다가 인근 파 출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날,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던지 울면서 엄마에게 와락 안 겨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가물거린다. 가물거리던 그 기억에 대해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 께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겨우 서너 살 무렵의 일이었다고 한다. 내가 조금 더 자랐을 때는 노점철거가 한창이었다. 단속반원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던 엄마를 껴안고 어린 나도 목이 터져라 울었다. 무서워서 울었고 엄마가 우니까 슬퍼서 울었고 엄마가 경찰서로 끌려가 버리면 막막해서 또 울었다. 부전시장을 기웃거리는 나의 마음은 또다시 수십 년 전 기억으로 흔들린다. 시장은 내게 늘 그런 곳이다. 유년의 발길이 새겨진 곳. 몇 갈래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아픔과 기쁨들이 공존하는 곳. 어린 날의 기억은 늘 그랬다. 어느 때, 어떤 장소에 서게 되면 반드시 다시 살아 나오는 기억. 언제 어디서 또다시 나를 흔들며 폭발할 지 모를 활화산 같은 기억. 유년은 늘 그렇게 나를 흔들었다. 56


나는 잠시 후 그 누군가의 유년을 감싸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간다. 그들은 노동자라고도 제 대로 이름 불리지 못한 채, 아동학대와 폭력의 주범으로만 내몰리고 있는 보육 노동자들이다. 어린 날의 나처럼, 갈 곳이 없이 시장에서 유년을 보내는 아이들은 더 이상 이 사회에 없다. 누리과정*을 실시한 지 몇 해가 흘렀고, 이제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유년을 보낸다. 유년의 기억이 내게 활화산과 같 은 것이었다면, 보육교사 노동자들은 그 뜨거운 기억을 함께 엮고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부전시장을 뒤로 하고 시청으로 가는 지하철역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유년의 기억을 담은 시장을 뒤 로 하고, 누군가의 유년을 보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폐원을 하든 말든 원장 맘, 어린이집은 원장의 사유 재산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에 있는 한 어린이 집. 이곳의 교사들은 원장의 계획대로라면 2월 28일이 지나면 더 이상 이 어린이 집에서 보육교사로 일할 수 없다. 지난 2월 2일, 원장은 기장군청에 어린이집 폐원신고 서를 제출했다. 이유는 경영악화와 노조의 운영 개입 때문이라고 했다. 이미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던 아 이들은 인근에 짓고 있는 원장 소유의 유치원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모집을 마친 신입생 50여 명은 3월이 되어도 갈 곳이 없다. 신입생들은 아직 어린이집의 원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책임 질 이유가 이곳 어린이집에는 없다고 한다. 애가 타는 건 부모들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이 예쁘고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은 것 말고는 다른 욕심은 내지 않고 일했다는 이곳의 교사들은 급작스럽게 닥쳐온 이별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보육교사들에게 어린이집의 급작스러운 폐원은 자신 들이 일터에서‘해고’당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떠올리면“매일매일 무거운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올리고 사는 듯하다” 는 한 교사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원장의 일방적인 폐원 결정을 막고 이후의 대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장이지만, 막상 해당 어린이집 교 사들은 이곳에 참석할 수가 없다. 오전 10시, 기자회견이 열리는 시간은 등원을 마친 어린이들이 한창 아 침 놀이를 하고 있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집 교사들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에는 단 한순 간도 어린이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일만 오천여 명이 넘는 부산의 보육교사들의 근무를 대체할 인력인 대 체교사들조차 겨우 오십여 명에 불과하다. 보육교사들이 대체교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어린이집을 잠시 비우는 일은 상상도 하기 어렵다. 아프거나, 어쩌다 어린이집 근무가 불가피한 일이 생겨도 어린이집 교 사들은 어지간하면 출근을 해야 한다.‘폐원’ 이라는 결정에 맞서 싸워야 하는 시간에도 어린이집 교사들 은 아이들을 보듬고 먹이고 재워야 한다. 아이를 길러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태풍이 치고 홍수가 나도 아 이들은 자라나듯, 어린이집 원장이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일을 벌이더라도 보육교사들은 당장 눈앞의 아

* 만 3~5세 유아에게 공통적으로 제공하는 교육・보육 과정. 2012년 3월, 5세를 대상으로 시행에 들어가 이듬해에 3~4세까지 확 대됐다. 유아 학비와 보육료를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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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돌봐야 한다. 그것은 세상 어떤 일보다 가장 우선시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자 회견장에 오지 못 한 교사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지난 몇 년간 보육교사로 살아온 세월이 아무 의미가 없는 듯 느껴지며 회의가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좋은 것, 그것 말고는 다른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제 월급은 136만 원입니다. 그것도 날짜를 안 지켜 주 시고, 또 나눠서 주시기도 합니다. 지금 어린이집에 100여 명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데 원장님은 2014년 한해에만도 1억여 원의 빚을 졌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100명이 넘는 어린이집의 교사 월급은 136만 원인 데 빚을 저리 지고 경영이 악화되어 2015년 신입생을 다 받아놓은 상황에서 폐원을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시는지요. 정말 원장님 말대로 70%가 교사들 인건비로 지출되어서 경영이 어렵다면, 그 근거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사들 모두는 정확한 회계감사를 요청하며 영수증 하나 하나까지 명명백맥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폐원을 결정한 어린이집의 원장은 이미 관으로부터 자격정지와 운영정지의 행정처분을 받은 적이 있 다. 친인척을 어린이집 교사로 허위등록해 보조금을 착복하고 관공서에서 지원해준 물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부정으로 운영자격을 잃은 원장을 대신해서 아이들을 돌보고 어린이집을 운영한 건 보육교사들이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처음으로 위장폐업을 시도했던 지난해 4월, 원장은 교사들

2월 11일, 부산시청 광장에서 열린 기장군 민간 어린이집 문제해결 촉구 기자회견 (사진 : 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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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고통분담을 강요하며 임금을 삭감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단협을 통해 보육교사들 의 삶의 질이 달라진 건 없었다. 경영악화의 원인을 교사들의 임금 때문이라고 하는 원장의 주장을 교사 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1억 원이 넘는 빚을 졌다고 하면서도 원장은 오히려 유치원 건물을 신축했 다. 일자리를 잃은 교사들, 그리고 3월이 코앞이지만 당장 갈 곳이 없는 신입생들, 수년간 자신을 돌보던 선생님을 떠나서 하루아침에 낯선 공간, 낯선 선생님들과 하루를 보내야 하는 어린이집 아이들에 대한 배 려나 이해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당장 어린이집 문을 닫겠다는 원장의 결정 앞에서도 기장군청과 부산시청의 태도는 한결같다.‘개인 사유 재산’ 이므로 폐원에 대해 관여할 수 없다는 거다.‘무상보육’ 으로 흘러가는 국민의 세금을 운영자 개 인의 사유재산으로 치부하는 자치단체의 태도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사 회적 방어벽이 이토록 없다는 게 더 놀랍다. 아이를 향해 끔찍한 매질을 하던 교사들보다 더 우려스러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가 이뤄질 토대가 없다는 거다. 아이 들은 앙상한 기둥만 세워진 시설에 갇혀 있다. 모래 바람이 날아들고 사나운 동물들이 으르렁댄다 해도 그곳에서 유년을 버텨야만 한다. 아이들을 향한 교사들의 폭력에만 날카로운 비난이 꽂혀 있는 사이, 정 작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어린이집의 기둥은 기울고 있었다.

CCTV 설치, 아이들을 돌볼 때는 뒷짐을 지라고요?

정인선 씨는 보육교사다. 올해 마흔 다섯 살인 인선 씨의 꿈은 고등학교 때부터 유치원교사였다. 하루 에도 꿈이 몇 번씩 바뀔 나이이지만 그의 꿈은 바뀌지 않았다. 유아교육과로 진학을 했고 졸업 후에는 유 치원교사가 되었다. 그가 보육교사로 다시 일을 하게 된 건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다. 5세 이상의 아이들을 담당하던 유치원과는 달리 어린이집에서는 대부분 3세 전후의 어린 아이들을 돌봤다. 어린이집에서는 유치원에서 처럼 단체 활동을 하는 시간보다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개별적으로 돌봐야 할 일이 많았다. 유치 원교사 시절에 만났던 아이들에 비해 단계별로 가지는 특징도 달랐다. 이미 보육교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인선 씨는 아이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다시 보육교사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이들이 새롭게 보였다. 무엇보다 두 아이를 키워본 엄마로서의 경험이 어린이집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돌보고 키 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세 살 반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이제 겨우 두, 세 돌이 지났을 뿐이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이 있다. 특별한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도 하고, 유난히 집중력을 발 휘하는 아이들도 있다. 유치원교사 경력부터 보육교사 경력까지, 게다가 두 아이를 기른 엄마로서의 경험 은 그가 만나는 아이들 개개인의 개성을 읽을 수 있는 섬세한 감각을 가지게 했다. 아이들이 잘하는 분야 를 찾아 집중할 때, 그 활동을 지원해 주고 더 잘 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지시하는 일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이들의 섬세한 결을 읽어 내는 일. 그건 보육교사라고 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 노동르포 59


이들이 좋아서 오랫동안 아이들이 있는 현장을 떠나지 않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전문 적인 능력을 가진 그가 하루 열 시간 가까이 아이들을 돌보고 받는 월급은 겨우 백만 원 안팎이다. 보육교 사 자격증뿐만 아니라 교원자격증이 있고,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합쳐 경력 십년이 넘는 교사의 월급이라 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아무리 아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아이들 돌보 는 업무량은 줄어들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보육교사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 남편 월급 의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되는 월급은 때때로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게다가 요즘은 연일 방송이든 신문이 든 온통 어린이집 학대사건으로 떠들썩하니, 그나마 남아있던 의욕마저 조금씩 힘이 빠져 간다. 대학 전 공부터 중간에 아이를 키운 경험까지 합친다면 경력 이십 오년의 보육교사 인선씨. 그는 아동보호의 대책 을 CCTV 설치로 몰아가는 정부의 정책을 강하게 반대했다.

“아이들이 예쁘면 선생님이 아이들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게 CCTV로 보면 아이를 때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CCTV가 설치되면 거기에 대비한 매 뉴얼이 있어요. 아이들을 대할 때는 두 손을 뒤로 하고 대하라거나…. 너무 예뻐 그냥 만지게 되고 그러는 데, 이젠 그런 건 할 수가 없는 거죠. 보육교사들은 아이들 화장실 가는 것도 보살펴야 하는데, 그러면 CCTV를 화장실에도 설치할 건가요? 대부분의 보육교사들은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어서 방광염을 달고 사는 교사들이 많은데, CCTV가 설치되면 그나마 화장실조차도 못 가잖아요. 교사가 아이들을 두고 어디 갔냐고 하면…. 이건 보육교사들의 인권하고도 관련된 일인데 CCTV를 달아도 되냐고 왜 우리에게는 물 어보지 않나요? 보육교사들을 잠정적인 범죄자 취급까지 하는데 언제까지 이런 저임금을 받으며 천사처 럼 가만히 있어야만 하나요?”

그는 CCTV보다는 보조교사 제도를 두는 것이 더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교사들의 폭력의 원인에는 개 인적인 자질도 있지만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원인이 있으니까, 보조교사와 함께 교실에서 돌본다면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눈 노래가, 공놀이를 할 때는 그 놀이에 맞는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는 그가 아이들을 안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교실에서 사라지 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육협의회 정명화 부의장은 CCTV 설치는 보육교사들에 대한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한다. 아이들 인 권이 중요하기 때문에 CCTV를 설치한다는 발상 자체가 인권을 개개인 고유의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교사들의 인권을 침해해도 좋다는 건 애초 인권을 개인의 것이 아 닌 통제의 수단으로 본 것일 뿐이다.‘아이들에게 절대로 스킨십을 하지 마라’ ,‘아이들을 돌볼 때는 손을 뒷짐 져라’등의 매뉴얼이 지금 보육현장에 나돌고 있다.“이게 무슨 아이들 키우는 거냐” 라며 되묻는 정 명화 부의장은“인권엔 총량이 없다” 고 말한다. 교사의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인권 또한 지 켜지기 어렵다 .아이를 맘 편히 보듬을 수 없고 늘 긴장한 채 아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교 60


사에게서 어떻게 아이들이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겠는가. CCTV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좀 더 근원 적인 안전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다.

휴게 시간이라 쓰고, 무료 노동이라 읽는다

2015년 2월 4일, 경남 양산시청 옆 양산시 문화예술회관에는 밤늦도록 보육교사들이 머물고 있었다. 일이층 강당을 다 채웠으니 이삼천 명은 넘는 숫자이다. 아동학대 예방 교육을 받기 위해 온 교사들이다.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가 정해진 교육시간이지만, 일곱 시 반까지 보육을 하는 어린이집 교사들이 여덟 시가 다 되어서도 계속 교육장소로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다. 대부분 퇴근을 하고 곧장 오느라 저녁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온 듯하다. 강당로비 곳곳에 김밥이나 빵을 손에 쥔 교사들이 표정 없이 앉아서 허기 를 채우고 있다. 늦은 시간이라 자신의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는지 아이를 업거나 유모차에 태 우고 온 교사들도 있다. 평일 야간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잡히는 교육일정에 보육교사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 다. 아침 일곱 시 반에서 저녁 일곱 시 반까지가 어린이집의 보육시간인데, 평일 교육까지 잡히는 날에는

휴일・야간 교육 금지 선전물 (사진 : 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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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의 근무시간이 하루 열네다섯 시간을 훌쩍 넘어가기도 한다. 근로기준법 상 업무에 필요한 교육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히 근무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사업주인 원 장이 야간이나 토요일에 교육을 받는 보육교사들에게 시간외 수당이나 휴일 가산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날 내가 만난 보육교사들은“시간외 수당을 받느냐” 는 나의 질문에“그런 건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고 한다. CCTV를 정말 어린이집에 설치할 것 같냐는 나의 물음에는 교사들의 얼굴이 금방 어 두워진다.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려고 하자 보육교사들이 갑자기‘원장님이다’ 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 강당 안으로 들어간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보육협의회 소속 보육교사와 활동가들이 수당지급 없는 교육의 부당함과 노동 조합에 가입할 것을 알리는 선전을 하자, 한 무리의 중년여성들이 나와서 선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원장들이다. 선전지를 돌리지 말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활동가들이 돌리 고 있는 선전지를 빼앗으려고도 한다. 대부분의 어린이집이 교사들의 시간외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심지 어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점심시간조차 노동시간에서 빼버리는 현실이다 보니, 교사들의 권리를 알 리는 활동이 사업주인 원장들에게는 못마땅하게 다가온 모양이다. 내일 아침 일찍 어린이집으로 출근해야 할 교사들은 밤늦도록 강당에 발이 묶여있다.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교육이라지만, 수당 없이 장시간 이어지는 교육이 과연 교사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있을까. 이 런 가혹한 노동 같은 교육을 통해 아동학대가 정말 예방될 수 있을까. 장시간의 노동과 저임금은 교사들 을 지치고 병들게 한다. 행복하지 않은 교사가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들도 어린이집 선생님 들의 손에서 길러졌다. 너무나 당연하게만 여겼던 선생님의 손길. 내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겨우내 흘러 내리던 콧물을 닦아내고, 병치레가 잦던 아이를 위해 때가 되면 쓴 약을 먹이기 위해 아이를 달래던 사람. 아이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힐 때마다 가장 먼저 그것을 눈여겨보고 기뻐하며 자랑하던 사람들…. 어두운 하늘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은 또 어디서 아이들을 돌보고 계실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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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최근 온라인상에서 역사인식에 대한 논쟁이 노동당 젊은 당원 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이승만’ 에서 시작된 논쟁은 근대 성과 식민주의 문제를 넘어 이제‘대안세력으로서 진보진영이 담지해야 할 역사인식’ 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논쟁을 더 잇 다 보면 결국“노동당은 어떤 역사관 위에서 대안사회를 만들 고자 하는가” 라는 물음에 가닿는다. 온라인에서 매체와 매체를 오가며 난상토론으로 진행됐던 이 논쟁을 좀 더 정제하여《미래에서 온 편지》지면으로 옮겨오 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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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노동당은어떤역사관위에서 대안을제시해야하는가? 햄벨스 서울 송파 당원

문제는 역사관이다 : 노동당만의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어야 한다

지난 2월 8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후보자가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는 당선 되자마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묘역을 참배할 것이라 공언했으며, 바로 다음날인 2월 9일 당 내 반대를 물리치고 참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모든 역사가 대한민국입니다. 진정한 화 해와 통합을 꿈꿉니다” 라고 방명록을 남겼다고 한다. 문재인의 지지자들은 SNS에서 이를 두고 분열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배신이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략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에 앞서 무엇이 이 사건의 원인이었을까? 다 소 뜬금없이 들릴 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이 사건의 원인이‘역사관’ 이라 생각한다. 우선 나 는‘역사관’ 이라는 말 자체가 단순히 역사에 대한 입장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공이 역사학이라 그런지 모르겠으나 누구를 만날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이 역사관이다. 아 무리 대화가 잘 통하고 합리적인 사람일지라도 근본적으로 역사관이 다르면 종국에는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역사관에 단순히 역사의 해석뿐만이 아니라 인간관, 세계관, 정치관 등 한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의 정체성, 더 나아가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파악하는 데 있어 역사관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런 입장에서 역사관의 충돌은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한 민족의, 한 공동체의‘정신세 계’ 에서의 주도권에 대한 다툼이라 생각한다. 역사해석은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객관 64


적’ 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어떤 학자가 아무리 자신이 실증을 중시한다고 주장해도 그 사람의 역사해석 은‘슬프게도’필연적으로 정신세계에서의 주도권 다툼에 일정 부분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 다. 실증주의를 중시하시던 故 이기백 선생께서 편집인으로서 발간하시던《한국사 시민강좌》 가 결과적으 로 한국 좌파 민족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 각한다. 또 지난 세기 한국 민주화 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관념세계에서의 승리 때문이라 생 각한다. 그렇기에 중립적인 역사해석이란 무릇 허망하고 심지어 기만적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재인의 참배는 민주진보 진영의 역사관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배신행위일 수밖에 없 으며 심지어 무분별한 이적행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민주진보 진영의 역사관 내에서의 이승만 과 박정희에 대한 해석은 사라지고 뉴라이트의 역사관에서의 이승만과 박정희 해석에 무분별하게 동조한 결과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민주진보 진영의 역사관과 노동당으로 대변되는 좌파 진영의 역사관이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역사관에 있어 큰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노동당을 지지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새정치민주 연합을‘비판적으로 지지’ 하는 것이 합리 적인 선택일 것이다. 당에서 논의되고 있

문제는 이러한 민주진보 진영의 역사관과

는 진보재편 주장이 허망한 까닭도 바로

노동당으로 대변되는 좌파 진영의 역사관이

여기에 있다. 노동당이 노동당으로서의 정 체성을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역사관을 창출하는 데에도 실패했으면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 통합하더라도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역사관에 있어 큰 차 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노동당을 지지할 이유가대체무엇인가?

