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일상>

Page 1


고귀한 일상


고귀한 일상 초판 1쇄 발행 2021년 4월 30일

지은이 김혜련 펴낸이 김형근 펴낸곳 서울셀렉션㈜ 편 집 지태진 디자인 이찬미

등 록 2003년 1월 28일(제1-3169호)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6 출판문화회관 지하 1층 (우03062) 편집부 전화 02-734-9567 팩스 02-734-9562 영업부 전화 02-734-9565 팩스 02-734-9563 홈페이지 www.seoulselection.com 이메일 hankinseoul@gmail.com

ⓒ 2021 김혜련

ISBN 979-11-89809-45-4 03810

• 책 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 잘못된 책은 구입하신 서점에서 바꾸어 드립니다. • 이 책의 내용과 편집 체제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고귀한 일  상 김혜련


프롤로그

지난 십여 년 동안 땅 가까이에서 살았다. 매일 걷는 들 판을 일 년, 이 년…… 십 년을 걸었다. 벼들이 자라는 한 생애가 들어오고,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알게 되었다. 뜰 을 가꾸고 작물을 키우면서 꽃들이 피고 지는 걸 지켜보 았다. 늦가을까지 생명을 잉태하는 가지의 속살을 들여다 보고, 여린 몸으로 겨울을 나는 마늘의 생명력에 놀라워 했다. 봄에 새들이 일 년 중 가장 아름답게 노래한다는 사 실을 알게 되었고, 저녁이면 대숲에 들어와 잠을 자고 새 벽이면 다시 날아오르는 수백 마리 참새 떼의 생리도 알게 되었다. 아래에서 볼 때 더 잘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위에서 보는 삶을 살려고 했다. 뭔가 그럴듯하고 위대한 것을 꿈꿨다. 더 높이, 더 멀리 삶을 따라잡으려 했 다. 언젠가부터 그 삶을 돌이켜 느리고, 낮고, 단순하게 삶 이 주는 것을 받아 살았다. 내 의지를 내세우기보다 삶이

고귀한 일상

4


흐르는 방향을 바라보고자 했다. 마음보다 정직한 몸을 믿 었다. 일상에서 비근한 것, 근원적인 것, 작고 사소한 것들 가까이서 그리 살았다. 꽃이나 나무, 바람처럼 ‘스스로 그 러한[自然]’ 것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했고, 나 또한 ‘스스 로 그러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갔다. 삶의 신성성에 눈뜨는 시간이었다. 일상이 사무칠 때가 있다. 밥 먹고, 차 마시고, 함께 웃 는, 그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사무치게 다가올 때가 있 다. 일상의 소중함은 그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요즘 우리는 일상을 잃은 시간을 살고 있 다. 이 시간이 언제까지 갈지, 회복이나 될 수 있을지 도무 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기후 위기의 적신호인 양 이례적 인 긴 장마와 태풍에 노인들은 갇히고, 아이들은 친구들과 뛰어놀지 못한다. 긴 역병에 일터를 잃는 사람들이 늘어나 고, 돌보는 일을 주로 해 온 여성들의 삶은 더욱 무겁고 아 프다. 나무들은 병들고 벼들은 쓰러져 눕고, 작물들이 녹 아내린 밭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 나? 허리 숙여 황폐해진 밭을 일구고 무 씨앗을 뿌리고, 배

5


추 모종을 심는다. 이웃에게 안부를 묻는다. ‘저 멀리에 있 는’ 관념적 이상에게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은다. ‘맹물 맛’ 같은 평범한 세계에서 신성 성과 위대함을 구한다. 고귀한 일상을 살고 싶다. 삶의 근 원이 되어 주는 것에 정성을 기울이고, ‘사소한 고귀함’으 로 회생回生하자고 모은 손을 내밀고 싶다. 이 책은 《밥하는 시간》과 이어져 있다. 온갖 관념의 세 계를 헤맨 끝에 만난 게 ‘아무것도 아닌’ 세계라는 역설, 그 역설이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이 함께 겪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직관으로 쓴 글이 《밥하는 시간》이 다. 관념에서 구체적 일상으로 내려오는 과정, 그 과정에 서 겪은 지루함과 고됨, 자신과의 싸움, 그러면서 조금씩 쌓여 간 삶의 어떤 굳건함, 단순한 기쁨, 아름다움, 고요한 시간…… 그 일상의 즐거움이나 깨달음을 나누고자 했다. 《밥하는 시간》이 시간과 장소에 세밀하게 집중한 글이라 면 이 글은 좀 더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을 취했다. 시 산문 이라는 형식을 빌린 짤막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십여 년 동안 틈틈이 일상과 자연에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의 기록 이다. 절실하게 살아낸 끝에, 산사나무 열매처럼 붉고 단