정파등록제를 실시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넘어 기만적일 수밖에 없다. 설령 재편에 성공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또한 노동당도 언젠가 문재인과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노동당은 노동당만의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어야 한다.

기존 역사관과 그 한계 : 현실의 배신과 의도하지 않은 협력

어떠한 역사관이 정치세력의 역사관으로서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대략적으로 인간관, 세계관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당위성을 갖춰야 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또 그와 동시에 현실의 한국과 세계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그것이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고 그 문 제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세계관과 당위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 진보좌파 진영의 역사관을 간략하게나마 분석해보자면, 기본적으로 진보좌파 진 영의 인사들은 맑스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인간을“사회적인 존재” 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쟁점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65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참석한 박정희 (사진 : 대한뉴스 제998호 갈무리)

이러한 인식 때문에 기본적으로 개인의 이기심보다는 사회 전체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지난 100년 동 안의 독재와 근대화로 인해 공동체성이 파괴되고 사회의 비(非)인간화가 진행되었다고 파악한다. 특히나 세계자본주의의 전개가 신자유주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파악한다. 좌파 들은 이러한 인식 아래, 대안을 노동세력의 결집 및 투쟁의 격화와 그를 통한 자본주의의 지양으로 규정 한다.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좌파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현대사 서사는 다음과 같다. 박정희 정부는 외국자 본을 도입해 수출중심의 공업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외채에 의존한 성장으로 경제는 외국에 종속되어 갔 다. 정부는 수출기업체에게 특권을 주며 독점대기업으로 성장시켰고,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환경을 강요했다. 경제개발은 이와 같이 노동자 농민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민중의 투쟁으 로 독재정권은 몰락했고 민주화를 쟁취했으나 외환위기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친 민주당 보수 정권 하에서 반(反)노동 국가체제가 완성됐다. 비정규직 문제와 대기업의 착취 문제 등도 추가될 수 있다. 통일에 대한 입장이 빠진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겠으나 대략적인 서사는 이렇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역사인식에서 나올 수 있는 당위성이란 노동투쟁을 격화해 독점자본을 타도하 고 미일로 대표되는 외국자본으로부터의 종속을 단절하여 자립경제를 세우고 신자유주의, 나아가 자본주 의를 타파하자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보수 세력은 정치적 파트너 혹은 경쟁자가 아 니라 제거해야할 어떠한 대상일 뿐이다. 정당으로서의, 대안세력으로서의 대안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66


앞으로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이 없고 그저 시위나 계속하겠다는 것이 대안이다. 누가 표를 주고 싶겠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않은가. 또 결정적으로 이는 역사적 실재에 부합하지도 않기에 장기적으로 지속이 불가능한 사관이다. 가령 경제개발에 있어 박정희의 비중은 꽤나 클 수밖에 없다. 후진국일수록 제도화가 덜 되어서 인치 (人治)가 중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대통령이며 어떠한 정책 의지를 지녔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

이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1965년 1월부터 시작한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는 1979년까지 총 147회가 개 최되었는데, 박정희가 참여하지 않은 회의는 1972년 5월 단 한 차례였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66년부터 79년까지 거의 매월 개최되어 총 152회 개최되었는데, 박정희가 참여하지 않은 회의는 고작 5번이다. 즉 박정희는 거의 100% 회의에 참여했을 정도로 경제문제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그가 경제개발에 공로가 없 다 하다면 납득하기 힘들다. 인민들이 과연 이러한 서사를 언제까지 납득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좌파 진영은 친 대한민국이냐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서사로 인해

반 대한민국이냐 하는 야바위에 사로잡혀

좌파, 더 나아가 진보 진영이 의도치 않게 뉴라이트와 공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승

반공 반북 좌파를 자임하며 좌파정치가 기

만과 박정희로부터“민중성” 을 이끌어내지

능할 수 있는 영역을 스스로“자유민주주

못하는 이와 같은 저항 대 협력의 이분법적

의” 적틀안으로축소시킨다.

관점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자유민주주의 자로, 더 나아가 그 수호자로 축소시키면서 오로지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만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부합 한다는 서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뉴라이트의 사관에 공조한다. 결과적으로 좌파 진영은 친(親)대한민국이 냐 반(反)대한민국이냐 하는 야바위에 사로잡혀 반공(反共)・반북(反北) 좌파를 자임하며 좌파정치가 기능 할 수 있는 영역을 스스로“자유민주주의” 적 틀 안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겠으나 주 대환 씨 같은 이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재 해석해 활동영역을 넓혀야만 한다.

우리만의 역사관이 필요하다 :‘우리만의’이승만과 박정희를 만들어내야 한다

노동당이 대안세력으로서 집권하기 위해서는 좌파의 입장에서 적어도 300년의 역사를 일관적이고 정 합적으로 해석해서, 그것을 현재 노동당이 해결을 목표로 하는 현실의 문제와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한 이념은 현실적으로 사회민주주의밖에 없다. 사민주의 복지국가도 결국에는 해체되지 않았냐는 식의 주장은 일단 복지국가가 실현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한국의 발전 단계는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단계가 아니다. 맑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지도이념으로 규정하고 구체적인 목표는 의회민주주의의 대 표성 확대와 복지국가, 그리고 그를 위한 생산력 발전으로 삼아야 한다. 지면의 한계로 인해 복지국가와 쟁점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67


관련한 역사만 서술하겠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역사는 17세기 환곡제도에서부터 1994년 해체되는 경제 기획원까지의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라 생각한다. 조선왕조는 상대적으로 영토규모가 작고, 주요 곡창지대가 동일한 기상변화에 직면하므로 총 곡물양 의 연도별 변동이 컸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환곡제도이다. 환곡제도는 정부가 운영하는 곡물저장제도로서 그 총량이 18세기 초에는 500만 가마니였는데,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1000만 가 마니에 이르렀다. 조선왕조는 연간 곡물 총생산량의 16%에 달하는 이 막대한 환곡 중 600만 석을 약 100 만 호에 달하는 백성들에게 매년 봄에 종자와 식량으로 분배하였으며 가을에 10분의 1의 이자를 쳐서 회 수했다. 이렇듯 정부가 춘궁기에 종자와 식량을 분배함으로써 소농들이 그 농업경영에 있어 안정성을 획 득하게 했다. 이 시기 조선왕조는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안정을 이뤄냈다. 그러나 계속된 자연재해와 제도의 미비로 18세기 말 1000만 석에 달했던 환곡은 1862년까지 450만 석 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관료들은 환곡을 채우기 위해 조세수탈은 강화했고 당연하게도 조 선왕조는 권력 정당성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수많은 농민봉기에 직면한다. 정 부의 권력 정당성이 무너지고 어떠한 원인 때문인지 아직 믿을만한 연구가 없지만 관료제마저 와해되자 한국 사회는 외부의 침략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결국 한국은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식 민지기 식민권력의 개입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 조선왕조의 개입이 현재의 복지국가와 마찬가지로 생산력의 증대와 인민의 재생산 안정을 주목표로 했다면, 해방 이후의 이승만의 기획처와 부흥부에서 시작해 박정희 시기, 더 나아가 1994년까지 존속했던 경제기획원은 국민경제의 관리라는 차원에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고 자본을 통제했다. 흔히들 경제기획 원은 그 이름 때문인지 경제 전반에 대해‘기획’ 하는 기구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이진설 기획국장(1981)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기획원은“정보를 종합하고 그것을 빨리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기동성 있는”조직이었으며,“경제운영의 사령탑” 으로서“정책조정기능” 을 갖고 있는 조직이었다. 기획의 기능보다는 조정의 기능을 더 강하게 갖고 있었으며 특히 80년대 이후 정치(정당)와 민간(자본)의 성장 및 개입에 대응해 이러한 조정기능은 더욱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경제기획원과 같은 기구는“개발독재” 와 연관이 깊기 때문 에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고 하는 주장이 있을 수 있고 실제 진보좌파 진영에서도 이와 같은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경제기획원

계획경제를 주장한다는 좌파들이 국가와 시장을 대체적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좌파들은 경제기획원이 국민경제의 측면에서 각

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주장 이다. 특히나 계획경제를 주장한다는 좌파들이 이와 같이 국가와 시장을 대 체적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납득하기

정부부처의 정책과 정치,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

어렵다. 좌파들이 주목해야 할 점은

정/통합할수있었다는데주목해야한다.

경제기획원이 국민경제의 측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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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정부부처의 정책과 정치(정당과 국회) 및 사회(자본을 비롯한 이해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 및 통합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중심으로 삼아 현재의 폭주하는 경제 권력을 통제하고 더 높 은 수준의 발전을 이뤄내야만 한다. 이렇듯 우리는 박정희에게서“민중성” 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의 민중성을 폭정과 연결시켜 폭정을 제거한, 재벌 등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담론으로 이어가야 한다. 박정희 찬양론을 뒤집어 재벌통제로 나아가야 한다. 그가 재벌들을 어떻게 통제했는지, 그리고 그 러한 통제 하에서 인민들의 실질임금 상승 등의 진보가 얼마나 이뤄졌는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폭정에 가까운 것이었는지 보여주면서 민주적 통제성의 필요를 주장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폭력” 에 의한 재벌통제가 아닌“민주주의” 에 의한 재벌통제를 주장해야 하며 무분별한 시장주의가 아닌“지도 받 는 자본주의” 를 다시 역설해야 한다. 그 지도의 주체가 박정희가 아니라 민중이라는 것을 확실히 못 박으 면서 말이다. 지난 역사를 이렇듯 좌익의 입장에서 새롭 게 해석해‘우리만의’이승만과 박정희를 만들 어냈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승만과 박정희의 묘역을 참배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면이 너무나도 제한적이라 굉장히 제한적으

좌익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한‘우리만 의’이승만과 박정희를 만들어냈을 때에 서야 비소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묘역을 참배해도문제가없을것이다.

로 문제제기만을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하나 의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역사관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만의 역사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노동당이 당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우리만의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내 글이 당의 혁신을 논의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유의미한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쟁점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69


쟁점 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역사에대한급진적인질문, 마이너리거들을위한정치로 이승만・박정희의 공과 문제 백승덕 징병제 연구자, 서울 서대문 당원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첫 공식일정으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선택했다. 문재인 대표 역시 지난 대선 후보 시절에는 무명용사의 묘역만을 참배했을 뿐 이 승만・박정희 묘역은 찾지 않았다. 그는 논란을 의식한 듯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판단을 맡기고, 자신은 국민통합을 담당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같은 당의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그의 참배 행보를 거세게 비판했다. 한편, 종편들은 박근혜 정권과 전 면전을 하겠다던 대표직 수락선언을 꼬집으면서 그의 참배가 모순적인 술책에 지나지 않다 고 비난을 쏟아냈다. 국민통합을 위한다던 문재인 대표의 이승만・박정희 참배는 결과적으 로 보수언론에게 환영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내 갈등까지도 불러일으킨 꼴이 되었다. 이처럼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역사로만 돌리기에는 너무도 첨예한 문제다. 한 사람은 부정선거로 죽을 때까지 대통령 자리에 있으려다가 시민들의 시위에 의해 하야했 고, 다른 한 사람은 아예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선거 자체를 무력하게 만들 었다가 자신의 부하가 쏜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의 집권 동안 국가폭력에 의해 고 통 받고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들이 현충원에 묻혀 있다는 사실 조차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갈등은 특정한 정당에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주체가 형성될 때 역사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이들에 대한 평가가 첨예한 문제이다 보니 한 인터넷 언론에 실린 햄벨스 당원의 글에 관심이 갔다. 진보진영이 그간 무시해온 이승만의 업적에 관해 설명하겠다는 글이었다. 햄 벨스 님은 이 글에서 이승만의 업적으로 민족사회주의, 교육률 증가, 농지개혁, 민주주의적 70


선거 정착을 제시했다. 일종의‘막대구부리기’같은 시도였다. 하지만 햄벨스 님의 글 역시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에 정작 드러내야 할 당대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근대성과 식민주의의 문제 : 앎을 문제화하기

과거 권력자의 공과를 묻는 질문은 어느 쪽에 무게를 두든 간에 역사적 사건을 해당 인물의 능력 문제 로 환원하게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다. 특정인을 선지자가 아니면 초인적인 독재자처럼 그리게 되는 것이 다. 그래서 특정인의 공과를 묻는 질문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대답은 당대의 권력관계를 보다 풍부하게 드러낼 때에만 찾을 수 있다. 공과에 대한 관심을 내려두고 당대에 식민주의와 냉전의 길항작용이 만든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비판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논의를 더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기의 징병제 사례를 살펴보자. 지금은 병역이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자리를 잡았지만, 식민지 시기의 징집 기억이 남아있던 해방 직후만 해도 징병제 도입은 통 치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을 요소였다. 1950년대 내내 해당자의 30% 정도가 병역을 기피할 정도로 병역 인식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전에 10만 명에 불과했던 병력규모가 휴전 후에 는 72만 명까지 늘어나게 되어 전면적인 징병제를 시행할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1957년부터는 제 대자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이전까지 학생, 생계부양자, 외아들 등에게 적용했던 입영연기제도 일체를 폐 지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물들은 이후에 박정희 정권이‘입영률 100%’ 를 주창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에 기초해서 이승만은 한국의 병역 인식 강화에 공이 크다고 평할 수 있다. 반대로 이승 만은 군사주의를 강화했기 때문에 과가 크다고 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이 여기에서 멈춘다면 우리가 다루는 역사적 사실들의 끝은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결국 이승만의 능력을 향하게 되어버린다. 물론 강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 는 국가의 대통령은 매우 영향력 있는 행위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신이 아 닌 이상 자신을 둘러싼 구조와 상황들 에 제약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 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신이 아닌 이상 자신을 둘러싼 구조와 상황들에 제약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으로 판단 할 수 없다. 그래서 특정 인물의 공과 대신에 당 대의권력관계를물을필요가있다.

그 시대의 조건들이 만드는 구조와 상 황의 영향 속에서 내려진 판단이 개인의 것인지 구조의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것인지를 판정하기란 대단 히 어렵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물 중 하나가 징병제를 시행할 요건들이었다. 그래서 특정 인물의 공과 대신에 당대의 권력관계를 물을 필요가 있다. 쟁점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71


병역기피자 신상공개 법안을 다룬 SBS뉴스 보도화면 (사진 : SBS뉴스 갈무리)

이러한 관점에서‘이승만의 판단’ 을 다시 살펴보자. 한국전쟁 직후부터 제대자들은 전쟁 중에 학생들 이 징집을 피할 수 있도록 했던 입영연기제도에 대해 큰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와 문교부가 학생입영연기제도 폐지와 관련하여 갈등을 빚었다. 양 부처 간의 논란은 이승만이 국방부의 손을 들어주 면서 마침내 결론이 났다. 여기서 이승만이 입영연기제도 폐지를 결정하며 발언했던 내용이 흥미롭다. “우리 역사에서 문무의 갈등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문보다 무를 천시할 때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국 민개병에 힘써야 한다.”무를 천시해서 국력이 약해졌던 역사를 본보기로 삼아 국방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국방정책과 관련한 논의에서 중요한 근거로 자주 출현했다. 조선의 숭문천무(崇文賤武) 경향이 국력을 약하게 만들어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들었다는 역사 인식은 사실 이승만만의 독특한 해석은 아니었다. 이는 그 당시 역사학계가 가지고 있던 관점이기도 했다. 그렇 기 때문에 이승만의 판단에도 더욱 힘이 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 인식은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일례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에서 발행되었던 신문들 은 하나 같이 의병들의 무장투쟁이 교육을 수단으로 삼아 민족을 구원해야 할 문명화 사명의 발목을 잡는 다고 비판했다.《황성신문》 의 한 기사는 조선이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에 너무 뒤쳐져서 위기를 맞이했다 며 이렇게 잘라 말했다.“이 시대에 구원의 길은 군사적인 방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방법에 의지하는 것이다.”이 시기의 문명담론을 이끌었던 지식인들에게 교육은 무력증강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었다. 조선이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해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평가는 일본의 제국대학에서 동양 사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사 연구가 시작되면서 나타났다. 일본의 조선사 연구는 자연스럽게 식민주의 관 72


점에서 조선의 전근대성을 분석했다. 특히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의 경우 문명과 진보 등의 근대성 을 선명하게 내세우기가 비교적 어려웠기 때문에 조선의 전근대성을 확실히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 한 관점에서 일본의 조선사 연구는 조선이 식민지가 된 까닭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팽창 욕망이 아니라 조선의 문약(文弱)에서 찾도록 이끌었다. 또한 일본의 도움이 없이는 전근대적 습속에 머물러 정체된 조선 이 강하고 합리적으로 변할 수가 없었다고 분석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에서 역사학자들은 민족주 의를 주창하였지만 근대 역사학의 방법을 통해 자리 잡은 인식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인영처럼 식민사학을 극복하겠다는 역사학자도 조선의 문약이 식민지로 이끌었다는 이전의 식민주의 역사학의 전 제가‘객관적 견해’ 라며 수용했다. 이승만은 이와 같은 당대의 역사 인식이 만든 기반 위에서 국방부의 손 을 들어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인물의 공과가 아니라 당대의 권력 관계를 묻는다는 것은 이처럼 당대의 앎을 규 정한 구조와 상황들을 비판적으로 따져볼 때 가능해진다. 이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인물의 공과가 아닌 당대의 권력관계를 묻는 것은 이처럼 당대의 앎을 규정한 구 조와 상황들을 비판적으로 따져볼 때 가

바로 식민주의와 근대성이다. 제국주의에 집

능해진다. 이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

중하는 이들은 레닌의 유명한 정의에서 출발

가바로식민주의와근대성이다.