고귀한 일상

6


단한 언어를 얻고자 했으나 내 언어는 오염되고, 삶의 핵 심을 빗나가기만 했다. 그 어긋남에 절망할 즈음 책이 만 들어졌다. 《밥하는 시간》을 통해 만난 많은 여성들, 시대를 고민 하는 에코 페미니스트들, 삶을 전환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 들, 허약한 인간인 내게 생명의 강인함과 명랑함을 가르치 는 고양이와 물까치, 산수유와 목련, 눈 속에서 맨주먹 같 은 꽃을 내미는 머위…… 모두에게 안부를 전한다.

7


목차

1장  가만히 누워 나를 본다 누워야 보이고 들리는 것들 • 13 고독과 외로움 • 16 아픈 몸을 살 다 • 19 분노의 힘으로 꽃은 핀다 • 23 스토리를 살다 • 25 그 벼 가 되고 싶다 • 29 고귀한 사치 1 • 30 비를 듣고 느끼다 • 35

2장  일상의 품 안에 고요히 앉아 앉아라 • 39 소쩍새 우는 밤, 늙은 파를 뽑다 • 41 마당이 있다는 건…… • 44 이렇게 좋은 날 • 45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고요 1 • 48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고요 2 • 52 집과 놀다 • 59 우리가 잃 어버린 것들, 겨울밤 • 61 고귀한 사치 2 • 68 사소한 것을 고귀하 게 하라 • 70 삶의 우선순위 • 73 벼꽃의 위로 • 76 이혼을 앞둔 벗 ‘나타샤’에게 • 77

3장  세상을 향해 걷다 보면 평생 안 하던 짓을 이제 하려니 그게 돼야 말이지요 • 81 그가 노인 의 속도를 존중했을 때 • 85 부지런함과 바쁨 • 89 24시간 편의점 청년 • 92 청소 노동자 종숙 씨 • 94 유월의 끝, 부끄부끄 콘서트에


가다 • 99 ‘썩지 않는’과 ‘썩을 수 없는’ • 104 존재의 시간을 먹다 • 106 고통의 언어 • 109 말을 묻다[埋] • 112 함께 쓰는 글은 힘이 세다 • 115 똥차에게 경의를! • 124

4장  멈춰 서 깨닫는 것들 감자꽃을 따는 이유 • 129 배냇빛 연두와 수의 빛 연두 • 131 코의 불인不仁 • 134 안 살려고 계속 산다 • 136 순간의 빛 • 137 할喝 과 옹알이 • 142 무논 • 145 밥과 밥 사이 • 148 늙은 고양이 오중 이 • 150 측은지심惻隱之心 • 154 기를 쓰고 놀다 • 156 백일홍 • 161 지는 꽃에 관하여 • 164

5장  생명의 몸짓으로 날다 새를 보는 기쁨 • 169 야생성의 소멸 • 171 완경完經 • 175 세 여 자 • 179 가을 쑥갓 • 182 져야 할 것이 져야 익어야 할 것이 익는다 • 184 몸들 • 189 웃음 • 192 늙음의 고요 • 195 아흔아홉 할머 니의 부활 • 196 두려운 질문 • 200


1장

가만히 누워 나를 본다


때로 외로움은 고독으로 가는 길이 되기도 한다.


고독과 외로움

자연 속에 있을 때, 내가 자연의 일부로 함께 있다는 것 이 명징하게 느껴질 때, 고독하다.

자연이면서 동시에 자연이 아닌 나는 고독하다. 자연이지만 자연일 수만 없는 존재, 자연인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로서 나는 고독하다.

고독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자연과의 근원 적 연결을 그리워하는 자의 안타까움, 거대한 우주 앞에 천둥벌거숭이로 서 있는 자의 나약함. 내가 사라져도 자 연은 어김없이 자신의 길을 순환할 것을 아는 자가 느끼는 안도감 섞인 고독.