하여 영토와 자원에 대한 일방적인 약탈을 강 조하는 반면에 식민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은 식민지가 된 지역의 사람들에게 분석의 초점을 맞춘다. 초점 이 제국의 중심에서 식민지로 향하는 것이다. 식민주의를 문제로 삼는 관점에 따르면, 소수의 식민지배자들은 다수의 식민지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물리적 폭력 이상의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식민지배자들은 식민지민들에게 근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설득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래야만 앞선 근대성을 지닌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 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근대 역사학 등이 식민주의를 싣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식민주의 역사학 의 영향을 받은 당대의 역사 인식은 1950년대의 냉전적 세계질서와 함께 이승만의 판단을 만들었다.

병역기피자를 위한 정당 : 경험의 탈식민화

이승만의 공과가 아니라 당대의 앎을 공략한다고 해서 이승만의 독재에 대한 비판이 무뎌지는 것은 아 니다. 오히려 당대의 앎에 기초했던 이승만의 통치가 만들어낸 또 다른 시대조건들이 우리 시대의 정치적 조건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연속성까지도 비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위에서 언급했던 입영연기제도 사례로 돌아가 보면, 당시 신문들은 입영연기제도 폐지로 인해 학생들 뿐만 아니라 생계부양자들이나 2~3대 독자들이 예외 없이 입대하게 되어 끼니를 해결하기 어렵게 된 가 족들의 사정을 보도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던 아버지가 군대에 끌려간 뒤에 어린 아이들이 밤낮 없이 쟁점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73


울며 지낸다거나, 길거리 단속에 걸려서 입대한 자식을 찾으려고 노모가 매일 경찰서 앞에 찾아온다는 소 식들이 그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승만의 역사인식은 국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 입영연기제 도를 폐지하는 것이 진리라고 답을 내렸지만, 그 진리에서 배제되어 그나마 근근이 이어오던 생계마저 위 태로워진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책을 입안하고 최종결정을 내리는 지배 자들은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새로운 국민국가의 지배자들 또한 마 치 식민주의자들처럼 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근대적 세계상에 따라 국민들을 이끌어야 할 문명화 사명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길거리에 나앉은 평범한 사람들의 느낌과 경험을 반영하기는커녕 식민 화한 것이다. 문제는 정치가 일상의 경험을 식민화하는 행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부터 시행될 병 역기피자 인터넷 신상 공개가 대표적인 사례다. 성범죄자들에게 하듯이 사회에 신상을 까발려 병역기피 를 근절하겠다는 제도다. 애초에 새누리당

일상의 경험을 식민화하는 행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부터 시행될 병역기피 자인터넷신상공개가대표적인사례다.

송영근 의원이 내놓았던 개정안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해외에 체류하고 있는 이들 의 신상을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부 특권층의 병역기피로 논란이 일자 그에 호 응하여 국외 체류 병역불이행자들에게 합

법적으로 사회에서 모욕을 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국외 체류자들만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국내 병역기피자들까지 포함하도록 수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함정이 있다. 지난 5년 간 병무청에서 적발한 병역기피자 119명 중 연예인, 체육 인이 55명으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특권층이 아니라‘마이너리거’ 들이기 때문이다. 법안 심 의 때문에 국회에 출석한 병무청차장은 병역을 기피하는 체육인들의 성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체육인은 거의 1부 리그에서는 별로 유혹을 안 받습니다. 상무를 가든 어디를 가든 충분히 자기가 활동하 는데 문제는 마이너리그에 있는 애들이 문제입니다. 전부 이쪽 애들이, 군에 가면 자기 인생이 끝나거든 요. 그러니까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듣고 있던 법률안심사소위 위원장 윤후덕 의원 또한 이렇게 답 했다.“아니, 인생 끝나는 애들을 뭐 하러 군에 데리고 가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인터넷에 신상이 공개될 병역기피자들 중 상당수가‘군대 가면 죽 는 애들’ 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인생 끝나는 애들’걱정을 하던 윤후덕 의원을 포함한 228명 찬성에 1명 기권으로 통과되었다. 찬성 의원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슬퍼지기까지 한다. 국방위 소속 김광진을 포함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 심상정을 비롯한 정의당 의원들, 그리고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해산 명령을 내린 통합진보당 의원들. 이번 개정안 만장일치 통과는 정의당이나 통진당처럼 국회 국방위 에 자당 의원들을 넣지 못한 진보정당에게 특히나 중요한 문제다. 거대 양당이 국방위에서 합의해서 만든 것을 확인 없이 만장일치나 다름없게 통과시켰으니…. 모든 법안을 다 다루기에는 여력이 없는 것이 현실 74


이겠지만, 오히려 이런 사안이야말로 진보정당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예컨대 병 역기피자 인터넷 신상공개를 계급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거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반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의 원내정당에 이러한 기대를 품기는 아직 어려워 보인다. 문재인의 참배와 관련해 정의당 노회찬 전 대표는“대한민국을 만들고 지켜온 분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면 현충원 무명용사 탑과 보라 매공원의 산업재해 희생자 위령탑을 참배하면 족하다” 고 평했다. 반만 맞는 말이다. 무명용사들은 말이 없다. 지배세력은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리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텅 빈 그 이름 안에 무엇이든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 해도 쉽게 넣을 수 있다. 그래서 무명용사의 묘역을 참배하는 일은 현실 정치인들에게 매우 안전하다. 반 면에 고유한 얼굴이 있는‘마이너리거’병역기피자들은 다르다. 지배세력은 질서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병역기피자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들에게 부정적인 그 위치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 자리 에 가만히 있다가는 경력이 단절되고 심지어 신상 공개로 인생이 끝나는 이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급진적인 질문이 발생한다. 왜 군대에 가야하는 것이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이승만・박정 희의 공과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할 질문들이다. 이처럼 식민주의와 근대성의 기원 과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가 바로 급 진적인 질문이다. ‘국민’ 에 호소하는 정당들은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이름이 없는 마이너리거들의 현실을 볼 수 없다. 원내 정당들은 노동당

전직 대통령들의 공과만을 따져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현실이 있다. 민주의와 근대성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근원적 회의, 즉 급진적

이나 녹색당과 같은 원외 진보정당을 두

인 질문을 던지는 정당이 필요한 까닭이 여

고 현실을 잘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

기에있다.

직 대통령의 공과만을 따지는 입장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이승만・박정희의 공과를 넘어 역사에 보다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는 정당 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쟁점토론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관 75


정책포럼

슈퍼집 아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전 국민 산재보험으로 홍원표 정책실장

같은 사고, 다른 보장

업무 중이던 노동자가 교통사고로 재해를 입으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이 경우 산재보험과 자동차 보험 모두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다만, 같은 내용으로 중복 보장을 받을 수는 없다. 두 보험 모두 보상을 받으려고 할 경우, 한 보험의 혜택 외에 추가적 혜택 부분에 대해서만 다른 보험에 청구할 수 있다. 두 보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산재보험은 노동자의 과실유무와 관계없이 산재보험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으나(무과실책임주의), 자동 차보험은 본인의 과실유무에 따라 보상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과실책임주의). 그렇다면, 대리운전 중이던 노동자가 교통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될까? 굉장히 복잡해진 다. 우선 대리운전 노동자의 법적 노동자성을 따져 산재보험 보장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대 리운전 노동자는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로 사실상 노동자지만 법적으로는 자영업자 신분 으로 위장 채용되어 산재보험 당연 가입 대상자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산재를 적 용받기 위해서는 소송 등을 통해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후에야 가능하다. 자동차 보험은 노 동자가 가입한 자동차 보험의 종류에 따라 보장범위가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동네 슈퍼집 아저씨가 배달 중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산재보험이 불가능하 다. 특수고용노동자와 달리 노동자성을 다툴 여지조차 없는 사업주(자영업자)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개인이 가입한 자동차 보험 또는 상해보험의 종류에 따라 보장을 받게 된다. 76


그렇다면 배달을 같이 나간 사장님이 다쳤을 경우에는 산재보험이 가능할까? 슈퍼집 아저씨와는 달리 노동자와 함께 배달 나간 사장님은 가능하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험법)은 산재보험 대 상 사업의 사업주 역시 보험가입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통 당연가입사업주라고 한다.

산재 보험은 보편 복지?

위에서 예를 든 네 경우 모두 다‘일하다’다친 경우지만, 경우에 따라 공적 보험의 혜택을 받거나 못 받는다. 공적 보험이 고용 상 지위 에 따라 적용 범위를 달리 하기 때 문이다. 2013년 기준으로 산재보험 적용 률을 살펴보면, 산재보험 적용 노 동자(보험 가입자)는 1,544만 명으로

2013년 기준 산재보험 적용률을 살펴보면, 산재 보험 적용 노동자는 전체 취업자의 61.9%에 불과 하다. 일하다 다쳐도 10명 중 4명은 고용 상 지위 때문에산재보험보장을못받는다는말이다.

임금노동자 대비 83.9%의 적용률 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체 취업자를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61.9%에 불과하다. 일하다 다쳐도 10명 중 4명 은 고용 상 지위 때문에 산재보험 보장을 못 받는다는 말이다.

<표> 산재보험 적용률(2013년 기준, 단위 : 천 명) 취업자(A)

임금 노동자

비임금

산재보험 적용

적용률 1

적용률 2

(B)

노동자

노동자(C)

(C/A)

(C/B)

18,414

6,548

15,449

61.9%

83.9%

24,962

이처럼 모든 사람이 산재 보험 적용을 받지 못 하는 이유는 현행 산재보험법이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 중 일부에 대해서는 적용을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재보험법 제6조는 법 의 적용 대상을‘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 으로 규정하고 있어 우선 자영업자 및 무급가 족종사자 등 비 임금노동자를 원천 배제하고 있다. 또한 적용 예외 규정에 따라 공무원/군인/교사, 선원, 소규모 건설업 노동자, 가구 내 고용활동 종사자, 상시노동자 수가 1명 미만인 사업장 노동자, 농업/임업/ 어업/수렵업 중 법인이 아닌 자의 사업으로서 상시노동자 수가 5명 미만인 사업장의 노동자 등을 적용 대 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적용 제외 대상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업종은 자영업자다. 2013년 기준 547만 명에 달한다. 적 용 제외 임금노동자는 300만 명에 육박하는데, 이 중 공무원/군인/교사/선원 등 별도 법률에 의한 재해보 장이 가능한 업종이 60%를 차지하고, 나머지 40%는 규모가 작거나 상시적 노사관계 파악이 쉽지 않은 정책포럼 77


근로복지공단의 산재보험 안내문 (사진 :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

사업장으로 (아마도) 행정적 이유로 제외된 사업장이다. 대다수의 사회보장은 근대적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산재보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산재보험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러 가지 사회보장 중 가장 먼저 공적 보험으로 자리 잡아 여타 다른 사회 보장의 발전을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초기 산재보험은 지금과는 달리 사용주의 불법행위에 따른 재 해 보상의 성격이 강했다. 즉 사용자의 과실이 인정될 경우(사용자의 불법행위로 인한 재해) 재판을 통해 보 상을 청구하는 과실책임주의 방식이었다. 이후 산재보험은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노동자에게 신속 하고 확실한 보장을 위해 무과실책임주의로 전환되어 왔다. 산재보험의 특성과 산재보험의 발달 역사는 공적 보험으로서의 산재보험 주 대상자가

근대적 사회보장 제도는 산업의 발달과 이에 따른 다양한 고용형태의 출현, 신자유주의의 공세로 인한 비정형 노동자의 확대 등으로 인해그공적기능이한계에다다랐다.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 해 준다. 하지만 이 같은 근대적 사회보장 제도 는 산업의 발달과 이에 따른 다양한 고용 형태의 출현, 그리고 신자유주의 공세로 인한 비정형 노동자의 확대 등으로 인해

그 공적 기능이 한계에 다다랐다. 한국 산재보험법의 경우 무려 6개의 특례 조항을 갖고 있는데, 이 역시 78


산업 발달에 따른 다양한 고용형태의 출현과 신자유주의에 의한 비정규 고용형태 확대와 무관하지 않다. 산재보험법 상 적용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례 조항을 통해 적용하는 대상은 국외 사업 노동자, 해외 파견자, 현장 실습생, 중소기업 사업주, 특수고용 노동자 중 일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중 자활 참여자 등이다. 이 중 국외 사업 노동자와 해외 파견자의 경우 국가 단위 사회보장 제도의 사각지대를 해 소하기 위한 것이고, 나머지 4개의 특례 조항은 모두 노동자처럼 일하되 법적‘노동자성’ 을 인정받지 못 하는 노동자의 문제다.

사회보험 적용 기준으로서의 노동자성?

우리가 통상 노동관계법이라고 부르는 법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개별적 노사관 계를 규율하는 법체계이고, 두 번째는 집단적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법체계, 마지막으로 노동시장을 중심 으로 형성된 사회보장을 위한 관련 법규들이다. 한국의 경우 개별적 노사관계의 대표적 법률은 근로기준 법, 최저임금법 등이고, 집단적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법률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 있으 며, 사회보장과 관련해서는 고용보험법 및 산재보험법, 그리고 고용 상 지위를 근거로 적용하는 사회보장 법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노동자라 함은 사회적으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지만,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법에서의 노 동자는 이보다 엄밀한 정의를 갖고 법의 목적에 따라 그 개념 정의도 차이가 난다. 개별적 노사관계는 임 금, 노동시간, 휴일, 휴게시간, 해고 등의 문제를 다루며 노사관계 성립과 동시에 노동자와 사용자의 권리 와 의무가 자동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가장 엄밀하게 노동자성을 따진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이나 휴일

(사진 :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

정책포럼 79


보장은 사용자가 법에 보장한 수준 이상을 보장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거나 의무 이행의 책임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적용할 노동자성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따지게 된다. 반면 집단적 노사관계를 법으로 규율하는 이유는 노사 간의 대화와 협력, 갈등 조정 등 당사자들의 자 율적 조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 노사관계처럼 엄격한 노동자성과 사용자성을 따질 이 유가 없다. 개별적 노사관계에서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사용종속관계에 놓여 있는가 아닌가가 매우 핵심 적인데 반해, 노조법 상 사용자와 노동자는 반드시 직접적 사용종속관계일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산별 이나 지역 사용자단체의 경우 산별 또는 지역 노동자에 대한 임금 지급, 휴일 보장 등 근로기준법 상의 직 접적 사용자 책임을 갖지는 않지만, 성실 교섭 의무 등 노조법 상 사용자의 책임을 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보장의 경우 적용 대상을

사회보장은 적용 대상을 한정하고 비용 부담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노동자성 과 사용자성을 따지는 것이기에 개별적

한정하고 비용 부담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노동자성과 사용자성을 따지는 것이기에 개별 적 노사관계나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만큼 노 동자성의 구분이 본질적이지 않다. 또한 사회

노사관계나 집단적 노사관계만큼 노동자

보장이 보편적일수록 그 적용 대상을 한정할

성의구분이본질적이지않다.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동자성의 의미가 축소 된다.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처럼 제도 도입

초기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다 대상이 확대되는 경우, 노동자성 여부는 비용 부담 주체 문제를 제외하고 는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

국제 기준은 산재 적용 범위 확대

앞서 살펴보았던 산재보험법 특례 조항은 산재보험 도입 이후 제도적 확대를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한 경우다. 해외의 경우에는 초기 도입 시 피고용자, 즉 임금노동자만을 위한 제도로 도입되었으나, 점차 적 용범위가 넓어져 왔다. 가장 일차적인 확대 대상은 농민과 자영업자였으며, 가정주부와 학생은 물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까지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02년 발간한 <산재보험제도의 국제비교 연구>에 따르면, OECD 30개국 중 전국 민을 대상으로 산재보험을 시행하는 국가는 네덜란드와 뉴질랜드가 있고, 취업자뿐만 아니라 가정주부, 학생 등 미취업자도 일부 적용범위로 포괄하는 국가로는 독일,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헝가리, 노르웨 이, 덴마크 등이 있으며, 자영업자까지 적용대상으로 하고 있는 국가가 23개국, 피고용인만을 대상으로 한 국가는 7개국으로 나타났다. 피고용인뿐만 아니라 자영업자까지도 대상으로 한 23개국 중에서 자영업 자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국가가 14개국, 자영업자 중 일부만을 대상으로 한 국가가 9개국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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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집 아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전 국민 산재보험으로

최근에는 투쟁이 다소 소강(?) 상태이긴 하지만, 한 때 특수고용노동자 문제의 해법으로 산재보험 노동 자성 확대가 주요 요구 사항으로 등장한 바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산재 적용을 통해 특고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향상시키자는 의미도 있었지만, 근로기준법이나 노조법보다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사회보장법 상 의 노동자성 인정을 얻어내겠다는 의도 역시 담겨 있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특수고용노동자는 사용자가 노동자를 자영업자 신분으로 위장하여 근로계약이 아 닌 도급 형태로 계약을 맺음으로서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박탈한 경우다. 노동자 성을 인정받지 못 함으로써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의 기본 권리는 물론 각종 사회보장제도에서도 소외당해 그 고통이 두 배 세 배에 달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산재보험 상 노동자성을 확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 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산재보험의 주요 대상이 피고용 노동자이며, 그 외 계층은 예외적 적용으로 한 정된다는 기본 골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산재보험의 노동자성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당은 2012년 총선부터 산재보험 개 혁을 위해 노동자성 정의 확대를 넘어 자영 업자를 포함한 경제활동 인구의 산재보험

노동당은 2012년 총선부터산재보험 개혁을 위해 노동자성 정의 확대를 넘어 자영업자 를 포함한 경제활동 인구의 산재보험 의무 가입을공약으로제시했다.

의무가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슈퍼집 아 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그 누구라도 일하다 다치면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치료와 재활, 그리고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

정책포럼 81


지역에서 현장에서

지금 서울에서 가장‘핫’ 한 포럼,서울적록포럼입니다 강남규 서울적록포럼 기획단, 서울 동작 당원

2월 6일 저녁의 신촌 카페 체화당. 세미나실이 있는 지하로 들어오는 나무계단이 연신 삐걱 소리를 냈다. 행사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났지만 장내는 부산했다. 더 이상 의자 하 나 보탤 곳도 없는 공간에 사람들이 계속 들어섰다. 40명쯤인가 세다가는 세기를 포기했다. 눈대중으로 파악하건대 60여 명이‘서울의 밤’ 을 함께했다. 어느덧 4회를 맞은 서울적록포럼 얘기다. 무슨 자리냐고? 이름에 다 나와 있다. 서울, 그 리고 적록. 노동당과 녹색당의 당원들로 구성된 기획단이 판을 깔고, 서울의 다양하고 복잡 한 이슈들을 적/록/청년이 각각의 관점으로 비교 발제함으로써 서울시 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는 자리다. 그럼으로써 나아가 청년당원의 정책역량을 키우고, 두 진보정당의 지 향과 제안을 포럼 참가자들에게 공유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서울적록포럼은 순항 중

각설하고, 서울적록포럼은 순항 중이다. 첫 포럼은‘이화여대 기숙사 증축 공사’ 를 다뤘 다. 개발하려는‘대학’ 과 원룸 수요를 유지하려는‘지역사회’ , 도시 숲을 보존해야 한다는 ‘환경단체’ , 그리고 안전한 주거지를 원하는‘대학생’ 이 상호 충돌한 복잡한 문제였다. 이 복잡 미묘한 문제가 단순히 지역 vs 대학생의 구도로만 이야기되는 상황을 깨고,“청년주거 문제의 해법, 대학과 지역사회, 도시의 숲 보존 문제 등 통전적 관점으로 접근” 해보고자 했 다. 이해 당사자들이 포럼 현장을 가득 채우는‘퍼포먼스’ 까지 곁들여져 현장 분위기는 그 야말로‘핫’ 했다. 82


2차 포럼에서는‘지역상권’ 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대학생 청년의 생활공간으로서 대학가 상권에 초 점을 맞췄다. 이제는 익숙한 용어가 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그 속에서 지워지는 공유된 기억, 불안정 노 동에 시달리는 자영업자의 현실 같은 것들이 키워드였다. 노동당은 특히 자영업자 계급-불안정 노동에, 녹색당은 공간과 기억의 측면에 초점을 맞춰 발제를 진행했다. 3차 포럼은‘서울, 청년, 거버넌스’ 를 키워드로 삼아 서울시의 청년정책을 평가해보는 자리였다. 박원 순 서울시장은 청년 명예부시장을 두는 등‘서울시-청년 거버넌스(=공공경영)’정책에 주력해왔다. 이러 한 정책이 겉보기로는 신선하고 또 호의적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한계점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는 문제의식으로 발제를 진행했다. 특히‘진보정당’ 에 소속된 청년의 관점에서 정책을 바라보고자 시도했 다. 이 날 포럼은 서울시 청년사업의 코어라 할 만한 은평구 청년허브 공간에서 이뤄져 나름의 의미를 더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진행한 4차 포럼의 주제는‘서울의 밤’ 이었다. 24시간 내내 불빛이 꺼지지 않는 도 시, 그것이 한편에서는 활력 있는 도시의 상징으로 주장되지만 한편에서는 야간노동과 에너지 과잉소비 의 현실을 반영할 뿐이다. 노동당과 녹색당은 후자의 관점을 견지하며‘서울의 밤’ 을 파헤쳤다. 야간노동 을 존재하도록 하는 도시의 조건은 무엇인가, 도시의 밤을 밝히기 위한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이런 질 문들을 품고 진행된 포럼은 기대했던 것 이상의 무수한 질문들을 남겼다.

서울적록포럼 1차 포스터(좌). 3차 포스터(우)

지역에서 현장에서 83


왜 지금, 서울적록포럼인가?

왜 지금 서울적록포럼일까? 이것은 정말로 의미 있는 움직임일까? 4차 포럼에 참석했던 한 참석자에 게 포럼에 참석한 이유를 물으니“이런 얘길 하는 곳이 여기밖에 없다” 고 답한다. 이 말이 많은 걸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박원순 시정과 오세훈 시정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민단체와 협업하 는 시정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협업의 무게중심이 관에 쏠려있는 한 그 질서로부터의 탈주는 불가능하다. 서울적록포럼은 노동당 서울시당과 서울 녹색당이라는‘박원순 저격수’ 가 기획하고 차려둔, 지금까지와 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최고의 판인 것이다. “서울을 지금보다 한 걸음, 다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만드는 긴 공정에 들어간다.”서울적록포럼을 통해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말이다. 포럼에 참석한 사람 들은 마치 이런 주제를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말을 쏟아낸다. 때로는 사회자가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이 야기가 불어나기도 한다. 이 말들을 잘 주워 담고 갈고닦아 하나의 정책 결과물로 만들어낸다면 김상철 위원장이 바라던 그‘공정’ 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공정의 주인은 당연히 노동당일 것이다.

서울적록포럼, 당 조직사업으로서의 역할도

서울적록포럼은 포럼 자체의 의의뿐만 아니라 당 조직사업으로도 성과를 내고 있다. 일단 정당에 대해

4차 포럼 현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진 : 강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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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장벽을 지닌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정당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준다. 실제로 지난 포 럼들, 특히 4차 포럼에서는 열 명 가량의 비당원이 참석했고 그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발언을 하기도 했 다. 동시에 서울적록포럼은 비활동 당원들에 대한 조직사업이기도 하다. 서울적록포럼을 계기로 당 활동 을 시작하고 당원들을 만나기 시작한 청년당원들이 많다. 이들은 다음 포럼의 발제자가 되거나, 또는 기 획단에 참여할 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적록포럼의 파급력은 지역으로까지 미치고 있다. 광주, 영남의 청년당원들로부터 서울적록포럼을 참고해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지역 청년당원들을 모아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장기적 기획의 발판으로 써 포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흐름이다. 이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힘이 불끈 난다. 더 많은 연락 을 기다린다. 더 나은 서울을 만드는 데 관심 있는 당원이라면 누구나, 나처럼 기획단으로 참여할 수 있다. 실제로 매 회 포럼 이후에 기획단이 한두 명씩 꾸준히 보강되고 있다. 연락주시라. 혹 기획단 참여까지는 부담스럽 다면, 포럼에서 다뤄봤으면 하는 주제를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셔도 좋다. 아이템에 목마른 포럼 기획단이 두 팔 벌려 반길 거다. 그 주제에 대해 본인이 발제하고 싶다는 의사까지 내비쳐주신다면 금상첨화다.

포럼에 참석하지 못했거나 당일 발언을 돌아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속기록과 자료집, 기획안 등을 구 글 드라이브에 모아두었다. 도움이 되길 바란다. http://goo.gl/vJp0Gu

지역에서 현장에서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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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걷고 싶은 거리, 어떻게 상품이 되는가 서울역고가 프로젝트의 허와 실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

지난 1월 27일 박원순 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서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서울역고가 도 시공원사업을 공식화했다. 작년 9월에‘하이라인을 뛰어 넘겠다’ 고 밝힌 데 이어, 새롭게 조성되는 고가 도시공원의 설계에 대한 국제현상공모가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박원순 시장은 이 프로젝트가“건설을 통해 파괴하는 과거 방식보다는 도시재생 방식을 통해 시민 삶에 보탬이 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나가고자 한다” 고 강조했다. 박원순 시장은 40년 이 넘은 고가를 도시공원화하는 것에 대해‘도시재생’ 라는 말을 붙였다. 재생이라는 말은, 쇠퇴한 것을 되살린다는 의미이다. 고가라는 시설의 낡음이 안전에 문제가 있어 철거하는 데 이를 재생한다니 선뜻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특히 서울역 주변이 여타 광역도시와 같이 쇠퇴하고 있다 보기도 힘들다. 서울역고가는 1970년에 지어졌고, 2006년부터는 구조적 안정성 때문에 오가는 차량의 무게를 13톤 이하로 통제해왔다. 그리고 2011년 정밀안전진단 결과 D등급이 나와 2015년 까지 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2013년, 2014년 관련 고가 철거계획은 물론 예산 역시 반영되어 있다. 이미 서울시는 아현고가를 철거한 데 이어 올해만 해도 서대문고가의 철거를 시작할 예정이다. 도심 내 통행량을 늘리기 위해 만들었던 고가는 안전도 안전이거 니와 도심 내 공기질 문제에서부터, 교통수요관리라는 측면을 고려할 때 점차 줄여가는 것 이 기본적으로 타당한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도시재생이니 뭐니 하 면서, 서울역고가 프로젝트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걷고 싶은 도 시라는 이름으로.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7


서울역고가 프로젝트는 60개 공약 중 18번째로,‘따뜻한 개발, 따뜻한 도시’분야에 포함되었다.

공약으로 시작하다

서울역고가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2014년 6월 지방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의 공약집에서 였다. 당시 서울역고가 프로젝트는 전혀 논쟁거리가 되지 못했다. 워낙 뜬금없기도 했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진행된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은 정권심판이라는 대세 속에 오히려‘조용한 선거’ 를 치르며 현직 의 프리미엄을 누렸다. 사실 이 공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서울역고가 프로젝트는 작년 9월이나 올해 1월에 발표한 서울역고가 프로젝트와 관련된 공식적 언급보다 함의하고 있는 것이 크다. 첫 번째는 서울역고가 프로젝트가 정확하 게 도시개발 사업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

지방선거 당시의 박원순 후보 공약집은 서울역고가 프로젝트가 정확하게 도시개

이다. 서울시의 발표 이후 문화영역 등에서 걷고 싶은 거리 혹은 걷기 좋은 도시라는 말 을 사용함으로써 자동차 길이었던 서울역고

발 사업임을 명시하고 있다. 당시 공약의

가를 대비시키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말도

내용을눈여겨봐야하는이유다.

안 된다. 기본적으로 서울역고가를 철거한 다는 것 자체가 도로를 없애는 것인데, 이것

이 어떻게 차량 중심의 사고라고 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고가에 차량이 다니는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가가 아니라 고가를 없앨 것인가 존치할 것인가다. 그래서 서울역고가 프로젝트를 인근 역세권개발과 연 동하여 관광자원화 하겠다는 생각이 또렷한 공약의 내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비용 측면 에서 당초 철거비용이었던 148억 원보다 238억 원이 늘어난 386억 원을 책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재활용할 수 있는 시설을 돈을 들여 철거하기 보다는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원으로 사용하면 더 좋지 않느 냐는 말인데, 오히려 도시공원으로의 활용이 철거비용보다 갑절 이상 소모된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이런 88


사실은 이후 추가적인 발표에서조차 언급된 바 없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이후 진행된 행정절차가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빨랐다는 데 있다. 2014년 8월부터 갑자기 자문회의가 열리고 국제현상 공모를 위한 지침들이 논의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서울역고가 프로 젝트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용역발주가 이루어졌다. 사업추진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 한 사실상‘청부용역’ 이 진행된 것이다. 이 배경에는 8월에 확정된 시장 방침이 있었다. 이때부터는 사업 의 진퇴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어떻게 무리 없이 추진할 것인가’ 로 정책방향이 바뀐다. 사실상 맥락 이 바뀐 것이다.

하이라인이라는 상품

지난 해 9월 24일,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이 프로젝트를 밝히는 자리에서 공개된 보도자료의 헤드라인 이“박 시장, 서울역고가 하이라인파크 넘는 녹지공원으로” 였다. 아마 이 자리에서 하이라인이라는 사례 를 처음 접했던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라인은 비교적 최근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뉴 욕에 위치한 하인라인고가는 도로가 아닌 철로로서 1934 년에 개통된 고가다. 이후 철 로로서 활용가치가 떨어지면 서 화물차들이 다니는 도로 로 이용되다 1980년에 폐쇄 되면서 철거가 예정됐다. 그 리고 1999년 뉴욕 시장 줄리 아니가 철거 요구를 받아들 여 사실상 철거가 확정되지 만,‘하이라인의 친구들’ 을 중심으로 하는 보존운동이 시작되면서 공원화 논의가 시작된다. 이후 2006년이 되 어서야 착공식을 하고, 2009 년에 첫 번째 구간이, 2011년

위는 하이라인을 모방하여 만든 서울역고가 프로젝트의 청사진이고, 아래는 현재 하이 라인이 실제 거주자들의 삶과는 유리된 판타지만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를‘디즈니 월 드’ 로 표현한 뉴욕타임즈의 기고란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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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두 번째 구간이 완성되었다. 원래 노후화된 도심 내 고가를 도시공원으로 바꾸면서 인근 거주자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는 목표가 있었으나, 사실상 지가 상승에 따른 거주지 교체가 이루어졌다. 개발이익 은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독점했고 전통적인 지역 상권은 무너졌다. 특히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관광객의 편의가 거주자들의 불편이 되는 모순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도 하이라인 사업의 결과다. 서울역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서울 역 인근의‘거주’문제를 쉽게 망각하 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울역 서부역 방면에서 한겨레신문사가 있는 만리재 고개 쪽은 수많은 서민주거층이 살고 있는 삶터임과 동시에 영세한 출판사 나 중소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일터 이기도 하다. 서울역고가는 정확하게 서울역을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를 연 결하는 보행도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기존의 다양한 정주 생태계에 영 향을 주리란 걸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하이라인을 모방하려면 이에 대한 공과를 제대로 살피는 것이 필요 했다고 본다. 현재의 상황에서 서울시 가 기존보다 2배 이상의 예산을 사용 해가며 공론화도 되지 않은 서울역고 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이유를 찾으 하이라인 공원화 사업 이후, 인근에서 49년이나 장사를 해왔던 상인이 내 걸었던 폐업안내문. 장사의 마지막 날이지만 자신은 한번도 이를 비지니스 라고 생각하지 않았고‘삶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소회가 적혀있다.(위) 뉴욕시의 경제개발공사에서 분석한 주요 도시공원 조성에 따른 상권 변화 를 보면, 하이라인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이내의 경우 2003년에 비해 2011 년에 2배 이상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아래)

라면, 결국 서울역 주변에 정체되어 있 던 도시개발 사업에서 찾을 수밖에 없 다. 서울역 북부역세권 개발과 서울역 서부지역에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다 수의 개발사업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

서울역고가 프로젝트가 하이라인에서 참조한 것은 ‘경제적 효과’ 와‘비지니스’측면에서 본‘관광객 의필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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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서울역고가 프로젝트가 하이라인 에서 참조한 지점은‘경제적 효과’ 와 ‘비지니스’측면에서 본 관광객의 필 요일 뿐이다.


걷고 싶은 도시?‘누가’걷고 싶은 도시인가

최근 몇몇 민간영역의 활동가들이 서울역고가 프로젝트에 결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미 공공 조경가라 불리는 환경운동영역, 문화운동영역의 활동가들이 동원되었다. 말로는 탈근대지만 추진방법은 전형적인 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모순, 개발이라는 욕망이 거칠지만 익숙하게 비집고 나오는 모습을 확 인할 수 있다. 서울시의 행정정보공개 중에 서 가장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다. 가장 기본적인 프로젝트 (안)조차 비공개다. 이런 상황에서 자동차 대 보행자, 과거 대 미래, 보수 대 창조라는 우스운 대립구도로 이 문제를 끌고 가려는

“당신들이 말하는 걷고 싶은 도시는‘누가’ 걸을 수 있는가?”도시가 얼굴을 바꿀 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바뀌어왔다 는건부정할수없는냉정한현실이다.