고귀한 일상

16


고독한 나는 존엄하다.

외로움은 대개 인간관계에서 온다. 이해해 줄 거라고 생 각한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외롭다. 같이 있으면 따 뜻할 거라고 생각한 관계가 따뜻하지 않을 때도 외롭다. 젊은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외롭다고 느꼈 다. 결혼 생활할 때 가장 외로웠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 람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가 한없이 낯설고, 작은 방이 벗어날 수 없는 노예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밤새 외 로움이 숨죽인 눈물로 흘렀다.

외로움은 나를 들어 올리지 못한다. 고독은 나를 더 큰 세계로 열어 주지만, 외로움은 갇히게 한다. 닫힌회로 속에서 맴돈다.

고독은 나를 잊고, 나를 넘어서고, 나를 열어 확장하게 한다.

1장

가만히 누워 나를 본다

17


외로움은 눅눅하고 때로 구차하다.

외로울 때는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아 니구나. 누군가에게 할 일을 하지 않는구나. 불필요한 곳 에 에너지를 쏟고 있구나. 쓸데없는 것을 기대하고 있구 나. 벗어나야 할 관계 속에 있구나.

때로 외로움은 고독으로 가는 길이 되기도 한다.

고귀한 일상

18


자연 속에 살면서 보고 듣게 되는 것들, 작고 아름답고 절실한 것들. 가끔 생각한다. 이들을 보거나 듣지 못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하고.

고귀한 일상

34


2장

일상의 품 안에 고요히 앉아


고요가 없으면 충만함도 없다. 고요가 없으면 아름다움도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고요 1

짧은 인간의 생애 동안 너무도 많은 변화들이 있어, 나 는 내 생애 이런 일을 겪을 줄 몰랐다는 말을 수십 년 동안 여러 차례 반복했다. 미세먼지 자옥한 세상에서 살 줄 몰 랐고, 세계적인 전염병이 전쟁보다 심하게 사람들을 죽음 으로 데려갈 줄 몰랐다. 바쁜 것을 넘어 과도하게 움직이 던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자 이리도 금방 맑은 하늘을 보 게 될 줄도 몰랐다.

밤새도록 거센 비가 내렸다. 아침이 되니 날은 개었고, 밤새 내린 비로 개울물 소리가 우렁차고 빠르다. 나무들은 안녕한지, 꽃들과 풀은 또 무사한지. 숲으로 들어선다. 놀 랍게도 풀들은 고요하다. 어젯밤 비바람의 흔적을 읽을 수 없다. 바위도, 나무도 꽃들도 고요하다. 숲은 고요로 꽉 차 있다. 습기로 가득 찬 고요는 고막을 찢을 듯 팽팽하다.

고귀한 일상

48


처음 내면에서 고요를 발견했을 때, 오랜 명상을 통해 고요가 온 줄 알았다. ‘아, 드디어 고요를 이루었구나!’ 탐 욕에 찬 마음은 고요조차 성취로 읽었다. 하지만 곧 아니 라는 걸 깨달았다. 머릿속 온갖 자폐적 수다들에 가려져 있는 줄도 몰랐을 뿐, 고요는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그저 자신의 내면을 오래 응시하는 것만으로 고요의 정체를 확 인할 수 있다.

내 안의 고요를 발견하고 나니 사물의 고요 또한 느껴 진다. 모든 사물의 근원에는 고요한 바탕이 있다. 그 고요 함에는 힘이 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무의 뿌리처럼 흔들림 없는 힘이기도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잎이 흔들 림 속에서도 매 순간 고요한 것과 같은 힘이다.

동중정動中靜, 정중동靜中動.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다.

2장

일상의 품 안에 고요히 앉아

49


차를 우리고 따르고 마시는 이 순간의 고요를 나는 즐긴 다. 하루 중 가장 깊은 고요와 함께하는 시간, 시간에 향기 라도 있는 듯 이 시간을 깊이 들이마신다.

고귀한 일상

58


3장

세상을 향해 걷다 보면


자신의 노동에서 느끼는 기쁨은 예술적 창조의 기쁨과도 같다. 자신의 노동으로 달라진 존재에게 느끼는 대견함과 아름다움. 그 존재와 하나가 되는 자기 확장, 그 감동으로 그는 자기 변화 에 이른다.