움직임이 보인다. 이들이 말하는 주장은 대 개가 옳다. 자동차보다는 사람이 편한 도시가 되어야 하고 과거와 같이 파괴 일변도의 개발보다는 보존하 고 바꿔나가는 혁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시가 얼굴을 바꿀 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바뀌어왔 다는 냉정한 현실을 부정할 순 없다. 미안하지만, 하이라인이 그랬고 지금 상태의 서울역고가 프로젝트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세계은행의 보고서를 본 따 묻자면“당신들이 말하는 걷고 싶은 도시는‘누 가’걸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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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한국 대학 체제의 형성③

이승만정권기의사학팽창 1950년대의 고등교육 정책 김예찬 서울 강남서초 당원

과도하게 비싼 등록금, 너무나 많은 사립대학, 명문대 서열 체제…. 오늘 날의 한국 대학 문제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문제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사실 어제 오늘 생긴 일 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한국에서 고등교육이 출발한 1950년대부터 이러한 문제점들은 계속 지적되어 왔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승격한 이후 기존의 사립전문학교들이 대학으로 잇따라 전환했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전문학교에서 전환한 형태가 아닌, 신설 대학들도 상 당 수 등장했다. 이렇게 대학들이 늘어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국가적 차원에서 건국 과정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정책으로 대학 설립이 장려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고등교육의 통로가 매우 협소했던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 그동안 막 혀있던 교육을 통해 계층 상승을 이루려는 국민들의 열망에 따라 고등교육 기관들이 등장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요인은 종교계와 기업인, 지주 들이 나름의 사회봉사 차원에서, 혹은 기득권과 토지의 자산 유지를 위해 대학을 비롯한 교 육기관들을 설립했다는 점이다.1)

토지개혁이 불러온 사립대학의 과잉 팽창

1949년 6월 21일, 제헌국회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한다.“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함 1) 오성배《사립대학 팽창 과정 탐색 : 해방 후 농지개혁기를 중심으로》 , 2004, 한국교육 31호. 이후 표와 그림 자 료는 해당 논문에서 주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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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써 농가경제의 자립과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인한 농민생활의 향상” 을 꾀했던 농지개혁법은 그 성 격과 내용에 대한 이견은 있을지언정, 토지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주로 평가받는 다. 그런데 1949년 제정된 농지개혁법은‘학교 및 종교단체’ 의 자경농지를 토지 매수 및 분배 대상에서 제 외하고 있다. 자경농지 뿐 아니라,‘문교재단의 소유지는 별도의 정하는 바에 의해 매수’ 한다고 되어있는 데, 이는 교육재단 소유지는 일반 지주들의 소유지와 달리 관계법이 추가로 제정되기 전까지 토지개혁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었다.2) 이후 제정된 문교재단소유농지특별보상법(1951)은 문교재단이 소유한 토지에 대해서는 농림부의 일반보상 15할의 지가증권 이외에 문교부가 15할의 지가증권을 추가 발급한다 는 특혜를 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지주들은 이러한 토지개혁에 대응하여, 사학재단들을 설립하기 시작했 다. 실제로, 1945년 이전 설립되어 있던 고등교육기관은 총 22개(전문학교 포함)였는데, 1950년에는 47개 로 증가한다. 1945년부터 50년 사이에 증가한 고등교육기관은 총 25개 학교였으며, 이 가운데 국립대학 이 9개 학교, 사립대학이 16개 학교로 사립대학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처럼 지주들의 재단설립과 토지기부로 인한 사립대학의 증가는 당시의 국민소득과 인력수요에 비 해 과잉 팽창된 것이었으며, 이는 이후 1950년대 내내 대졸자 취업률이 30~40% 수준을 밑돌게 하는 결 과를 낳는다. 1954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 대비 대학인구 비율은 당시 미국의 4배, 영국의 15배 수준으 로, 사학의 갑작스러운 증가로 인한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은 고등교육 인구는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기도 했다.3)

오늘 날의 주요 사립대학 다수가 이 시기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1949년 농지개혁법 6조 1항 5호“공인하는 학교, 종교단체급 후생기관 등의 소유로서 자경이내의 농지. 단, 문교재단의 소유지는 별도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매수한다.” 3)《사학문제의 해법을 모색한다》 (2012) 中 김정인, <한국 사학 형성의 역사와 구조적 특성>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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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대학 증가로 인한 문제들의 대두

이렇게 대학생의 수가 늘어난 상황에서, 등록금 문제 역시 대두되었다. 1950년대 내내 학기 초마다 총 통화량의 20~25%가 대학등록금으로 들어가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설 사립대학들이 초 기에는 상당한 출연재산과 기금을 가지고 대학 인가를 받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시설 파손이나 수익 저하로 인하여 거의 모든 사립대학이 대학 운영

대학생의 수가 늘어난 상황에서 등록금 문제 역시 대두되었다. 1960년대 내내 학기 초마다 총 통화량의 20~25%가 대 학등록금으로들어갔다.

을 등록금 수입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4) 이러한 상황에서 각 대학들은 재정 마련을 위해 무리하게 학생 수를 늘렸고, 딱히 대학 정원에 대한 정부 통제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1950년 대 내내 많은 대학들이 자신들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여 학생들을 모집하게 되었다. 청강생 제

도(오늘 날의 편입), 야간대학, 수시입학 등이 그러한 마구잡이 학생 확보의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극도로 심화된 1960년에는, 사립대학 정원이 5만4천 명인 데 비해 재학생 수는 7만8천 명에 이를 정도였 다. 이는 당연히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애초부터 기업가와 지주의 토지자산 보존을 위해 생겨난 대학이었기에, 사학 운영의 사유 화와 독점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개인이 설립한 대학 24개 중 15개교가 장기적으로 설립자 본인 및 친인척에 의하여 운영되었고, 이러한 사유화 현상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사학재단을 특정 개인의 사유 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오늘 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력과 사학의 유착으로 인한 문제의 심화

이처럼 사학이 사유화되고, 권력화 된 것은 이승만 정권의 방임이 그 원인이기도 했다. 문교부는 사학 들이 학생들로부터 등록금 뿐 아니라 각종 납부금들을 걷을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으며, 정부의 기준을 넘 어서는 등록금을 징수한 대학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의 정치 엘리트들과 교육 엘리트들이 동일했던 것이 그 원인이기도 한데, 아직 지배 엘리트 계층의 분화가 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권력과 사학의 유착이 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1950년대부터 전국사립대학연합회가 출범하여 교육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을 4) 등록금 문제를 다루고 있는 1950년대 신문 기사를 통해 상황의 심각성을 확인해볼 수 있다. 경향신문 1957년 5월 24일 기사에 따 르면“전국 55개 국공사립대학 학생 약 8만여 명의 태반이 제2기분 납입금을 내지 못하고 있어 대거 제적 처분을 당할 상태에 놓 여있다. 특히 39개 사립대학은 과중한 납입금으로 인해 지금 현재 재적학생의 약 7할이 미등록 상태에 있다고 문교부 관계관은 말하고 있어 학교 운영재단이 미약한 학교는 자연 도태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등록 부진 상태는 결국 5만 환 내지 8만 환에 이르는 막대한 등록금에 비해 태반의 학생들은 이를 일시에 납입할 경제적 여유가 없음에 기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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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방하면서 정부로부터 대학운영의 자율성을 관철하려 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전국사립대 학연합회 초대 회장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문교부 장관을 지냈으며 연세대 총장을 역임하고 이후 참의원 의장을 지내게 되는 자유당 출신 백낙준이었고, 부회장은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학가이자 고려대 총 장을 지낸 교육가로서 이후 1960년대 민주당 총재를 지낸 유진오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시의 정치 엘리 트들은 곧 사학재단과 밀접한 교육 엘리트로서, 사학재단의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대학 서열화 문제의 등장

오늘 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사학 서열화 현상 역시 1950년대부터 그 조짐을 보였는데, 이러한 서열화 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교육원조 기금이었다. UNCRA(유엔 한국재건단), FOA(대외활동본부), ICA(국제협조처) 등 한국으로 쏟아진 국제적인 교육원조의 절반 이상이 고등교육에 할 당되었는데, 이중 60%가 서울대에 집중되었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 고등교육 원조의 90%가 국립대에, 나머지 10%가 사립대에 공여되는데, 국립대 원조액의 80%를 서울대가, 사립대 배당 원조액의 90%를 고 려대와 연세대가 독점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한편, 미국인에 의해 설립된 기독교계 사학이었던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미국의 기독교 재단과 대학들에 의한 기금 원조를 통해 수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후발 주 자인 다른 사립대학과의 격차를 더욱 벌리는 계기가 되어 사학의 양극화 현상을 낳았고, 대학의 서열화를 고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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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공업사②

길냥이에게도 집을 화덕헌 부산 해운대구 당원

길냥이를 아십니까

길고양이들을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돌보는 이가 없어 마당에 말리는 생선이나 쓰레기통을 뒤져먹다 보니 그렇게 불린 것.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들을 길고양 이, 길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료를 가져다주는 등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그들을‘캣맘’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3년, 동네에서 구의원하던 시절 나는 처음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의회가 열리지 않는 날 종종 자전거를 타고 관내 순찰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엔가 공원 에서 쓰레기를 열심히 치우는 여성분을 보았다. 다가가서 어떤 이유로 청소를 하는지 물어 보았더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고양이 밥을 주는 입장이라서 눈치가 보여, 공원 관리인들 이나 이용객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런다고. 자식 챙기는 엄마 같은 마음이었다. 그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성화 수술 이야기며 유기동물에 관한 의견까지. 뭔가 도움을 드 리고 싶어 전화번호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2014년 6월 선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네 슈퍼 앞마당을 빌려 폐목재로 지은 가건물을 선거사무소로 썼다. 거기서 나는‘캣맘’ 을 다시 만났다. 나의 관심사는 그분의 한 표였고 그 분의 관심사는 오로지 고양이였다. 매달 사료비만 수십만 원을 지출할 정도로 애 정이 깊은 분이었으니. 선거 캠페인은 안중에도 없던 그녀가 내게 던진 말은, 선거가 끝나면 선거사무소를 철거 하고 남은 목재를 자기에게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게 왜 필요한지 물었더니 길냥이 집을 가 리는 울타리, 가림막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했다. 행인들 중에는 종종 길냥이 집을 향해 96


돌을 던지거나 심지어 불을 놓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가림막을 쳐서 보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심산이었 다. 이야기를 이리저리 섞다보니, 결국 목재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연장도 필요하고 목수도 필요하다고 실 토를 한다. 선거가 끝나면 기꺼이 도와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다. 마침 나는 낙선을 했고, 백수가 되어(!) 시 간이 넉넉해졌다.

소문난 길냥이 집짓기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캣맘과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나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갑자기 비가 오 면 사료통에 비가 들어 사료가 다 젖 는다는 것, 그리고 박스나 스티로폼 으로 만든 길냥이 집은 너무 부실하 다는 것이었다. 우선 빗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사 료 집부터 만들어 보았다. 현수막 막 대기와 공사현장에서 버려지는 폐자 재를 모아, 자재가 모이는 만큼씩 작 업을 진행했다. 지붕이 문제였는데, 데모용이나 선거용 피켓으로 쓰고 버 리는 포맥스(플라스틱 판)나 폼보드 같 은 화학제품을 재활용했다. 본격적으로 길냥이 집을 짓기 시 작했다. 먼저,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집 내부의 적정 크기를 정했다. 너무 크면 겨울철 보온문제도 있어 적정크 기가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적정 크기는 높이 30cm, 너비30cm, 깊이 40cm다. 출입구는 전면 중심보다 조 금 높게 뚫어주고 처마 끝에서 최대 한 안쪽으로 위치시켜 비를 막을 수 있게 하면 좋다. 고양이는 워낙 유연 한 동물이라 출입구를 크게 만들 필

박스의 틀을 짜고 합판을 붙인다. 보온효과를 위해 버려진 스티로폼을 합판 사이에 덧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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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폐팔레트를 한 겹 더 붙이면 습기를 막고 보 온력도 높일 수 있다.

요가 없다. 현수막 막대를 이용해서 박스의 틀을 짜고 합판을 양면으로 붙이는데, 이때 사이에 스티로폼을 넣는 게 포인트! 합판은 아무래도 내구성이 부족하고 습기에 약하므로 바깥에 폐팔레트를 외벽 타일처럼 한 겹 더 붙여준다. 습기도 막아주고 보온도 된다. 폐팔레트 외벽은 친환경 방부액을 발라서 부패를 방지하고 투명 라카를 한 번 더 발라 내구성을 높인다.

금방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가까운 기장군 캣맘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재료비를 마련해 줄 테니 우리 동네에도 지어달라는 것이다. 폐자재를 가지고 만들다보니 구색이 모자라 완성이 더딘 경우가 종종 있었 는데, 재료비를 준다고 하니 열심히 팔레트 같은 폐목을 주우러 다녔다. (폐지와 깡통 줍기를 그만 둔 시점과 일치한다.^^)

길거리 동물에 대한 연대에도 진보운동의 길이 있다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거나 집을 설치하면 고양이가 늘어난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하지만 고양이는 무한번식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자기 영역을 가지는 동물이고 영역 범위에서 일정한 개체수가 유지된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분들 중에는 막연한 터부 때문에 싫어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발정기간 중 의 울음소리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각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중성화수술을 이용하면 고양이들이 번식도 98


않고 소란도 피우지 않는다. 약자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길거리 동물을 보살피는 마음부터가 그 시작이 아닐까 생 각한다. 주변 생명에 대한 작은 관심과 애정으로 시작되는 연대에도 진보운동의 길이 있다고 믿는다.

초기의 길냥이 집

길냥이 집 내부

길냥이 집을 두 단으로 쌓아 길냥이 아파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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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치 칼럼

올해부터는 <LGBT ‘I’인권포럼>입니다 박자민 성정치위원

LGBT 인권포럼이 LGBTI 인권포럼으로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매해 연초에 <LGBT 인권포럼>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통해 결성된 성소수자 운동 연대체인 무지개행동은 인권 포럼을 통해 성소수자 운동의 양적 성장을 이뤄왔고, 지난해 포럼에서는 처음으로 대학 성 소수자 동아리 연대체가 기획을 갖고 참가하는 등 보다 다양한 성소수자의 현실을 논하는 공론장이 되고 있습니다. LGBT에 대한 노동당원들의 이해도는 높지만 친절하게 한번 더 반복하자면, Lesbian(여성동성애자), Gay(남성동성애자), Bisexual(양성애자), Transgender(성전환자)를 부르는 줄임말입니다. 8년 동안 이어온 LGBT 인권포럼이 올해부터 이름을 바꾸어 <LGBTI 인권포럼>이 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LGBT에 덧붙여진 I는‘아이폰’같은 스마트기기 작명법을 따라한 것 이 아니라, 성적소수자의 한 집단인 Intersexual(간성)에서 따온 글자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보통 남성 염색체 XY 또는 여성 염색체 XX 가운데 한 가지만 가지고 있지만 생식기는 남 녀의 것을 모두 갖고 있으며, 태아가 분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습니 다.

적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 인터섹슈얼(Intersexual)

인터섹슈얼은 2천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남한인구 5천만 100


인터섹슈얼에 관한 영화《두 개이지 않은 성》 의 한 장면

명을 기준으로 국내에는 약 2만5천 명의 인터섹슈얼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명 적지 않은 숫자 이지만 현재 인터섹슈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2만5천명보다 훨씬 적은 숫자일 것입니다. 인터섹슈얼임을 인지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남녀 생식기가 모두 뚜렷하게 형성되어 영유아기에 부모가 인지하는 경우와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시기에 신체가 빠르게 변하며 숨겨져 있던 다른 생식기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발주하고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 정책 연구회가 실시한 <한국 LGBTI 커뮤니티 욕구조사>에 따르면 이렇게 인터섹슈얼이 인지되면, 영유아의 경우는 부모의 성별 선택에 의해, 2차 성징이 나타난 이후의 경우는 이전까지 살아온 성별을 근거로 다른 쪽 생식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통해 앞으로 살아갈 성별을 선택하게 됩니다. 물론 한쪽 생식기가 발달하지 않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드물게 의료행위를 하지 않고 인터섹슈얼로 사는 것을 결 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터섹슈얼로 살건 한쪽 성기를 제거하고 남 성 또는 여성을 선택하건 자신의 정체성을 근거 로 내리는 결정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또한 우

인터섹슈얼로 살건 남성 또는 여성을 선 택하건 자신의 정체성을 근거로 내리는

리가 그들의 선택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도 따져보아야 합니다.

선택을존중할준비가되어있을까? 삶과 문화 101


‘보이지 않는 사람들’ , 사회가 확인해야

지난 연말,‘클라인펠터 증후군’ 이라는 낯선 단어가 며칠씩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 순위 상위권에 머문 일이 있습니다. 클라인펠터 증후군은 간성의 한 유형으로 XXY염색체를 지니는 것이 특징이며, 외부 생식기로는 큰 차이가 드러나지 않으나 생식능력에는 제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 클라인펠터 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아이를 따라 자살한 이 비극적인 영아살해 사건은, 언론에 의해 남녀 성기를 모두 가진 소수자를 마치‘사파리 관람’ 하듯 다뤄졌 습니다. 검색 순위에서‘클라인펠터 증후군’ 이 사라지며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졌고, 부모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성별 결정 수술을 받고 있는 간성인과 그들이 강요받는 남성/여성 성별 이분법은 문제시 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남자 아니면 여자만 존재하는 사회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아이를 낳아 혼란 과 불안을 겪는 사람이 적절한 도움을 구할 곳조차 없다는 사실 또한 여전합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터섹슈얼은 21세기 지구온난화로

부정해왔을 뿐, 인터섹슈얼은 21세기의 지구온난화

갑자기 나타난 돌연변이가 아니다.

로 갑자기 나타난 돌연변이가 아니라 역사 속에 계

부정해왔을 뿐, 역사 속에 계속 존재 해온사람들이다.

속 존재해온 사람들입니다. 또한 과거에도 없는 셈 치고 넘어갔으니 지금도 없는 셈 쳐도 되는 사람들 이 아닙니다. 간성인의 인권은 물론, 사회와 인류가

영문 페이스북 개인정보 수정 메뉴. 생물학적 성별인 sex(섹스) 대신 사회 적 성인 gender(젠더)를 표기했으며, female(여성)/male(남성) 외에도 custom(사용자 개별 입력) 선택지를 추가했다. 아랫줄엔 성별 인칭대명사 를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며 이 곳에서 성 중립적인 인칭대명사를 선 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설정 변경 이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친구나 대중 에게 공개될 수 있음을 알리는 안내 메시지를 띄워 의도치 않은 커밍아웃 (아웃팅) 방지에도 노력한 점이 돋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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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중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보이지 않는’사람들을 사회가 확인해야 합니다.

제3의 성 인정 국가가 되도록 하는 것 또한 노동당이 가야 할 길

해결책은 지금 당장 손바닥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지난해 2월 회원개인 정보 입력 메뉴에서 남성과 여성만 선택할 수 있었던 성별 선택란에 제3의 성을 입력할 수 있는‘사용자 개별 입력’선택지를 추가했습니다. 이 선택지를 선택하면 자신이 결정한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상태를 다른 회원에게 소개할 때 자동으로 생성되는 문구에서‘이 남 자’또는‘이 여자’ 로 표기되는 인칭 대명사도 성 중립적인‘이 사람’ 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아 쉽게도 페이스북 한국어 서비스는 이 기능이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어 성정치위원회는 페 이스북 코리아에 시정을 요구할 예정입니다. 인간이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것은 어렵겠으나, 적어도 세상이‘모 아니면 도’ 라는 이분법으로 굴러가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남과 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과 서도 있고, 철수와 영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둑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당이 있습 니다. 이분법을 넘어서는 결단이 한국 사회를 진보시킬 것입니다. 현재 제3 의 성을 인정하고 법체계를 전환한 나

광고

노동당 성정치위원회는, 3월 21일부터 22 일까지 서강대학교에서 개최되는 2015

라는 호주, 독일, 태국, 네팔 정도가 있

LGBTI 인권포럼‘우리는 원한다’ 에서 녹색당・정의당

습니다. 다음 제3의 성 인정 국가는 한

소수자 위원회와 함께 진보정치와 성소수자에 대한 토

국이 되도록 하는 것 또한 노동당이

론섹션(3월21일 오후1시 예정)을 준비했습니다. 많은

가야 하는 길입니다.

관심 부탁드립니다.

삶과 문화 103


오덕 칼럼

사철(私鐵)이 만든 철도의 나라 성민규 서울 동작 당원

사철(私鐵)이 만든 철도의 나라

일본철도의 역사는 1872년 도쿄 신바시와 요코하마를 잇는 도카이도선이 건설된 해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한국 철도가 1899년 경인선 개통으로 시작됐으니 27년이 빠른 셈이다. 일본의 철도건설은 같은 시기 철도건설에 매진하던 영국이나 미국 등 다른 국가들과 마찬 가지로 민간자본이 주도해 건설하고 운영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우리나라의 경부선이나 호남선에 해당하는 도카이도선이나 도호쿠선 같은 도시 권역 사 이를 이어주는 기간선의 건설과 관리는 국가가 맡았지만 도시권역내를 이어주는 도시철도 건설 주도권은 민간자본이 지배하는 사철이 쥐고 있었다. 조선이 강제병합 당한 1910년 이 후 모든 철도가 조선총독부 철도국을 거쳐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손을 타고 해방 이후 철 도청으로 넘어오는, 일관된 운영주체를 유지한 한국철도와는 상황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관이 주도적으로 철도를 건설하고 철도의 관리를 맡는 일원적 지배를 당연 하게 여기게 됐다. 한국에서 철도는 나라의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뿌리박히게 된 것 이 일본의 한반도 강점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역설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일본철도의 역사는 사철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신칸센으로 대표되는 JR 7 개사의 위상과 입지는 압도적이

난카이가 멈추면 오사카 남부가 정지되고 한큐가 멈추면 오사카 북부가 마비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철은 일본 지역사회 내에서강력한영향력을행사한다. 104

지만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좌우 하는 통근과 통학, 시내이동은 대부분 사철을 통해 이뤄지고 있 다. 난카이가 멈추면 오사카 남 부가 정지되고 한큐가 멈추면 오


사카 북부가 마비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철들은 일본 지역사회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 다. 그 이유는 대형 사철들의 설립시기와 설립과정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일본에서 주요 대형사철로 구분되는 16개사의 설립연도를 보면 1884년에 창립한 난카이 전기철도를 시작으로 대부분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몰려있다. 일본의 도시화와 산업화가 가장 급속도로 추진되던 시기에 민간자본이 철 도산업에 뛰어든 것이다. <표1> 일본 16대 사철의 설립시기와 운행 지역 회사명

설립연도

운행 지역

회사명

설립연도

운행 지역

난카이 전기철도

1884년

오사카,와카야마

케이오 전철

1948년

도쿄, 카나가와

도부 철도

1897년

동북 수도권

도쿄 메트로

1941년

도쿄

세이부 철도

1897년

사이타마, 도쿄

오다큐 전철

1948년

도쿄, 카나가와

도쿄 급행철도

1922년

도쿄,카나가와

킨키일본철도

1944년

도카이, 케이한신

게이힌 급행철도

1948년

도쿄,카나가와

케이한 전기철도

1949년

교토,시가,오사카

사가미 철도

1964년

카나가와

한신 전기철도

1899년

케이한신

나고야 철도

1894년

기후, 아이치

한큐 전철

1906년

교토,오사카,효고

케이세이 철도

1949년

도쿄, 치바

서일본 철도

1908년

큐슈

철도가 가진 운송력과 군사적 유용성에 주목한 일본정부는 2차 대전 말기 오사카와 와카야마를 잇는 한와선을 시작으로 대도시 주변의 사철노선을 강제매수하고, 전시기업 통합 정책을 시행하며 사철통폐합 을 밀어붙였다. 철도의 국가 관장력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결국 대형 사철들의 핵심 노선들을 끌 어안는 데 실패하고 종전을 맞았다. 종전 이후 국가가 사들인 노선들은 한와선 같이 일본국유철도(JNR)로 함께 넘어가거나 다시 사철 회사에 환원되고 억지로 통합된 회사들이 다시 분사하는 과정을 겪으며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다.

부동산에서 프로야구까지

전후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그 과정을 통해 형성된 과다하게 밀집된 대도시권 등 여러 면에서 한국과 일본은 사회적, 역사적 궤적을 비슷하게 밟아왔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도시건설과 대중교통의 발달은 다른 식으로 진행됐다. 일산과 분당, 판교 등 수도권 신도시로 대표되는 한국의 도시개발이 정부 주도의 택지개발과 도시건설 이후 도로와 철도가 따라 들어가는 형태로 이뤄졌다면 일본의 도시권은 사철회사가 철로를 놓고 철도회 사가 그 주변의 부동산을 개발하는 형태로 발달했다. 삶과 문화 105


일본인들은 철도회사가 개발한 부동산

사철회사들은 여객운송 뿐만 아니라 부동산개

에서 사철의 교통편으로 통근하고 사

발과 백화점 등의 유통업을 겸업하며 막대한 이

철이 운영하는 쇼핑센터를 이용하며 사철이 운영하는 야구단의 경기를 보 러가는것이다.

윤을 창출했다. 일본인들은 철도회사가 개발한 부동산에서 사철이 제공하는 교통편으로 통근하 고 사철이 운영하는 쇼핑센터를 이용하며 사철이 운영하는 야구단의 경기를 보러가는 것이다. 철도회사들은 철도수요를 만들며 지역사회에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신 전기철도는 1924년 자사의 선로가 지나는 효고 현의 니시노미야 근처의 땅을 사들여 고시엔 야구장을 짓고 한신 타이거즈 야구단을 만들어 수요를 창출 했다. 한큐 전철은 간사이의 작은 도시인 다카라즈카에 극단과 극장을 건설해 간사이권의 관광수요를 창 출했고 지금은 외국인들도 극단 공연을 보기위해 일부러 찾아가는 도시로 만들었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도 철도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사철들은 자사의 철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회사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같은 운행계통을 공유하는 사철 사이의 차별성을 만들어 승객의 충성도를 얻 기 위해 경쟁적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오릭스의 소유로 넘어간 긴테츠 버팔로즈, 소프트뱅크로 주인이 바뀐 난카이 호크스, 일본의 인기구단인 한신 타이거즈 등이 철도회사 간의 경쟁이 가장 치열한 간사이에서 만들어진 이유는 그런 이 유에서였다. 더불어 도쿄에 연고를 두고 있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본래 주인은 국철(JNR)이었다.

오사카 한큐 전철 (사진 : 정정은 편집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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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경쟁

어디까지나 사철은 민간자본이기 때문에 도시계획과 지역균형을 고려해 노선을 건설, 운영하기보다 돈이 될 만한 노선을 중심적으로 개발하고 운영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구간을 3개 회사의 철도가 나란히 달리는 등의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사철이 가장 발달한 간사이에서 오사카에서 고베, 히메지로 이어지는 구간은 4개 철도회사가 5개의 노 선을 놓고 경쟁중이다. 한큐 전철, 한신 전기철도, 산요전기철도가 JR 서일본의 도카이도본선, 신칸센과 경쟁하고 있고, 거기에 준대형 사철인 고베전철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케이한신 지역이 일본의 인구밀집 지역이기에 수요가 있고, 철도노선에 바이패 스가 생겼다는 점은 바람직하지만 민간 철도노선의 난립과 그로 인한 경쟁 격화는 또 다른 문제점을 낳았 다. 사철들은 요금을 내리는 경쟁보다 시설

사철들은 요금을 내리기보다 시설과 속도를

과 속도를 중심으로 경쟁을 시작했고, 이 구

중심으로 경쟁을 시작했다. 결국 2005년 JR

간을 지나는 열차들의 표정속도가 많이 올 랐다. JR서일본은 일반전철에 쾌속 등급 보 다 더 빠른 신쾌속이라는 등급을 도입하며 속도 경쟁을 본격화했다.

후쿠치야마선에서는 지연된 열차를 무리하 게 회복시키려 과속하다 열차가 탈선하는 대형참사가벌어졌다.

JR서일본은 사철을 중심으로 발달한 간 사이의 도시권에서 다소 어긋난 역의 위치와 비싼 가격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JR서일본은 다른 사 철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130Km로 열차의 운행속도를 올리고, 배차간격을 초단위로 관리해서 약점을 보완했다. 열차를 운행하는 철도노동자에게 살인적으로 느껴질 운행수준이었다. JR서일본은 기관사들이 오버런을 했거나 배차간격을 지키지 못했을 때, 인격모독 수준의 일근교육을 강제해 회사의 지침을 반드시 준수하게 만들었다. 결국 2005년 JR 후쿠치야마선에서 기관사가 지연된 열차를 무리하게 회복시키려 과속하다 열차가 탈선해 107명이 죽고 560여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벌어 졌다. 사고 이후, 조밀한 열차운행 시간표와 시간 엄수에 대한 회사의 강박이 사고의 원인이었다는 분석에 따라 운행시간을 늘리고 기관사들에 대한 노무관리도 다소 유연해졌지만 여전히 철도회사간의 과당경쟁 으로 이 지역 철도노동자들은 강한 노동강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철들이 만든 철도왕국의 이면에는 이윤과 효율만을 앞세우는 철도 회사의 경영, 노동자들을 극한상황으로 내모는 과도한 경쟁이 숨어있었다.

삶과 문화 107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

언론의무리한‘박원순’까기, 중요한건팩트다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최근 종편을 중심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의 가회동 새 공관을 일컬어 28억 원짜리‘황 제공관’ 이라고 보도해 논란이 일었다. 전세 28억을 비싸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옛 혜화동 공관이 시세 120억이며, 다른 공직자들의 공관과 비교해 매우 싼 값이라는 점을 알게 되 면 이러한 보도는 허망해진다. 종편의‘황제공관’보도는 소위 말하는‘조지는’보도에 가깝다. 언론이 특정인이나 특정단체를‘조지다’보면 자연스럽게 무리한 보도가 생겨난다.‘오보’ 도 생겨난다. 보수 언론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 박원순 서울시장을 무리하게 조지다 발생한 오보를 정리 해봤다.

조선일보, 박원순이‘학교폭력은 선생님 잘못’ 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2년 5월 15일 스승의 날 중대한 오보가 하나 나왔다. 조선일보는 이 날 서울 대방동 강남중학교를 방문한 박원순 시장이 교사들 앞에서‘학교폭력이 참 이해가 안 가 요, 그건 전적으로 선생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는“스 승의 날 학생들 앞에서 학교폭력을 일방적으로 교사 탓으로 돌린 박 시장의 발언이 적절 했느냐. 그런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고 비판했다. 이 보도는 조선일보 단독보도였다. 그러나 이 보도는 곧 거짓으로 밝혀진다. 서울시가 다음 날인 16일 녹취자료롤 공개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박 시장의 발언은 다음과 같 다.“학교 폭력은 참 이해가 안 가요. 그건 전적으로 성인들의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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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6일 조선일보 10면 갈무리

조선일보가‘성인’ 을‘선생님’ 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기성세대의 책임을 지적한 말이 선생들이 잘 못 가르쳐서 애들이 친구들을 때린다는 식으로 둔갑해버렸다. 조선일보도 오보를 인정했다. 조선일보 는 17일 <바로잡습니다> 코너에서“독자 여러분과 박 시장께 사과드린다” 고 밝혔다. 기자가 환청이라고 들은 걸까? 기사를 쓴 기자에게 직접 확인은 못했으나 미디어오늘이 서울시를 출입하는 기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떻게든 박원순 시장을 조질만한 내용을 구해오라는 데스 크의 지시가 계속 이어지면서 현장에 있 던 조선일보 기자가 스트레스를 받았고

박원순 시장을‘조질’ 만한 내용을 구해오라

그 와중에‘성인’ 을‘선생님’ 으로 잘못

는 계속된 지시에 스트레스를 받은 기자가

들었다는 것. 의도적 왜곡이 아니었다니 다행이지만 기자가 처한‘웃픈’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인’ 을‘선생님’ 으로 잘못 듣고 오보를 내 보냈다. 기자의‘웃픈’현실이다.

조선일보의 또 다른 오보, 5시간이나 늦온 박원순의‘늦장대응’

조선일보는 2013년 7월 16일, 박 시장과 관련해 또 다른 오보를 저질렀다. 2013년 7월 15일 서울 동작구의 노량진 배수지에서 상수도관 설치를 하던 인부 7명이 수몰돼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하 는 참사가 발생했다. 조선일보는 박원순 시장이 이 사고에 늦장대응을 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의 비판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사고 발생 30분 만인 이 날 5시 30분 쯤 문승국 서울시 부시장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박원순 시장은 밤 10시 25분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늦장대응 아니냐 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부시장은 30분 만에 사고현장에 도착했는데 박 시장은 5시간이 지나서야 사 고현장에 도착했다는 주장이었다.

삶과 문화 109


하지만 조선일보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미디어오늘 취재 결과 문승국 부시장은 오후 9시 26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박 시장이 도착한 시간과 1시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문 시장 은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언론에서 제대로 사실 확인도 안 하고 악의적으로 소설을 썼다” 고 말했 다. 서왕진 당시 서울시장 비서실장도 미디어오늘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박 시장은 당시 예정된 만찬 을 취소하고 집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저녁을 해결한 뒤에 현장상황에 대한 결과보고를 받고 8시 25분 경에 현장으로 출발을 해서 2시간 만에 도착을 했다”박 시장이 2시간 만에 도착한 이유는 한강대교 남단부터 소방본부 차량과 경찰차가 두 개의 차도를 막아서 교통체증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히 박 시장이 사고 직후 바로 도착

물론 박 시장이 사고 직후 바로 도착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비판

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

에 있어 중요한 것은 팩트다. 이 기사는 아직도

만비판에있어중요한것은팩트다.

수정되지 않고 조선일보 온라인 홈페이지에 그 대로 걸려있다.

1년 전 자료로 박원순 조지는 문화일보의‘뜬금포’

언론의‘정치인’조지기가 가장 극성을 부리는 시기는 선거 때다.‘석간 조선일보’ 라 불리는 문화 일보는 지난해 5월‘서울시・충남도 안전관리 꼴찌’ 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세월호 참사로 안전문제가 이슈화되는 속에서 박원순 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를 겨냥한 기사였다. 문화일보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객선 진도 침몰 참사로 재난・안전 관리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된 가운데 지난해 광역자치단체 평가에서 서울과 충남이 광역시・도 중 꼴찌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9일 안전행정부가 정부업무 평가 기본법에 따라 발표한‘2013년 지방자치단체 합동평가’따르면 서울은 안전관리 분야에서 69.9 점을 받아 특별・광역시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충남도 같은 경우는 72.4점으로 8개 도 중 꼴찌였다” 이 기사에는 중요한 오보가 있다. 기사는‘9일 안전행부가 발표한 지자체 평과결과’ 라고 출처를 밝 혔으나 사실이 아니다. 안행부가 2012년 업무실적에 대해 2013년 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2013년 12월 18일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안행부는 문화일보 보도 이후 반박 보도자료까지 냈다. 문화일보가 1년 전 자료를 마치 최근 자료인 것처럼 가져다 기사를 쓴 것이다. 거기다 기사에는 반론도 없었다. 심지어 새누리당 관계자, 새누리당 충남지사 후보의 코멘트까지 붙여 박 시장과 안 지사를 비난했다. 문화일보의 허민 정치부장은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자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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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8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 (사진: 오마이TV 갈무리)

2013년 자료가 맞는데. 우리가 기사 쓴 시점에 따라 9일이라고 썼다” 는 황당한 해명을 했다. 허 부장은 또한“2013년 자료이지만 문화일보가 단독으로 입수해서 썼다” 라는 말까지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자료는 안행부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다. 허 부장은“다른 데서 기사가 안 나왔기 때 문에 우리가 단독이다” 며“다른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안전 문제가 이슈가 되니깐 어떤 식으로든 이 슈가 되니깐 썼다” 고 설명했다.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야당 도지사들을 까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 문제가 부 각되자 이를 통해 야당 도지사들을 비난한 것이다. 특히 문화일보는 의심 가는 정황이 하나 있다. 문 화일보의 대주주는 문우언론재단과 동양문화재단으로 두 재단은 각 30%씩 주식을 갖고 있다. 이 재 단은 현대중공업에서 출자해 만든 재 단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박원순 시

문화일보의 대주주는 현대중공업에서 출자해

장과 서울시장 선거에서 겨루었던 인

만든 재단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박 시장과

물이 현대중공업 회장 출신의 정몽준

서울시장 선거에서 겨루었던 정몽준 후보와

이었다. 문화일보와 정몽준 후보는

문화일보는‘특수관계’ 였던셈이다.