계절에 따라 자연은 부지런히 자기 길을 간다. 자연의 순환을 보며 부지런함과 바쁨의 차이를 배운다.

3장

세상을 향해 걷다 보면

91


똥차에게 경의를!

아침에 시내로 가기 위해 나섰다. 개운못 쪽으로 가는데 중간쯤 어디서 나타났는지 말 그대로 똥차가 가고 있다. 요즘은 보기 드문 차, 앞으로는 볼 수 없을, 분뇨 운반차다.

정화조의 똥을 호수로 빨아들여 싣고 가는 초록색 구닥다리 ‘ 위생 차량’ 그 뒤를 12인승 회색 승합차가 따라가고 있다.

똥차는 느렸다. 승합차가 곧 똥차를 추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도 추월하리라.’

그런데 앞차는 똥차를 추월하지 않았다.

고귀한 일상

124


그저 똥차 뒤를 따라갔다. 바쁜 나는 짜증이 일다가 ‘어라, 이건 무슨 상황이지?’ 궁금해진다.

똥차는 무겁고 낡은 몸으로 고개를 넘고, 개운 호수 굴곡진 길을 터덜거리며 달렸다. 그 뒤를 승합차와 나와 내 뒤의 일 톤 트럭이 따라갔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그렇게 달리고 있자니 왠지 똥차를 추월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일어났다. 앞차도, 뒤차도 같은 마음일 것 같았다.

똥차를 따라 천천히 그의 앞길을 가로채지 않고 달리는 우리는 운명이 다해 가는 똥차의 오랜 역정을 기억하고 똥차를 격려하는 동지들 같았다.

남루한 창자인 양 구부러진 호스를 등짝 위에 둘둘 감고 재를 넘는 똥차는

3장

세상을 향해 걷다 보면

125


4장

멈춰 서 깨닫는 것들


삶의 근원 위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초월적 꽃을 피울 수 있다. 근원에 닿지 못하면 ‘헛꽃’을 계속 피우게 된다.


지는 꽃에 관하여

피는 꽃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있지. 지는 꽃은 좀 달라. 생명의 소멸에 시선을 주는 건 삶의 깊이를 비추는 거야.

꽃이 질 때 모든 꽃이 같은 모습으로 지는 건 아니야. 많은 꽃이 핀 자리에서 시들고 마르지. 꽃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져 나가며 지기도 하지.

마르는 모습이 유난한 건 산수국과 국화야. 산수국은 마치 피어 있는 듯 생생하게 말라 있지. 글쎄, 살아 있는 줄 깜박 속지 뭐야. 국화는 말라서 오래오래 서리와 눈을 다 맞아.

꽃잎이 시들며 떨어지는 꽃 중엔 모란이 있어.

고귀한 일상

164


꽃이 크고 탐스러워 질 때도 그래. 바람도 없는데 모란잎이 질 때 툭, 툭, 가슴으로 떨어져.

양귀비도 그래. 뒤뜰에 핀 현란한 꽃이 한 잎씩 떨어져 내릴 때 죽음이 저렇게 고요하고 아름답게 올 수도 있구나 싶지.

통꽃 중엔 모가지 떨어지듯 시들지도 않고 ‘뚝’ 떨어지는 꽃도 있지. 동백꽃은 물론이고 감꽃, 개불알꽃, 능소화, 참깨꽃…… 떨어지는 모습이 서늘해.

신묘하기로는 수련이지. 봉오리를 오므리고

4장

멈춰 서 깨닫는 것들

165


물속으로 잠들듯이 눕지.

지는 꽃을 보는 건 삶의 깊이를 비추는 거야.

고귀한 일상

166


5장

생명의 몸짓으로 날다


져야 할 것들이 져야, 익어야 할 것들이 익는다.


두려운 질문

소나무를 꺾으면 그 꺾인 자리에서 짙은 솔 향이 난다.

페퍼민트를 밟으면 밟힌 자리 가득 화한 페퍼민트의 향기!

모든 생명의 상처에는 고유의 향기가 있다.

내 꺾인 자리 그 상처에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고귀한 일상

200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