‘특수관계’ 였던 셈이다. 박원순 시장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공직자에 대한 언론의 검증과 비판은 날카로 워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비판 그 자체보다 비판의 근거, 즉 팩트다.

삶과 문화 111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힙합하는 당직자 윤원필 글 : 최윤정 문화예술위원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앨범 하나 내보려다 빚쟁이로 몰리다

4층 총각 윤원필 당원을 만난 적은 몇 번 밖에 없지만, 만날 때마다 (거의 매번) 빚쟁이들의 빈축을 사 는 모습을 보았다. 음반을 제작한다고 미리 판매금을‘땡겨’놓고 감감무소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는 그 독촉도 종식되었다.《가정식 백반》 이라는 타이틀의 1집 앨범이 나온 것이다. 4층 총각의 1집《가정식 백반》 의 가사집 마지막에는 25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말하자면, 채권자 명단이다. 여기에는 4층 총각에게 소송을 걸려고 준비 중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이름도 있으니,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만, 채권자는 채권자였던 셈이다. 채권자 중에는 군대 가기 전에 음반 값을 내고 제대한 후 에 받았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오래 기다리긴 했다. 《가정식 백반》 은 이렇듯 오랜 기다림 끝에 세상에 나온 앨범이다. 더구나 (주로) 당원들의 십시일반으로 음반 하나가 탄생할 수 있었다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흐뭇해진다. 112


힙합 스피릿으로 집회 현장을 누비다

윤원필 당원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시청에서 집회가 있던 날 뒤풀이 장소에서 우연히 합석하 게 된 것인데, 음악을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음악 하는 사람은 하얗고 긴 손가락, 말간 얼굴과 가녀린 턱 선을 갖춰야 한다는 선입견은 없지만 (아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선입견이 있는 게 분명하다) 자외선에 과 다 노출되어 그을린 얼굴, 헝클어진 머리, 경상도 사투리의 윤원필 동지와 음악을 연결시키기는 솔직히 쉽지 않았다. 음반이 나오고 나서야 윤원필 당원이 래퍼라는 것 알았다. 그제야 그와 힙합이‘묘하게’어울린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가 좋아한다는 래퍼 에미넴이 주연을 맡은《8 마일》 을 봐도, 미국 디트로이트의 빈민계층 이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랩 배틀을 벌이지 않는가. 래퍼이자 노동자인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과 반골기질은 소위‘힙합 스피릿’ 이라고 할 수 있으니, 각종 집회에 어 김없이 나타나 투쟁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윤원필 동지가 힙합을 선택한 건 어쩌면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윤원필 동지가 힙합을 선택한 것은 숙명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인 이유에서였다. 가난한 이 민자들이나 흑인들이 돈 없이도 몸만으로 힙합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악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몸으로 부 딪혀보면 될 것 같아서 힙합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힙합이라고 만만하게 보고 덤볐다가는 큰 코 다친 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결국은 화성악 책을 보고, 악보 공부도 해야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힙합을 했다?!

윤원필 당원은 서른 둘, 적지 않은 나이에 힙합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어머니는 윤원필 동 지가 서른 살이던 때 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엄마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원필아, 너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한 방 맞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에게 제대로 한 방을 맞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스무 살에 했던 고민이 생각났다. ‘마흔이 되기 전까지 세 가지를 이루겠다. 음반, 만화책, 소설책!’스무 살 때는 그 세 개만 이루면 죽어 도 좋다고 생각했다. 윤원필 동지는 한국 나이로 올해 서른아홉 살이다. 마흔까지 일 년을 남긴 상황에서 이루고 싶었던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이루었다. 훌륭하다! 앞으로 1년 안에 만화책과 소설책을 모두 내는 것은 무리겠지만, 못 이루면 못 이루는 대로 마흔이 되어도 안 죽어도 좋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만화책을 내는‘미션’ 을‘클리어’ 하기 위해서는 갱지를 높게 쌓아두고 6개월 동안 데생집을 베껴 그렸 삶과 문화 113


다. 그때 갉고 닦은 그림 솜씨가《가정식 백반》표지 디자인으로 빛을 발했다. 소 설은 정말 재미있는 무협소설을 쓰고 싶 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음반과 소설책과 만화책이 냐 했더니, 고등학생 시절 내내 했던 일 이 음악 듣고, 만화책 보고, 무협소설 읽 고, 비디오 본 것이, 전부라고 한다. 당시 듀스, 김진표, 디제이 DOC를 들으며 락 을 통해 랩을 접했던 것이 지금 힙합을 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긴 산고 끝에 탄생 4층총각 1집《가정식 백반》

된 첫 CD는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드리 고 싶었다. 하지만, 멀리 마산에 있는 묘

소를 찾기도 전에 선 지급을 해준 고객들에게 빚부터 갚아야했던 것이 못내 죄송하다. 자식에게‘하고 싶 은 대로 하고 사는 삶’ 을 권유하는 고매한 인격의 어머니가 순서가 밀렸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실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윤 동지의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누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고 했지 힙합 하라고 했 냐” 고 하실 수는 있을 것 같다.

관광하러 갔던 영국에서 운동에 눈을 뜨다

어린 시절의 윤원필 당원에게는 딱히 꿈이랄 게 없었다. 막연히,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을 둔 가장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교수이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인 교육자 집안에 태어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딱히 아쉬운 것 없이 자란 배경 탓일까? 의외로 곱게 자란 그가 어린 시절 꿈과는 점 점 멀어지며 험한 집회현장마다 참가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집회에 나가자고 하면 도망 다니거나 피했다. 집회의 전체주의적인 분위 기가 싫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마산에서 유명한 무학소주에 입사했다. 지인들은 윤원필 동지에게 딱 어 울리는 회사라고 했지만, 입사 3개월도 안되어 뛰쳐나왔다. 아침마다 넥타이 매고 틀에 짜인 조직 생활을 하는 것이 도저히 생리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2년 말에 영국 에든버러에 관광을 하러 갔다가 이라크 참전 반대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 다. 당시 영국의 집회는 한국에서 보던 시위와 확연히 달랐다. 획일화되지 않고 소규모 단위에서 개인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운동의 가능성이 보였다. 114


그리고 2008년, 촛불집회에서 영국 에든버러의 반전집회와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개개인의 힘으로 조직화 없이도 운동이 가능하겠다고 느낀 그는, 당시 진보신당에 가입했다.

사람을 잘(못) 만나 힙합하는 당직자가 되다

이후 진보신당 도봉 당협에서 활동한 윤원필 동지는 당시 도봉 당협 위원장이었던 이상호 당원의 권유 (어쩌면 회유와 압박)로 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처음 사무국장을 맡을 때만 해도, 워드나 좀 쳐주고 일 좀 도

와주는 사무직 정도로 생각했지만, 결국 사람을 잘(못) 만나 중앙당 비정규노동실 실장을 거쳐 지금은 도 봉 당협 위원장까지 연임하게 되었다. 음악 편집 프로그램인 큐 베이스에 의지해 맨땅에 헤딩만 한 지 3년. 제법 곡이 곡 같이 만들어진다고 느껴지던 무렵이 도봉당협 사무국장을 맡게 된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당시 도봉 당협 사무실이 건물의 4 층에 있었던 터라 이웃주민들이 도봉 당협 남자 활동가들을‘4층 총각’ 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4층 총 각’ 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힙합과 당직자가 만나 독특한‘거리의 음악’ 이 탄생하는 태동이 시작된 것이었다.‘4층 총각’ 이라는 작명부터가 당과 연관되어 있으니,‘힙합하는 당직자’ 의 탄생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원필 당원은 애당초 운동권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힙합이 라는 게 어려운 용어나 개념어로 만들어지기보다는 대중들이 자주 쓰는 단어들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 문에, 곡을 만들어서 오디션에 보내볼 생각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늘 대중가수를 지향해 왔고(지양 아님), 주요 타겟층도 2030 여성들이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힙합하는 당직자’ 라는 숙명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첫 데뷔 무대도 당협 행사였으니 말이다. 2011년 도봉 당협이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공동출범식을 개최했는데, 취소된 공연을 커버하기 위해 윤 원필 동지와 이상호 전 도봉 당협 위원장이 무대로 올라간 것이다. 모든 극적인 데뷔 무대는‘땜빵’ 으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첫 공연 이후 서울시당이 주체하는 행사 에 한 번 더 오른 후, 단 세 번째 만에 재능 집회장에 입성한다. 거기서 민중가수 김성만 선배를 만나게 되 면서, 그 후 끊임없이 집회장에 불려 다니게 되었다. 이삼십 대 여성을 타겟으로 대중적인 래퍼를 꿈꾸던 윤원필 당원의 야무진 포부는 집회 공연을 다니면서 다른 층위를 갖게 되었고, 마침내《가정식 백반》 이탄 생하게 된 것이다.

여느 래퍼와 달리 실체 있는 대상을 항한 저항을 보여주다

《가정식 백반》 >에 민중가요라고 할 만한 트랙은 1, 2, 9번 트랙인 <탈환>, <광장에서>, 그리고 <붉은 달 의 춤>뿐이다. 앨범 제작을 위한 선투자를 해주고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당 사람들을 위해서 신경 써서 만 삶과 문화 115


든 곡들이다. 앨범 제작에 2년이나 걸린 것은, 비정규노동실에서 일하면서 집회를 쫓아다니느라 짬이 없 어서였기도 했지만, 이삼십 대 여성을 타겟으로 잡은 전략의 실패를 깨닫고 수정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었 기 때문이다. 힙합에는‘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났다’ 는 자의식의 과잉이 들어있기도 한데, <탈환>에 그런 면을 넣고 싶었다. <광장에서>로는 메시지는 담되 대중성을 획득하고 싶었다. 굉장히 많은 래퍼들이 반항과 싸움을 기초로 하지만 그 대상이 명확한 경우는 많지 않다. 실체 없는 대 상을 적으로 삼다보니 사회 전체에 대한 막연한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그치기도 한다. 반면 <탈환>과 <붉은 달의 춤>은 명확하게 적과 상황을 설정해놓고 풀어낸 랩이다. <탈환>은 공장 밖에서 공장 안으로 들 어가는 싸움을 시작하는 대치 상황을 그린 것이고, <붉은 달의 춤>은 천막농성장을 지켜내는 상황이다. 그에게 익숙한 현장의 모습을 랩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의미보다는 형식으로 타이틀을 정하다

앞서 얘기했듯 4층 총각의 1집 타이틀은《가정식 백반》 이다. 1집에 담겨진 10곡을 타이틀이 가지는 의 미로 묶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타이틀에 어울리는 곡은 4번 트랙 <밑반찬 1>과 10번 트랙 <밑반찬 2> 정 도다. 그나마 랩이 없는 기악곡이다. 이번 음반은 의미로 묶었다기보다 형식으로 묶었다는 것이 윤원필 당원의 설명이다. 가내수공업, 즉 홈 레코딩으로 제작된 앨범이라는 것을 표방하는 타이틀인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앨범을 내고 싶어 시작했는데, 제작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음반 시장의 부조리함이 보였고, 유통망이‘개판’ 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비자가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한 곡을 클릭해서 들으면 6원의 수익이 떨어진다. 그 중 통신사가 3원을, 제작사와 창작자가 나머지 3원을 나눠 가진다. 1만 원 벌기도 힘든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독립 음반 제작 의지에 불타게 되었지 만, 홈 레코딩이다 보니 믹싱 능력이 떨어져 전반적으로 음반의 질이 떨어졌다. 2집 준비를 하고 있는데 2 집은 사람 손을 좀 더 거쳐서 질적 향상을 조금이라도 꾀해보고자 한다. 홈 레코딩이었다고 하지만 도와준 사람도 많다. 8번 트랙 <미친 듯이>만 노래를 직접 불렀고, 나머지 트 랙들은 품앗이로 도움을 받았다. 녹음실도 있었다. 느티나무 쉼터 캠핑장, 도봉 마을예술창작소, 중랑 민 중의 집 등에서 녹음을 했다. 이와 같이 묵묵히 함께 걸어와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앨범이었다.

노동당이 해야 하고 노동당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결국 사람이 힘이다. 노동당이라는 이름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 노동당이 가야할 길은 정해진 것 같다 고 윤원필 동지는 말한다. 지역 당협 위원장으로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며, 묵묵히 노동당이 가야할 길을 같이 걸어가자 말한다. 116


노동당 문화 팟캐스트《컬쳐쇼크》 에 출연한 윤원필 당원

“노동당의 지역위원장은 달라요. 우리는 노동당이에요. 노동당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지는 함축적 의미 가 있어요. 베이스를 깔아주고, 때로는 포용적이어야 하고 때로는 더 냉정해야 합니다. 노동당이라는 이 름에 걸맞는 역할이 있다고 봐요. 노동당이 해야 하고, 노동당이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어요. 작지만 중 요한 목소리를 계속 내는 일들을 조금씩 해야 합니다.” 래퍼를 실제 만나본 적이 없어서, 내게 윤원필 당원은 만나본 래퍼 중에 가장 마음씨 넓은 래퍼일 수밖 에 없다. 하지만 앞으로 전 세계의 래퍼를 다 만나게 되더라도 윤원필 동지가 가장 포용력 있는 래퍼일 것 같다. 래퍼로서의 저항정신을 투쟁 현장에서 구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구석진 곳에서 낮은 목소리 를 내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윤원필 당원. 누군가 차별을 받고 있거나, 해 고를 당했거나,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는 윤원필 동지가 함께 하리라.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9회 4층총각 윤원필 편 듣기 http://m.podbbang.com/ch/1858?e=2162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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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차브》 와 계급사회 차브 오언 존스 / 북인더갭 / 2014년11월 / 17,500원

권상우 대한민국 고등학생

우리는 속고 있다.

우리는 속고 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사회 안에는 분명히 계급이 존재하고, 한

대한민국 자본주의

사람 한 사람의 가치는 같지 않다. 그리고 그 계급을 나누는 것은 소득이다. 이런

사회 안에는 분명

계급적 구분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며, 상위계급의 몇 안 되는 사람이 대다수

히 계급이 존재하

하위계급 사람들의 척추에 빨대를 꽂고 양분을 약탈하는, 매우 불합리한 구조를

고, 한 사람 한 사

지녔다.

람의 가치는 같지 않다. 그리고 그 계 급을 나누는 것은 소득이다.

그러나 모른 척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항상 강조하는 말들,‘사람의 가치는 모두 같다’ ,‘We are the world’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같은 말들은 계급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의 착취를 망각하게 한다. 하위계급의 사람들도 노력하면 누 구나 상위계급에 진출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자꾸 되뇐다. 이 계급 체제의 유지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자신이 처한 환경이 열악하다고 믿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위계급의 사 람들은, 항상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열려 있고 자신들도 본인들이 누리는 부와 특 권을 언제든지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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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무엇인가? 지금도 수많은 비정규직이 기업의 배를 불리는 일회용 스푼으로 써 철저히 소모되고 버려진다. 애초에 자기들이 가진 것을 사회와 나눌 생각은 요 만큼도 없다. 자신들이 져야 할 의무나 세금마저도 갖가지 방법으로 피해버린다. 극단적이긴 하지만,‘땅콩회항’사건으로 우리는 상위계급의 사람들이 자기보 다 계급이 낮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개인의 노력은 태어날 때부터 물고 나온 금수저에 짓이겨지는 꼴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내려놓겠다니, 이보다 더한 거짓말은 없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 지 않아서 나는 정말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의 경제수준에 따라, 한 반 에서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아이들의 삶이, 그들이 살면서 느낄 감정이, 그들의 삶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된 게 다 우리 잘못일까?” 아빠가 직장과 돈을 잃고 외할머니 집에 얹혀살게 되었을 때다. 항상 따뜻한 가 족일 것 같았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 가족을 떠안 고 나서부터는 나를 볼 때 항상 무한한 사랑의 눈길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 을 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힘겹게 만든 카페가 건물주의 재건축 통보와 함께 날아온 철거 계고장 앞에서는 흑자는커녕 투자한 돈마저 먼지 더미가 된다는 사실 을 알았을 때,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알고 싶지 않아도 뼈가 시리도록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소득이 곧 그 사람의 계급이라는 걸. 그렇게 갈린 계급들 의 사회적 위치가 결국엔 한 사람 삶의 가치를 저울질하게 한다는 것을. 인간의 삶의 가치가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건, 그저 꿈같은 얘기이며 낮은 경제수준,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자신을 위로하거나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사회에서 이탈하지 않고 살게 하려고 하는 허울 마지막 전 재산을 들인 카페가 넘어 갈 때에도 그 저 우리 가족이 못나 서, 노력이 부족해 서라고 애써 믿으

좋은 말뿐이라는 걸, 돈이 제일의 가치이며 모든 것 위에 있다는 것을! 의료, 복지, 교육 등 경제적 계급에서 벗어나 평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그 누구도 자신의 경제적 계급을 정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좋든 싫든 계급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막 중2가 되던 때, 나는 그것 을 혹독하게 느꼈다.

려 했다. 모두가 나

하지만 모른 척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 학교… 내가 사는 모든 곳,

에게 그렇게 말했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계급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

으니까.

히려“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많다” ,“우리나 삶과 문화 119


라보다 훨씬 못한 나라도 수두룩하다”이런 말들만 넘치도록 들을 수가 있었다. 우 리 집이 가난하고 늙으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댁에 얹혀사는 것이, 우리 아빠가 직업을 잃은 것이, 우리 집이 가난한 것이, 더럽게 썩은 우리 사회의 구조 때문이 라고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나는 그저 주변에서 지겹게 들어 주입된 말들로 스스 로 최면을 걸어 위안하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남은 전 재산을 들인 카페가 넘어갈 때에도,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밥 한술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걸 볼 때에도, 엄마가 매일 밤 우는 모습 을 볼 때에도 그저 우리 가족이 못나서,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애써 믿으려 했다. 모두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닌데, 내가 제일 좋아하 는 우리 아빠는 패배자가 아닌데, 항상 우리 가족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는데, ‘이렇게 된 게 정말 다 우리 잘못일까?’ 하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사회가 심어 놓은 보편적인 통념의 틀이 나를 천근만근 짓눌러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았다. 정말 한 글자만큼도 추억하기 싫은 그 시간은 이제 모두 지나갔다.

《차브》 , 조작된 계급사회의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다 그런데 박근혜정부 3년에 접어든 지금, 공장 굴뚝 위에 올라간 쌍용차 노동자 들을 보면서,‘증세 없는 복지’ 라는 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자꾸만 세금이 오 르는 걸 보면서, 그때 목소리를 내지 못한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시험과 크 리스마스, 연말로 한창 바쁜 척 하고 있던 12월의 끝자락 즈음, 나의 책을 만들어 주신 고마운 출판사‘북인더갭’ 에서 한 권의 책이 왔다.《차브》 라는 불친절한 제목 을 달고 나에게 온 그 책은, 그야말로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그동안 어떤 책 이나 교과서도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던 조작된 계급사회의 현실을 낱낱이 대면하 게 해주었다. 《차브》 는, 패배감 과 열등감, 억울함 에 아직 짓눌려 있 던 나를 끄집어내 주었고, 지금까지

《차브》 는 제2의 조지 오웰이라는 평을 받는 영국의 오언 존스가 쓴 화제작으로 안병률 대표님이 직접 번역을 하셨다. 마가렛 대처가 총리로 집권하던 십수 년 간 노동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보수당과 신노동당이 부자들만을 위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한때는 영국의 소금이라 불리던 노동계급이 일자리를 잃고 정부의 복

내가 지녔던 모든

지지원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하층계급으로 전락해 오늘날‘차브’ 라는

의문, 피하려 했던

비하된 이름으로 불리며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진실을 이 세상에 까발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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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브》 를 읽으며, 영국이 선진국 중에서 양극화가 가장 심한 나라이고 노조를 탄압하는 것이나 언론과 정치인들의 태도도 우리나라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


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때 했던 생각들은 멍청한 생각이었 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회가 주입한 통념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 을 스스로 깎아내리고, 내가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열등감마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에 대한 해방감이 든 적은 처음이 었다. 이 책은 중학교 시절 지독하게 겪었던 패배감과 열등감, 억울함에 아직 짓눌 려 있던 나를 끄집어내 주었고, 지금까지 내가 지녔던 모든 의문, 피하려 했던 진 실을 이 세상에 까발려 주었다. 《차브》 는 계급이 갈린 세상에서 부자들이 거대 공룡처럼 모든 걸 독식하는 사 태를 고발한다. 그리고《차브》 에서 보여주는 영국사회 계층 간의 갈등은 우리나라 에서도 머지않은, 아니 이미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는, 아니 대한민국 건국 이래 보수를 자칭했던 모든 대통령은 이 같 은 문제를 알고도 눈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면 악화시켰 지 한 번도 노동계급의 빈곤에 대해 생각해 준 적이 없다. 그들 역시 부유한 계층 의 정점에 있으므로, 자신들의 부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 가정과 같은 최하 계급을 철저히 씹어 먹고 짓뭉개고 척추까지 빨아먹는 것을 예사로 알았다.《차 브》 는, 최상위 계급을 위해 다수의 하위계급 사람들이 피를 빨리는 이 불합리한 구 조가, 기업과 정권이 죄 없는 사람들의 척수를 뽑아 마시는 우리 사회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 마냥 씨부렁거리는 꼰대들을 맹렬하게 물어뜯을 수 있는 책이라 통쾌하게 생각한다. 《매트릭스》 에서 빨 간 약을 선택해 현 실로 나아간 네오

계층 간의 문제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피부에 와 닿는 문제인 데도, 노동계층과 하위계층에서 보수를 지칭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것 은 참 심각한 문제다. 세대교체가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하위계층의 노동

처럼 진실을 알고

자들이 최상위계층의 사람들을 두둔하고 나선다. 이러한 세뇌 또한 기득권 수구

잘못된 현실에 저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항하는 것! 여기부

좀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터가 시작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무엇이 옳은지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매트릭 스》 에서 빨간 약을 선택해 현실로 나아간 네오처럼 진실을 알고 잘못된 현실에 저 항하는 것! 여기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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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처럼 남은 1985년의 어느 아침 풍경 “형, 잘 다녀오세요.”수원역 광장 시계탑에 모여 선배를 배웅하고 각자의 학교로 향하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다들 아침 댓바람부터 술이나 한잔 하고 싶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렇 게 전방입소하는 이를 배웅했던 1985년 어느 아침 풍경은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도 낙인처럼 남아 쓴 웃음을 짓게 합니다. 단지 1주일간 훈련받고 돌아오는 전방입소였음에도 가볍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습 니다. 아마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행해온‘녹화사업’ 의 영향 때문이었을 겁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입대시켜 학교에서 격리하고자 했습니다. 이른바 녹화 사업이라고 합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녹화사업은 좀 더 악랄했습니다. 보안사에서 주도했던 전두 환 정권의 녹화사업은 단순 격리 차원이 아니라, 강제 입대시킨 학생들에게 자술서를 강요하고 그들을 출 신 학교 운동권의 정보를 빼오는 프락치로 활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항하는 이들에게 돌아오는 건 가 차 없는 고문과 가혹행위였습니다. 그러다 1984년 바깥 세상에 강제 입대와 프락치 활용 등이 알려지며 여론이 악화하고 국회에서조차 문제가 되자 1984년 가을에‘소요 관련 대학생 조기 입영제’ 는 폐지되었 습니다. 운동권 학생 강제 입대와는 다르지만, 80년대 대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문무대와 전방에 입소하여 강제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학 1학년에는 문무대입소를, 2학년에는 전방입소를 각 1주일씩 이행 하면 이후 정식으로 입대했을 때 군복무를 45일간 단축해주는 제도였습니다. 이 역시 대학생들을 억압하 려는 녹화사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86년. 전방입소 반대 투쟁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지만 아직까진“어차피 하게 될 전방입소” 라는 분위 기가 더 많았다고 기억합니다. 아마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그리되었을 겁니다.

전방입소 반대와 반미투쟁에 불을 댕긴 스물세 살 두 죽음 1980년대 중반은 광주의 피를 발판 삼아 들어선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와 전두환 정권을 용인한 미 국은 전두환 정권의 수호자라는 불신이 맞물려 반미투쟁이 거세게 일어날 때였습니다. 1980년 12월9일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강원대 성조기 소각, 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니 문무대입소와 전방입소는 대학생을 억압하는 기제인 동시에‘양키 용병 교육’ 이라 는 인식이 확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6년 봄.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인‘구국학생연맹’ 은 민족해방민 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에 기초하여 반미자주화투쟁, 반파쇼 민주화 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을 투쟁

노래의

벗이여 해방이 온다 민정연 문화기획자, 꽃다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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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이들은 그해 4월 공개투쟁기구인‘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자민 투)를 결성하고 그 산하에‘반전반핵평화옹호주쟁위원회’ 를 결성해 대학 2학년생들의 전방입소 의무군사

교육을‘양키 용병 교육’ 이라고 규정하며 전면적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 장이었던 이재호와 자연대 학생회장이었던 김세진이 이 투쟁의 선봉에 섰습니다. 전방입소 투쟁을 막으 려고 교문까지 폐쇄하자 이들은 전방입소 대상자였던 수백 명의 학생들의 신림사거리 연좌농성을 주도했 습니다. 몸에 시너를 끼얹고“시위대에게 덤벼들지 마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가까이 오면 분신할 것이다” 라고 외치는 이재호와 김세진을 향해 경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진압을 단행했고 결국 이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습니다. 생명만은 건지기를 바랐던 간절함을 뒤로하고 김세진은 5월 3일에, 이재호 는 5월 26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스물세 살의 두 죽음은 전방입소 반대와 반미투쟁을 대중적으 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무대입소와 전방입소라는 대학생 강제 군사교육은 1989년에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솟아오른 눈물로 그려낸 노래 학창시절 메아리 활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노래 분과‘새벽’ 에서 문화운동을 하 던 이성지는 후배들의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후배들이었음에 도‘스스로 사회변혁을 위해서 노력한다고 자부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런 후배들에 비추 어 난 이 비극적이고 폭압의 시대에 과연 떳떳하게 항거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라고 자문하며 부끄러웠다 고 했습니다. 서울대 81학번으로 여러 죽음을 봤던 그였지만 어찌 죽음에 익숙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가 슴이 터질 것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던 그는 노래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래를 만들며 그는 자신이 스스로 이재호가 되고 김세진이 되어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았답니 다. 내일 있을 투쟁을 사수해야만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 신나를 사들고 오는 길에 떠올랐을 부모의 얼 굴, 시위를 막아선 경찰에 대한 분노, 더 이상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을 떠올리며 솟아오른 눈물은 오선지 위에서 그대로 노래가 되었습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재호와 김세진의 추모제가 열린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벗이여 해방이 온다>가 처음으로 울 려 퍼졌습니다. 윤선애가 그 자리에 모인 청년들의 분노와 격정, 눈물을 오롯이 담아 부른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30년 세월이 흐른 지난 지금도 회자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성지는 훗날 20주기를 맞 아 쓴 글에서“<벗이여 해방이 온다>가 내가 만든 노래가 맞는가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내가 가진 음 악적 능력과 젊은 용기가 던져주던 어설픈 혈기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분에 넘치는 노래 같아서.” 라고 회

스물세 살의 두 죽음은 전방입소 반대와 반미투쟁을 대중적으로 확산했습니다. 문무대입소와 전방입소라는 대학생 강제 군사교육 은1989년, 완전히폐지되었습니다. 삶과 문화 123


고했습니다. 지금은 문화운동을 그만두고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2005년에 지금까지 만들었던 노 래를 모아 음반《reminiscence of 80’ s(만월당)》 을 발표하며“열정과 회한이 깃든 이 노래들을 한번은 세 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도 내 마음의 빚으로 항상 가슴 속에 담겨있는 고 김세진・이재호 두 분의 영 혼 위에 이 음반을 바친다.” 고 밝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더 두 죽음을 기억하게 해주었습니다.

청춘이 당연히 꿈꿀 수 있는‘그날’ 이 오기를 80년대에 청춘이었던 제 또래들이 요즘 젊은이들을 향해“요즘 것들은 패기가 없어. 스펙 쌓기에만 몰 두하는 이기적인 젊은 것들. 우리가 너희 나이일 적에는 말이야….” 로 시작하는 지청구를 늘어놓곤 할 때 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젊었던 80년대는 그나마‘개천에서 나는 용’ 이 될 가능성이라도 있었던 시절 이었습니다. 아직은‘우리 손으로 기성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는 꿈을 꿀 수도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21세기가 되니 절대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피 흘리며 역사의 물 꼬를 바꾸려던 몸부림은 좌절되었고 입에 풀칠할 직장 하나 구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습니다.‘꿈’ 이라는 걸 꾸기 힘들게 된 지금의 사회는 80년대 청춘이었던 우리 세대가 만들어놓은 세상인데 자성보다 는 80년대 미화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야단 먼저 치고 있으니 미안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청춘이 절망스 러웠던 만큼 21세기의 청춘의 절망을 이해할 법도 한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재호와 김세진과는 다른 식으로 사회적 타살을 당하고 있는 젊음이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른 척하고 있는 걸까요? 1986년에‘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 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라고 했던 이창학은 2014년에‘미안 해 미안해 너를 지켜주질 못해서 사랑해 사랑해 네가 남긴 모든 것들을 약속해 굳게 약속할게 영원히 너를 잊지 않을게’ 라고 세월호 참사로 스러져간 청춘에 바치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1986년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눈물로 불렀던 윤선애도 2014년 어느 여름날, 거리에서 노래했습니다. 매우 오랜만에 그녀가 거 리에 나선 것은 세월호 참사 때문이었습니다. 이재호와 김세진을 기리며 노래를 만들고 불렀던 두 사람이 30년 세월이 흘러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청춘들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1986년이나 2014년이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청춘. 2014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어느 시절이나 청춘은 이다지도 슬퍼야 하는 세대인 걸까요? 패기 있게 꿈을 꾸며 살라고 말하기 전에 당연히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을 수는 없는 걸까요?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 믿는 구석도 있습니다. 유사 이래 늘“요즘 젊은 것들은… 쯧쯧” 이 라고 지청구를 들었음에도 젊음은 자기들 방식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는 사실 에 기대어 봅니다.

이재호와 김세진을 기리며 노래를 만들고 불렀던 두 사람이 30년 세월이 흘러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청춘들을 기립니다. 어느 시절 이나청춘은이다지도슬퍼야하는세대인걸까요? 124


벗이여 해방이 온다 작사・작곡 이성지

그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가소서 투쟁으로 함께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사진 :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을 다룬 다큐멘터리《과거는 낯선 나라다》 (2007)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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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김희서 구로구의회 의원

박은지 동지 잘 지내나요? 당신이 떠난 지 1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곳에서는 아픔도, 힘든 일도 없이 잘 지내길 기도합니다. 당신의 무덤가에 몇 번인가 찾아갔지만, 여전히 당신의 빈자리가 실감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세 월호 침몰, 통진당 해산, 노동당 대표단선거… 진보정치에, 우리 당에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문득문득‘당 신이 있었으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역할을 했을까?’생각하곤 합니다. 여전히 당신이 진보정치 활동가 로, 노동당의 부대표로, 우리의 동지로 살아있는 것만 같습니다. 얼마 전 박은지 동지 아버지와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만났습니다.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이 두고 갔을 혹시 모를 아픔이라도 모두 풀어주고자 노력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당신의 동지들인 우리는 무 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예전보다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이를 보면서 이 아이가 엄마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엄마를 대신해 엄마 친구들을 더 편하게 느끼도록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 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뭘 했으면 좋겠소? 박은지 동지!” 라고 물으면“뭘 물어요. 즐겁게 하세요. 지금 당장 행동으로 표현하세요. 절 두고 슬퍼하지 말고 그 시간에 박은지가 하고 싶었던 것을 살아있는 동지 들이 다 같이 힘 모아서 하세요.” 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당신이 사랑했던 것을 기억하고 챙겨보려 합니다. 딸 박은지, 엄마 박은지, 사회운동가 박은지, 인간 박은지의 작은 부분이라도 함께 해보려고 합니다. 1주기인 3월8일에 맞춰 당신이 활동했던 공간, 단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기적으로 추모사업을 진행하려 합니다. CMS후원도 모으고, 당신의 말과 걸어온 길을 모아 출판도 해보려고요. 그렇다고 아주 많이 기대하지는 마세요. 거창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조촐하지만 아름답게 해볼 생각입니다. 부모님과 ○○이를 늘 챙기겠습니다. 추모사업단 회비를 걷어서 ○○이 장학금도 주고 부모님께 그때그 때 필요한 것들도 자식처럼 챙기려 합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겠지만‘은지의 동지들이 은지를 잊지 않 았구나’ ,‘엄마 친구들이 내 곁에 있구나’생각하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지향과 입장과 위치를 떠나, 당신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그렇게 하고파했던‘세상을 바꾸는 활동’ 에 당신의 이름으로 함께 참여하면서 당신과 당신의 꿈을 기억하고 이어가겠습니다. 당신 스 타일처럼 늦추지 않고 지금 바로! 즐겁게! 힘 모아서! 해보겠습니다. 짧은 글로 그리운 마음을 대신합니다. 먼 곳이지만, 언제나처럼 우리와 함께해주길….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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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야기

당원-되기 step 2.

“당 대표 선거를 애프터서비스 해드립니다.” 지난 2월 13일.‘음기양조’ 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이 <당원-되기>라는 이름 아래, 최근 있었던 당 대표 선거 출마자들을 모두

미래에서 온 편지 제18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모아서‘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토크쇼

교 열 노정 정정은

를열었다.

디자인 고미숙

나경채 후보, 아니 나경채 당 대표 또한 이 자리에 참석해, 선거 때 이야기했던 공약들을 지키면서도 나도원 후보, 윤현식 후보가 이야 기했던 것들을 잊지 않고 함께 지켜나가며 당 의 역량 강화를 위해 생활정치 기획단 등 여 러 기획을 의욕적으로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5년 2월 26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 당원-되기 step 2. 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 후기 : 무언가가 된다는 것 전문은 6쪽~10쪽 <지금+여기 노동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 정정은 편집실 부장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2015. 3

제18호

2015.3

야만의 시대, 길을 묻는다

www.laborparty.kr

값 10,000원

지금+여기 노동당 ■ 당원-되기 step 2. 당 대표 선거 애프터서비스 후기 : 무언가가 된다는 것 특집

길을 묻는다

야만의시대,

기획 ■ 방사능안전급식 활동가 대담 :“정치 기획자, 그리고 책임질 활동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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